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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시인)
최승호(崔承鎬)
출생 1954년 9월 1일
강원도 춘천시
학력
춘천사범부속국민학교
춘천중학교
춘천고등학교
춘천교육대학교
소속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초등교사로 재직하다 1977년 등단했다. 그의 이름을 알린「대설주의보」는 ‘현대시 100주년, 시인들이 뽑은 애송시 100편’ 가운데 하나로 실렸다.
2. 내용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 3학년 때 담임교사가 춘천고등학교 선배인 소설가 전상국이었다. 춘천교육대학교 재학 시절 교수였던 이승훈(시인) 역시 춘천고등학교 선배였다.
춘천교대 재학 중 친해진 소설가 이외수가 그의 시를 보고는 감탄했고, 〈비발디〉로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이 때 그의 시를 심사하며 추천했던 이는 "피아노"로 유명한 전봉건 시인이었다.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후 7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시를 간간히 쓰다가, 1982년《대설주의보》로 민음사에서 주관하는 제6회 '오늘의 작가상' 을 수상해 세간에 알려지면서 본격 시인으로 전업했다.
그 뒤 알린 인지도를 바탕으로 꾸준히 시를 써, 1986년 제5회 「김수영문학상」,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2000년 제8회 「대산문학상」, 2001년 제47회 「현대문학상」, 2003년 제3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시 창작 강의를 맡고 있다.
1997년에 고등학교 선배인 최열을 도와 환경운동연합 월간지인 《함께 사는 길》을 맡아 환경운동 또한 하고 있다.
2009년 화제가 된 "시인도 본인 시 문제 다 틀렸다"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교과서나 참고서 등에 수록이 많이 됐고, 그 중 '북어', ‘대설주의보’, ‘아마존 수족관’ 등이 모의평가에 나왔는데, 최승호 시인이 이들 평가에서 자신이 지은 시의 출제 문제를 모두 틀리며 대입 위주 교육의 폐해 중 하나로 여겨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1]
3. 주요 시
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둣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꿇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북어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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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아마존 수족관 /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악마의 배설물 / 최승호
몇 해 전 볼리비아 원주민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입니다.”
12세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돈은 악마의 배설물입니다.”
로마의 바실리우스 주교님도
이미 4세기에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입니다.”
내 안에도 넘치는 악마의 배설물 속에서
똥이나 먹자 똥이나 먹자
뚱뚱한 황금구더기들이 더 뚱뚱해지자고 버둥댑니다.
자동판매기 / 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 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출처 ;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1985년. 문학과 지성사.
공터 / 최승호(1954~ )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 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네모를 향하여 / 최승호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 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 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가엾게 생각해 줘요 / 최승호
달밤의 마당에서 아버지의 큰 발에
마구 짓밟히는 아이는
얼굴이 일그러져 입 벌린 채 말도 못하고
그래도 한잠 푹 자고 좀 나았는지
아침이면 참새떼 재잘거리는 미류나무길로
책가방을 메고 덜컹대며 학교로 온다
즐거운 作文時間
타고난 불행을 노래해야 할
의무도 재주도 없는 아이는
오직 불행의 힘으로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아버지는 새파란 도끼, 달, 홍수, 수박, 쥐
성질은 온순하나 복수심이 강한 노새처럼
찐한 글씨로 쓰고 있었다
—시집『진흙소를 타고』1987
거울 / 최승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鑄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최승호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2003년)
물 위에 물 아래 / 최승호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수부(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소리 없이 점점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와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도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통, 비닐조각 따위를
먹고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갈수록 시체처럼 몸집이 불어나는 무덤을
본다 폐수의 독에 중독된 채
창자가 곪아가는 우울한 쇠우렁이를
물가에 발상했던 문명이
처리되지 않은 뒷구멍의 온갖 배설물과 함께
곪아가는 증거를
호수를 둘러싼 호텔과 산들의 경관에
취하면서 유원지를 향해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오징어 3 / 최승호(1954~ )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 / 최승호
함박눈 펄펄 내리는 날 정육점 앞에
비닐옷 입은 지구인이 나타난다
냉동차 뒷문이 활짝 열리고 거기 도살된
대가리 없는 살덩어리들이
내장을 긁어낸 길짐승들이
지구인의 어깨에 척 걸려서 정육점 안으로 들어간다
함박눈에 핏방울은 뿌려지고
나도 먹고 사는 사람인지라
이제는 저 살코기들을 지구인을 위한 싱싱한 음식으로
백정을 제사장으로
함박눈을 상서로운 꽃으로
받아들여 보기로 한다
끔찍한 슬픔 뒤에
풍성한 기쁨이 늘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진눈깨비도 있고
우박도 있고
함박웃음 웃는 날도 있을 거라고
그 변덕스러운 길을
하늘을 탓하지 않으리라 중얼대면서
두 번 죽지 않는 그 날까지
걸어가 보기로 한다
고슴도치의 마을 / 최승호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를 읽으리라
-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한 토막 뼈 / 최승호
이 뼈는 한때
뿔 달린 짐승이었다
털가죽을 뒤집어쓴 채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네 발로 걸어다녔을 것이다
이 뼈는 한때 피 따뜻한 짐승이었다
제 눈에 멋져 보이는 이성과
짝짓기를 해보려고 무척 애썼을 것이며
제 모습을 빼닮은 어린것들에게 젖을 먹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한 토막 뼈다
말의 등뼈인지 낙타 목뼈인지
아니면 양의 다리뼈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뿔 없는 늑대의 턱뼈인지도 모른다
한때 한몸을 이루었던 뼈들과 멀어진 뼈
쓸개와 간과 심장과 멀어진 뼈
해와 달과 이별한 뼈
울음과 배고픔에서 떨어진 뼈
가족과 헤어진 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결별한 뼈
제 얼굴을 모르는 뼈
이 뼈는 한때 보이지 않는 뼈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인다
털가죽과 살덩이, 눈알과 내장과 숨결
그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흩어진 것이다
발효 / 최승호
부패해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 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먼지흡입열차 / 최승호
지하철 운행이 모두 끝난 한밤중
캄캄한 지하에서 캄캄한 지하로
먼지 흡입열차가 웅웅거리며 돌아다닌다
아무도 없는 철길에
널려있는 쇳가루와 먼지와 케케묵은 침묵
그것들을 힘차게 빨아들이며
고독한 기관사가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사막으로
텅 빈 해골이 되어 굴러다니고
누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침묵에 둘러싸여
글을 쓰는 밤
벽돌 같은 언어들도 결국엔
흩날리는 먼지일까
침묵으로 돌아가는 침묵의 눈보라일까
백지에 고요가 내려앉는 밤
나도 먼지 덩어리다 나도 고독한 기관사다
아가리를 벌리고 먼지를 퍼먹으며 공허 속으로 달려간다
—《세계의 문학》 2009년 겨울호
검은 잉크병 / 최승호
은하계 한구석 다 망가진 별에서
글을 쓰는 개미,
그것이 나다
머리는 큼직한데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글개미
밤마다 검은 잉크들이 나를 기다린다
검은 침묵 속의 언어들이
글개미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불립문자 앞의 바보,
침묵의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글개미의 팔자는 이렇게
백지 안에서 더듬거리고 맴돌며 뻘뻘거리다
눈알이 딱딱해지는 새벽을 맞이하는 것일까
발을 하나 들어 머리를 긁적이는데
이것 봐라
책상 아래로
쿵!
개미 머리통이 떨어진다
천둥소리 / 최승호
뭉게구름 속의 저 고요는
137억 년 전
아니, 그 이전에도 있었던 고요
뭉게구름 속의 저 고요는
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고요,
절대로 죽지 않는 고요,
그 고요의 만발처럼
떠 있는
뭉게구름 속에서
오늘은 천둥소리도
연꽃 속의 수줍은 심청이처럼
잠자고 있네
취한 밤 / 최승호
데킬라 몬테알반 술병 속에는
선인장(仙人掌) 애벌레가 들어 있다
날마다 술에 절어
바닥에 누워 있는 벌레,
술꾼들은 그 미해탈의 나비를 씹어먹곤 한다
늦은 밤의 바에는 늘 취한 사내들이 있다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자
혀가 꼬여 돌돌 말릴 때까지
마음껏 헛소리를 지르자
술꾼들이란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하는 낙타들이다
사막의 심장에 독한 술을 들이붓는 낙타
잔뜩 취해 뇌를 뭉개버리고 싶은 낙타
나도 늘 취해서 사는 것 같다
나비의 꿈속에서 살았던 장자처럼
백일몽 속에서 늙어가는 허깨비처럼
언젠가는 나도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내 안의 끈질긴 괴물
허무와 싸우면서 말이다
어느새 날이 밝았는지
어찌된 영문인지 바에는 나밖에 없다
빈 술병들, 빈 의자들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쓰레기 안주들,
빈 술통을 짊어진 낙타처럼
나를 쓰레기투성이 오아시스에 내버려둔 채
모두들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일까
그로테스크 / 최승호
사나운 빗줄기가 유리에 흘러내리고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일 때,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놓을 때,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불현듯 그 기이한 문어를 떠올렸다. 발 하나를 떼어내듯 자신의 음경을 어둠 속으로 출발시키는 문어를.
달의 뒷면으로 하강하는 달착륙선처럼, 그것은 목표물을 향해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태고의 흑암이 깔려 있는 바다에서 그 괴상한 음경은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을까. 눈 먼 채 개흙에 우글거리는 먹장어들이나 입 큰 아귀, 왕코브라처럼 성질 사나운 곰치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눈앞에 벼락불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고 사방이 점점 더 캄캄해진다.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
여울이 歌王 / 최승호
왜가리는
반가사유상도 아니면서
고개를 숙이고 물가에 서 있었다
천 개의 손가락들이 쉬지 않고
줄 없는 거문고를 뜯듯이
여울 물소리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물의 관객이었다
뜨거운 청중이었다
눈은 눈부신 여울을 보고 있었고
귀는 여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여울가에는 큼직한 음표 같은 돌들이 많다
조약돌들, 자갈들
하늘 밖에서 굴러온 무슨 은하계의 돌 조각이든
늘 귀머거리 늙은이인 돌들에게
들을 테면 들으라고 나는 말한다
여울이 가왕이다 그침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온몸을 게우듯 왝왝거리는
왜가리가 가왕이랴
— 시집『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2005)
연어 / 최승호
눈이 부시다
맑은 날 섬진강은 게으르게 흘러간다
아무 일 없이 게으르게
개들이 옆으로 걷든 게들이 뒤로 걷든
무심하게
그냥 흘러가기 위해 흘러간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회귀 연어 개체수 조사>
여울목에서는 누군가 그물을 치고
연어를 잡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연어
북회귀선을 넘고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마침내 지느러미 빛나는 우주왕복선처럼 귀환하는
연어들을 누가 박수와 환호로 맞이할까
잡힌 연어들은 지금 섬진강변 두 개의 수족관에 격리된 채 구경거리다
암컷의 수족관, 암컷의 감옥
수컷의 수족관, 수컷의 감옥
기어코 살아서 돌아온 늙은 영웅다운 풍모로
씩씩한 수컷이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크게 벌린다
암컷도 아가미를 벌름대며 입을 크게 벌린다
조용하다
어디에도 울부짖음은 없다
이제는 붉게 늙어버린 단풍잎도 울부짖지 않는 가을
내 어린 날 강가의 물또래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고향은 춘천
시퍼런 북한강 상류에 있다
어린 날의 물비린내가 그립다
그 물비린내 속에서 죽고 싶다
—《현대시》2012년 3월호
봄밤 / 최승호(1954∼)
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
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
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
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
할 일 없는 봄밤에
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
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핼쓱한 병자가
육신이 나른한 꽃향기에 취해
아픔도 없이 조용히 죽어가나 보다.
아름다운 용모의 귀신들이
우두커니 꽃나무 그늘에 서서
저승에도 못 가는 찬기운의 한숨을 쉬고
인간축에도 못 끼는 서러운 낯짝으로
누가 좀 따뜻이 나를 대해줬으면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봄밤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
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저승열차는 내 두개골 속을 지난다.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 / 최승호
아프리카 코뿔소도 인도 코뿔소도
코뿔이 뽑히면서 너무 많이 죽었다
내가 코뿔소 대변인은 아니지만
뿔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코뿔소를 너무 많이 죽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달려도 허공이고 뒤로 달려도 허공이고 위를 봐도 허공이고 아래를 봐도 허공인 큰 허공에서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는 어디로 달려야 할까 무한이 뭔지 무변이 뭔지 무극이 뭔지 일자무식인 코뿔소는 달리고 달려도 밟는 자리마다 허공이어서 잠시도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슬픔의 무게가 4톤쯤 되는 코뿔소를 데리고 허공 밖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무소뿔도장으로 판결문에 시뻘건 도장을 찍던 분이 누구였던가
황혼의 피 마른 서류들이여
무소뿔부채로 얼굴을 가린 신선들이여
코뿔이 없어도 코뿔소는 허공을 들이받으며 달릴 것이다
들이받다 보면 큰 허공이 우르르르 다 무너지지 않으랴!
러닝머신 위의 남자 / 최승호
헬스장에 나타난 그 남자는 악어처럼 엎드려
이를 악물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악어는 팔굽혀펴기를 하지 않는다.
이를 악물지도 않는다.
달려가서 그냥 이빨로 콱 물어뜯지!
그 남자는 그 여자와 헤어진 뒤로
어느 날 핼쑥해진 얼굴로 헬스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벌써 삼십분이나 달리고 있다.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인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그는 왜 뛰는 걸까. 물렁한 의지력을 강철로 만들기 위해, 복근에 王 자를 만들기 위해, 아니면 세계마라톤대회에 나가기 위해,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는 제자리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실연의 우후죽순들이 자라서
슬픔의 왕대나무숲을 이루고
그것이 가슴 한 구석에서 서걱거릴 때
바람이 불고 어느덧 옛 애인이
인자한 할머니가 되어 나타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러닝머신 위의 남자가 이번에는
요가를 하느라
외발로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다
—《현대시학》2013년 5월호
소행성 / 최승호
어제 소행성 하나가 지구를 살짝 비켜갔다. 지구와 달 사이보다 가까운 거리까지 근접했다가 충돌하지 않고 지나간 것이다. 태양을 2.72년 주기로 돌고 있는 소행성 2012XE54는 지구로 다시 접근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사(NASA)의 제트추진연구소 과학자들은 최근 지구에 접근했던 소행성 99942 아포피스가 2036년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결론내렸다.
백악기 대멸종.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들이 다 죽은 것은 소행성 칙술룹이 지구와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없는 내가 허공으로 존재했던 6500만년 전 이야기.
어느 날 나 없는 나의 고독은
동쪽 은하
외뿔소자리에서 고개를 쳐들 것이다
허공 한 조각 / 최승호
허공 한 조각이 팔랑거리며
들꽃에 내려앉는다
모시나비다
내 마음은 언제
비늘과 무늬들을 털어버리고
얇은 누더기 한 조각 될까
들꽃에서 들꽃으로 날아다니던 나비들은 어느 날 얇은 누더기 한 조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꿀에 취해 나른하게 들꽃에 잠들었던 시간들, 허물을 벗고 나오던 날의 화사한 햇살, 그리고 가느다란 다리에 감기던 부드러운 바람결, 그 모든 것이 나비에게는 ‘지금 여기’의 기쁨이었나. 신선나비들도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가을, 허공 한 조각이 팔랑거리며 허공으로 날아간다.
운석 / 최승호
어뢰를 맞고 침몰한 핵잠수함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흑해함대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죽어갔을까
광막한 허공에서 날아오던 외계의 돌덩어리가 바다와 충돌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마침내 가라앉은 해저에 운석들의 묘지가 있다. 허공에서 오래 방황하다 바다 밑에 비로소 잠든 돌들, 오래된 고요, 태고의 어둠,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운석들의 묘지를 구부정하게 지키는 것은 늙은 해마 한 마리, 그런 상상을 하며 글을 끄적거리다 창밖을 내다보는 지금은 새벽 어스름
해저에 잠든 운석들은
제 고향이 어딘지 알기나 할까
—시집『허공을 달리는 코뿔소』(2013)에서
탈 / 최승호
허공의 옷을 찢어 버린다
유방도 없고 엉덩이도 없다
음부도 없고 털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허공 살해!
그래도 아직
허공의 해골이 남아
이쁜 탈을 뒤집어쓰고 수줍은 듯 웃으면서
성형외과 문을 열고 걸어 나온다
—《세계의 문학》2014년 봄호
흉터 / 최승호
개에 물린 이빨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흉터 속에는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개가 있고
왕 같은 아버지의 얼굴이 있다.
스스로 아물릴 수밖에 없는 상처들,
가시덤불의 길을
피에 젖어 절뚝이며 걸어온
곰 같은 역사도 그렇지만
저마다 끙끙대며 아물릴 수밖에 없는
상처들이 검은 흉터가 된다.
어린 나무를
스쳐간 도끼 자국은
나무가 자라 푸르름을 완성하는 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공포를 깨끗이 잊은 것 같으면서
꿈속에 목 졸리는 어머니들,
꿈속에 목 졸리는 어린아이들,
그들에게 속 깊은 흉터가 있다.
짓눌리는 밤과 버둥거려야 하는 대낮의
이중의 악몽이 있다.
―시집 『대설주의보』(1983)
머리 잘린 개구리 / 최승호
미치고 팔짝 뛰겠네
머리 잘린 개구리가 은하수를 건너서 뛰어간다네
공겁 밖으로 힘차게 뛰어간다네
개굴 개굴
개굴 개굴
울음주머니 속 은하수를 게우면서
개굴 개굴
개굴 개굴
⸻《시인동네》 2017년 12월호
국가가 유령을 책임져야 한다 / 최승호
국가는 유령을 책임지지 않는다
한생을 고문하며
철밥통의 밥을 먹은 고문 기술자
누구를 고문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한다
스스로 치매라나
이제 치매는 국가책임제가 되었다
국가가 치매를 책임진다
국가가 고문도 책임진다
영안실의 하얀 유령이
잠들지 못하는 백야
국가가 유령을 책임져야 한다
방부제가 썩는 나라 / 최승호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큰빗이끼벌레는 그놈의 아바타다
냄새나는 그 물컹물컹한 덩어리를
나는 청평호에서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덩어리들이 불어나면서
대청호가 거대한 시궁창으로 변하는 것을
악취 속에서 지켜봤다고 한다
이 괴물체는
(누구라고 밝히지 않겠으나)
부패한 누군가가 우리에게 안겨준 것이다
중음의 냄새나는 중음신들처럼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고 있는 괴물
도처에서 점점 불어나는 이 물컹한 괴물들과
둥둥 떠다니는 괴물들의 사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부패한 그놈은 오늘도 흐물흐물 웃고 있다
⸻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 (2018. 7)에서
별들을 풀어줄 때 / 최승호
이제는 그물자리 별들을
그물에서 풀어주자
물병자리 별들도
물병에서 꺼내줄 때가 되었다
테이블자리 별들이
테이블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컵자리 별들을
컵에서 쏟을 때가 되었다
이제는 천칭자리 별들도
천칭에서 내려놓자
거문고자리 별들도
줄을 떠날 때가 되었다
밤의 수족관 바닥에서
넙치는 아직도 두 눈을 뜨고 있다
단 두 개의 별로 된 별자리처럼
내 눈에 지느러미를 다오 / 최승호
나는 바라는 것 없이 바라보려고 애쓴다
어부들이 긴 칼로
상어 지느러미를 도려낼 때
상어들이 폐기물처럼 바다에 던져질 때
나는 바라는 것 없이 바라보려고 애쓴다
벌목으로 토막 난 통나무들처럼
상어들이 지느러미 없는 지느러미를 꿈틀거릴 때
아무것도 물어뜯지 못하고
바다를 물어뜯을 때
나는 바라는 것 없이 바라보려고 애쓴다
바라는 것이 바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라본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무력하게
무력하기 짝이 없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지느러미 없는 상어들을
지느러미 없는 눈으로 바라본다
슬픈 진화 / 최승호
상아 없이 태어나
어린 코끼리는
아무 쓸모없는 가죽나무처럼
걸어가야 한다
커다란 귀 너펄거리는 할머니 코끼리를 따라
밀렵꾼이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아프리카
긴 가뭄 속으로
아무 쓸모없는 가죽나무처럼
걸어가야 한다
상아 없이 태어나
⸻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 (2018. 7)에서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 최승호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를
무슨 무슨 주의의 엿장수들이 가위질한 지도 오래 되었다.
이제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엔
가지도 없고 잎도 없다.
있는 것은 흠집투성이 몸통뿐
허공은 나의 나라, 거기서는 더 해 입을 것도 의무도 없으니
죽었다 생각하고 사라진 신목(神木)의 향기 맡으며 밤을 보내고
깨어나면 다시 국도변에 서 있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귀 있는 바람은 들었으리라.
원치 않는 깃발과 플래카드들이
내 앙상한 몸통에 매달려 나부끼는 소리,
그 뒤에 내 영혼이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리를.
봄기운에
대장간의 낫이 시퍼런 생기를 띠고
톱니들이 갈수록 뾰족하게 빛이 나니
살벌한 몸통으로 서서 반역하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여
잎사귀 달린 시를, 과일을 나눠 주는 시를
언젠가 나는 쓸 수도 있으리라 초록과 금빛의 향기를 뿌리는 시를.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어
지저귀지 않아도.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1985
물소가죽가방 / 최승호
문명엔 너의 죽음이 필요하다
네 뼈가
공업용 쇠뼈로 부서지고
네 육신이 포장육으로 나눠질 때
가죽공장 노동자들은 네 가죽에
무두질과 염색을 시작한다
가죽들의 무덤, 쇼윈도에 나타나는
물소
문명엔 너의 식욕이 필요하다
숫자와 서류뭉치와
도장을 먹고
불룩해지는 가죽가방
이제 네 뱃속에 풀물 든 내장은 없다
관청과 회사들 사이에서
음험한 뱃가죽을 내밀고 숨쉬면서
너는 이제 도살의 음모에 가담한다
너의 숫자는
가방을 든 傭兵,
가방을 든 회사원만큼 불어난다
쇠뿔 달린 힘센 문명이여,
가방으로 물소들을 때려죽여라
공장지대 / 최승호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 종일 뽑아댄다.
복면의 서울 / 최승호
하루에도 너댓번씩 전화가 온다
그는 늘 말이 없다
나의 목소리를 듣기만 한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자신을 숨은 신이라 생각하는 정신병자?
밤중에도 새벽에도 전화가 온다
그녀인지도 모르겠다
내 애를 낳았다고 주장하던
결혼 전 그 거머리여자는 아닌지
집으로도 사무실로도 전화가 온다
저쪽은 늘 말이 없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듣기만 한다
혹시 나를 뒷조사해 컴퓨터로 읽고 있는
전지전능한 형사는 아닌지
나는 불안에 끄달리기 시작한다
저쪽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전화기들이 복면을 쓰고 일어나
나를 둘러싸고 킬킬대는 밤
전화선을 뽑아버린다
불통의 밤
벽이 나를 막아주는 밤
雜鬼들은 無心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나를 달래며
사악해지는 밤 속에서
한결같은 달빛을 쳐다본다
자동차에 치인 눈사람 / 최승호
자동차는 말썽이다. 왜 하필 눈사람을 치고 달아나는가. 아이는 운다. 눈사람은 죽은 게 아니고 몸이 쪼개졌을 뿐인데, 교통사고를 낸 뺑소니 차를 원망하는 것이리라. "눈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꼬마야, 눈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저씨, 눈사람은 죽었어요.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이렇게 죽었잖아요."
『얼음의 자서전』, 세계사, 2005.
변기 / 최승호
1.
늦은 밤 불을 켜니
둥근 벽 변기에 빠져 있는
귀뚜라미,
몸뚱이보다 촉수가 긴 게
별깨나 헛더듬은 시인 같다.
거품의 밤을 울던 창녀 같다.
2.
변기의 물 전체가 떨고
떨림의 진원점에
그가 있다.
파도에 까만 눈이
어리둥절 흔들린다.
내가 일으킨 파도에 내가 휩쓸려 익사하는 수도 있겠구나
3,
둥근 벽 안에서 귀뚜라미가 헤엄친다
저쪽이 피안이겠지
출렁이며 헤엄쳐 가 닿는 순간
둥근 벽이 그를
밀어낸다
어쩔 것인가
가는 곳마다 둥근 벽이요
가지 않으면 천천히 몸이 가라앉을 때
4.
굴원이여
아무리 욕돼도 죽지 못하는 자들을 왜 괴롭히는가
강물 속에서 거울을 들고
일어서는 큰 물귀신
살아서는 세상에 거슬리고
죽어서는 물살에 거슬렸던
기개 있는 굴원이여
나는 멋있는 놈이 아니다
세상이 본래 청탁한데
나만 탁하다고 생각하니까
5.
둥근 벽 밑바닥의
구멍은
언제라도 삼킬 준비를 끝내고
때를 기다린다
누구든 죽음의 반대편으로 노 젓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구멍으로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왜 이리 오랜 날들을
겁먹은 채
맴돌다가 들어가야 하는지
6.
변기의 뚜껑을 덮으면
귀뚜라미의 절망은 완성된다.
둥근 벽을 덮치는 둥근 뚜껑,
나는 귀뚜라미를 건지지 않았다. ‘
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
아가리를 꽉 맞추고
한 덩어리
동글네모난 감옥을 이룬
뭐랄까,
임신에서 매장까지의 길들이
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
거대한 변기의 감옥 속에서 죽어가는
나를 건져줄 그 어떤 손도 나는 거부했기에.
얼음의 자서전 P. 8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