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32414 충남 예산군 삽교읍 두리학교길 19 ☎(041)334-4865 기독교대한감리회 삽교교회 원로목사 박 한 응(朴 漢 應)H.P 010-5452-4865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43ch E-Mail : park43kr@hanmail.net ***************************************************************************** 2024.11.17.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추 수 감 사 절】 본 문 : 창세기 4:3-7, 시편 136:1-9 제 목 :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 찬 양 : 40, 75, 306, 310, 434, 453, 460. 복음송 : 날 구원하신 주 감사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가 될 수 있으며 또 온전한 축복이 되는 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헌금을 드릴 때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드리고도 저주를 받으면 안 됩니다.
1. 그러면 먼저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역사에 대하여 상고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볼 때 1620년 영국 성공회의 분리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에 부딪쳐 그들은 1620년 12월에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 매사추세츠 주에 상륙하여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인디언으로부터 배워서 가꾼 옥수수와 호박 등을 심어서 처음 수확하였을 때에 그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제로 지켜왔습니다. 그것이 1884년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그대로 전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추수감사절의 유래요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광야에 머물 때 모세를 명하여 계명들을 주셨는데 그 때에 3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23:14-16)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이와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 절기를 지키지 못하다가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 첫 농사를 지은 때부터 맥추절도 지키고 수장절,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초로 농경을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바로 아담의 직업(가업)은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업은 아담의 장남인 가인이 이어 받아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곡식도 심고 채소도 심고해서 열심히 일하며 농산물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없이 아들 딸 낳고 농사지으면서 살다보니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 의 그 세월이 얼마가 지났느냐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가인과 아벨이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아 상당한 연수가 지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것 중에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 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급기야는 가인은 자기의 성질을 참지 못하여 안색이 변하고 분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가인은 결국 아우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는 의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의 제물을 모두 받으시면 이와 같은 살인 사건도 나지 않았을 것인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의문점은 영원히 미제로서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어떤 해석도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해석과 주석과 학설들이 있습니다. ① 어떤 주석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워 주기 위하여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곳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실 구원사업을 예고해 준 것으로 아벨은 이 뜻을 잘 알아서 양을 잡아 드렸고 가인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가 농사지어 얻은 곡식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② 또 어떤 이는 땅의 농산물은 수고와 땀으로 거둔 “행위”의 제물이요, 양의 새끼와 그 기름은 “믿음”의 제물이니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한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행위” 보다 “믿음”을 택하셨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 다른 의문을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처음부터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농사짓는 자가 농산물로 드리고, 양치는 자가 양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인은 부친 아담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농사짓는 사람이 되었는데 아벨은 왜 양치는 자가 되었을 까요? 창3:9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양을 치는 것은 먹기 위해서 기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 대답은 아담과 해와가 입은 가죽옷 밖에 없습니다. 즉 가인은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담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입을 것을 위하여 양을 기르고 그 가죽을 벗기고 그것으로 곡식을 바꾸어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 새끼 밖에는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 새끼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가지 결론에 닿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이유가 그 제물이 양이냐 곡식이냐에 있지 않고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누가 드리느냐? 어떤 사람이 드리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실 때 그 제물의 종류를 보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드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사법을 가르치시면서 어떤 이는 송아지로, 어떤 이는 양 새끼로, 또 어떤 이는 비둘기로, 또 어떤 이는 밀가루나 전병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다만 그 제사를 드리는 제주의 마음 자세가 어떠한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이 농작물이기 때문에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양이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물은 바치는 사람의 태도, 마음씨, 더 나아가서는 그의 인격, 그의 성품, 그의 인간성, 그의 믿음과 신앙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의가 따르지 않는 제사나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곡식보다 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릴 때에 그의 정성과, 그의 인격, 신앙,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가인과의 대화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는데 아벨과의 대화는 없습니다.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해하지 못하도록 표를 주어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를테면 면죄부를 주신 것이요 그의 허물을 용서하셨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가인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의식적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먼저 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가인에게는 제물을 드리긴 드려도 이와 같은 진실 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것을 알자 그의 낯빛이 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심히 분하여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가인을 달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쩜이냐?” “네가 안색이 변함은 어쩐 일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지금 네 마음속에 죄의 소원이 있으니 그것을 다스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가인의 마음속에는 죄의 소원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동생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의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를 다스려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마음속에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마음속의 악한 생각, 잘못된 생각, 미움,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제거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종합하여 볼 때 가인의 성품은 다혈 적이고, 자신을 깨달을 줄 모르며, 불평하기를 쉽게 하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자체보다는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그 자세가 어떠한가를 보십니다. (시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 즉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성경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제물과 감사를 드리고도 축복은커녕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삼상13:10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행5:1절 이하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다가 거액의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인 죄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미6:7-8)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시40:6-8)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그런가 하면 막12:42절과 눅21:2절 의 말씀을 보면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는데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면서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이 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막12:42-44)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려야 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또 흠이 없고 정결한 것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4.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는 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누가 드렸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제물을 어떻게 드렸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중심으로 어떤 태도로서 드렸느냐가 그 제물의 종류나 다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느냐 안하시느냐 를 좌우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밭까지 팔아서 거액의 헌금을 드렸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고도 예수님께 “화 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하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르밧에 사는 한 가난한 과부는 물 한 그릇, 떡 한 개를 엘리야에게 대접하고도 3년 반 동안의 기근이 다 지나도록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으며, 마가복음 12:41-44절의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하고도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세와 교만과 위선과 명예욕에 이끌리어 보아란 듯이 헌금을 하는데 가난하게 홀로 사는 이 여인은 적은 액수인 동전 두 푼을 남이 볼세라 조심스럽게 헌금을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막12:43-4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헌금의 액수를 조금한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그 헌금 속에 스며있는 그의 정성, 그의 믿음, 그의 신앙, 그의 감사를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여 적은 헌금도 정성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능히 많이 드릴 수 있는 재력이 있음에도 적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요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세입니다. 거기에는 진실과 정성과 감사가 겸비된 전인적이고 전 생명 적인 봉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기에 그의 제물이 열납 된 것입니다. (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말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가인의 행위는 정성이 없고, 기쁨과 감사가 없고, 믿음이 없는 제물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감사가 있을 수 없고, 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혹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적으면 감사가 적고 믿음이 크면 감사도 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항상 믿음의 산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1) 신자에게는 두 가지형의 신자가 있습니다.
곧 가인형의 신자가 있고 아벨 형의 신자가 있습니다. 에서 형의 신자가 있고 야곱 형의 신자가 있습니다. 베드로형의 신자가 있고 가롯유다형의 신자가 있습니다.
(2) 따라서 예배에도 두 종류의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가 있고 열납 안 하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있고 기뻐하지 않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가 있고 응답 안 하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의 모델입니다. 아벨은 신앙의 사람이요, 성실한 신자요, 감사하는 사람이요, 복음 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불신앙의 사람이요,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적인 사람이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어떤 제단을 쌓고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시급한 문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드려야 하며 혹시 나의 제물이, 나의 기도가, 열납 되지 않았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가인은 ①자기의 인간성이 변화 받지 못하였으며 ②하나님께 제물을 드려도 감사와 믿음과 신앙이 없는 형식적인 제물을 드렸고 ③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④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살해하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2024년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아벨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는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나 자신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받고 또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되신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알리는 말씀을 전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한 저의 설교를 사랑해 주시는 전국, 세계의 모든 동역자님들과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려고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나의 카페를 비롯하여 몇몇 기독교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설교는 실명제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설교는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인용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자신의 사이트나 다른 곳에 자신의 설교인양 전제를 하여서 이것을 보신 분들이 내가 그것을 보고 도용을 하였다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 나의 부족한 설교를 인용도 하시고 전문 사용을 하셔도 좋으나 다른 곳에 전제를 하는 것은 삼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만약 앞으로 이와 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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