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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2014년 9월 21일 / 대예배 / 누가복음 17:5-10
■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청원과 이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더 큰 믿음을 달라고 청을 드렸습니다(5절). 이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는 동문서답과 같은 답변 같지만 실은 제자들이 믿음을 생각하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7-10절에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으로 ‘무익한 종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은 밖에서 땀 흘려 일하고 집에 들어온 뒤에도 집안에 할 일이 있으면 쉬지 않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령을 다 이행한 뒤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 올바른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먼저 제자들이 왜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청을 드렸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사도’(5절)라는 단어에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제자’라고 지칭되던 사람들이 유독 오늘 본문에서만 ‘사도’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을 받아 나가서 사역을 마치고 예수님 앞으로 돌아온 상황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현장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다 보니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병자들도 생각처럼 잘 낫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했지만 사람들이 그 말에 잘 호응해 주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낀 채로 예수님 앞에 돌아와서 청원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청원을 드린 것이 바로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더 큰 믿음을 주시면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놀랍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크기의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로 옮겨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동문서답과 같은 말씀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믿음 타령하지 말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제대로 활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제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지적해 주시는 제자들의 잘못된 관점이 두 가지입니다.
1. 제자들이 믿음을 양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양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다 큰 믿음을 주신다면 더 많은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고, 또 더 큰 능력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믿음을 무슨 내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나 어떤 재능쯤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양적인 관점보다는 질적인 관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① 겨자씨는 그 크기 면에서 정말 변변치 못합니다(다윗처럼).
사실 겨자씨는 이스라엘 땅에서 나는 나무의 씨 중에서는 가장 작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작습니다. 밀이나 보리 그리고 쌀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에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자라나게 됩니다. 오히려 밀이나 보리 그리고 벼와 비교할 수 없이 큰 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도 양의 크고 작음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②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씨가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이유는 그 씨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의 핵심은 바로 생명에 있습니다. 그 생명이 건강하면 큰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씨가 병 들거나 부실하면 제대로 생장(生長)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믿음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요 14:12-13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아들인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루어 주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찬양을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이 커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작은 겨자씨를 예로 들으시며 작은 믿음이라도 큰 역사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큰 믿음만이 기적을 이룬다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겨자씨 한 알만한 순수한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과 같은 큰 믿음에서만 생각하다보면 적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손도 못 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예 할 일도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21절)와 양과 염소(40절)의 비유를 통해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하여 묵묵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한 사람들이 영생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기적을 만드는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무언가 업적을 이루어 놓았다거나 또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자기의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 오랜 가뭄으로 미국 중서부 지방의 이 작은 마을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비는 농작물 재배에도 중요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도 필수적이었습니다.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자 마을의 교회는 비를 내려 달라는 대대적인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행하던 기우제를 연상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교회 앞마당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막 집회를 시작하려는 순간 맨 앞줄에 앉은 10살가량의 소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소녀는 흥분과 기대에 찬 얼굴로 천사처럼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빨간 우산 하나를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 순수한 믿음에 목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잃어버렸지만, 이 어린 소녀만은 아직도 순수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으나, 이 소녀는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오셨습니까? 혹시 제자들처럼 믿음의 양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이시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안에 겨자씨처럼 작더라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의지하는 살아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믿음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본문을 음미해 보면 제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내가 이런 일도 하고 또 저런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믿음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자기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이야기를 통해 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심는 사람의 의도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심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물과 햇볕을 주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믿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 교회의 사명은 천하만국을 호령하는 권세와 영광이 그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교회가 가야할 목표는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 교훈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을 깨달아 이제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요 13: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선택한 길은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을 집단 세력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그 남은 것이 12바구니에 가득 차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본 사람들이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시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요 6:1-15).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처음부터 부귀영화, 권세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류 구원을 위한 어린양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과 불의에 대한 삯으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의롭게 변화시켜 사망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남긴 극소수의 제자들도 이름도, 빛도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가신 길은 권세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제물(祭物)이 되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계적인 부호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천하를 호령하려는 것도 아니며 또는 세계 최고의 유명 인사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이윤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이 되거나, 집단의 세력화를 형성한다면 이미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야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 8:1-16 /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무슨 목적을 위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출 19:3-6 /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자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4) ‘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어떻게 내게로 데리고 왔는지 너희는 다 보았다. 5) 온 누리가 다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6) 너희야말로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러주어라.”
▶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편안하지도 않고, 부대끼는 일도 많고, 늘 양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듯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삶은 그리 쉽고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절제를 요구하는 삶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갑자기 편해지는 것 아닙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오히려 평소의 삶이 불편해지고 자유롭지 못하고 눈치를 볼 일도 많고, 손해도 많고, 훨씬 더 피곤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가 뭐 이렇게 힘드냐? 나 안 할래.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하며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은혜로 택하여 주셨기에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는 특권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자녀라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귀찮다고, 피곤하다고, 신나게 놀지 못한다고 영원히 복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 왜 좁은 길은 눈에 띄지 않는 길이 되었을까요? 정말 길이 좁아서 안 보이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너무나 선명합니다. 잘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수군거립니다. “왜! 밤하늘에 빨간 십자가가 그렇게 많지?” 그런데도 구원의 길은 안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문이나 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눈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길을 바라보지 않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는 인터넷의 실시간 검색어를 보면 당장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뭘까요? 사람들의 외모,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 소위 말하는 뉴스 메이커들입니다. 요즘은 무엇을 하든지 인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연예인만 인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설가, 시인, 학교 선생, 교수도 인기가 있어야 됩니다. 대통령도 국민에게 인기가 없으면 정치하기 힘듭니다. 음식점, 백화점, 기업체도 인기가 좌우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와 목사도 인기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인기로 말한다면 천국은 가장 인기가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가장 인기가 많았을 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입니다. 배부르게 해 줬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셔다가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라고 야단했습니다. 그러다가 영생과 천국 그리고 십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다 도망갔습니다(요 6:66).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는 소수의 무리만이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가 영생 천국 얘기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가장 싫어합니다. 심지어는 교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천국은 좋은데, 천국 가는 좁은 길은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데, 예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은 싫어합니다. 천국은 가고 싶지만 현세에서 잘 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시야 밖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 없는 좁은 길을 가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좁다고 하는지, 좁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①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길로 예수님도 세상을 향해 첫 번째로 외치신 말씀은 회개였습니다(마 4:17).
② 이 세상을 버리고 천국을 목표 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의 번영을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영원한 내세는 믿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떨어지든지 말든지 상관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도 재산이 아까워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 것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쌓아 둘 것이 있다면 천국에 쌓아 두라! 진정한 행복은 천국에서 누려라!” 사도들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③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 뜻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상이 뭡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네 느낌대로 네 감정대로 살아보라!” 느낌대로 감정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동물적인 삶이 됩니다. 그것은 곧 죄악의 길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자기 필요성, 자기 욕구만을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주장이 자신의 삶을 지배합니다. 자기 사상에 미쳐 있고, 자기 아집에 매여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자기 때문에 진리를 부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다 버려야 합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눅 9:23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이요, 힘든 길이요, 인기가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은 쉽고 편한 길로 갑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집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인이 천만 명에서 7백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편하고 안락하게 살아보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을지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 당시 그 많은 청중들 가운데 12제자들 중 가룟 유다를 뺀 11명은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넓은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까? 부끄러워 말고, 당당하게 좁은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종점에서 조금도 후회 없는 자랑스러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해 오셨습니까? 우리 주변에 자기중심적으로 믿음을 생각해 온 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남보다 목회를 크게 성공하고 싶습니다. 남보다 짧은 기간에 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힘이 듭니다. 남이 없는 뭔가 특별한 은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한 병 고치는 은사가 있으면... 그래서 손만 얹으면 병자들이 척척 낫고 널리 소문도 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삽시간에 몰려들고...’ 이런 생각에서 ‘내게 믿음을 더 하소서’ 라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3가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마 4:3-10 / 그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하며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친다.” 5)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지붕 위에 세워 놓고 6) 말하였다. “뛰어내리시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주께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천사를 보내 보호하게 하시니 그들이 두 손으로 너를 꽉 붙잡으리라. 혹시나 돌부리에라도 채이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소?” 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도 성경에 있다.” 8) 마귀는 다시 예수를 이끌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9) “만일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성경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와 같은 관점으로 믿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2. 올바른 자세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청원을 드렸을까요? 제자들은 믿음을 통해서 무엇인가 큰일을 이루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놀라운 이적도 이루고, 그래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게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믿음을 달라고 청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는 생각에서 그렇게 청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서운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큰일을 해 보려는 생각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열광했던 것처럼 자기들 주변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점을 간파하셨습니다. 저들의 봉사 자세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익한 종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종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종의 자세로 봉사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으로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봉사해 오셨습니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해 왔던 봉사 자세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종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오라면 오고 주인이 가라면 가는 백부장이 가졌던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종이 하루 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기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고 명합니다. 주인이 음식 먹는 동안에 계속 수발을 들다가 그 후에 먹으라는 것입니다. 종은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마치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잔치를 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이 너덧 말 들어가는 돌항아리 여섯 개에 예수님이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했던 하인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기 전,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베드로조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에 예수님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절히 말하였습니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마 16:23)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말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뒤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성찬을 나누시면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1-34 / <베드로의 장담>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려 하고 있다. 32) 그러나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내가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깨닫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주어라.” 33)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저는 이미 감옥에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34) 이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베드로야, 내 말을 명심해 두어라. 지금부터 내일 아침 닭이 울 때까지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닭이 2번 울 때에 3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눅 22:62).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자기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핍박을 무릅쓰고 복음을 외쳤습니다.
■ 베드로의 마지막에 대하여 성경에는 기록된 것이 없지만, 외경(外經)의 베드로행전 35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박해할 때 베드로는 여러 성도들이 “지금은 베드로 사도께서 죽을 때가 아닙니다. 사도님은 더 살아서 많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돌보아야 합니다.”라고 권고하여 로마의 성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변장을 하고 막 성문을 빠져 나갔을 때 앞에서 주님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네가 지지 않으려는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아닙니다. 십자가는 제가 지겠습니다. 주님은 한 번 지신 것으로도 족합니다.”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를 당하였다고 합니다.(외경 베드로행전 제35장~37장)
2. 순종을 잘 하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를 쉽게 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질을 버리지 못하면 십자가를 끝까지 지지 못합니다. 어디까지 순종하시겠습니까?
■ 한 성자가 제자들과 함께 낯선 도시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자와 그 제자들이 지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무런 이유없이 성자와 그 일행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다만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도시의 사람들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스승의 뜻을 무시하고 그들과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도시를 벗어나자 한 제자가 종전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성자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사람들이 저토록 심한 욕을 퍼붓는 데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니 그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제자야! 내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모르겠니?”, “예, 모르겠습니다.”, “제자야. 그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줄 뿐이다. 내게 분노는 없으니 내가 그들에게 분노를 줄 수가 없다. 그런데 마친 내게 약간의 자비가 있으니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뿐이란다.”
■ 어떤 곳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집은 가난하고 일곱 식구나 되었지만 늘 웃음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네 집은 부자이고 세 식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늘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형이 동생을 찾아가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네 집에는 똑똑한 사람만 있고 우리 집에는 바보들만 살기 때문이죠.”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형에게 동생은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가 자기 잘못이라고 하는 바람에 싸울 일이 없지만 형님 집에서는 서로가 네 잘못이라고 하며 책임을 떠넘기니까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게 다 똑똑해서 생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형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이 참 지혜인지, 똑똑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과거의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부인을 갈라디아서 2:20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과거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고 믿음으로 변화된 전혀 새로운 나라는 것입니다.
■ 김익두 목사님은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분입니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악독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전도를 해야 할 텐데 아무도 그를 만나주질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피하고 그의 말에 겁부터 먹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묘안을 냈습니다. 자기 부고장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김익두가 죽었습니다!’라는 그 부고장을 받아들고 마을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얼마 후, 죽었다는 김익두가 마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표지가 까만색의 성경책 한 권을 옆에 끼고 나타난 김익두가 예수 믿고 변하여 새사람이 됐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화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마을 사람 하나가 김익두를 시험했습니다. 그가 잘 다니는 골목에 숨어서 그 길을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머리에 구정물통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 때 김익두 청년의 말이 유명합니다. “아저씨, 과거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당신은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 태어난 김익두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이렇게 옛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이게 살아있으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가시가 됩니다. 내 신앙생활에 가장 큰 짐이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삶 속에서 나를 부정하고 대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①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진정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②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③ 내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내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④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생사화복이 내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인정하며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께 다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3. 이제부터라도 충성스러운 삶을 사십시다.
1.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구원해 주셨고, 귀한 일꾼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충성하십시다.
딤전 1:12-16 / [자비에 대한 감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13)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14) 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요. 예수님은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신뢰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일꾼(휘페레테스)은 군사 용어로 사령관이나 부대장의 명령에 따라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자라는 말로 아래서 (휘포) 배 젖는 자 (에레테스)가 합쳐진 복합 명사로 지휘자의 명령을 따라 배를 젓는 하인 특별히 하급 노예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맨 하단에서 노 젖는 노예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수종드는 종을 나타냅니다. 교회적으로 본다면 교회라는 배를 움직여 나가는 노를 젓는 노예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ㆍ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말입니다.
이 ‘일군’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던져줍니다. 노예는 전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노를 젓다가 생명을 바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일군을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성경에 쓰인 다른 말들도 그와 비슷한 개념이 강합니다. 종이나 노예들은 생산수단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 노예는 말을 할 수 있고 당나귀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다를 뿐이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종의 개념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는 사도입니다. 종은 일생동안 주인의 소유물이었으며, 그들에겐 도덕도 윤리도 없으며 무조건 주인에게 복종할 뿐만 아니라, 팔려가기도 하고 팔려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노예란 비참하기 그지없는 신분이었습니다. ‘종’은 바로 이 노예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를 종이라고 소개하면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말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권력을 자랑하고 주인됨을 자랑하고 로마 시민됨을 자랑하고 자유민임을 자랑합니다. 어디를 가나 나는 노예가 아니고 특별히 로마 권력을 가진 특권층임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자신이 자유인이 아니고 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의 종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저것을 배우고, 외우지만 이 모든 것을 간단히 줄인다면 예수님의 종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노예가 되기를 자진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된 사도의 심정은 어떤가요? 오히려 바울은 기쁨과 열정에 들떠서 종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서슬이 시퍼레 가지고 다메섹을 달려가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종된 것을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이 핍박자의 괴수이며 살인자인 자기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이 경험 때문에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험악한 십자가의 길(행 9:16), 멸시와 조롱의 길(고전 4:9)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을 부인하고 이제는 빚진 자가 되어 예수님이 목숨 바쳐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 죽을 각오(행 20:24)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사용한 종은 예수에 대한 순결한 사랑과 뜨거운 열정과 생명을 바치는 헌신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2. 우리들도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십시다.
■ 1950년 6. 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서 부랴부랴 한강 인도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쌍안경을 가지고 인도교 건너편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때는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있었고, 강 건너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쌍안경으로 강 건너편을 보게 된 맥아더 장군의 눈은 문뜩 강 이쪽 편에 서있는 부동자세의 군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지프차를 타고 달려가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느냐?”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 서있을 작정인가?” 이때 병사는 부동자세 한 자세로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입니다.” 전세는 위급하고, 지휘 계통은 사라지고, 지휘관들도 도망하는 형편에서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데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이 병사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목격한 맥아더 장군은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그 날로 당장 미군 병력의 출동 명령을 내리고, UN군이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전투를 뒤집어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 6일 전쟁 /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나자 외국에서 유학하던 이스라엘 학생들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귀국해서 전쟁터로 자원했습니다. 미국의 한 하숙집에 이스라엘 유학생과 이집트 유학생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같은 날 둘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스라엘 청년은 조국에 가서 전쟁에 가담하였고, 이집트 학생은 끌려갈까봐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불과 일주일 만에 아랍을 항복시키고 승리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300만이고, 애굽은 1억이 넘는 대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300만 모두가 단합하였으나 이집트는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지리멸렬한 상태였습니다. 이집트의 하늘에는 이스라엘 전투기가 항상 떠 있었습니다. 아랍군의 곡사포가 이스라엘의 비행기 한 대를 쏴서 추락시켰습니다. 추락된 비행기에 가 보니 놀랍게도 조종사가 만삭된 임신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노인과 영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인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집트는 할 수 없이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스라엘은 사막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늪지대와 모래땅을 적셔 비옥한 옥토로 만들고 수백 마일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사막을 전천후 영농 농장으로 만드는 등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충성하는 마음이 승리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그 부서의 책임자나 담임목사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合)한 삶을 살려고 결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이고 세상적으로 귀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고, 사람 중심으로 하는 교회라면 그곳은 이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곳으로 살아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와 같습니다.
계 3:1-2 / 사데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보내라.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나는 네가 살아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이제 일어나라.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자들에게 힘을 넣어 주어라. 그들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 네가 행한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래도 옳지 않다.
그리스도의 일군은 예수님의 판단을 가장 중요시하면서 일해야 합니다(고전 4:3-4).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남에게 판단을 받는 것을 의식하며 일하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다가 보면 외식하기가 쉬워서 속보다는 겉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잠언 16:2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관적인 판단에 너무 우쭐해서도 안 되고 너무 자책을 하며 살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은 오직 예수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코람데오’(神前意識)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으면 몰래 하십시오. 헌신도, 봉사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면 시험들 일도 없습니다. 서운할 것도 없습니다.
♬ 해 같이 빛나리 / 1.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후렴)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2. 당신의 그 순종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사랑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찬송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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