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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위로로 가득찬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 우리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은혜롭고도 영광스럽게 주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게 된답니다. 육신의 허물을 벗은 우리 모두는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된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위령 성월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자주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의식은 철저하게도 차별화됩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거부하고 도망치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면 온 몸이 경직되고 살이 떨리며 두려움에 사지를 떨게 됩니다. 끝이요 멸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왔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천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고 나면 천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것입니다. 주님 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 자비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집착하는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두가이들을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 대명사입니다.
피터 팬은 자신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부모의 대화를 듣고 집을 도망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들어오기를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혼자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도 160cm에서 성장이 멈추었고 결혼을 해서도 부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옆집의 어린이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죽거나 물속에서, 혹은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비극을 맞은 것이 배리의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더 집착하고 사랑한 아이들부터 그렇게 죽었습니다.
자라야 하는데 멈추고 싶은 마음은 현세주의자라기보다는 실제로 현실도피자입니다.
제임스 배리가 그렇게 어린이들에 집착하였던 이유는 그의 삶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싶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리의 형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사고로 형이 사망합니다.
어쩌면 배리는 형이 죽은 탓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도 매일 눈물로 큰아들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
배리가 “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배리는 형의 흉내를 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진짜 배리의 모습은 끝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아이들도 사랑을 갈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배리의 집착에 시달리며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배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태아의 부활은 무엇일까요? 태어남입니다. 태아는 어머니 태중에서 양식을 먹고 보호를 받습니다.
내가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말이고 성장한다는 말은 언젠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로 태어날 일이 없으면 내 손으로 양식을 벌어먹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어린이들도 양식을 먹습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양식을 준다는 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야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어린이로 남으려고 하는 현세주의자들은 현실도피자입니다.
어른이 되면 양식이 필요 없을까요?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을 버텨도 사랑을 먹지 않으면 4일만 지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는 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도를 통해 사랑의 양식을 먹으며 그것이 없으면 살 힘이 없음은 압니다.
부활을 믿고 싶으면 이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할 것임을 직감합니다.
여러 번 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창조자가 주는 양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현실도피자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이정재는 몸에 총알이 7개씩이나 박히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에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는 김구 선생 밑으로 들어가 정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본에 팔아넘겼습니다.
김구 선생이 점점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죽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독립투사가 희생됩니다.
하지만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반민특위 법정에 세워졌고 증인들은 죽어갔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일본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
그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죽이고자 했고 죽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작은 골목길에서 이런 마지막 대화가 나옵니다.
“안오균?”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16년 전인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서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믿는 이들은 독립투사처럼 삽니다.
문제는 부활이 있고 난 뒤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다면 성장하여 부활하란 뜻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현세주의자로 살다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부활은 성장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AI를 인간의 새로운 지배자라고도 부릅니다. 어디에 살든 불가해한 알고리즘으로 짜인 거미줄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알고리즘들이 우리의 삶을 관리하고, 우리의 정치와 문화를 재편하며, 심지어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재설계하면서 힘을 잃게 만듭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유튜브를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스포츠 관련 영상을 찾다 보면 계속 첫 화면에 스포츠 영상만 나옵니다. ‘보수’ 정치 관련 영상만을 찾으면, ‘진보’ 정치 관련 영상은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스포츠만 좋아하고, 보수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포츠 싫어하는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고, 진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AI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을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I에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닌 진실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한 자기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또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질문은 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혼인을 하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는 정리될 수 없기에, 예수님이나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부활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지요.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나라는 온전한 기쁨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 보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중심을 맞췄을 때,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마스다 미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33)
부활 때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아내가 된다네.
우리는
그분의 신부이므로
그 날이 오면
저마다 등불을 들고
동구 밖으로
신랑을
마중 나가야 한다네.
그때까지
등잔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사두가이들의 삶의 자세는 그들이 지닌 선입견,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자기방어에서 오는 완고함으로 대변됩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처럼 냉소적이고 완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메뚜기에게는 내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눈과 하느님의 눈은 다릅니다.
사두가이들은 마치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메뚜기처럼 ‘내년’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에 갇힌 하느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