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_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그림에세이_물병자리몽상가 '방하착放下着의 순수의 시대'
매운탕 집에서 주문한 '탕' 이름을 부르면 사람들이 매운탕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생각나서 혼자서 아이구 참! 하고 웃는다. 늦은 새벽에 혼자서 시를 읽으며 피식대는 내모습을 또 내가 보는 것처럼 상상이 돼서 또 헛웃음이 나왔다. 이래저래 새벽에 모호한 웃음을 짓는 일이 배가 되었다.
책은 그 자체로 어떤 묘사를 하는 것이어서 상상하며 읽게 된다. 하지만 이 상상 역시 주어진 정보에 의해서다. 상상은 그 자신이 본 만큼 풍부해지는 것이니까 어떤 정보들이 미리 저장되어 있는가일 것이다. 가령 나는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를 모른다. 시 제목을 보며 이건 뭐지? 식물인가? 했었다.
검색해보니 '캥거루'과에 속한다고 한다. 멸종되었다고 한다. 아하..그렇구나! 나도 만날 일 없겠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애인이 있었다니<시/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중에서>' 멸종된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가 시 안에서는 살아나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처럼 상상된다. 번식도 하여 주머니에 작은 왈라비가 빼꼼히 밖을 내다 보는 듯도 하다.
멸종된 생물은 때가 되어 떠난 것일까, 아니면 인간에 의한 것일까, 살아 남은 종은 어째서일까. 이런 의문들이 찾아 온다. 나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도 어느 면에서는 멸종하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여전히 번식하고 있다. 나는 인간종이지만 나 이후에 나는 없다.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나는 멸종한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종은 계속 번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멸종한 것인가? 아니면 계속 번성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을 보는가의 문제이겠지만, 어떻든 멸종은 그 종이 모두 사라져야 멸종이다. 왈라비종이 서로 조금씩 달라도 살아남은 종이 있다면 완전 멸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건 일종의 '기원'적인 것이다. 그러니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에 대한 '애도'이다. 만날 일 없는 것들에 대한 애도, 그것은 어쩌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만날 일이 없다니 말이다.
'모든 생물은 때가 되면 떠난다'/ / 그 후 바로 나는 학교 후문을 떠났어<시/ '마지막 생물 수업' 중에서>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는 짜장면을 사줄 이가 없었던 것일까. 아주 떠나지는 말고 '장소'만 옮기면 되는 거였는데, 옮길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던 거였을까.
시집<<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는 잔잔한 해학과 위트가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림에세이 <<물병자리 몽상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시는 시적세계로 좀 더 깊이 들어 가 있고 그림에세이는 평평한 느낌을 준다. 그 평평함이 선禪적이며 선화禪畫적인 세계로 이끈다. 시는 좀 더 비평적이고(직접적으로 비틀었고), 그림에세이는 한숨 내뱉고 난 후의 정적에서 오는 바로 그 느낌을 한호흡에 다시 끌어 당기는 맛이 있다. 그러니 시는 시인의 시적 화자의 분출이라면, 그림에세이는 한발 떨어진 관조를 풍긴다. 하지만 그 관조가 곧 현실과 멀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잡어>라든가, <자유로운 관계>라든지, <12월엔 이별을>, <견자>가 그러하다. 몇 편을 나열했지만, 전체가 하나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선어록처럼 간결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림은 글보다 더 간결하다. 어느 절집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뎅그랑 소리를 내며 바람결에 멀리 퍼지는 그런 공감각적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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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문장이 방향을 획 틀어 땅을 박차고 솟아서 허공을 향해 뻗는다. 무엇을 하라는 것 보다는 그 허공에는 일종의 '해방과 추방'이 있다. 그 해방된 공간의 느낌이 추방된 사물의 부각으로 드러났다. 무의 공간에 둥실 떠 오른 그림은 '머리식힘' 이다. 방하착放下着의 시어들과 그림에서 먹먹한 눈길이 허공을 향한다. 고개들어 하늘을 보자. 깊고 깊은 가을은 그곳에 있는지도. 추방된 감정과 고통들은 모두 저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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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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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물병자리 몽상가>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