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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에 의한 통치-벨라야트예 파키(Velayat-e-Faqih)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특별한 통치 체제를 말하는 것으로, 열두 이맘파 쉬아 이슬람의 특징에 이란의 정치 상황이 결합되어 나타난 이론이다.
열두 이맘파 쉬아 이슬람(이하 열두 이맘파로 지칭)은 순니 이슬람과는 독특한 신학 및 철학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알리 및 후세인, 하산으로 이어져 오는 열 두 명의 이맘의 계보를 믿으며, 마지막 이맘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현재 숨어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 마지막 이맘이 그 은폐를 풀고 세상에 나타나고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나 유태교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이맘의 계승에 대해서는 그리스 철학-특히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 가잘리 이후 순니 세계의 철학이 쇠퇴하였지만 쉬아파는 이러한 전통에 힘입어 계속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열두 이맘파는 진정한 정의로운 통치는 오로지 이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처음에 이맘이 사라졌을 때는 네명의 이맘의 대리인이 70년간 존재하여 이맘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 시기를 소은폐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940년 이 네명의 대리인들도 모두 죽어서 완전히 이맘과의 접촉은 끊어지게 되어 지금까지 대은폐기가 계속되고 있다.
당시 존재하던 열두 이맘파 왕조였던 페르시아의 부예이흐조(945~1055)에게 있어 이맘이 완전 대은폐기로 접어든 것은 좋은 기회였다. 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쉬아파의 정신적 지주 이맘이 살아있다던가 접촉이 된다고 하면 그들의 권세는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마침 이맘이 완전 잠적해버림으로써 부예이흐의 군주들은 이란과 이라크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특히 이집트에 있던 이스마일파의 파티마 왕조(909~1171)는 아싸리 자기네들의 칼리프가 이맘이라고 떠들어대는 통에 그들과 적대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예이흐 왕조는 이슬람의 많은 왕조가 그랬듯이 단명했고, 열두 이맘파가 정권을 잡는 일은 이후 4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기간동안 쉬아파 학자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즉 이제 이맘은 사라졌는데, 누군가는 다스리긴 해야할텐데, 일반 세속군주에 맡겨놨다간 다 자기 맘대로 해먹을께 분명하고, 어떻게 해야 신과 예언자와 이맘의 뜻에 맞게 통치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11세기의 세이후 알 타이파(Sheykhu Al Taifa)는 이렇게 이맘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법학자들이 사법 권한을 가져야 하는거 아니겠냐고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무하키크 알 힐리(Muhaqqiq Al Hili), 무하키크 알 카라키(Muhaqqiq Al Karki), 샤히드 알 타니(Shahid Al Thani) 등의 학자들도 사법권, 통치권, 또는 방어적 지하드를 일으킬 권한은 법학자들에게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1. 가장 정당한 통치는 이맘이 하는 통치이다. 2. 그러나 지금은 없다. 3. 그렇다면 그 이맘의 뜻(=쉬아 이슬람의 길. 순니와는 다르다 순니와는!)을 가장 잘 알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다스려야 마땅하다. 4. 그게 법학자들 아냐?
그러나 이렇게 이론은 나왔지만 정작 대다수의 쉬아 종교인들이나 법학자들은 세속적인 일을 다스리려고 들거나, 또는 세속정권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이슬람이 정교일치의 종교라고는 하나, 이는 정치에 있어 종교적 원칙이 적용됨을 의미하지, 반드시 성직자 및 법학자들이 나라륻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많은 쉬아 성직자들은 조용히 마을이나 도시의 모스크에서 설교하고 토론하고 예배하는 등 신앙생활에 더 집중을 했다.
<사파비 왕조의 문장. 사자와 태양은 전통적인 페르시아의 상징이다>
문제는 1501년, 400년만에 이란 땅에 열두 이맘파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사파비 왕조는 애시당초 쉬아-수피즘 교단인 사파비 교단에서 출발한 왕조로, 그 지지배경이었던 키질바쉬들 역시 터키 동부와 이란 서부 지역의 사파비 종단의 지지자들이었다.
<키질바쉬>
또한 사파비 왕조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Musa Al Kazim)의 후예라고 칭함으로써, 자신들이 이맘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쉬아 성직자들은 사파비 왕조의 쟁쟁한 기세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사파비 왕조는 사드르(Sadr)라는 직책을 통해 성직자와 종교계를 다스렸다. 샤 이스마일 1세는 스스로를 '알리의 칼리파위의 후계자'(Warith-e Khalifat-e Murtada)라고 할 정도였다.
<샤 이스마일 1세.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를 그린 벨리니의 작품이다>
이러한 세속 군주의 교권에 대한 우위는 세속 정부가 힘을 가지고 있는 한 계속되었다. 샤 타흐마스프 1세, 샤 압바스 1세 등 사파비 왕조의 권세가 강하던 시기에는 많은 성직자들은 사파비 조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통치를 돕거나, 또는 늘 그렇듯이 자신들의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압바스 1세가 죽고, 17세기 들어 사파비 왕조의 권위가 약해지고 유약한 군주들이 즉위하게 되자, 점차 성직 계층은 힘을 강화하게 된다. 1687년 셰이흐 알 이슬람이 된 바끼르 알 마즐리시는 군주에 대한 성직자의 세력 확대를 알린 하나의 사건이었다. 샤 후세인은 대관식 때 그에게 무슨 소원이 있느냐를 물었고, 마즐리시는 '이스파한 내의 수피들을 쫓아낼 것, 왕국 내의 음주와 비둘기 날리기를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쉐이흐 알 이슬람, 바끼르 알 마즐리시>
이 시점에서 알아두어야 할 용어가 몇개 있다. 첫째는 무즈타히드(Mujtahid)라는 것으로, 이는 쉬아-순니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독자적인 법 해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무즈타히드가 법 해석을 하는것을 이즈티하드(Ijtihad)라고 한다.
17세기 이란에는 이 이즈티하드에 대해 두 개의 학파가 존재했다. 하나는 아흐바리(Akhbari) 학파로, 이들은 코란과 하디스, 그리고 이맘의 전승(Akhbar)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우술리(Usuli) 학파는 위의 요소들뿐만 아니라 무즈타히드의 독자적인 법 판단 역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슬림들은 각자 자기에게 맞는 무즈타히드를 선택해 그의 말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우술리 학파는 18세기 들어 아흐바리 학파를 압도하고, 열두 이맘파의 독보적인 종파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우술리 학파가 득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파비 왕조 붕괴 이후 카자르 조의 건국까지의 혼란기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군주 나디르 샤가 18세기 이란을 침공하고, 쉬아파 무슬림들을 박해하자 많은 성직자들은 이라크의 쉬아파 성지로 도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남아 있던 쉬아 성직자들은 자신의 세를 역설적으로 더 넓힐 수 있었다. 또한 나디르 샤의 정권이 너무나 빨리 무너지자 생긴 권력의 공백을 바로 우술리 학파의 무즈타히드들이 채우게 되고, 이들은 점차 권력 없이도 독자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의 권력 공백의 경험이 벨라야트예 파키 이론을 만들어내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반짝 영화의 표본. 나디르 샤>
또한 이 시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19세기에 세워진 카자르조와 군주 아가 무함마드 칸은 사파비 종단으로부터 시작한 사파비 왕조와는 달리 부족적 기반을 두고 세워진 왕조였기에 어떠한 종교적인 이름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종교적 권위를 메워준 계층이 신학자 계층이었고, 카자르조 시기에 들어 체계화된 성직 계층이 등장하고, 이들이 힘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 특히 성직계층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기존의 무즈타히드는 마르자(Marja), 또는 마르자에 타끌리드(Marja-e Taqlid)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마르자는 원천이란 뜻이고, 따끌리드는 모방, 따름이란 뜻으로 무즈타히드는 어떤 일을 따르는 데에 있어 가장 주요한 원천이 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19세기 중반에 마르자에 타끌리드는 이란 전역에서 3-4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성직 계층의 강화로 이들의 숫자가 수백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쉬아파의 주요한 성지인 이라크의 나자프에서 이 수많은 마르자들중 가장 뛰어난 마르자 몇명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마르자에 타끌리드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한 지역에서 오직 소수만이 마르자에 타끌리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자에 타끌리드 중에서도 가장 학식이 높은 자를 마르자에 타끌리데 무뜰락(Marja-e Taqlid-e Mutlaq), 즉 '유일무이한 마르자에 타끌리드' 라고 칭했다. 만약 최고 마르자에 타끌리드가 없을 시에는 여러명의 마르자에 타끌리드들이 모여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했다.
잠깐 첨언하자면, 집단지도체제라고 해봤자 이 시기까지도 성직자들이 실제 권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란 종교적 지도를 의미한다.
마르자, 또는 마르자에 타끌리드가 최고 성직계층이라고 한다면, 그 아래에는 아야톨라(Ayatollah)가 있다. 참고로, 마르자에 타끌리드를 부르는 일반 호칭은 아야톨라 우즈마(Ayatollah Uzma)-신의 최고 상징이다-라고 한다. 아야톨라는 '신의 증거'라는 뜻으로, 하우자(Hawza)라 불리는 이슬람 학교에서 코란, 하디스, 이즈마(합의), 아끌(이성), 철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운 뒤 그의 선생으로부터 자격증을 받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칭호이다. 쉬아파 무즈타히드들 중 마르자에 타끌리드 다음으로 높은 계층이다.
그 아래에는 호자톨 이슬람(Hozatol Islam)이 있다. 이는 '이슬람의 증거' 라는 뜻으로, 법학, 철학, 아랍 문학, 코란 해석 등을 배운 뒤 얻을 수 있는 칭호이다. 하메네이가 호메이니 사후 부랴부랴 아야톨라가 되기 전까지, 그 역시 호자톨 이슬람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쉬아파의 성직(또는 학자)계급은 호자톨 이슬람-아야톨라-마르자에 타끌리드(아야톨라 우즈마)-마르자에 타끌리데 무뜰락 순으로 될 수 있겠다. 또한 알아두어야 할 것은 같은 급이더라도 무깔리드(Muqallid)-신도-의 수와 저서의 양, 헌금의 양 등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모두들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는 알지만 샤리아티마다리, 골파야가니, 부르제르디, 몬타제리 등은 모르는 것에서 호메이니와 하메네이와 다른 마르자에 타끌리드들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란의 유명한 개혁파인 모함마드 하타미도 호자툴 이슬람이다>
PS : 글 한편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길어지는군요;;;;
첫댓글 어흙 이슬람사를 잘 몰라서 여기저기 단어들 찾아보면서 읽었네엽 ㅋ; 잘보고갑니당
이란사람들 얼굴보면 상류층들은 확실히 백인같다는.. 저 아저씨 옷만 갈아입히면 유럽 어느 나라의 수상도 할수 있겠습니다. 근데 신기한게 진짜 어느 나라나 상류층은 얼굴색이 더 희다는...
실내에 오래있다보니.. 사실 백인도 밖에 오래 나가있으면 얼굴 타자나요. 미드 중에 덱스터 보면 그게 나오죠 ㅋㅋ 2기에
이란애들은 인종상 서유럽인하고 상당히 유사한 편입니다.
예전에 블루블러드란 말이 있는데.. 실내에만 오래있는 백인하고 밭에서 오랜시간 일하는 백인하고도 서로 피부색의 흰 정도가 틀려서 실내에 오래 있던 백인들은 피부가하얘서 힘줄같은 푸른 빛도 돌았기 때문에 귀족은 파란피일 것이다.. 이런 얘기도 민간에 돌았다네여.. 상류층은 실내에서 오덕질 하기때문에.. 가 정답. 우리나라 사람들도 현역 군인이랑 직장인 예비군이랑 옆에 세워두면 직장인 예비군들 피부가 훨씬 하얗죠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
[PS : 글 한편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길어지는군요;;;;] 이제 글이 스스로 무한증식하는 모습을 보실수 있을껍니다 ㄲㄲ. 제가 AGS버프를 걸어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결지을것임다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