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6,25전쟁 제74주년을 맞아 25일 대회실에서 기념식을 개최했다(사진제공/인천시)
진주시 6.25전쟁 제74주년 행사. 유공인과 유가족(사진=진주시)
날짜: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결과: 휴전 협정 체결: 휴전선의 형성;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양측의 갈등 심화; 양측의 중앙집권 강화
장소: 한반도, 동해, 황해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북한군 기동부대는 서해와 내륙에서, 유격대와 육전대는 강원도와 동해안 지역에서 남하하였다.
북한군의 주력부대인 제1군단은 서울로,
제2군단은 춘천과 강릉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국군은 오랫동안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월 24일(토) 해제되었고,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소련제 T34전차와 SU76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국군의 방어 전선은 곧 붕괴되었고, 이승만 대통령과한국군 주력부대는 서울을 포기하고 남하하였다.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에 진주하였다.
1953년 6월 8일 UN군과 공산군 측 회담대표들은 회의 의제의 마지막 관문인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하였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줄곧 휴전에 반대하였으며 UN군의 지속적인 북진과 한반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UN군과 공산군 측의 포로교환 협정 합의 소식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전국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 27,000여 명을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전격적으로 석방하여 미국과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반공포로를 공산군에 넘겨줄 수 없으며 반공포로들의 자유세계에 대한 열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측면과 북진통일을 향한 한국민의 의지를 과시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휴전회담과 미국에 대해 극단적인 조치로써 항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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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중국군의 철수, 미국에 대한 한미방위동맹의 체결 및 군사·경제면에서 한국 원조 등을 요구하였다. 자칫 한국정부의 포로석방으로 휴전회담이 무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 등을 시사하며 한국 측을 안심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휴전회담 개시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서명자는 제3대 UN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북한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그리고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였다.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회담이었다. UN군과 북한은 종전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 정전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일시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1953년 정전협정 이후한반도는 정전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정전협정에 의해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는 이의 이행여부를 감시하게 되었다.
첫댓글 오늘은 6.25 전쟁 후 74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여전한데 자유 통일은 언제나 올까요!
남은 강격책을 구사하고, 북은 통일을 지우고 있으니 요원하기만 합니다.
최근 대북전단으로 북에서도 풍선을 보내고 있는데 이것부터 안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