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長江)은 흐른다(2)
오늘은 마침 부처님 오신 날, 그러니 불경과 얽힌 일화
한토막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절깐 공부를 제법 여러 해 했다는 스님도 경을 읽을 때,
이를테면 금강경을, ‘여시아문(如是我聞)...하면서 초성 좋게 외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다가 막판 결어(結語)만 ‘마하 사바하!’하고 끝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때는 당나라 정관(貞觀)년간에 당승 현장(玄奘-서유기에서는 三藏으로 각색됨)법사가 인도에 가서 십여년의 고생 끝에 700여권의 불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오다가 장강의 거센 물결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쓰던 중, 스님의 불심에 감동을 받은 장강의 잉어들이 모두 수면위로 떠올라서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렇게 거의 장강을 다 건너올 즈음 스님을 떠받치고 있던 어떤 물고기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이번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실 때 무슨 선물을 가져오셨나요?,
스님 왈, ‘얘들아, 내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었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
순간 삐친 물고기들이 물속으로 사라지고 불경과 함께 스님 일행이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제자들(손오공)의 힘으로 스님 일행이 살아나오긴 했지만,
불경 60여권은 물속으로 사라지고 640여권만 남아서 전해졌다. 물속으로 사라진 불경은 잉어들이 먹어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스님들은 불경을 암송할 때, 사라진 부분을
얼버무릴 수 밖에 없게 되었고, 큰 절에서는 아침마다 나무로 된 커다란 잉어(木魚)의 배를 두들겨서 뱃속으로 사라진 불경을 토해내서 끝까지 독송(讀訟)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고 있단다. (믿거나 말거나豊江說話)
풍도를 가기 전에 총칭에 대한 얘기 한 가지를 추가하려 한다.
친구들은 강물이 동(東)에서 서(西)로 흘렀다가 나중에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나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증거는 중경에서 보았다.
60년 인간세로 보았을 때는 어떠한 변화도 감지할 수 없지만,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커다란 변화를 관찰할 수 있으니, 예를 들어 강원도 태백과 일본 큐슈(九州)가 약 4억 5천만년 전에는 같이 붙어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태백산맥이 융기(隆起)하면서 상층부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사면(斜面)이 동해안이 되어 급격히 깊은 바다가 되었고, 거기서 떨어져나간 덩어리가
큐슈지방이 된 것이다. 즉 이것은 태백 동점(銅店)지역의
화석과 큐슈지방의 화석이 일치하는 것으로 증명 할 수 있고, 그 지역이 융기된 지형이라는 것은,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 등의 화석으로 보아 그 옛날에는 바닷속이었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중경지역등 히말라야나 힌두쿠시 동쪽에서도 생겨났으니, 인도 대륙판이 아시아판을 밀어올려서 히말라야 산맥을 형성하였고, 오늘날도 꾸준히 그 판들의 충돌과 융기가 계속되고 있으며, 그래서 그 판(版)을 따라 지진도 잦다. 이는 곧 히말라야 산들도 모두 해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약 2억 5천만년전에 형성된 소금이 내륙 한복판인 총칭에서도 나는데, 미네랄이 풍부하고 값도 비싼 소금으로 생산된다. 이런 얘기는 ‘차마고도’에서도 소개된 바가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장강은 동에서 서쪽으로 흘렀을 것이다.
장강이란 말은 우리는 잘 쓰지 아니하고, 양자강 (양쯔장 揚子江)이라 부르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히말라야 어딘가의 발원지부터 상해에 이르기 까지 수천 수만 킬로미터(支流의 合算)의 기나긴 강은, 구역에 따라 내려오면서 7개의 이름을 갖게 되고, 마지막 구간인 난징(南京)에서부터 샹하이(上海) 까지의 구간을 양쯔라 부른다.
그리고 이 구역이 외국에도 가장 널리 알려져서 장강=양자강으로 여겨지고 있단다. 장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는 약 3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 비로소 풍도(酆都)에 간다.
풍도는 옛날 주(周)나라 때의 수도다.
3천년 고도(古都)다운 전설의 도시, 유령의 도시(City of ghost 鬼城)다.
귀성 입구를 지나면 약간 가파른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커다란 누각으로 세워진 귀성에 다다른다.
귀성은 도교(道敎)의 사원이다.
도교는 기독교, 불교, 힌두교와 함께 인류의 4대 종교 중 하나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도교를 종교라 하기엔 좀 어색하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힌두적인 요소를 모두 조금씩 포함하고 있는 도교는 중국인의 사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교는 이름 그대로 타오(Tao,道) 즉 ‘길’(Way)을 가리킨다. 무엇 보다 다른 종교와 대비되는 것은 내세(來世)에 대한 약속이 없다는 것이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든지 극락왕생한다는 터무니없는(중국인 입장에서) 외상을 중국인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외상거래 보다는 금세발복(今世發福)을 원한다. 대만이나 홍콩에도 있는 포대화상(袍帶和尙)의 불룩한 배를 쓸어주고 복 받기를 기원하며, 아파트 건물의 한 가운데를 통째로 뚫어놓고 그 구멍으로 복이 굴러들어오기를 기원하며 한움큼씩의 향을 사른다. 그래서 사원마다 향연(香煙)이 가득하고 빨간 가짜 돈이 얼마든지 불살라지고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 거금을 들여서 폭죽을 터트린다.
무슨 복잡한 이론이 있는 종교도 아니고, 열심히 빌면 우주만상의 귀신들이 다 도와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음식도 목구멍 까지 차도록 먹으며, 술도 취하도록 마시며, 산해진미나 불로장생의 약제에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 도락이나 마약, 다양한 애완물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믿지 못할 외상 보다는 현세가 즐거워야한다는 것이 도교의 가르침이다. 나도 그렇게 산다.
이태백도 노자도 다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
묘지도 필요없이.
귀성관광을 마치고 향한 곳은 석보채(石寶寨).
장강 유역에 있는 아름다운 누각 중의 하나이며 긴 다리를 건너 석산에 위치해있다.
7층이나 되는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를 것 같지 않아서 외관만 구경했다. 벼랑에 집 잘 짓기는 쭝궈런이 최고다.
절경을 보는데 왕복 가마비로 5만원을 썼다.
한국은 유채가 한창인데 거기는 이미 꽃이 지고 씨가 맺혀있었다.
점심은 중국식으로 저녁은 중국식과 서구식이 혼합된 뷔페로 했는데, 그때마다 중국술 한 병씩을 비웠다.
하루에 두 병씩.
48도에서 52도에 이르는 그 술들은 가는 곳 마다 종류가 달랐고, 마시고 또 마셔도 대취하지 않았고, 이튿날은 마신 흔적 조차 남기지 않아서 참으로 좋았다.
중국술과 오리와 빠오(만두 종류)같은 좋은 안주가 없었으면 여행은 너무 건조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팩소주를 권했다가 욕만 얻어먹었다.
그맛이 그 맛이라 소주가 싫었다. 맹물 같기도 하고.
그렇게 또 하루가 가고 배는 밤을 도와 구당협(舊唐峽)으로 향했다.
to be continued....
丁酉 釋氏誕日
豊江
첫댓글 "믿거나 말거나 풍강설화"는 정말 그럴듯 하다~~ 천하의 애주가가 원없이 마시는구나~~ 피곤할텐데 시간을 내서 글을 올려 주니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