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홀 Hall, William James(1860 ~ 1894)】
「평양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다」
홀은 1860년 1월 16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 뷰엘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서 그는 14세에 장로교회에 헌신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다. 홀은 17세에 목공 경력을 쌓기 위해 글렌 뷰엘 학교를 떠났다. 결핵으로 인한 심한 열병에 시달리던 홀은 목공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추구했으며, 1880년에 아테네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홀은 1883년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1885년 온타리오주 킹스턴에 있는 퀸스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훈련에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 있는 드와이트 L. 무디 여름학교 참석이 포함되었다. 홀은 1887년 뉴욕시로 건너가 1889년 벨뷰 병원 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홀은 매디슨 스트리트 의료 선교 병원의 의료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윌리엄 홀은 캐나다 벽촌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로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고,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만난 의사 로제타와 약혼을 하였다. 약혼녀인 로제타는 먼저 한국에 선교를 위해 들어오고, 윌리엄은 약혼녀 보다 1년 늦은 1891년 한국에 들어와 두 사람은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1894년 평양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채 한 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데,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이들 부부는 의료 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후에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전염병에 걸리게 되었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아내의 품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 그의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 중이었다.
남편과 딸을 잃어도 일평생 계속된 헌신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딸 에디스을 낳은 후 두 자녀를 데리고 1897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하였다. 이 때 사랑하는 딸 에디스도 이질로 희생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헌신은 계속됐다. 그녀는 김점동(나중에 박에스더라고 불림)이라는 한 여성을 미국에까지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다. 박에스더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하여서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이나 지속되었다.
폐결핵 퇴치를 위해 힘쓰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부인 메리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였다. 그는 특히 폐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이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다. 그는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고, 그의 가족들은 지체 않고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가는 배를 바로 탔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첫댓글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