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신랑
어떤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축하객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랑과 신부는 참으로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축하객들 중의 한 부부가 데리고 온 꼬마 아이가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결혼이 뭐지?"
그 엄마는 어린 아이가 결혼에 대해서 묻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지만 웃는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어서 하는 거란다.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잘못에 대해 감싸주고, 또 모든 힘든 일을 나누어서 도와주게 되지."
그러자 꼬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결혼한 것이 아니구나!"
혼인은 하나의 “계약”입니다. 둘은 죽기까지 서로 신의를 지키고 존경하고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다.
어쩌면 이런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위의 꼬마아이의 말대로 겉만 부부생활을 하고 있지
실제로는 참 부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결혼할 때 배우자에게 했던 맹세를 현재 어느 정도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지키고 있는지 먼저 그 수준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 상담가들과 심리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부부들은 결혼식에서 했던 서약을 거의 잊고 있으며, 또 기억을 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결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결혼하는 부부들 대부분이 별 의미를 두지 않고 형식적으로 서약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 그들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결혼 서약문을 한 번 따라 읽을 뿐입니다.
저의 지도 신부님이 어렸을 때, 아씨시에서 미사가 있어 복사를 서기위해 갔는데 한 성당에서 스무 명이 넘는 사제가 벽에 붙어있는 각자의 제단에서 동시에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변화 하는 시간이라 이쪽에서 성변화 때 종을 땡 치면 그 쪽을 향해 인사하고 저 쪽에서 종을 치면 그 쪽을 향해 인사하고 그렇게 스물 몇 번을 제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며 인사하면 미사를 스물 몇 대를 드린 것으로 간주되었답니다.
만약 이렇게 미사를 드리는 대수가 중요했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많은 공로를 주시기 위해
미사를 더 일찍 제정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때 단 한 번의 미사만을 하셨습니다.
구약의 전통에서도 하느님께 제물을 얼마나 바치고 얼마나 예식에 잘 참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거룩함이 평가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서민들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일 년에 세 번씩 비싼 여행비용을 대고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전례의 참여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우리가 들으면 아주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면 돈이 없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보다 더 거룩해 질 수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도 이것을 이해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이 율법 학자도 전례에만 열심히 참여하며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이 싫었는지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미사에 수천 번 참례한다고 그만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이라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이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거룩한 전례일지라도 교만만 증가시키는 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자주 전례에 참석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 분과 맺은 계약을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계약이란 바로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부부가 참으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혼인 서약을 잘 기억하고 지켜나가려고 해야 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분과 맺은 계약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분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배워야합니다.
그 분이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배워야 우리도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인 동시에 ‘스승님’인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주님께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 부른 것은 그저 스승이란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분을 아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몸만 신자인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영성체 때 우리 몸과 한 몸이 되시는 그 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 분이 사신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결심을 합시다.
왜냐하면 그 분 삶 자체가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혼인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