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더뜨거워질수있었다_강기희시집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비와 눈과 당나귀와 책 읽는 고양이 -
선물 받은 시집을 이제서야 읽었다. 시집 안에는 삶도 있고 죽음도 있고 과거도 있고 역사도 있고 회상도 있고 해학도 있고 ...있고 있고 또 있었다. 현재를 드러내는 순간들은 '있고 , 있고'가 드러나는 그 때마다에 시인의 시선은 먼 먼 산등성이의 구름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허허로웠다. 시집 한 권 다 읽고 나니 그만큼의 허허로움이 나에게로 왔다. 읽었는데 그만큼 비었다. 그 비어진 만큼 나는 내 생각을 채우게 되었다.
[ ... 해마다 가을이 되면 청심의 애달픈 넋을 위로하는 제를 올렸다 벌써 600여 년 전의 일이라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박양수에게 뭐라 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렀다 ' <청심대에서, 82~83쪽>]
현재의 어떤 약속을 백년 후에 바라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어떤 약속은 지키려 애쓰고 또 어떤 약속은 지키지 않아서 다행인 약속도 있을 것이다. 지킨 약속과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에서 보자면, 지킨 약속은 역사의 흐름따라 상쇄되어 무심하게 흘러갈 것이지만 지키지 않은 약속은 '청심대'란 시처럼 허허로움을 남긴다. 백년 후와 600년 전이라는 이 두 말에 차이가 있을까. 가깝고 멀고에서 보자면 시간차는 있을지라도 두 말의 차이는 '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백년 후이든 600년 전이든 지키지 못한 약속은 허허롭다.
도단道斷-刀斷에서만 인간은 비약하게 되는 것일까.
입양간 아이들이 '엄마가 꼭 데리러 올께' 하필 이 말을 기억하여 새부모를 적대하여 자신의 인생을 사납게 만든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물론 비근한 예를 든 것이겠지만 각인된 약속은 그 약속이 이행될 것이란 믿음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하게 된다. 자기를 데리러 올 부모를 기다려야 하는 고단함을 자처하는 것이다. 새부모를 배척하느라 어린 발톱을 세워 날을 갈아야 하는 그런 날들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를 글 읽으며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약속'이란 서로에게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 쪽의 운명을 가른다. 헛되지만 안심 시키려고 또는 진심이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내뱉듯이 참지 못하고 한 그 말이 한 아이의 인생에 결정타였다면, 그 아이는 얽매인 채로 평생 족쇄에 매여서 산 것이 된다. '자유박탈'은 곧 족쇄다. 이왕지사 그리되었다면 자유라도 줄 것이지, 뭣하러 족쇄는 채웠을까. 600년 전이라 박양수에게 뭐라 하기엔 그 사이 시간이 지나치게 허허롭지만, 청심의 애절한 사랑이 빈 가지에 매달려 흐날리는 손수건처럼 허허롭게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버리면 뭐라 하기에는 모든 게 그 자체로 모호해진다. '청심'만이 그대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어떤 폭력은 모호해져서 할 말을 잃고, 어떤 폭력은 끝까지 추적해서 애도한다.
[ 넑의 나이가 열네 살이라도 절대로 반말을 해서는 안된다 / 만약 넑이 따귀를 올려 붙이더라도 꾹 참아야 한다 / 우리는 그들의 주검에 대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므로 왜 때리느냐고 노려볼 일도 아니다 / 학살터에 이르러서는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 (...) /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넋을 향해 뜨거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그리고 지금껏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 왜 제주에 살아 이런 꼴을 당했느냐고 철없는 질문도 하지 말아야 한다 / (..) / "할아방 오늘도 추우셨지요? 제가 크면 할아방 춥지 않게 해드릴께요" / 그럼 된다 <백조일손 묘 앞에서, 84~85쪽> ]
'그럼 된다' 이 말에는 어떤 안도감이 내재되어 있다. 애도에는 어떤 형식이 반드시 따라주어야 한다. 결국 슬픔의 표현에는 절차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그때의 진심'이다. 진심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의 그 상황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것만이 진심이다. 진심을 먼 데서 찾을 일은 아닌 것이다.
[ ... 특히 여성들은 좀 전에 지나간 사람과 비슷하게 / 생긴 사람이 또 지나간다는 느낌을 / 받을 때가 많다 / (...) 회전목마는 놀이공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 회전목마, 91쪽> ]
바비인형 가지고 싶어서 조르던 기억, 이내 중딩이 되어서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용돈 모아서 막내 동생 바비인형 사 주고, 옷입히기 그려주고..., 문득 뉴스와 인터넷 신문 및 유튜브에서 '바비인형'이 자주 등장해서, '회전목마' 시에서 그만 바비인형 공장이 떠오른다. 똑같아지려는 욕망의 지향점이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었다니, 사람은 늙으면 다 유년으로 되돌아간다고 하지만 아이가 아니라 바비인형일 줄은 미처 몰랐어. 인생은 회전목마지, 회전목마 따라서 여성들이 회춘해도 여전히 사람이야, 인형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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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표현들'이란 돌부리에 잘 걸려 넘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 자기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지나온 우리네 역사적 시간대에서 여전히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와 역사가 선사시대와 안드로메다의 차이만큼의 간극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만큼의 낙차가 현재 우리의 심정인 것이다. 낙차가 큰 만큼 빈 공간은 허허롭다. 그 큰 공백을 메꾸려 하니 허기지고 고단하다. 고통일까 허기일까 그리움일까.. 그러니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비'는 짐작을 불허하는 '슬픔'일 것이다.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비> 제목은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연상시킨다. 제목에서 보자면 '오마주'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어디에서 모티브를 얻었을까.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은 자기존재의 기원을 그려내는 마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 그곳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총체성이 발아되는 장소이며 일의적인 자기로의 시작점이 되는 물질과 정신이 혼합된 장소이다. 그러므로 그 장소는 물질적이지만 비물질적이다. 자기 기억의 어떤 장소와 시인의 현재가 중첩된 어떤 장소다. 시인의 현재에서 보자면 총체성으로의 자기는 '일의적인 자기'이다. 그 일의적인 출발점인 특이성의 존재로서의 자기이다. 모든 존재는 특이성으로서의 발생이다. 생명은 특이성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건의 위치를 갖게 된다. 자기 기원의 시작이 된 '샤갈의 마을'에는 시인이 아직 없다. 그 시간대에 시인은 없었다. 그러므로 샤갈의 마을은 비물질로만 존재한다. 존재는 사건이다. 그 사건의 날에 눈이 고요하게 내렸고 [ ...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 밤에 아낙들은 /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 제일 아름다운 불은 아궁이에 지펴졌다.
김춘수 시인은 '샤갈의 마을'이란 명칭을 '마르크 샤갈'에서 차용해 왔을 것이다. 마을 이름을 '샤갈'이라 한 이유는 마르크 샤갈의 정신세계를 빌려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마르크 샤갈의 정신세계가 그려낸 몽환적이고 판타지적인 그림 세계에서 김춘수 그 자신의 마을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샤갈의 그림에서 <나와 마을I and Village>을 보고 있으니 당나귀가 보인다. 당나귀처럼 보인다. 당나귀는 백석의 시에서도 등장한다. 김춘수의 시에서는 마르크 샤갈과 '나와 마을'과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겹쳐진다. 백석의 시에서는 '나와 마을'이 더 잘 전해온다. 무엇인가. 백석이 창조한 세계는 이름이 없다. 무중력의 공간만 있다. 나와 나타샤와 난데없는 흰 당나귀만 마르크 샤갈의 그림 세계처럼 부유하고 있다. '무게 없음'은 바로 꿈이다. 가볍게 나는 듯한 리듬감이 세계를 만들고 있다.
강기희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비'는 이 모든 판타지를 다시 다 걷어낸다. 눈이 내리는 것과 비가 내리는 것의 차이는 환상과 실존의 대비일 것이다. 무엇을 조망하는가에 따라 기억된 장소는 눈이 내리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고 폭풍이 치기도 하고 번개가 치기도 한다. 때로는 사막의 모래 폭풍이나 바위산 길을 걷거나 저녁에 흙모래가 튀는 비바람을 우산으로 막거나의 환상의 장소들이 소환되기도 한다.
[ 샤갈의 마을에 비가 내립니다 / 양복쟁이 최 씨의 양복이 비에 젖고 / 미장이 지 씨의 흙칼이 비에 젖고 / 솜사탕을 파는 할아버지의 솜사탕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 애써 핀 미스 리의 고데 머리가 라면 가닥처럼 구불거리고 / 야채 장수 마누라의 눈에서 흐른 닭똥 같은 눈물이 배추를 절이고 / 방 안에 고인 빗물을 퍼내던 앞집 여자의 욕설이 비에 젖고 / 배고픈 아기가 젖은 어미의 옷자락을 빨며 우는 / 샤갈의 마을 사람들은 세상 탓 그만두고 / 그저 구멍 뚫린 하늘만 원망합니다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비, 강기희, 59쪽> ]
눈이 오고 비바람이 쳐도 '기억된 장소, 비물질의 장소'는 모두 환상이다. 우리는 그 환상을 통하여 세계를 창조하며 동시에 공간을 넓힌다. 허허롭게 샤갈의 마을에 비가 내린다. 다시 허허롭게 시인은 약속의 장소로 초대한다. '흰 눈 안고 오시라'는 것의 의미는 아예 길을 묻어버리고 오라는 말이겠다. 발자국마저 흰 눈에 파묻혀 흔적을 지우겠다. 그 세계는 다시 비물질이다. 그래도 덕산기에 가시려거든 '소주'는 짊어지고 가소서, 그대. 너도나도 사건적 존재로서 그 경계에서 아슬하게 각자의 기억된 장소를 갖는 것에서, 어쩌면 그것은 더 '고적한 비'인지도 모르겠다. '허허'로운 흰 눈으로의 전환은 그래서 다시 하나의 통합된 이해로 나에게 전해온다.
[ ... 그대 덕산기에 오시려거든 / 폭설로 길이 끊어지는 날 흰 눈 안고 오시라 / 혹여 세상의 끝을 보고 싶다면 / 백석이 그러했듯 나와 나타샤와 책 읽는 고양이가 있는 숲속책방으로 시린 발로 오시라 / 그대 <덕산기에 오시려거든, 46~47쪽> ]
#우린더뜨거워질수있었다_강기희시집_달아실
#고인의명복을빕니다
#샤갈의마을에내리는비
#덕산기에오시려거든
#청심대에서
#회전목마
#백조일손묘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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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님_시집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