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5년의 런던을 토모그라프로 보자.
(토모그라프—Tomography(단층). CT scan=Computed tomography 촬영)
1. 루이 14세(1638(1643) - 1715)의 죽음이 알려지자 환호했다.
루이 14세 통치 46년 간 끊임없이 전쟁을 했고, 성장하려는 영국과
부딛혔다.
합스부르그 家의 제국을 부수려는 이유도 있었고
---> 이후로 주권을 가진 국가가 나타나서 유럽이 오늘의 기본 구조로
편성되었다.
2. 극장은 오페라의 인기가 높았고, 무도회 형식이 나타났다.
(수수의 귀족이 저거끼리 즐기는데서, 단체로 즐기는 형식으로)
3. 루이 14세 죽음 --> 에티켓이 무너지고 --> 도덕이 해이해졌다.
(루이 14세가 왕의 권위를 세우는 방법으로 에티켓을 강조 강조했다.)
일상에서 쌍욕이 나타나고, 조직 범죄(깡패같은)가 나타났다.
절도범인 네트로슈(조직 범죄의 두목이기도 함)가 영웅대접을 받다.- 경찰을 농락함으로
4. 인생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풍조가 나타나다.
(이때 유행한 언어인 ‘비가텍’이란 말의 뜻은 가벼운, 보잘 것 없는, 하룻밤 풋사랑, 의미 없는, 등이다. 인생이 가볍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했다.)
2023.8.21.
5. 영국은 왕권주의자인 제임스 2세의 후임으로 네델란드에서
제임스 3세(사위로)를 모신다.
영국에 뿌리가 없는 제임스 3세는(메리 공주의 신랑)는 영국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함으로 명예혁명이 된다. 제임스 3세가 죽자, 메어리의 동생인 안이 왕위에 오른다. 안이 죽자 왕의 계보가 끊어지고, 독일 하노버 가에서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국 왕실을 하노버 가가 이어온다.
6. 언론은 정부를 공격하는 일이 부패와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했다.
(디포와 스위프트는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인 출신이다.)
7. 의회는 선거로 구성했고, 토리당(왕당파-보수당)와 휘그당(부르주아지 파 – 진보파 – 자유당)이 경쟁했다.
다수당이 되기 위해서 여론이 중요했다.
두 당이 옥신각신할 때 어떤 사건이 터지면 여론을 한 곳으로 모우는 역할 을 했다.
(정부가 사건을 조작하였다. 전쟁, 반란 등)
-->신문이 여론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 더 발전하여 마을의 작은 일에도 여론 형성(가짜 뉴스)을 조작했다.
(여론 조작은 마을에서 마음에 안 드는 목사를 쫓아내는 일이라든지 ---, 헛소문을 퍼트리고---. )
8. 요새 건설의 필요성 — 과학을 이용한 축조술 발달 —일반 건축에로 확산
(성 밑을 파고, 폭탄을 터뜨려 파괴하는 폭파술도 등장한다.)
9. 모든 학문에서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다.
10. 식민지 확장—영국은 위치상으로 바다 밖으로 눈을 돌렸고
쿡 선장 등의 활약이 나타난다.
11. 미주 대륙은 투자에 비해 이득이 적었다.
(유럽 강국이 손을 놓을 때)
미국이 카리브 해와, 태평양 지역을 차지했다.(하와이, 필립핀 등)
12. 문학(시) -- 발전의 여지가 적었다.
13. 회화 --- 마땅히 배울 곳이 없어서 독학파가 나타났다.
이때 프랑스는 이태리 유학이 대유행이었다.
14. 이 시기의 러시아는 표토르 대제 치하로,
북쪽은 스웨덴과 싸워 페테르부르그를 건설하여 발틱해로 진출
남쪽은 터키와 싸워 ***스탄 이라는 이슬람 지역으로 진출한다.
유럽 문화를 받아들여 빠르게 유럽화 한다.
15. 디포와 스위프트는 언론인 출신으로
서로 다른 정당을 위해서 일한다.
16, 극장에서 오페라의 인기가 높았고,
바흐, 헨델 등 바로크 음악이 유행했다.
*** 이 시기의 영국 왕위 요약
엘리자베스 1세가 죽다,--- 1603
*제임스1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 1603 – 1625
카톨릭으로 복귀하려고 했다.
*찰스 1세(1625 –1649) - 제임스 1세의 아들
카톨릭 복귀, 왕권신수설 주장으로 신교도가 장악한 의회와 마찰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과 한판 붙었으나 깨지고
나중에 참수형 당한다.
**크롬웰(1599-1658)
아주 성실한 신교도 종교인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종교인으로 생각하고, 국민은 강경한 청교도 종교인으로 살아아 한다고 주장
의회에도 여러 세력이 있어서 서로 대립했으나 민병대(강경세력)로
의회를 장악했디.
귀족 세력(왕권파)과 대립했다.(의회라고 모두 그의 편이 아니다.)
찰스 1세는 의회의 일부, 귀족을 등에 업고 반기 — 왕을 처형해버렸다.
크롬웰이 주장하는 삶이(바르게 살자) 오히려 삶은 제한하는 부자유라는 것을 느꼈다.
귀족의 자만, 대중의 어리석음 사이에서 오늘의 대통령과 같은 위치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권력은
아주 막강했다.
그런 와중에 병들어 죽었다.
-->그는 정치적 꿈을 이루려 한 것이 아니고, 종교적 이상 세계를 펼치려 했다. 술 도박, 노래, 춤, 기타 오락을 폐지하고 —좋은 세계이긴 하나 실천할 수 없는 이상이었고, 오히려 재미없는 삶이 되었다. --인기가 시들해져 갔다.
아일랜드의 카톨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주 잔인하게 다루었다.
**찰스 2세(1660 – 1685) - 찰스 1세의 장남
프랑스로 도망가 있다가 크롬웰이 죽고 왕위 복위
크롬웰 시신을 꺼내 목을 자르고 보복
카톨릭의 신자(은밀히)였고,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알려져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의회와 마찰들 일으키면서 별 볼 일 없이 살다가 죽다 . 14명의 자녀가 있으나 정통 왕손은 없었다.
(모두 사생아)
**제임스2세(1685 – 1689) - 찰스 1세의 차남
명예혁명으로 쫓겨나다.
**매리 2세(1689-1694) - 제임스 2세의 장녀로 남편 윌리엄 3세와 공동 통치
**윌리엄 3세(1689 – 1702) -- 메리의 신랑
네델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통치기반이 약한 그는 명예혁명을 수용한다.
**앤(1702-1714) -- 제임스 2세의 차녀
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한다. 통합 왕이 된다.
앤이 죽자 스튜어트 가의 왕통이 끊어진다.
독일 하노버 가에서 왕을 빌려온다.(모셔온다)
조지 1세 (1714 – 1727)
조지 2세 (1727 – 1760)
조지 3세 (1760 – 1820)
지금의 찰스 3세까지 하노버 왕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