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장미가 건네는 말/ 조이섭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야트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마루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꺾여 도는 범어재이다. 범어재 길 따라 연이은 아파트 담장에 줄 장미가 피기 시작했다.
서쪽 언덕바지에 면해 있는 울타리의 장미와 언덕 위에서 ㄱ자로 꺾여 남쪽을 향한 울타리 안의 장미는 피는 시기와 만개하는 속도가 달랐다.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의 장미는 일찍 피고 제 자리에서 곱게 키를 키운다. 오전 내내 그늘진, 서편 장미는 혹여 개화하지 못할까 봐 온몸을 비틀어 햇살이 드는 쪽으로 가지를 뻗어 내린다. 까치발로도 모자라 목을 있는 대로 길게 늘어뜨린다. 포기마다 생의 의지가 가득하다. 절실함은 수단과 방법을 마련하게 되어 있나 보다.
꽃 핀 지 열흘이 지나니 남쪽의 장미는 힘을 잃고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쪽에서 늦게 핀 작고 단단한 꽃들은 꽃받침에 예쁘게 담긴 채 벙근 꽃잎을 꼿꼿하게 세우고 바람과 얘기를 나누느라 살랑거린다. 진정한 성공이란 시기의 빠름과 늦음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율곡 이이는 인생의 세 가지 불행으로 '소년 등과, 중년 상처, 노년 빈곤'을 들었다. 상처든 빈곤이든 둘 다 우리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이른 나이에 급제한 것이 왜 불행인가? 아마도 이른 나이에 성공하면 나태와 방탕에 빠질 우려가 크고, 자만으로 이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리라.
장미는 제가 있을 좋은 자리, 나쁜 자리를 스스로 고르지 않았다. 제가 거기 있고 싶다고 거기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사람도 제가 태어날 데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라고 꽃 피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언덕바지를 오르내릴 때마다 햇살 좋은 남쪽의 줄 장미들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부럽냐고, 부러웠더냐고?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잠시 잠깐 비추고 이내 아파트 건물 너머로 숨어버리는 햇살을 원망하지도 않았다고 대답한다. 다만, 내가 뿌리 박고 섰던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지 않았음을 반성한다고 얼버무린다.
서쪽 언덕바지 그늘에 잠긴 장미도 나에게 서러웠냐고, 원망했었더냐고 묻는다. 나도 살면서 어찌 볕 좋고 물 좋은 것을 바라고, 부러워하지 않았으리. 그러나 진창에서도 보슬보슬한 황톳길을 보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목말라했다고 고백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랴. 기쁨 속에 웅크린 슬픔이 있고, 고난 속에 행복이 깃든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이다. 내가 있었던 곳, 지나친 곳이 중요하지 않다. 부초처럼 떠밀려가지 않고 손주들 재롱에 빠져 사는 지금, 그 그늘과 척박한 토양이 그나마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라 믿는다.
과거는 징검다리의 지나온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는 앞으로 건너갈, 몇 개 남지 않은 돌덩이지만 더없이 소중하다. 줄 장미가 피어 있는 범어재를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 오르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산다.
제주일보 6월 27일자 <금요에세이>
첫댓글 장미 한 그루에서 좋은 글감을 찾아 좋은 글 만드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