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0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 아들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며 또한 영화와 존귀로 관를 씌우셨습니다(시 8:5).
이는 곧 아들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가 쓸 영화와 존귀의 관임을 믿습니다.
지금은 가장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그 나라 아버지의 품에서 누릴 영광이요 우리의 소망이오니 잠시 잠깐 후면 들어갈 그 나라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하소서.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얽매이지 않고 가장 자유한 모습으로 주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거운 것 곧 거리끼는 것이나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게 하소서.
이러한 믿음의 경주 역시 나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로 인함인 줄 압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그 분은 당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 등 온갖 수치와 멸시를 개의치 않으시다가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1-2).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힘과 능력으로 행하려던 자였습니다.
믿음과 은혜가 아니라 나의 의였음을 고백합니다.
이 아침에 다시 살아나는 나의 옛 사람과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가 되어 이 하루를 살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로 살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기 원합니다.
내게 주신 고난이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게 하소서.
주께서 그러하셨듯 나 또한 우리 주님을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17:24-33
제목 : 여호와도 경외하고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7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 나의 묵상
앗수르 왕은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뒤에 혼혈정책을 펼쳤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호세아였고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의 왕은 살만에셀, 즉 정확하게는 살만에셀 5세로서 그의 아버지는 디글랏빌레셀이었다.
그런데 살만에셀은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으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해인 BC 722년에 갑자기 죽는다.
그래서 그의 동생인 사르곤 2세가 앗수르의 왕이 되어 북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데려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살게 하는 혼혈정책을 펼친다.
그 후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어 앗수르 왕이 된 에살핫돈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앗수르가 정복한 피정복지 백성들을 데려다가 사마리아에 흩어서 살게 하는 혼혈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므로 하나님께서 사나운 사자들을 보내어 그들 중 몇 사람을 물어 죽게 하셨다.
이런 사실을 앗수르 왕에게 전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신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에살핫돈은 사마리아에서 잡아온 제사장 한 명을 다시 사마리아로 보내 그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법을 가르치도록 한다.
그 제사장은 벧엘에 살면서 이방 백성들에게 여호와 섬기는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각기 자기 민족의 신을 섬기면서 그와 함께 여호와도 섬겼다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80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면 종교성이 있어서 잘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섬기는 기존의 800만 개의 신에다 예수 신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격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예수는 세상에 널려 있는 신들과 똑같은 잡신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모태신앙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나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즘에는 이 말을 비꼬아서 일면 ‘못해신앙’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모태신앙인들은 정말 뭔가 잘 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또 딱히 못 하는 것도 별로 없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며 놀고 살아왔기 때문에 보는 것이 교회에서 하는 것인지라 감으로라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대부분 신앙의 열정도 미지근하고, 신앙의 확신도 없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식이다.
물론 모태신앙인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이 와도 교회를 빠지는 일은 드물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교회는 가야 한다는 마음은 확고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이 정말 예수를 확실하게 믿어서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보면서 배워 왔기 때문에 몸에 밴 습관처럼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믿는 일 외에 어떠한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나 알라나 무속신앙의 어떤 정해진 신을 믿는 것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름 나는 예수님만 믿는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나는 오직 예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외에 믿는 신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마치 일본 사람들이나,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 당한 사람들과 똑같은 자였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가까운 사람을 더 의지하였고, 믿는다고 하면서 돈의 능력을 더 많이 믿었던 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 왕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 나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점을 치며 우상을 섬기는 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거역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요, 완고함이란 교만과 뻔뻔함을 일컫는다.
따라서 나는 점을 치거나 사신 우상에게 절을 하지는 않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죄의 경계선을 넘나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그분을 신뢰하여 나의 전 삶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고난이 닥치면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
나는 이것이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물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그 상황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겸손히 받아들이며 그 고난의 무덤을 성소로 삼고 주님 안에서 말씀과 함께 거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기도하였고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던가?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 안에서 새 사람으로 일으키심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이처럼 나는 예수만 믿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신을 믿고 섬겨 왔던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모습이다.
결국 나는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기는 자가 아니었다.
내가 더 나쁜 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땅의 것을 구하면서 만물 위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것을 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말씀을 이용하여 그들의 상황을 해결해 주려고 하였고, 기도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였다.
그 상황을 주님이 주시고 무덤으로 초청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목사인 나는 그것을 거부하면서 해결하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목사도 영적 지도자도 아니었다.
적어도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여야 하는데 나는 나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자행자지한 패역한 자이다.
이렇게 하면 성도들이 위로를 받고 은혜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였던 것이다.
어느 순간 그들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당장은 아프고 힘들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을 전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영생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는 것은 히브리어로 ‘야다’, 헬라어로 ‘기노스코’로써 사귐을 말한다.
이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 틈입하여 들어오고 우리는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보는 영광을 보며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에 속한 비밀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이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나는 오늘도 말씀묵상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보셨던 그 영광을 본다.
전에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내 뜻을 아버지의 뜻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임을 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그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삶을 산다.
말씀의 맛은 정말 맛있다.
그래서 억지로 해치우는 묵상이 아니라 그 맛을 보면서 스스로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오늘 나를 이끌어 주님의 말씀 앞에 나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생명은 주의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셔도 영광입니다.
주님이 주신 영광은 곧 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맛보는 영생이 있기에 나는 온전한 영생을 소망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이 나의 소망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 창세전의 세계요 묵시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곳이 언제나 돌아갈 나의 본향입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있는 그 자리가 나의 거할 처소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