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고령 바리스타
이강촌(로사)
커피의 꽃말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Always be with you) 이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그리워하다 죽어서 그 여인의 무덤가에 피어났던 꽃의 열매가 바로 '커피'라 한다. 커피의 색은 어두운 핏빛인데 그건 그 여인의 눈물 빛깔이고 너무나도 울어서 피 눈물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사연을 듣기만 해도 여기저기 다 아파온다.
커피가 쓴 이유는 기다리는 마음 때문이고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밤낮으로 그 사람을 기다렸던 그 여인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커피의 향이 그윽한 이유는 그 여자의 사랑하는 마음이 향기가 되어 흩날리기 때문이란다. 커피를 타고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들이다.
나는 그래서 누군가가 그리워서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바리스타가 되었던가. 그것도 최고령 바리스타. 개강 사십여 년이 넘은 서울의 '00 커피전문학원'에서 나는 '최고령 바리스타'라는 명예를 안고 바리스타 필기와 실기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곳은 고향과 지인들과는 머나멀게 느껴지는 타향 땅이다. 옆지기 퇴직하고 노후를 보내겠다고 휴양 차 오게 된 타향에서 자연스럽게 사람 만나는 자리를 만드는 일은 절실했다. 그윽한 커피 향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눈을 맞추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 수 있는 또래 벗, 더구나 속내 다 풀어 놓고 돌아서서도 후회되지 않을 지인을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 꿈을 꾸게 된 것은 오래 전 ‘나의 버킷리스트 10’을 작성하면서 그 열 번째 안에 이미 들어있던 것이다. 나의 버킷리스트에 뜻을 함께하던 옆지기마저 떠나버리고 혼자가 되자 그 버킷리스트를 실현하고자하는 마음은 더 절실했다.
이십 수 년 전에 뉴질랜드로 이민 가서 살 때였다. 태평양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숲속에 ‘숲속의 실버들의 찻집’ 을 찾아보고는 참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마침 나는 지금 뉴질랜드를 닮은 아름다운 양평에 살고 있으니 바다가 부럽지 않게 넓은 한강변에 그런 쉼터를 만들면 될 일이다 싶었다. 한 세상 열심히 살았으나 노년에 그저 그렇게 살면서 동전 한 알 가지지 않아도 커피 향기 따라 가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 그런 평화로운 실버들의 모임 집을 만드는 일이다.
내 소박한 꿈에 귀 기울여 주던 커피학원 원장님과 자녀들은 응원의 힘을 실어 주었다. 더구나 원장님은 서울 모처에도 그런 집을 만드는데 주선해 준 경험이 있다면서 도와주겠다기에 용기를 얻어 나는 손주뻘 되는 젊은이들 틈에 끼어들어 커피전문학원의 원생이 되었었다. 커피만 잘 뽁아 향기로운 커피를 뽑을 줄 알고 찾아오는 이에게 마음까지 보태어 편안하게 커피 향기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어디 가서 든 향기 나누는 봉사자가 될 각오를 한다면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00개월 동안 손주뻘 되는 학생들 틈에 끼어 커피 로스팅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색깔이 은은하게 뽁아 진 커피 향에 푸욱 빠져 살았던 덕분에 무사히 필기와 실기 시험에 통과하여 나는 '40년 역사를 가진 그 학원에서 최고령 바리스타'가 되었다. 커피 향에 취해 옆지기 보낸 슬픔을 가슴 속 깊이 감추며 버텨 온 수개월, 그런데 자격증을 받을 즈음 내 몸과 마음의 면역은 바닥을 치며 나를 쓰러트리고 말았다. 커피와 빵으로 견뎌 온 기간 동안 나의 몸무게는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20kg 이나 빠져나갔고 갖가지 병이 생기며 나를 털썩 주저앉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라는 전염병이 돌면서 나를 집과 병원을 드나드는 쓸모없는 근심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코스모스와 맨드라미 백일홍이 울을 친 잔디밭에서 만들어지길 소망하던 ‘숲속의 실버들의 찻집’은 나의 건강과 코로나로 ‘버킷리스트10’ 에서 갈 길을 잃고 삭제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토록 사랑하던 커피마저 멀리하라는 병원의 경고도 받아 놓았다.
그렇게 최고령바리스타라고 자랑하고 싶던 자격증은 지금 학원보관함에서 찾아가지 않은 자격증이 되고 말았다.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던 일에 도전해 보았고 젊은이들이 만든 커피에 푹 빠져 살았던 몇 개월은 분명 소중한 경험이었다. 시도도 해 보지 않고 버킷리스트에서 삭제했다면 아쉽지 않았겠는가.
나는 오늘도 마셔서는 아니 될 커피알을 로스팅하고 곱게 갈아 우려낸다. 기다릴 사람도 마셔 줄 사람도 없는 텅 빈 집안에 커피향기만이 허허롭게 흘러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