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호칭
황보영락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내는 순간까지 불리는 이름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아명, 관명, 자, 호 등 여러 개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요즘은 직장의 직위로, 어떤 이는 종교적인 세례명이나 법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의 바람으로 천박한 아명으로 불린 적이 있고, 작명 철학관을 거친 근사한 이름도 있다. 순수한 한글 이름이 유행하기도 했다. 내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름을 되돌아본다.
나는 황보 두 글자의 성에 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이 영락이다. 두 글자의 성을 공유하는 아버지, 누나와 형님은 모두 이름이 한 글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출생신고서에는 황보 영락으로 기록된 출생신고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성과 이름을 합치니 네 글자가 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담당 공무원은 주민등록 원본을 만들면서‘영’글자를 빼고 형님과 누나처럼 한 글자‘락’만 적어놓았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름이 ‘황보 락’이 었다. 당시에는 호적등본에는 황보 영락, 주민등록 등본에는 황보락 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러나 스무살 무렵 본적지 주민센터를 찾아간 아버지의 항의로 넉 자 황보 영락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아무도 갖지 않는 '황보 락’이라는 학교명(學校名)이 생긴 이유이다.
이름을 불러줘야 하지만 주위의 친구들이 나를 황보라는 성으로 많이 불렀던 것 같다. 학교에 근무하다 보니‘선생님’이라는 말이 그냥 자연스러웠는데 퇴직을 하니 그것도 문제였다. 예전에 같이 교류하던 분들끼리는 문제가 없지만 새롭게 관계하는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황보 사장, 황보 씨, 영락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씨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 친해지면 형이나 형님이라고 어물쩍 부르고 넘어간다. 여성분도 씨, 여사, 누님, 이모님, 때로는 언니 등으로 눈치껏 부른다. 퇴직하기 전에 청소년 활동을 할 때 중고생들에게 대학생 선배들을 성별과 관계없이‘언니’라고 부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삼십 대 초반 어느 날 실내에서 생활하는 편한 복장으로 급하게 물건을 사러 근처의 재래시장에 갔었다. 누군가 뒤에서‘선생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학부모거니 생각하니 나의 행색이 부끄러워 조심해서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종로길거리에서 김 서방을 부른 것처럼,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게 주인이 지나가는 사람을 그냥 불렀을 뿐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나를 알고있는 학부형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30여 년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선생님’하고 불러서 뒤돌아보니 몇 년 전 속을 썩이던 학생이었는데 불쑥 “선생님 친구들과 놀다가 버스비가 떨어졌는데 차비 좀 빌려주세요.”라고 하는 제자도 있었다. 철없는 행동이지만 그래도 길 가는 후배들에게 돈을 뺏는 것보다는 훨씬 점잖은 행동 같아서 천원을 주면서 “분명히 갚아야 한다.”라고 하니 꼭 갚겠다고 약속은 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도 아직 소식이 없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는 생기발랄하고 전날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던 몇몇 여학생은‘선생님! 하면서 다가와서 예쁘게 인사를 하고는 다짜고짜 “선생님 제 이름이 뭔지 아세요?”라면서 얼굴을 들이대고 묻는다.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궁색한 변명을 했다. “얘들아 내가 안면인식장애가 있다. 그런데 너는 왜 나의 장애를 파고들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하면서 되치기를 했다. 하지만 그 명랑하고 예쁜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교무실로 돌아와 그 학생의 이름을 단단히 외워둔 뒤에 다음에 만났을 때 불러줬더니 너무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행복했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퇴계 선생님, 율곡 선생님, 백범 김구 선생님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들에게 쓰이던 호칭이 언젠가부터 불특정한 일반인들을 부를 때 많이 쓰이고 있다. 친구 한명이 “교사였더라도 퇴직을 했으니 더이상 선생님이 아니다.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내가 과분한 호칭으로 불려진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이 해외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BTS는 방탄소년단을 영어로 바꾼 단순한 이름이었으나 BTS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해외 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해외의 팬들로부터 상징하는 의미를 공모했는데 ‘Beyond The Scene’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BTS는 청소년들의 어려운 현실에서 마주하는 시간과 공간의 장면(The scene)을 넘어서(Beyond) 세로운 세상과 소통하려는 이상을 가진 BTS 그룹으로 전 세계 청소년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들의 음악도 훌륭하지만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를 이름에 잘 녹여낸 결과일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각하, 영부인 같은 극존칭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었다. 민주화 시대에 극존칭은 사라졌다. 이름은 스승이나 집안 어른이 지었던 시대에서 철학관 작명가를 거쳐서 지금은 철학과 가치를 공유하는 팬들이 지어주는 이름이 더 가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의 삶과 시대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이름과 호칭은 사회적인 약속이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고,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 주면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서로를 꽃으로 불러 주고 함께 꽃이 되다면,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답고 향기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2026. 2. 9
첫댓글 이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생 아니 후세에도 남게 됩니다. 인사유명 호사유피 라는 말이 아마도 이름의 중요성을 말하는 같습니다. 영락 선생님은 이름이 좋습니다. 이름 뒤에 오는 호칭은 근래에 남자는 사장 여자는 이모 또는 여사로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니 괜찮습니다. 시류에 따라서 가는 겁니다.
우리 집안 돌림자가 '희'자라 여자 이름이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호칭이 상당히 중요한것 같아요. 은퇴하고 나니 사장님이란 소리를 가장 많이 듣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