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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 믿음의 과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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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의 과정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복음의 끝부분에서 사도들은 이런 사명을 주님께 받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증인의 사명을 주님께 받은 사도들이 불구자를 고쳐주며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을 증거 하는 얘기가 오늘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매우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만 해도
이렇게 증거 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에 차 있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확신과는 반대되는 모습이랄까 상태를 보입니다.
두려움, 무서움, 의혹, 놀람, 기쁨 등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보이는데 특히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다.”라는 표현이,
그들의 긴가민가하고 곧 반신반의하는 믿음 상태를 잘 표현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기쁘기는 한데 아직도 믿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믿음은 과정 곧 두려움과 무서움과 의혹과
놀람과 기쁨의 과정을 통과하며 성장하고 확고해진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두려움과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합니다.
달리 말하면 두려움과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는 겁니다.
우리 삶에서 아무 두려움이 없을 때 믿음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존재 곧 구원자를 찾게 하는데
처음에는 그 구원자가 인간이었다가 차츰 하느님으로 바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역설이지요.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두려움이 두려움으로부터 구해 줄 하느님을 찾게 한다는 것이.
이것을 보면 우리가 당신을 찾고 믿도록 하느님께서
두려움을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구원자로 믿으려고 하지만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과연 구원자신지,
그에 대한 의혹과 의심이 수없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의심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하다가
두려움 때문에 다시 구원자를 찾고 믿으려 하고,
믿으려 하다가 다시 의심이 생겨 믿지 못하다가
두려움 때문에 다시 구원자를 찾고 믿는 과정이 반복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믿음이 확고해지는 과정이고,
그리고 이 과정의 정점에 성령강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두려움과 의혹을 보인
사도들에게서 우리는 큰 위안도 받고 도전도 받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에게 아직도 두려움과 의혹이 있는데
사도들도 그랬다는 것이 현재의 나를 위해서는 위안이지만,
그러나 사도들은 이것들을 통과해 확신에 이르렀다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나에게는 도전인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들로부터 위안과 도전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두려움과 의혹이 아직도 있더라도 너무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사도들처럼 믿음의 과정을 가라고 도전과 격려를 받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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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름답고 멋진 장소에 가시면 무엇부터 하십니까? 아마 감탄사가 먼저 나올 것이고,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기 위해서 사진도 찍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장소라도 자기 몸 상태에 따라 하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0년 전, 남미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행기 탄 시간만 하루가 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곳이고, 이제 다시 이곳에 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체험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페루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울고 싶었습니다. 안데스산맥 사이의 해발 3,399m에 위치한 15세기에 세워진 고도시입니다. 볼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두통과 어지러움, 계속해서 붕 뜬 느낌과 소화 불량이 계속 제 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산병 때문입니다.
고산 증세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과연 아름답고 멋진 경치가 눈에 들어왔을까요? 사람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곳에서 저는 한숨만 내쉬면서 빨리 낮은 곳에 가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산 증세는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나서는 다시 생생해졌고, 그제야 아름답고 멋진 장소가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 환경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 환경에 적응하고 바라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인 것처럼, 주님께도 완전히 적응해야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방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역시 죽지 않겠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직접 3번이나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몰랐던 사건이 아닙니다. 3번이나 예고하셨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많은 군중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 역시 세상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군중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소리,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모욕적인 군중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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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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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거행하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토록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꽃피우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고, 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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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사람이 있고, 드러난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안에서 그 의도, 본뜻을 헤아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경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실은 물론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뿐 아니라 진실을 모르면서 갖은 추측과 추정을 통하여 사실인 것처럼,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말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떠도는 말, 입에 발린 말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지혜로운 처신과 절제된 침묵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책임을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사를 도와주는 어린 복사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떤 색깔을 좋아하세요? 빨강이예요? 파랑이예요? 얼떨결에 하얀색!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당도, 야당도 아니고 천주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알아보려면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실 때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한결같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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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이런 증인은 법정에서 볼 수 있고, 증인의 증언은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이런 증인의 증언을 공적인 장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5공 청문회’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부당함을 증언하였습니다. 송곳 같은 질문으로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밝혀낸 ‘청문회 스타’ 국회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짓 증언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산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욕망에 사로 잡혔던 노인들은 수산나가 부정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억울하게 죽을 위험에 직면했지만 다니엘은 두 노인의 거짓 증언을 밝혀냈습니다. 수산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의 그물에서 벗어났습니다. 거짓 증언을 했던 노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에서 여덟 번째 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념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증인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를 ‘386 운동권’이라고 했습니다. 3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한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대부분 586 세대가 되었습니다.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에 출생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들의 저항과 이들의 투쟁은 많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의 민주화는 그런 증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증인은 스테파노입니다. 부제였던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300년 박해의 시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런 순교자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복음 전파 없이 자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한국 교회도 복음 때문에,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로서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우리들 또한 순교자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이제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회개 했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회개한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부당한 폭력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교회의 위기는 회개한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 주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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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주님께서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께 오늘의 주제는 사실 옛날이야기로 들립니다. 이미 부활이 이루어졌는데 왜 다시 고난에 관해 이야기할까요?
정호승 시인의 책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책은 시인의 삶과 철학과 신앙을 시와 산문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의 제목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익어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말한다면 그 사랑은 목적을 위한 사랑일 것입니다. 무언가를 얻고자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고통을 함께 통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후 수난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사랑에 대한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난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수난 없는 부활은 변화일 뿐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저 색과 모습을 바꿨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부활만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 전에 우리는 수난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가 부활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겪으신 수난을 통해, 그 수난이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기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이끌기를 바랍니다. 그 수난이 우리를 주님의 겸손으로 이끌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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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우유와 잘 어울리는 빵은?
얼마 전 병원에서 몇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를 하기 위해서 전날부터 금식했습니다.
검사가 끝나니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제대로 무언가를 먹을 시간이 없던 저는
병원 내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뭘 먹을까….
우선 우유를 집었습니다. 그냥 우유, 딸기, 초코, 멜론, 바나나….
종류가 너무 많았습니다.
덥석 흰 우유를 들고 옆에 줄 서 있는 빵코너를 봤습니다.
‘땅콩샌드’가 보여 집으려는 찰나 ‘딸기샌드’가 보였습니다. 이내 또 ‘연유샌드’도 보였습니다.
옛날에는 ‘땅콩샌드’가 전부였는데 말입니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빵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다 맛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이내 큰 결심으로 빵 하나를 골랐습니다. 셋중 하나를 골랐습니다.
흰 우유와 아주 잘 어울리는 빵으로 말입니다.
저는 어떤 빵을 골랐을까요? 땅콩? 딸기?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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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섬기는 자세로, 배우는 자세로 깨어 겸손히 사는 것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변 모두가 스승이요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가르침과 깨우침이 되는 여러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유의하여 사는 이들이 주님의 참사람들이겠습니다.
1.역시 오늘 소개되는 옛 어른이 말씀입니다.
“사람과의 신의(信義)를 지키는 일은 먼 이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할 덕목이다.”-다산
“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고(견리사의;見利思義),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며, 희미해진 약속이라도 잊지 않는다면, 완성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논어
2.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와 더불어 만개하기 시작한 봄꽃들에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순간 떠오른 가르침이 정직입니다. 일년 꼬박 기다렸다가 때되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자연은 참 정직하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수인중 가장 무시받는, 사람 취급 못받는 죄인들이 사기꾼이라 합니다.
정직, 효도, 우애를 조카들에게 가훈(家訓)으로 남기고 떠난 셋째 형님 생각도 납니다. 가훈 그대로 참 정직하게 살아가는 세 형제 조카들입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정직이 가장 오래간다”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역시 ‘신의’와 더불어 마음에 새겨야 할 ‘정직’이란 덕목입니다.
3.낮은 자리 곳곳에 피어나는 제비꽃을 보니 23년전 써놨던 “절망은 없다”란자작 고백시가 떠오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제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고 사랑스럽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 희망의 삶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4.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전임 베네딕도 교황님과 세상 떠나기전 10년간 얼마나 깊은 우정을 나눈 삶인지, 또 얼마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베네딕도 교황님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는 최근 인터뷰 내용도 감동적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옹호했고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베네딕도 그분은 참으로 젊잖은 분이였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제한된 그분의 움직임에서도 유익을 얻었다. 그분은 참 섬세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인했다. 그분은 참으로 겸허했고, 어떤 부담을 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참 많이도 고통을 겪었다.”
두분 교황들에서 위대한 성인의 면모를 봅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한결같은 상호존경과 신뢰, 겸손의 모습들이 우리 마음에 깊은 안정(安靜)과 평화를 줍니다.
5.한밤중 기상하여 휴게실에 가는 도중 게시판에 붙은 부고에 순간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일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의 전설이 된 노트켈 아빠스의 부고 내용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께, 2024년 4월3일 로마에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선종하신 사랑하는 노트커 볼프 아빠스님의 갑작스러운 선종 소식을 매우 슬프게 접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1940년 6월 21일 그뢰넨바흐에서 태어나 1962년 9월17일 서품을 받았습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성 오틸리엔 총아빠스, 2000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를 역임했습니다. 기도중에 노트커 아빠스를 기억해 주세요. 아빠스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전무후무의 약력을 지닌 불가사의의 탁월한 지도자 아빠스였습니다. 저보다 9세 연상이니 우리나이로 85세입니다.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경구가 떠오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Mortem cotidie ante oculos suspectam habere)
누구에게나 언젠가 맞이할 공평한 죽음이요,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참 귀한 선물같은 오늘 하루, 본질적 깊이의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주님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은 유령이 아니라 영과 육을 지닌 참된 분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사도로 중책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활약상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서 펼쳐집니다. 앞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이은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로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중 핵심 부분을 나눴습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회개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회개입니다. 온전히 자나깨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린 회개의 삶이요, 회개와 더불어 선사되는 성령의 은총이, 믿음과 평화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주님의 증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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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증인>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알려주시니
알고
아니
알려줍니다
아는 만큼
알려주고
알려주는 만큼
압니다
알려주심
앎
알려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보여주시니
보고
보니
보여줍니다
보는 만큼
보여주고
보여주는 만큼
봅니다
보여주심
봄
보여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들려주시니
듣고
들으니
들려줍니다
듣는 만큼
들려주고
들려주는 만큼
듣습니다
들려주심
들음
들려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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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41-42)
순교자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구운 생선
그들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그분을 보고 손으로 만졌지만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은총을 받았습니까? 손으로 만지지도 눈으로 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믿으니까요! 그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들은 자기네한테 있는 것, 곧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습니다. 구운 물고기는 불로 입증된 믿음, 곧 순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한 토막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순교자의 온전한 몸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이는 사랑 때문에 고난당하고 어떤 이는 교만 때문에 고난당합니다. 교만 토막을 치우고 사랑 토막을 내어 놓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음식입니다. 그리스도께 그분의 몫을 드리십시오. 그리스도는 사랑 때문에 고난당하는 순교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세 번째 사랑은 신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알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내재를 받아들인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낳는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영원 전부터 외아들을 낳았고, 지금도 낳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낳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린 영혼, 곧 내재하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선한 영혼 안에서 하느님은 아들을 낳는다. 그것은 신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적이고, 낳음을 지향하고, 하느님이 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하느님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고, 우리가 함께 나눌 만한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존재의 원 안에 있는 피조물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 원의 중심점은 창조주다. 신적 사랑과 에너지에 더 온전히 참여하고자 하는 존재는 원둘레의 여러 점처럼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피조물들은 이 원의 중심을 향해 더 깊이 나가도록 초대받는다. 이 원의 중심에서 신적인 사랑이 방출되기 때문이다. 원의 중심으로 나가는 이 여정은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가라앉는 여정이다. 가서, 너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라. 가라앉음의 여정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존재의 원초적 근원에서 끝난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우리가 중앙으로 가라앉는 것은 모든 존재의 원초적 근원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게 비치는 하느님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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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성모님의 날✝️
프란치스코의 주님 성탄과 피조물
하느님의 성인은 부제(副察)였으므로 부제복을 차려입고 거룩한 복음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면서도 부드러웠고, 맑고 낭랑하였으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최고의 선물을 받게 했다. 그는 둘레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그는 가난한 임금님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햄에 관하여 재미나게 말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부르고 싶을 때면 사랑에 불타서 그분을 “베들레헴의 아기”라고 부르곤 하였고,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 양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의 입은 말로써 보다는 차라리 감미로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형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베들레헴 아기”나 “예수”라는 말을 할 때, 그의 혀는 이 말의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고 입술을 핥으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하였다. 전능하신 분의 은총이 그곳에 충만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어떤 한 덕이 있는 사람들은 놀라운 환시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이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형제여, 우리를 위하여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 날을 단식일이라고 하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날은 담벼락까지도 고기를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먹일 수가 없으니, 그 곁에다가 고기를 문지르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 날에 프란치스코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를 바랐고, 소나 당나귀까지도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여물을 주게 하였다. 그가 말하였다. “내가 황제께 말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이야기해서 포고를 이렇게 내리라고 하겠소. 모든 사람이 밀과 곡식을 길에다 뿌려서 새들도 이렇게 성대한 날은 실컷 먹게 하고 특히 나의 자매들인 종달새들이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첼라노가 전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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