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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
박재준
- 박 준 태 -
얼마 전 영화 '국제시장’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의 스토리와 비슷한 나의 '형자랑'을 좀 해볼까 한다. 전해오는 말로 '아들 자랑은 반풍수'라지만 형자랑은 한 다리 건너이니 어쩌면 괜찮을 것도 같다. 열 살 전후의 어린 시절, 고향 청도에서 세 살 위인 형과 산에 나무를 하러 자주 다녔다. 그러면서 그 산에서 형과 심하게 다투곤 했다. 당시는 형과 내가 덩치가 비슷하여 어쩌면 내가 이길 것 같기도 해서 죽을힘을 다해 보았지만 아! 그것은 큰 오산이었고 죽도록 얻어터지기만 했다. 오뉴월 땡볕이 하루가 무섭다는데 삼년이나 먼저 태어났으니 절대적으로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형제는 싸우면서 컸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형은 고등학교 진학을 부산으로 떠나면서 지루하던 다툼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방학 때면 형이 '007 위기일발'이나 '살인번호'와 같은 책을 사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국 가수 클리프 리차드가 부른 'The Young Ones'를 형이 나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 바람에 중학교 1학년 가을소풍에서 그 팝송을 멋지게 뽑아 영어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벽촌에서 나와 같은 중학생이 당시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곡을 부를 수 있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난 고등학교 시험 치느라 고향 부락을 나서면서 난생 처음으로 청도역에서 기차를 봤으니 촌놈 중의 촌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나의 형도 다르지 않았다. 형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고향 동네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형의 직장이 있던 서울에서 형과 함께 잠시 생활하면서 하숙집 주인아줌마에게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옮긴다. 손수 빨래를 하는 형에게 아줌마가 해주겠다고 하니까 보통 빨래가 아니라서 맡길 수가 없다고 하더란다. 그게 나의 '빤쭈'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난 형이 내 팬티를 빨아주는 것은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세종대왕이나 링컨 대통령이 아닌 바로 형이었기 때문이다. 형은 영어에서부터 일반상식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러고 붓글씨까지도 아주 잘 썼다. 그래서 아버지의 좋은 유전자는 몽땅 형이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나의 우상은 바로 형이었는데 그러한 형도 장가를 가고 나서부터는 어쩐 일인지 그 존경심이 아침안개처럼 차츰 사라지더라. 참으로 이상도 하제?
우리 집 3남 3녀 서열은 누나와 형 그 다음이 나였다. 그래서 형이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고향에 계실 때 형은 직장에서 1년이나 되는 긴 해외연수를 떠났다. 그때부터 나는 좌불안석이 되더라. 연로하신 어머니 때문에 그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 때문에 고향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장남의 책임감이 그렇게 큰 줄을 그전까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남인 형이 진실로 존경스러웠다. 그러면서 차남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장남인 형 덕분으로 어머니 걱정은 모르고 살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형에게서 약간 흥분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왔다. "준태야! 걸맀다, 진흠이가 드디어 합격했대이, 지금 온 몸이 다 떨린다, 니한테 맨 먼저 알린대이"
형의 아들인 조카가 연세대학 법대 재학 중에 제47회 사법고시에 합격을 한 것이었다. 그 전화를 받은 나도 많이 떨렸다. 조카는 그 후 좌파정부에서 만들었던 '친일파 인명사전' 사건의 박정희 대통령 측 담당 변호사로 TV뉴스에도 자주 나왔다. 조카며느리도 이화여대 법대 대학원을 나와 사법고시 제48회 출신이니 갑자기 우리 집안에 두 명의 율사가 생긴 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다시 세월이 흘러 형도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직장을 떠나오고 나서 수년이 흐른 어느 날, 형이 과장 시절이었던 1984년에 한전 사장을 역임했던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재직 당시 직장의 최고 경영자가 전화를 해온 사연은 이러하다. 형은 그 당시 월성원자력본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자로의 온도가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크게 상승하며 운전이 정지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자로는 가동 1년 여 만이었고 메뉴얼에도 없는 고장이었다. 원자력에 대한 기술이 열악했던 초창기에 당시 기계과장을 맡고 있던 형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자기가 원자로 안에 들어가서 원인을 알아보겠다고 자청을 했던 것이다. 혹 모를 죽음에 대비해서 시신 회수용 로프로 몸을 묶고 협력업체 직원 3명을 대동하고 냉각수 증기로 가득 찬 깜깜한 원자로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형은 그렇게 고장원인을 찾아내어 사고를 수습하였다. 냉각수인 중수(重水)가 시가로 따지면 500억 원 정도나 유출되었으나 다행히 방사능 누출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만약 우리 형과 같이 죽음을 불사한 의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시간을 더 지체했더라면 '후쿠시마 사태'와 같은 대형 참사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최악의 상황까지 갔더라면 우리 대한민국에는 오늘날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기업도 없을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인을 처벌이 두려워 사고를 은폐하느라 발전소에서는 쉬쉬하면서 덮었던 것이다. 사고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세계육상연맹 이사로 있던 박정기(육사14기, 육군대령 출신) 전 사장이 2011년 어느 날, 옛 한전 직원들과 만난 대구의 식사자리에서 월성원자력 중수 누출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 사장은 당시 3개월 전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떠올리며 현 사장인 LG출신 김쌍수 사장을 찾아가 형이 월성원자력을 구한 이야기를 전했다. 마침 그해에 한국전력은 창사 50주년을 맞이했고 '50년 동안 한전을 빛낸 10인'에 형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반백년 동안 십 수만 명의 직원이 거쳐 간 중에서 당당히 뽑힌 인물이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또 박 사장이 펴낸 경영도서 '에너토피아(에너지와 유토피아 합성어)'에도 형의 살신성인 이야기가 104~107쪽까지 들어있다. 요즘도 전임 사장이 형을 서울로 자주 불러서 "사장님" "박 과장"하면서 정담도 나누며 잘 지낸단다. 박 사장은 검찰총장이었던 사위 자랑, 형은 아들과 며느리 자랑하면서. 비록 재직 당시는 만날 수 없었지만 '비밀은 없다'는 제목으로 저서에서 형의 이야길 밝힌 인연이 되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지금도 우리 3형제는 고향을 들락거리면서 농사를 직접 짓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형이 '예수쟁이'라서 걱정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성경에 빠져 있어서 안타깝다. 그래서 며칠 후 만나면 '병신육갑'이란 책을 형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우리 금속과 출신 친구들도 꼭 한 번 읽어 보시길 강력히 권한다. 작년 10월에 나온 책이다. 형은 또 수 년 전부터 기(氣)에 대한 공부를 하더니 턱도 아니게 자신이 그 분야의 책까지 출간하여 인터파크에서 판매까지 했다. 사실 이 점은 나도 좀 창피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기를 제3의 어떤 힘이라고 하더라만 나는 잡귀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영화 '국제시장'과 같은 픽션이 아니라서 재미는 좀 없지만 자랑한다고 욕은 하지 마시고 박정기 전임 한전사장의 책 '에너토피아'와 '병신육갑'이란 책을 읽다 보니까 괜히 친구들에게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글을 써본 것이니 너무 욕은 마시고 고운 눈으로 일별해주면 고맙겠다.
[카페로 퍼나른 이의 변]
'형만한 아우 없다'고 했던가. 난 위 글을 읽으면서 이 말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父傳子傳'이라 하듯이 '兄傳弟傳'이라 부르고 싶다. 글에서는 형제간의 끈끈한 우애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글쓴이는 물 흐르듯 아주 수월하게 써내려간 것 같은데 재미가 넘쳐난다. 글을 보내온 박재준 형이 약간 머뭇거린 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일흔이 내일 모렌데 그는 여전히 긍정적인 마인드로 활기가 넘친다. 그러니 성공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글속의 '창사 50주년'은 1961년 경성전기 조선전업 남선전기 등 전력3사가 통합하여 한국전력(주)로 출발한 날을 기준으로 잡았던 것으로, 지금은 이 잘못도 바로 잡아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면서 생긴 날짜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념하고 있다. 한남 박정기 님께서는 1980년대 중반에 4년 5개월 동안 한전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선진화된 전력회사의 기틀을 만드신 분이다. '전력이 국력'이라고 하지 않던가.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산업의 원동력인 전력산업이 기여한 공이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성공신화는 위에서 언급한 책 <에너토피아>에 들어 있다. 위 사진은 작년 10월 22일 한전 은퇴자 단체인 전력전우회가 부산 동래금강공원에서 펼친 추계체련대회에서 박재준 형이 7백 명 회원 앞에서 <에너토피아> 책을 들고 나와 소개하는 장면.
산적 15.01.20. 10:57
박 사장, 난 ‘국제시장’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마눌님 하고 보러 가야겠소. 자랑스러운 형님 하고 늘 따뜻한 가족애로 화목한 집안이 되길. 박용구
이용창 15.01.23. 08:00
준태 사장님, 감동적입니다. 올해 20회 전체 동기회가 있을 때 형님 한번 모셔서 감동적인 얘기를 듣는 자리 한번 마련합시다.
박광민 15.01.26. 08:47
박 사장의 내공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위대한 형님이 계셨기에…의문이 풀렸소! 형만 한 아우 없다고.ㅋㅋ(농담이우)
그러나 진솔한 글 쏨씨와 때 묻지 않은 마음씨를 가진 박준태 친구가 더욱 자랑스럽소이다.
곽구영 15-03-12 11:38
와, 멋집니다. 대단합니다. 위대합니다. 존경합니다. 박준태 님의 형님이! 그리고 박준태 선생님도. 진정 큰 용기와 결단으로 나라를 구하셨나이다. 감과
한사랑 15-02-06 08:17
존경하는 선배님! 여행 중이라 이제야 메일을 봤습니다. 자랑스런 형제입니다. 정말 부럽기도 하구요. 저도 존경하는 형님이 계셨는데, 안타깝게도 5년전 작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그 행복 50년만 더 누리십시오.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글로리 15-02-04 09:19
사랑하는 박 사장님! 2015년 새해가 진즉 지나고 구랍 새해가 낼 모레요. 구정 새해 복 많이 누리시길 축복하오.<중략> 보내주신 형님 자랑에 대하여는 나는 우리 형님을 많이 섭섭히 대하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드려서 못내 미안하고 죄스러울 따름이군요. 아무튼 멋지고 귀한 형님을 두신 박 사장님 축하와 축복을 드리오. <중략> 자주 연락 못 드려 미안코, 이멜로 가끔 소식 전합시다. 멋진 친구 박 사장님을 존경하며. 포항에서 양기실
choikyurae 15-02-03 20:13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훌륭하신 형님 이야기도 감명 깊었지만, 아우님의 글 솜씨 또한 장난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나게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 ‘국제시장’ 한 편보다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더 감동한 것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입니다. 화기애애한 가족사를 계속해서 쓰신다면 베스트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귀례 드림
이상석 15-01-29 14:13
박재준 사장님! 귀한 말씀을 동생 분을 통해서 듣게 되니 참으로 정감 갑니다. 주변이 답답해져 가기만 하는 세태 속에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훈훈함이 있어 더욱 좋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와 자랑스러움에 박수 드립니다. 님이 있어 외롭지 않다는 게 더욱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함께하는 날들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자랑스러움에 큰 용기 내어봅니다. 항상 자랑스런 저의 멘토이십니다. 이상석 드림
박주범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15-01-29 10:18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계셔서 오늘날 우리가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