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98卷-列傳11-崔思全-000
崔思全 최사전
#高麗史98卷-列傳11-崔思全-001
○崔思全耽津人初爲內醫累遷少府少監
최사전은 탐진(耽津) 사람이니 처음 내의(內醫)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소부 소감(少府少監)으로 되었다.
睿宗患背疽召思全視之思全以爲微瘇必無患不卽理至不救宰相韓安仁文公美請置於法仁宗止令徒二年
예종이 등창(背疽)을 앓을 때 최사전을 불러 보였더니 그는 조그마한 종기이니 그렇게 염려할 것 없다고 생각하고 제때에 치료하지 않은 데로부터 왕은 목숨까지 잃게 되었으므로 재상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가 법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요청했으나 인종은 다만 2년간 도형(徒)에 처하게 하였다.
思全嗛之遂構安仁公美于李資謙流之語在安仁傳.
최사전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마침내 한안인과 문공미를 이자겸에게 모함하여 그를 귀양 보낸 전말은 한안인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尋授軍器少監時資謙旣擧兵犯闕勢甚橫
그는 미구에 군기소감(軍機少監)으로 되었는데 당시 이자겸이 무력으로 대궐을 침범하였으며 권세 부림이 몹시 횡포하였다.
王密與思全謀之. 思全曰:
그래서 왕이 가만히 최사전에게 상의한즉 최사전의 말이
"資謙所以跋扈者惟恃拓俊京若得俊京則兵權內屬資謙特一夫耳." 王曰:
“이자겸이 함부로 날뛰는 것은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는 까닭이니 만약 척준경만 합의된다면 병권(兵權)이 폐하에게 귀속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자겸은 고립된 몸으로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俊京爲國公腹心至結昏姻而弟俊臣子純皆爲官兵所害以是疑之."
“척준경은 이자겸의 심복으로 혼인하게까지 결합되었고 또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俊臣)과 아들 척순(純)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살해되었으니 이런 일로 보아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乃筮得吉兆思全因往俊京家諭以忠義曰:
그래서 점을 쳐보았더니 길한 조짐을 얻었으므로 최사전이 그 길로 척준경의 집으로 가서 충성과 의리로 타일러 말하기를
"太祖列聖神靈在天禍福可畏
“태조와 역대 임금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화복(禍福)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資謙特籍宮掖之勢爾無有信義不可與同好惡
이자겸은 다만 후궁의 세력에 등을 대고 있을 뿐이고 신의란 찾아 볼 수 없는 자이니 좋아하고 미워함을 같이 할 사람이 못된다
公宜一心奉國以立永世不朽之功."
그러니 당신은 일편 단심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불멸할 공훈을 세우시라.”고 하니
俊京心然之遂決策去資謙
척준경도 그럴 듯이 여기고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王錄俊京功幷賞思全擢兵部尙書賜推忠衛社功臣號加守司空尙書左僕射. 制曰:
그래서 왕이 척준경의 공을 표창하는 동시에 최사전에게도 상을 주어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등용하고 추충 위사 공신(推忠衛社功臣) 칭호를 주고 수 사공 상서 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를 더 주었으며 제서(制)를 내리기를
"朕幼年莅政外戚專權作威作福多所中傷
“내가 어려서 즉위하자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고 있으면서 상주거나 벌에 처하는 것이 중상(中傷)에 의하여 시행되는 일이 많았다.
殺韓安仁流文公美崔弘宰等五十餘人朝廷爲之一空
한안인을 죽이고 문공미, 최홍재 등 50여 명을 귀양 보내니 조정에 사람이 없게 되었다.
威振國內寡人至於孤立自
그의 위엄은 나라를 뒤흔들고 나를 고립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是多樹朋黨禍將不測.
이때부터 그는 붕당(朋黨)을 점차 확대하여 화가 장차 어디까지 미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至丙午二月近侍員僚及一二大臣請除其權朕不敢不從
병오(丙午)년 2월에 이르러 근시(近侍)하는 신하들과 1∼2명의 대신이 그의 권한을 제거하자고 청하므로 나도 그 말을 안 들을 수 없었다.
而彼乃肆毒犯闕宮殿府庫焚蕩無遺
그랬더니 그는 악독한 짓을 감행하며 대궐에 침입하여 궁전과 부고(府庫)에 불을 질러 남김 없이 태워버렸다.
及朕出御延德宮凡在左右侍衛軍士或斬殺之或流竄之凶焰益熾禍變難測.
내가 연덕궁(延德宮)에 나가 있을 때 나의 좌우(左右)에서 호위하던 군사들을 혹은 목매어 죽이고 혹은 귀양을 보내는 등 흉악한 행동이 끝없이 일어나서 무슨 화변이 발생될지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卿密諭俊京同心定策以五月二十日掃除凶逆再安宗社功不可忘宜
그때에 그대는 비밀리에 척준경을 달래어 한마음으로 계책을 결정한 후 5월 20일에 흉악한 역적들을 숙청하고 다시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令有司書三韓後壁上功臣之次."
해당 관리에게 지시하여 삼한 후벽상 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 자리에 기록하게 하노라.”고 하였다.
轉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進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후에 참지정사 판 상서 형부사로 전직되었다가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 평장사로 승진되었다.
#高麗史98卷-列傳11-崔思全-002
自以起寒地位極寵懇請致仕乃許之賜甲第一區詔曰:
최사전은 한미한 가정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치사를 간청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고 상등 사택 한 채(甲第一區)를 주면서 조서를 내렸는바 그 글에 이르기를
"朕聞疾風知勁草板蕩識貞臣歲丙午禍起蕭墻宗社幾危板蕩之勢已極矣
“내 듣건대 빠른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아 볼 수 있고 난세를 당하여야 충신을 알 수 있다 하더니 병오(丙午)년에 화변이 왕실 내부에서 일어나 국가가 위기에 빠졌으며 동란의 기세가 극도에 달하였다.
在朕左右忠義之士尙未免於白刃誰能出力以衛社稷
나의 곁에 있던 충의로운 사람들도 오히려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니 그 누구가 힘을 다 바쳐 국가를 보위하려 하였던가?
惟卿奮不顧身與人好謀辨論逆順開諭禍福雖俊京之悍黠亦揮淚感激知宗所尊轉禍爲福復安宗社卿之功也
오직 그대가 분연히 일어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과 잘 상의하여 반역과 충순을 변론하고 화(禍)와 복(福)으로 개유하였으므로 척준경과 같이 사납고 교활한 자로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왕실을 높이 받들 줄 알게 하여 화를 변하여 복으로 만들고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킨 것은 그대의 공이다.
卿雖退居在予褒奬之心何敢少弭."
그대 비록 벼슬에서 은퇴하나 나로서야 표창하려는 마음이 어찌 조금인들 등한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遂加開府儀同三司守太尉柱國
드디어 개부 의 동 삼사 수태위 관직과 주국 훈위를 더 주었다.
十七年卒年七十三
인종 17년(1139)에 죽으니 나이 73세였다.
輟朝三日贈賻加等
왕이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부의를 특히 후하게 주었다.
謚莊景配享仁宗廟庭
시호는 장경(莊景)이라 하였고 인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子弁烈.
아들은 최변(弁)과 최열(烈)이다.
思全嘗與弁烈. 金罍各一具及沒妾竊其一
최사전이 살았을 때 금(金)으로 만든 술잔 1개씩을 두 아들에게 주었는데 최사전이 죽은 후 그 첩이 한 개를 훔쳤다.
弁怒欲鞭之烈曰:
그래서 최변이 노하여 채찍으로 치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此人先君所愛
“이 사람은 선친이 사랑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當傾家産以恤之况此物耶?
가산을 털어 주고라도 돌보아 주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이런 물건쯤이야 아끼겠습니까?
弟所得者尙存請以遺兄."
제가 받은 것이 아직 있으니 그것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王聞而嘉之曰: "可謂孝且仁矣御筆賜名曰孝仁.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가위 효성스럽고 또 어진 사람이로다!”라고 칭찬하고 친필로써 효인(孝仁)이라고 이름을 써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