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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781 ~ 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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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라도 화순을 무대로 활약한 학자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은 수차(水車)나 자승차(自升車)의 발명과 활용을 주장하는 등 이용후생적인 측면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실학자였다. 하백원은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순창), 황윤석(黃胤錫, 1729~1790, 고창),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장흥)와 함께 조선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4명의 실학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백원의 학문과 사상을 통하여 19세기 호남 지역에 수용되었던 실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하백원의 자는 치행(穉行), 호는 규남(圭南), 본관은 진주. 규남이라는 호는 서석산(瑞石山) 규봉(圭峰)의 남쪽에 살았으므로 생긴 것이다. 1781년 1월 복천(福川: 동복현)의 야사촌(野沙村: 현재의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하진성(河鎭星)과 모친 장택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가장(家狀)>에 의하면 12, 13세에 주돈이, 장재, 정호, 주희의 책을 다 읽었으며 시문에 능숙하여 사람들의 경탄을 받았고, 15, 16세에는 문사(文詞)로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전통적인 가례에 의해 삼년상을 마쳤고, 부친상을 마친 후에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송시열의 문인인 송환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인 송환기는 경서와 예학에 능했던 제자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22세 때 귀향한 하백원은 스승 송환기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 편지에서 “대개 독서 궁리(窮理)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데 전념하면 실효를 얻을 수 없고, 자득(自得)하는 데만 힘쓰면 쉽게 병통이 생기므로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병행시킨 연후에 아마 실지로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1)”고 하여, 독서 궁리와 함께 스스로 체득하는 ‘자득’이 병행될 때 실지로 얻는 바가 있다고 하였다.
하백원은 23세이던 1803년에는 주변 인물들의 권유로 증광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오래도록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하다가 30년이 지난 50세가 넘어서야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 30년의 기간은 하백원이 다양한 서책들을 두로 섭렵하면서 그의 학문을 정리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규남문집]의 서문에 의하면 하백원은 '위로는 분전(墳典: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곧 삼황오제의 전적인 고전적(古典籍)을 가리킨다)으로부터 아래로는 자사(子史)에 미치기까지 회통(會通)하지 않음이 없었고, 박학하여 백가외서(百家外書)와 중기지문(衆技之文)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 원류를 섭렵하였다.2)’고 한다.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기술학에도 관심을 보인 점은 하백원을 실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1831년(51세) 하백원은 경명행수(經明行修: 유교 경전에 해박하고 행실을 닦은 사람)로 천거를 받았고, 1834년 창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1836년 금부도사로 전임되었고, 이듬해 순릉(順陵) 직장(直長)을 거쳐 1838년 형조좌랑에 올랐다. 1841년에는 석성현감에 올라 백성문집] 권3, <答李士剛(遇正)>, 古所謂學問 非必讀書之稱 農工商賈 無非學也.’ 하여 상업이나 수공업과 같은 말업(末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하백원이나 동시대를 살았던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사례에서는 실용 중시의 성향과 개방적 학풍의 요소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조선중기 남명학파나 화담학파에서 두드러졌던 경향으로, 18세기 박학을 추구한 학자인 윤휴(尹鑴), 이익(李瀷), 박제가(朴齊家) 등에 의해서도 계승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하백원이 16세기 학자인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사상을 계승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선중기 남명학파와 화담학파가 추구했던 실천, 실용 중시의 학풍이 당대나 그 문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18, 19세기 박학과 실용을 중시했던 학자들에 의해 후대까지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용후생적인 사고를 지니고 그 실천에 주력한 하백원의 사상은 자승차(自升車)와 지도의 제작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났다. 하백원은 수차의 일종인 자승차를 발명하고, 당시의 전라도관찰사인 서유구(徐有榘)에게 이를 수리(水利)와 농정에 활용하도록 건의함으로써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하백원은 또한 지도에도 관심이 많았다. <동국지도>와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인 <야소회사(耶蘇會士)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 만국전도(萬國地圖)>를 다시 제작하는 등 천문, 지리, 율력, 지도, 산수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해박하였다. 하백원이 강조했던 자승차의 제조는, 19세기 중엽의 실학자 이규경이 행차(行車)나 수륙차(水陸車)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과도 그 흐름이 연결된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하백원에게서 나타나는 실용적인 학풍의 연원에는 16세기의 학자 남명 조식의 학문적 영향이 있었다. 그는 문집 곳곳에서 어록처럼 조식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1829년(순조 29) 유성주(兪星柱)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백원은,
속학(俗學)으로 강설(講說)에만 전념하는 자는 구이(口耳)의 한가로운 담론에만 출입함을 면치 못하고, 헛되고 묘한 것을 말하여 모두 일을 구제하지 못합니다. 조남명(曺南冥)이 말한 ‘손은 물을 뿌리고 마당을 쓰는 범절을 모르고 입은 천리를 말한다’는 것이 이러한 폐해에 절실히 맞습니다...... 요즈음의 호락논쟁은 실로 한심한 것입니다. - [규남문집] 권2 <與兪金化(:兪星柱)書> 1829년 12월
라고 하여, 18세기 인성과 물성의 동이(同異)를 놓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론논쟁인 호락(湖洛)논쟁을 비판하면서, 조식이 16세기 이기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을 강조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조식과는 300년 가까운 시차가 있고 지역적 기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식의 언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가 조식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저술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도 하백원은 ‘우리들은 다행히 정주(程朱)의 뒤에 태어났으니 이기심성(理氣心性)이 밝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다만 들은 바를 존중하고 아는 바를 행하면 된다. 부족하거나 과한 자들이 만약 전대의 언어를 표절하여 박학을 자랑하고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듣는 이를 현혹한다면 이는 군더더기이며 혹인 것이다3)’라고 하여 조식이 말한 ‘정자와 주자 이후 학자들은 반드시 저술을 할 필요는 없다’라는 입장을 계승하고 있는 점도 발견된다.
하백원이 ‘주자서(朱子書)의 연구에 더욱 주력하여 그것을 일생의 학문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그가 기본적으로 주자학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것의 실천 문제에 보다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저술에서 이론보다는 실천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편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다. ‘학문의 공은 오로지 단정히 거하고 고요히 앉아서 독서궁리하는 데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지의 일에 힘쓰는 데에 있다...... 근세의 구이지학(口耳之學: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은 문장을 기록하고 암기하는 학습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나, ‘나는 어려서부터 문자나 구두를 익히는데 종사하여 오로지 잘된 글을 표절하고 조박(糟粕: 찌꺼기)을 주워 모아 과거에 응시할 계산이었다. 그러다가 중년 이래로 궁리 공부에 유념하였지만 역시 해석의 차이점을 탐구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 반궁실천(反窮實踐: 몸을 반성하여 실천함)의 공부에 있어서는 아무런 실천이 없었다.’라고 하여 입으로만 천리를 논하는 구이지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반궁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 눈에 띈다.
하백원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조식이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버리고 위로는 천리를 통달하는 것이 학문에 나아감의 목표이다. 인사를 버리고 천리를 논하는 것은 한갓 구이상(口耳上)의 이치이며, 반궁실천하지 않고 견문과 지식이 많다는 것은 바로 구이상의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도 흡사하다.
19세기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실학자인 하백원이 16세기 경상우도의 학자 조식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점은 영남 지역에서 호남 지역으로 사상이 전승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영남과 호남의 학문 전승에는 두 지역을 아우르는 산인 지리산이 학문 공간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된다.
하백원의 <만국전도>. 1821년에 제작한 세계지도로 적도를 중심으로 북반구와 남반구의 세계 각 나라들이 지금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하백원의 실용주의 학풍과 18세기 북학사상의 수용과 박학의 시대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85호.
하백원은 실천 중시 정신을 바탕으로 농업 이외에도 상업이나 수공업과 같은 말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옛날의 이른바 학문이란 반드시 독서함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농공상고(農工商賈)가 다 학문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비가 농사에 나서 토지를 키우면 우리 뛰어난 선비의 시를 훈훈하게 하며, 공장(工匠)의 일에도 지극한 이치가 없을 수 없었다.4)”고 한 대목은 그의 실학사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농공상고’가 학문이 아닌 것이 없다 하여 말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16세기 화담학파를 대표하는 학자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상업이나 수공업 중시론과 유사성을 갖는다. 이런 점은 하백원의 사상이 화담학파의 실용 사상이나 북학사상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천과 실용을 중시한 하백원 실학의 대표적인 성과물은 수차(水車)의 개발, 그리고<동국지도>와 <만국전도>의 제작이다. 하백원은 일찍이 [농정전서(農政全書, 1639년)], [천공개물(天公開物, 1637년)], [삼재도회(三才圖會, 1609년)] 등의 문헌을 통해 수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중국 측 문헌을 통해 알게 된 수차에 대한 하백원의 태도는 이전의 호남 학자들과 달랐다. 즉 신경준, 이여박, 이우형 등이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수차들을 그대로 제작하여 보급, 활용하자는 태도를 지녔던 데 비해 하백원은 비판적 수용의 입장이었다. 하백원은 중국 측 문헌들에 소개되어 있는 수차들을 고찰해 본 결과 직접 활용하기에는 우리의 실정에 불편한 바가 많다고 파악하고, 본인이 직접 자승차의 구조에 대한 설계도인 자승차도해(自升車圖解)를 고안해 냈다. 그러나 자승차를 직접 시험해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백원은 1834년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에게 답한 편지에서, ‘<자승차도해>는 십수년 전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써 놓았으나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마 자신도 그 효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던 듯하여 실제 사용은 하지 못했지만, 수차의 설계도는 그의 문집인 [규남문집]에 정교하게 도설로 그려져 전해지고 있다.
하백원은 지도 제작에도 열정을 보였다. <동국지도>는 기하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척도법을 사용해서 만든 새로운 형태의 지도이다. <동국지도>는 총 9폭으로 되어 있는데, 한 장은 우리나라의 전도(全圖)이고, 나머지 여덟 장은 팔도의 지도를 따로 그린 것이다. 백리척과 축척법과 같은 새로운 지도 제작법이 활용되어 있으며 산천과 도로망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동국지도>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동여도> 처럼 우리의 국토와 산천을 보다 과학적으로 그리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하백원이 당시의 지도와 지리에 대한 정보를 상당한 수준으로 흡수하였음을 보여준다. <만국전도>는 적도를 중심으로 한 북반구와 남반구의 세계 각 나라들이 거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지도의 하단에는 자세한 주기(註記)를 달아 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이 시기 들어 조선이 더 이상 고립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비슷한 시기를 산 실학자 이규경이 호를 오대양 육대주를 상징하는 ‘오주(五洲)’로 하고, 그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서양인의 지구 인식이 중국보다 우월함을 주장한 것이나, 남극과 항성에 관심을 표방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백원의 실학에는 가학(家學)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7대조 하윤구와 친교가 두터웠던 정두원은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자명종과 천리경, 새로운 지도의 제작 기술에 의해 제작된 만국전도 등을 얻어 왔다. 증조인 하영청과 친교가 깊었던 신경준, 황윤석, 홍대용 등은 조선의 언어, 지리, 역사, 풍속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함께 당시 청나라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은 수학과 천문학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학자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그가 선대로부터 전승받은 가학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하백원이 실학 연구에서 남긴 업적 또한 그러한 가학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도 제작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 등에 나타나는 하백원의 실학은 분명 18세기 북학사상의 수용이라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가학으로 이러한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한층 유리하게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백원과 비슷한 성향을 보이면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한 이규경 또한 이덕무, 이광규로 이어지는 가학의 영향이 그의 실학사상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은 사실이지만, 북학사상의 수용과 박학의 분위기가 대세화 되어가는 19세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특히 이 시기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직방외기(職方外紀)], [곤여도설(坤輿圖說)], [서방요기(西方要紀)], [기하원본(幾何原本)], [수리정온(數理精溫)], [측량법의(測量法義)] 등 지도학, 수학, 천문학 등에 관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들이 조선사회에 두루 수입되었고, 실학적 성향을 보인 학자들은 이들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백원은 서학 수용에 인색하지 않았고, 새로운 학문의 수용은 수차의 발명이나 <동국지도>, <만국전도>의 제작을 통해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하백원의 실학사상이 조선중기 이후 싹트기 시작한 박학과 개방적인 학풍, 18세기 북학사상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기반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고려하면, 그가 19세기 호남 지역이 실학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박학을 추구하는 분위기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학풍과 사상이 조선중기 이후 내면적으로 계승되어 하백원과 같은 19세기 실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에도 반영되었다는 점은 조선후기 사상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는 특히 조선후기 실학이나 북학사상의 내재적 계승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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