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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이 이렇게 긴 강인 줄 몰랐다. 273㎞,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나라 9번째인 강, 남한 구간이 90㎞ 남짓하니 2/3가 북녘 땅에 흐른다. 분단의 상징 임진강은 기어이 건너야할 강이다. 새해 DMZ를 한반도의 대동맥으로 만들자는 구호가 힘차다. 임진강 적벽 너머에 국제평화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계가 화려하나 아직 공허하다. 남북의 신년사는 저마다 다른 언어로 통일을 말한다. 이 겨울, 흐르지 못하는 강의 유빙이 솟아올라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 그래도 강바닥엔 봄마중 물이 흐르고 있으리라
임진강을 이 겨울에 찾은 것은 순전히 새해라는 희망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오랜 분단에도 가시지 않은 긴장은 이 겨울 철조망을 지나오는 바람으로 더욱 분명하다. 차가울수록 명징해지는 머릿속, 임진강의 북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 땅은 우리나라지만 우리나라가 아니다. 우리 지도에도 빼버린 땅을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은 관념일 뿐이다. 그래도 임진강의 뿌리를 찾는다.
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
임진강은 순수한 우리 이름으로 ‘더덜나루(다달나루)’다. ‘다닫다’는 뜻을 가진 ‘臨’자도 여기서 유래한다. 일명 ‘더덜매’라고도 하는데 ‘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이니 골짜기 깊이 절벽을 이루면서 흐르는 임진강의 지형을 제대로 꿴 이름이다.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산맥과 아호비령산맥의 두류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니 오늘날 북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강원도 법동군 룡포리다. 남으로 내려오면서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포촌(浦村)이 수운의 종점이고, 연천군 중면 횡산리에서 휴전선을 넘는다. S자를 그리면서 휘감아 도는 물줄기는 왕징면 강내리에서 남한의 물이 되어 군남댐에서 잠시 휴식한다.
서둘러 만든 군남댐의 숙명
군남댐의 역사는 서글프다. 높이래야 26m, 길이 658m에 홍수 조절량이 7,100만t(평화의 댐 최대저수량 26억t)에 불과한 작은 댐이다. 2009년 9월 북한의 황강댐 무단방류로 야영하던 주민 6명이 사망하면서 주춤거리던 공사는 피치를 올려 2010년 6월 본댐을 조기에 완공하였다. 어쨌든 수공(水攻)의 위력을 단단히 본 셈이다. 원래는 북의 수공에 대비하여 물을 가두지 않는 마른 댐으로 만들었으나 가뭄에도 물을 가두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을 가두고 보니 하류 쪽 파주에는 바닷물의 역류로 염해(鹽害)와 철새 생태계의 변화까지 우려하는 환경론자들의 목소리까지 논란에 가세했다. 2007년 북은 원래 '4월5일댐'이 있음에도 저수용량(3~4억t)이 10배나 큰 황강댐을 더 상류에 건설했으니 우리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자원의 공동이용 등 다양한 합동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국제법적인 문제까지 산 너머 산이다. 남북관계의 줄다리기 속에서 진도는 개점휴업이다.
휴전선에 접한 철원, 연천, 파주의 자치단체는 DMZ를 소재로 관광 활성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흔적은 군남댐에서 왕징교에 이르는 구간에 만들어진 자전거 길에서도 보인다.
겨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자전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왕징면 소재지에 이르자 정미소의 기계음이 조용한 마을에 생기를 돌게 한다. 오래도록 나는 ‘징(澄)’자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북쪽 끄트머리 DMZ가 점선으로 처리된, 지도 속 왕징면이 늘 궁금했다. ‘맑을 징’이라는 훈독(訓讀)이 주는 청아함 때문에 고교시절 접한 불문학자 오징자(吳澄子)교수의 이름마저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살아 있다.
임진교부터 어느 쪽도 강을 끼고 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숭의전이 있는 미산면 아미리까지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다. 대단한 높이는 아니어서 두 어 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면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숭의전(崇義殿), 고려를 기리는 조선의 사당
지리적으로도 북방의 외진 곳에 위치해서일까, 숭의전(국가사적223호)은 그 깊은 뜻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당이다. 한탄강이 전곡읍내를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여 아미산 자락 누에머리 같다는 잠두봉(蠶頭峰) 아래에 숭의전은 지어졌다. 임진강의 주상절리 절경중의 하나다.
이곳에 모신 위패는 고려조의 4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공신(복지겸, 신숭겸,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정몽주 등)이니 예사롭지 않다. 멸망시킨 고려의 왕과 신하를 조선 태조6년(1397년)에 모셨으니 이채롭다. 고려유민들의 선왕조에 대한 그리움과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위로의 사당이니 말이다. 그 시절에도 민심은 칼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도도한 물결이었나 보다.
신라 경순왕릉과 더 갈 수 없는 장단
비룡대교에서 371과 372번 지방도로를 따라 장남면을 지나면 호로고루성과 경순왕릉이 있는 상고랑포에 이른다. 호로고루(瓠蘆古壘)성은 옛 부족국가시절부터 치열한 격전지였고, 신라와 대치하는 고구려의 국경방어사령부 격이었다. 임진강은 원래가 주상절리가 심해 물 한 방울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뿐더러 아예 기어오를 수는 없는 천연의 요새다. 그러나 임진강의 옛 성들은 물길이 느슨해지면서 퇴적이 심해 사람이 절벽으로 올라붙기 쉬운 장소에 어김없이 만들어졌다. 소위 적을 확인해 무찌르기도 수월하고 자신들도 강을 건너 공격하기 좋은 곳에 만든 것이다. 장파나루, 고랑포나루, 임진나루 근처의 풍광이 그렇다.
북으로 난 도로는 모두 민간인통행불가다. 확인하고 싶었다. 병사들이 막아선다. “더 갈 수 없습니다” 절도 있고 단호한 금지다. 경순왕릉으로만 길이 트여 있어 발길을 돌린다. 신라왕이 천리 먼 경기도 땅에 와서 초라하게 묻히다니. 사연이 이러하다. 이미 저물어버린 신라의 패망을 몸으로 안은 경순왕은 고려의 도읍 개경에 볼모로 잡혀 살다 생을 마감한다. 죽어서라도 신라의 경주에 묻어 주어야 한다는 장례행렬은 도성 밖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막힌다. ‘개경 100리 이내를 벗어나지 말라’는 어명에 따라 이 외진 산골에 묻혀 천년을 보낸 거다. 신라 천년에 유일하게 경주 밖에 육신을 누인 왕의 유택이라 더 스산하다.
두지나루 황포돛배와 임진강 어부
장남교로 나와 강을 건너면 임진강황포돛배가 운행되는 두지나루다. 물론 이 겨울 임진강의 배는 그대로 동결이다. 두지나루는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임진강 어부의 생업도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어업허가를 받은 이는 임진강 1호 어부 임종수 씨다. 25사단의 허가구역인데다 허가된 배도 87척(2007년 기준)에 불과하다. 5개 선단의 배들 가운데 유독 5선단 16대는 무동력선이다. 모터를 달 수 없어 손으로 노를 저어 조업할 뿐이다. 북이 지척이라 눈 깜짝하면 북쪽으로 붙을 수가 있어서다. 그들의 배는 관측초소의 통제를 받는다. 조금이라도 허용선을 넘으면 ‘돌아오라’는 경고 방송이 영락없이 강안에 울려 퍼진다.
임진강의 명물은 역시 참게와 황복이다. 황복이야 워낙 귀해 ‘회 한 점이 금 한 돈‘일 지경이다. 황복철(4~6월)에 선택받은 입만 맛 볼 정도이니 논외로 하자. 임진강 참게는 자고로 이름 날리는 특산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전국 7개도 71개 고을에서 참게가 나지만 섬진강 곡성의 참게와 함께 임진강 참게를 가장 알아주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임진강 참게장맛을 제대로 보려면 파주군 적성면 두지리와 화석정 인근 문산읍 임진리, 반구정 근처인 문산읍 사목리에 가면 된다. 암케 게딱지 안에 생긴 노란 내장인 ‘장(腸)’이 게 맛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별미다. 게장이 밥도둑의 원조임에도 디스토마의 원인이라 판매가 전면 중단되었던 것은 일제 때인 1924년이다. 물론 1934년에 다시 먹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1960년대 이후로 오면서는 바다꽃게로 담근 게장이 식탁의 주연으로 등장하게 된다.
조용필과 장파리 미군클럽 ‘라스트찬스’
자장사거리에서 자하리로 접어들면 질주하는 차량으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 강가에 다가갈 수 있다. 리비교가 있는 장파4거리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장마루촌은 음식촌으로 변해 있다. 자전거를 소재로 조형물을 설치한 조그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라스트찬스’라는 간판이 도드라진다. 참게를 듬뿍 넣고 잡어탕을 끓여주는 매운탕집 주인은 그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휴전 이후에 생겨나 70년대 초 주한미군이 대거 철수할 때까지 날리던 미군클럽이었다. 머나먼 이국땅에 파병된 미군들이 회포를 풀고 시름을 달래던 흔적이 달리는 백마를 그린 벽화로 여전히 남아 있다. 클럽의 여급들과 양공주들이 거주하던 2층집은 세금폭탄을 맞을 것을 우려한 옛 주인이 잽싸게 허물어버려 흔적도 없다.
솟구치며 얼어붙은 유빙에 사로잡히다
길지도 않은 강둑길 여정을 장마루촌에서 일단 접은 것은 얼어붙은 임진강과 눈 덮인 임진강 적벽 풍경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꼭 2주 뒤였다. 수도권에서는 눈이 귀했으나 서부전선에 내린 눈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 리비교 아래 강둑길은 영농을 위해 철망문이 열려있다. 길이 끝까지 연결되어 있으리란 확신은 없다. 그러나 임진강의 속살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설렘도 크다.
강은 거대한 빙판이다. 매끈한 빙판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유빙이 얼어붙은 난장(亂場)이다. 적어도 남한 땅에서 임진강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겨울강의 백미다. 얼어붙은 강물은 서해의 밀물에 막혀 더 제 자리 걸음을 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얼음판은 고싸움처럼 들고 일어나 뒤엉겨 붙은 채 얼어버린 것이다. 날이 조금이라도 푹해지면 유빙은 기지개를 펴느라 쩡쩡 갈라지는 신음소리를 낼 것이다.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쉬운 강둑길인데도 겨울강에 취한다. 지천에 막혀 되돌아 나오면서도 허비한 여정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은 쉬이 만날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임진나루와 율곡의 화석정
운천리 고갯마루에 올라서기 전에 화석정이 있다. 남진하던 임진강이 절벽에 부딪혀 회절하며 강물을 온몸으로 안는 자리다. 560년 된 느티나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옛 1번국도 터의 영화를, 의주까지 쫓겨 몽진하던 선조의 처량한 모습도, 남침하던 북의 탱크 행렬까지도.
율곡이 8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의 “강은 만 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라는 말이 실감난다. 마을이름도 율곡리다. 조선조 최고의 학자인 율곡이 태를 묻고, 경세를 논하며 만년을 보낸 곳이니 자부심이 느껴질 만하다. 그러나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일까 신사임당의 명성 탓일까 율곡은 강릉 땅에서 이름값이 더 큰듯하다. 이미지란 그런 것이다.
임진각과 통일로 가는 다리
임진각에 서면 대한민국이 섬나라인 게 실감난다. 비행기나 배가 아니면 이 나라를 벗어날 수 없는 섬나라. 휴전선은 거대한 해협(海峽)이다. 좌로 가면 ‘자유의 다리’고, 직진하면 ‘통일대교다. ‘’평양’이라는 이정표가 공허하다. 바리케이드가 막아서 U-턴한다. 1000여 마리의 소떼를 끌고 당당히 고향땅으로 향하던 정주영 할아버지의 기개가 새삼 존경스럽다. 평화의 공원은 겨울이라 쓸쓸하나 부서질 듯 서있는 녹슨 철마 앞에는 중국관광객들의 성조가 드높다. 3월이 되면 ‘DMZ 자전거타기’가 시작된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통제된 강둑길의 속살을 흔쾌히 내어줄 게다. 임진각 통문에서 통일대교를 거쳐 분단의 섬 초평도를 바라보면서 64초소까지 돌아오는 민통선 안 17.2㎞다.
임진각에서 반구정(伴鷗亭)까지는 자전거길이 일부러 나 있다. 이쯤해서는 온통 간판이 매운탕이고, 참게장이다. 황복은 구색이고 여전히 시가(市價)다. 반구정은 조선 세종조의 명재상 황희가 만년을 보낸 경치 좋은 영당(影堂)이다. 최근 황희에 관한 평전들이 눈길을 끈다. 그가 행정과 외교의 달인이자 경청의 명수인 것은 맞지만 청백리 황희는 과장된 것이라고 말한다. 뇌물수수 건에다 아들 사위의 처신 문제까지 그도 평범한 인간이다, 그래서 오히려 정이 간다.
동화경모공원과 헤이리마을
사목리에서 성동IC로 넘어가는 길은 자유로가 가로 막아서 강을 보기가 어렵다. 낙하IC부터는 오금리 쪽으로 넓은 논이 펼쳐져 있지만 토끼굴에서 병사들이 막는다. 그나마 자유로를 따라가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길은 한가하다. 한때는 대북방송의 날카로운 스피커 소리가 이곳이 접적지역임을 말해주었는데 이젠 자유로의 소음만 끈질기다.
임진강의 종점인 성동IC 근처에 오면 이름마저 탄현(숯고개)이라 붙었듯이 산세가 제대로 한번 뭉쳐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에 분단의 한숨은 ‘통일동산’을 만들었다. 평생을 두고 온 고향을 그리다 피눈물로 생을 마감한 그야말로 이북사람들(실향민이라면 느낌이 덜하다)의 안식처 ‘동화경모공원’이 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탄현산업단지를 넘어서면 파주 음식마을이 산사람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거대한 모텔촌을 이룬 욕망의 정거장이 산자락에 들어서고, 때로는 염치없이 큰길가로 나와 반짝이를 흔든다. 한글전용이라는 몰입된 민족혼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경기영어마을’은 이름을 이어간다. 인간의 욕망 뒤에 잡힌 물집 같은 공허는 예술과 사색의 여백으로 껴안아야 삭혀진다. ‘헤이리문화예술마을’이 큰 위안이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하얀 단애 위에 솟아올라 북녘을 응시한다. 얼마나 외웠던 제원(諸元)인가. “김포군 하성면 시암리에서 북의 개풍군 관산포까지는 물 빠지면 1.5㎞에 불과한 거리입니다”라고. 통일전망대는 ‘자전거 사절’이다. 빤히 보이는 북녘 땅 다시보기를 포기한다. 간첩들이 한강을 건너면서 목표물로 삼았다는, 유서 깊은 심학산이나 바라보며 투덜거린다.
여행 만들기
임진강 여행은 한여름보다는 겨울이나 봄이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연천 신망리역에 내려 78번 군도를 타면 군남댐에 이른다. 임진강 여정의 중간쯤 되는 장마루촌에서 점심을 하고, 화석정과 임진각을 들러 헤이리문화예술촌 입구에서 여정을 마치면 좋다. 아무래도 하루에 헤이리까지 둘러보는 일정은 무리다. 경의선 금촌역에서 전철로 돌아오면 된다.
길섶에서 만난 사람
장마루음식촌의 임진강매운탕집 주인이다. 15년 전에 자주 매운탕 먹으러 오다가 연로한 옛 주인에게서 이 집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세월이 내려앉긴 했어도 그에겐 멋스러움이 풍긴다. 60년대서 70년대까지 명동에서 생맥주집을 5군데나 하고, 하룻저녁에 생맥주 38통을 팔아치울 정도로 물장사 재미도 봤단다. “옆의 라스트찬스는 나름대로 유서 깊은 건물이지요. 장파리의 미군클럽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지요. 조용필도 무명시절 여기서 연주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설치미술가가 잘 가꿔 보겠다고 하길래 그냥 빌려줬지요.” 일찌감치 명동의 통기타부대와 함께 부대끼면서 몸에 밴 예술에 대한 이해가 보통이 아니다.
임진강매운탕집 주방장이다. 7순이나 되었으니 힘에 겨울만도 하련만 매운탕 끓이는 솜씨는 대단하다. 그는 임진각 근처의 마정리 출신으로 7년 전에 주방에 들어오기 전만해도 임진강에서 참게와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한 30년은 임진강에서 고기를 잡았지요. 서리 내릴 때부터 잡히는 참게가 일등품이구요. 10여 년 전에는 참게 씨가 말라서 한 마리에 3만원이나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참게가 많이 잡히는 편이지요.” 이미 섬진강 유역을 비롯한 남도지방에는 동남참게가 대량 양식되고 있어 자연산참게 원산지 세탁문제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입맛과 돈맛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나보다.
연천, 파주 음식점
임진강황포나루 031-959-9995
파주 장파리 장마루촌에 있는 매운탕전문집이다. 참게매운탕도 좋지만 잡어매운탕을 시키면 참게에다 모래무지와 빠가사리까지 더해주는 넉넉한 인심을 맛볼 수 있다.
진한 매운탕 맛에 쫄깃한 수제비까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참게매운탕(1인) 1만8000원, 잡어매운탕(1인) 1만4000원.
개성순대 031-835-3525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 있다. 숭의전 근처다. 길가에 민속주점처럼 생겨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 담백한 맛의 개성순대국이다.
길가에서 뜻밖에 맛집을 하나 건진 기분이다. 시를 쓰는 주인의 마음씨가 추운 날 길손을 녹여준다. 순대국 7000원, 술국 1만원.
숙박 및 교통
동두천~백마고지 통근열차
05:45 동두천역 출발 첫차부터 1~2시간 간격 운행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남은 통근열차로 거리 관계없이 어른 1000원(어린이 500원). 예매 안됨. 서울에서 동두천까지는 소요산행 전철을 이용하고, 동두천에서 신망리까지 35분 소요.
<참고자료>
1. 다시 보는 경기산하. 연천군, 파주시 편, 경기문화포탈
2, 한국의 발견, 경기도. 연천군, 파주시, 뿌리깊은나무
3. 답사여행의 길잡이 19. 경기북부 편
4. 방촌 황희 평전. 이성무/ 민음사
5. 연천군문화관광-호로고루성/ 강흥구
풍경에 건네는 말(35) by 조용연
자전거의 겨울잠
두루마기 허리춤 접어 지른 울 아제 장날
미야다(宮田)*로 비틀비틀 돌아오던 불콰한 동구
하늘이 멀리 따라와 주저 앉았지
구루마도 차지 못한 술도가 다마네기*
체인은 그릉그릉 가래로 끓고,
목도하듯 끌고 가던 삼천리 짐차,
술통에 콧물이 흘렀지
수레가 감고 푼 세월이 얼만데
앞뒤로 제 그림자 밟지 않고 내달리다니
먼지 푹석대는 비탈의 기하학을 끌어안은 채
지난 세기 최고의 발명이라 했다던가
너하고 살아야 제격이라더니
유행가 따라 제 각각 어느 골에 살아가겠지
자라목 창문너머 아지랑이 기다리겠지
앞뒤바퀴 말라붙은 그믐밤 눈물자국에
엎드려 선잠 자고 강둑길에 앉았더니만
흔들어도 여즉 긴 겨울잠이다.
달빛 한 조각도 물렁해진 신 새벽, 지금
아직 반품가능이다
*일제 미야다(宮田)자전거는 일제 때부터 광복 후까지도 최고급자전거의 대명사였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술도가(양조장)의 술 배달부는 유난히 배가 나오고 키가 작아 모두들 “다마네기‘라고 놀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