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이승훈 베드로 묘(반주골)
간략설명: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를 기억하며
지번주소: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남동구 정수사업소 뒷산)
‘月落在天水上地盡(월락재천 수상지진)’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묘 앞에 서면 그가 1801년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직전에 읊었던 한시(漢詩)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 같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하지 않는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맺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종 · 약전 · 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여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했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며 1년간 신부로 활동하다가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 다시 교회로 돌아온 그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펼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입국시켰으나, 1795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승훈 베드로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여섯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현재 이승훈 베드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진행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는 비록 여러 번 배교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하느님께 돌아와 순교로 신앙의 삶을 증거하며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다.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주 며느리 정씨와 증손자 이연구 ‧ 균구는 1871년 인천 제물진두에서 참수당하면서 인천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 베드로의 유해가 천진암 성지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다. 반주골의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29일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인천교구는 2014년 1월 24일 교구 순교성지 성역화 사업의 중심이 될 성지개발후원회를 발족하며, 이승훈 베드로 묘 일대를 인천시와 협력하여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9일)]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중의 한 사람.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서울에서 태어났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 그곳의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전(丁若銓) · 정약용 형제, 권일신(權日身)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중국명 湯士選, ?~1808)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西學書)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池璜)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鞫廳)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이신규(李身逵) 마티아(1794-1868년)
순교자. 세례명 마티아. 이승훈(李承薰)의 셋째아들. 정약용(丁若鏞)의 생질이 된다. 아버지 이승훈이 사형당한 후 얼마동안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문재(文才)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龍仁), 진천(鎭川)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석방되어 그 뒤 인천(仁川)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永宗島)로 가서 1846년까지 살았다.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다.
이재의(李在誼) 토마스(1785-1868년)
세례명 토마스. 이승훈(李承薰)의 손자. 강원도 정선(旌善) 출신. 정하상(丁夏祥)과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교리를 배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복사로 일하면서 주교를 도왔다. 김대건(金大建) 부제(副祭)가 입국할 때 의주(義州) 변문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인도했고, 김 부제가 중국 상해로 건너갈 때 동행하여 그 곳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리를 더욱 깊이 연구한 뒤 페레올(Fereol, 高) 주교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홍주(洪州)로 피난하여 화를 면했으나 1846년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1868년 4월 3일(음 5월 25일) 그는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국내로 인도해 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28일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61세의 나이였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