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로 공식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최근 내각 개편을 통해 '포스트 임기 후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러-우크라 전쟁의 장기화에 맞춰 썩어가는 '고인 물'을 조금씩 갈아치우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전시에는 국가 총력 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독재 권력'이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최근의 잇단 인사 개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소문이 우크라이나 정가에서 나돌고 있다. 대통령실을 총괄하는 안드레이 예르마크 실장과 최고라다(의회)의 '여걸' 마리아나 베주글라야 의원이다. 예르마크 실장과 다투면 자리 보전이 어렵고, 베주글라야 의원에게 찍히면 (자리에서) 날아간다는 게 소문의 핵심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0일 루스템 우메로프 국방장관과 키릴 부다노프 군 정보총국(GUR) 국장이 해임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소식통을 인용해 "GUR의 부국장 빅토르 자이체프와 이고르 오스타펜코가 최근 부다노프 국장의 동의없이 해고됐다"며 "부다노프 국장과 예르마크 실장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고 전했다. 부다노프 국장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에서 예르마크 실장을 대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여서 대통령실의 강한 견제를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잘루즈니 군 총참모장(왼쪽)과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이 미국 측 파트너와 통화하는 장면/사진출처:예르마크 SNS
◇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vs 부다노프 군 정보국장 갈등
두 사람 간의 긴장설은 이미 새로운 내용이 아니지만, 우메로프 국방장관이 부다노프 국장의 동의를 받지 않고 그의 좌우 손발(측근)을 끊어낸 게 새로운 긴장을 촉발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해임된 두 사람은 국방장관 출신인 안드레이 타린 주슬로베니아 대사의 인맥에 속하지만, 부다노프 국장과도 호흡을 잘 맞춰온 편이라고 한다. 대통령실은 두 사람을 GUR에서 내침으로써 부다노프 국장의 힘을 약화시키기로 했다는 게 현지 정치 분석가들의 해석이다.
갈등의 직접적인 계기는 부다노프 국장이 지난 2월 경질된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의 자리를 노리면서부터. 예르마크 실장은 그의 야망을 탐탁치않게 여겼고,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3각 관계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부다노프 국장은 그러나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는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참모장이 사퇴할 경우, 여전히 그 자리를 탐하고 있다는 설이다. 부다노프 해임설이 간간히 터져나오는 이유다.
예르마크 실장은 그의 자리에 GUR 부국장 출신인 올레그 이바센코 해외정보국장이나, 우메로프 국방장관을 앉힐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 국방장관이 어떻게 그 자리에? 라는 의문이 들지만, 우메로프 장관은 서방 측과 가까운 반정부단체 활동가들과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어 자리가 위태로운 상태다.
키릴 부다노프 군정보총국 국장/사진출처:우크라군 정보총국
예르마크 실장의 '무소불위' 권력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포스크 임기'를 대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준 측면도 없지 않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4월 1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국가의 핵심 통치기관으로 위상을 높이면서 예르마크 실장의 권한을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이후 에르마크 실장의 취임 이전에 임명된 대통령실의 주요 부국장들이 모두 밀려났다.
결정적으로 대통령 직속인 국가안보국방회의의 알렉세이 다닐로프 서기(우리 식으로는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3월 경질됐다. 그는 안보문제를 놓고 예르마크 실장과 대립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자리에는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해외정보국장이 옮겨갔고, 빈 자리는 또 부다노프 GUR 국장의 아래에 있던 이바셴코가 차지했다. 리트비넨코 신임 서기는 '예르마크의 남자'라고 한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의 어릴 적 친구이자 그의 '지갑'으로 불린 세르게이 셰피르 보좌관도 대통령실을 떠났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생일날, 생일전문을 주는 장면. 웃으며 박수치는 이는 다닐로프 전 국가안보회의 서기/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이 과정을 거쳐 예르마크 실장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고, 그를 통하지 않고 젤렌스키 대통령으로 향하는 정보 전달루트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시 국가 통치 모델은 권력 집중?
현지 정치 분석가 루슬란 보르트니크는 "전시중에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 통치 모델의 최종판을 우리는 보고 있다"며 "대통령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은 이제 부다노프 국장과 집권여당 '인민의 종' 다비드 아라하미아 대표 정도"라고 지적했다. 안타깝게도 둘 다 예르마크 실장과 껄끄러운 관계라고 한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바실리 말류크 국장도 대통령에과 독대가 가능한 것으로 전해졌다.
젤렌스키 정권의 외교 수장이었던 드미트리 쿨레바 외무장관도 최근 내각 개편시 물러났다. 대통령 임기(5년)에 가까운 4년 6개월이나 장수한(?) 쿨레바의 경질 이유를 놓고 여러가지 설이 나오지만,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과의 '갈등설'에서 찾았다. 대통령실은 쿨레바 장관이 블링컨 미 국무장관 등 주요 국가 지도자들과 소통 채널을 독점하고, 개인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불만을 가졌다는 것. 한 소식통은 폴리티코 측에 “그가 300% 충성스럽다고 해도 대통령실은 자신의 사람인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중요한 의사 소통 채널을 맡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후임으로 발탁된 안드레이 시비가(Андрей Сибига) 차관이 지난 4월 대통령실에서 외무부로 옮겨갈 때, 쿨레바 장관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지 언론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당시 미 국무부의 압력에 밀려 시비가를 (차관이 아닌) 장관으로 밀어붙이지 못했다고도 했다.
◇ 또 한명의 인사 실세는 여성 의원?
베주글라야 의원/사진출처:텔레그램
직접적으로 인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예르마크 실장과는 달리 베주글라야 의원은 군력을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여걸'이다. 지난 18일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우메로프 국방장관과 시르스키 총참모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인사 요구가 먹혀든다는 점이다.
베주글라야 의원은 지난 8월 페이스북을 통해 우크라이나 무인기(드론) 특수전 부대의 운영을 맡은 로만 글래드키 부대장(사령관)의 해임을 요구했다. △글래드키 사령관의 아내가 아직도 러시아 시민권자이고 △그의 딸이 러시아를 대표해 스포츠 대회에 출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글래드키 사령관은 곧바로 해임됐다. 또 SBU의 특별 수사 대상이 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살아온 사람들간의 특수한 관계를 감안하면, 글래드키 사령관의 사생활은 용인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시르스키 군 총참모장의 경우, 부모가 러시아에 살고 있으며, 포돌랴크 대통령실 고문의 형도 전쟁 중에 러시아 군 정보총국에서 일했다. 어찌보면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는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래드키 사령관은 지난 8월 취임 당시부터 베주글라야 의원의 집중 포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2월 창설된 우크라이나 드론 특수전 부대의 초대 부대장으로 바딤 수하레프스키 장군이 발탁됐는데, 2개월만에 드론 운영 경험이 전혀 없는 글래드키 장군으로 경질되자 베주글라야 의원이 직격한 것이다.
그녀의 표적이 된 최고위급 인사는 또 있다. 우크라이나 공군 사령관(공군 참모총장) 니콜라이 올레슈크다. 그는 지난 8월 말 미국에서 들여온 우크라이나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에 의해 격추됐다고 발표한 직후 바로 해임됐다. 몇개월간 베주글라야 의원의 연타석 공격을 받은 결과로 해석됐다. 그녀는 지난 7월 △우크라이나 공군의 패트리어트 방공망 부실 운영 △러시아 미사일 격추에 관한 공군의 조작 발표 △ F-16 전투기 운영에 대한 준비 부족 등을 잇달아 질타했다.
그러던 중 F-16 전투기가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자, 베주글라야 의원은 모든 책임을 올레슈크 사령관에게 물었고,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올레슈크 전공군사령관과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러시아 TV채널 캡처
◇베주글라야 의원은 진짜 누구 편인가?
앞서 그녀는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 경질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최근에는 도네츠크주 방어작전과 관련, 시르스키 총참모장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런 대책없이 우크라이나군이 도네츠크주 주요 방어 요새에서 퇴각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우리 부대(우크라이나군)는 도네츠크에서 철수하고, 러시아군은 빈 요새를 맨 몸으로 통과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가 도네츠크 지역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임에 앞장서고, 후임 총참모장마저 공격하는 베주글라야 의원은 과연 누구를 위해 '말 폭탄'을 쏘아대는 것일까?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군 최고지휘부에 대한 그녀의 무차별 비판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그녀의 노선을 굳이 따지자면, 부다노프 군 정보총국(GUR) 국장 편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녀는 사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저격할 때만해도 대통령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의회내 꼭두각시'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그녀가 총참모장의 해임을 강하게 요구할 때,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의 목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시르스키 총참모장마저 '무능하고 자격이 없는 지휘관'이라고 비판하자, 정치권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예르마크 실장이 시르스키를 총참모장으로 발탁했고, 그를 지지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르스키 총참모장의 자리를 원하는, 그의 조기 경질을 바라는 부다노프 국장의 편에 서 있다는 의혹을 받을 만하다.
그녀가 20일 대놓고 우메로프 장관과 시르스키 총참모장 해임을 요구한 혐의는 전시 '범죄 행위' 다. 전날 시르스키 총참모장의 요청에 따라 우메로프 장관이 이고르 보론첸코 국방부 수석 조사관을 해고했는데, 추가 조사를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 특히 그가 F-16 전투기 추락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대공방어망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자 이를 막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르스키 총참모장이 나섰다고 베주글라야 의원은 주장했다. 국방장관은 이를 묵인한 공범이라고 했다.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시 중에는 권력내, 군부내 권력 투쟁은 끝없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도 그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