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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 '내'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빼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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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빼야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이 질문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 지도자들이,
곧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주님을 죽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힘으로 불구자를 살린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오늘은 제게 하는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에게 질문한 이들이 오늘은 내게 한 질문으로.
그래서 질문을 받고 자문합니다.
나는 무슨 힘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일할까?
저의 경우 요즘 확실히 주님의 힘으로 일합니다.
이것이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고 편한 점입니다.
요즘은 확실히 저의 힘을 뺐습니다.
뭣을 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일도 술술 잘되고,
일하며 그렇게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받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체험을 소소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식당에서 비지찌개를 메뉴로 추가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저 마음만 먹었는데도 그날 누가 묵은지를 한 열통 보내주시는 겁니다.
이런 식의 작은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가 힘을 뺀 것은 오늘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밤새 고기잡이했지만,
허탕을 친 것처럼 저도 과거 제힘으로 했을 때 실패했던 많은 경험 때문에
제가 힘을 뺀 것이기도 하고 나이 먹어 힘이 빠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내 힘이 빠지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니 성과도 좋고 힘도 안 들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얘기를 제가 한다는 겁니다.
그제도 회의를 위해 형제들과 함께 산청을 다녀오는 길에 제가 자연스럽게
나는 요즘 하느님을 만나는 작은 체험을 자주 한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는 점을 사심 없이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놓고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대놓고 자랑하지 않고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됩니까?
하느님의 힘으로 해놓고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힘도 빼고 이름도 빼야 합니다.
‘내’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빼야 합니다.
내 힘도 빼고 내 이름도 빼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주님의 힘으로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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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중학생 때 시험 보기 10일 전에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과 함께 늑장을 부리며 공부를 계획대로 하지 않았지요. 이제 시험을 3일 앞에 두고는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촉박하기는 하지만 이대로만 하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맞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친구들의 유혹과 이럴 때일수록 더 놀고만 싶은 것은 왜일까요? 결국 벼락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벼락치기 스타일이라며 합리화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인데도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던 것 같습니다. 계획을 통해 결과에 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만 세우고 멈춰있다면 좋은 결과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 신앙인도 계획은 가득합니다. 문제는 아직 시간이 많다면서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면서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의 시험처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시험에도 벼락치기가 가능할까요? 마지막 순간에 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이 역시도 평소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바로 이 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부르심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계획이 있었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양옆에 앉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그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부 출신이 많은 제자단이었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자,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 역시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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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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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그들이 제자들이 되기 전에,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그들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신 주님의 모습을 떠올랐을 것입니다.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어디서 났는지, 숯불 위에는 이미 ‘물고기’도 있고 ‘빵’도 있었습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곧 당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방금 잡은 고기도 몇 마리 가져오라.”(요한 21,10)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와서 ‘시중을 받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숯불에 구운 물고기’가 되고, ‘찢어지고 바수어진 빵’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고,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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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고통스럽고 힘에 겨운 길이지만 부활을 통해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걸을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3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에수님과 지내면서 손 놓았던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 하는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한 채 힘없이‘못잡았습니다.’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으니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가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의 말씀이 더욱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습니다. 혹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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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 중에 ‘구약성서의 배열’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는 성서와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서는 그 내용이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교회는 성서의 배열이 다르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삼중 구조로 성서를 배열하였습니다. 율법서는 모세5경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 성조들의 이야기,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야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서는 신호등과 같습니다. 신호등을 잘 지키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잘 지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회개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회개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이가 뛰놀고,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문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편이 있습니다. 삶의 지혜와 방향을 알려주는 지혜서와 잠언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욥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삼중구조로 배열된 유대인들의 성서는 안정적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런 배열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사중 구조로 배열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성서 배열이 안정적이라면 교회의 성서 배열은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직 메시아, 구세주가 오지 않았지만 교회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이야기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며,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지내는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말하는 모든 지향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구약성서 사본은 유대인들이 성서 배열과 같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과 같은 성서 배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희망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이방인도, 유다인도, 세리도, 창녀도, 과부도, 어린이도 모두 같은 빵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며,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두 가진 것을 팔아서 교회로 가져왔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초대 교회가 버린 것은 ‘소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원수마저 사랑하기 위해 그들은 ‘칼과 방패’를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비폭력 무저항은 시대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맞서 선택한 약자들의 항쟁 수단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의와 폭력의 낡은 시대를 부수고 출현한 평화와 사랑의 새 시대를 사는 승자들의 전혀 다른 지배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예언자들의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의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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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끝났다는 말 아니었을까요? 이제 다시 주님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뜻 아닐까요? 자신의 제일 잘하는 것을 하러 돌아간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주님 만나기 이전으로, 주님과의 모든 기억과 추억을 뒤로한 채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걷고, 들에서 먹고 마시며, 별을 보며 잠을 청했던 시간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치유하고 기적을 보여 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몸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물로 뛰어듭니다. 주님 만나기 전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주님을 만나러 뛰어듭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함께 기뻐하고 음식을 나눕니다.
없었던 일로 하려 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처음처럼 이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처음 그분과 이야기하고, 함께 머물며 기뻤던 그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언제가 우리가 시련과 유혹에 흔들려 주님 만났던 것을 지우거나 없던 일로 만들려 해도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셨고, 우리와 함께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만난 그 첫날로 돌아가 볼까요? 그 기뻤던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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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을까요?
혈액 검사를 해야 해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대기표를 뽑고 서 있는데….
간호사 한 분이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왜 나한테 다가올까? 사제복을 입지도 않았는데…. 날 아는 분인가?
그분은 제 앞에 서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이시죠?
이거 쓰세요.
그분의 한 손에는 마스크가 들려있었습니다.
마스크를 안 쓰고 지내다 보니
병원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인 것을 말입니다.
얼굴에 쓰여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신부님들도 종종 마스크를 잊으시는 걸까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실까요?
누군가가 다가와 ‘천주교 교우이시죠?’라고 인사했던 경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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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다!(Christ is Alive!)”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24)
금주 부활 팔일 축제중 날마다 부르는 복음 환호송이 마음을 파스카의 참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대축일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사는 우리 믿는 이들이요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부를 시편 복음 환호송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를 나눕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살다 간 수도자 사로포의 세라피노 성인에 관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고를 털어놓으려고 그를 수도원으로 찾아오면 그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거리까지 그들을 마중나오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합니다.
“기뻐하고 기뻐하여라. 그리스도께서 되 살아나셨다!”
성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마디가 얼마나 힘있었는지 그 말소리만 들어도 괴로움이 마음에서 싹 사라지고 희망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금주 부활 팔일 축제내 복음 선포전 함께 부르는 부속가도 참 흥겹습니다. 어제 부속가 후반부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이 여기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희망도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선택해 살 때 천국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믿음도 사랑도 살아납니다. 희망에서 기다림과 인내도 있고,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샘솟는 기쁨의 샘이 바로 희망이신 주님입니다. 그러니 희망보다 더 좋은 명약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을 상징하는 어둔 밤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일곱 제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수제자 베드로와 동료들과의 대화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고기 잡으로 가네.”
“우리도 함께 가겠소.”
참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상징들로 가득한 참 아름다운 살아 있는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때는 밤이었고,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마음은 참 춥고 삭막하고 밤처럼 어둠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저절로 입에서는 다음 시편 127장 고백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제자들은 위 시편과 더불어,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ㄷ) 말씀도 연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배경에는 다음 묘사에서 보다시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물끄러미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동녘하늘!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또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의 그 현장 우리 뒷 편에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태양처럼 서 계신, 마침내 절망의 어둔 현장에 희망의 빛처럼 개입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 내면의 사정을 잘 아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제자들은 그물을 던졌고,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텅빈 허무는 텅빈 충만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광석화, 그 순간 주님께서 사랑하신 애제자가 주님을 즉각 알아보며 고백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사랑할 때 보이고 압니다. 사랑의 영안이 활짝 열린 애제자의 고백에 베드로의 반응 역시 수제자답습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 듭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주님의 출현에 혼비백산, 반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의 모습이 흡사 활동가와 관상가의 조화로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익명의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교회공동체내의 숨겨진, 교회의 심장같은 사랑의 관상가들입니다. 주님과 깊은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의 숨겨진 보물, 애제자 관상가들이 있어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됩니다. 활동가 수제자 베드로만 있어서도 안되고, 이런 애제자들은 교회 공동체마다 꼭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상가, 애제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교회 공동체 곳곳에 숨겨진 이런 보물같은 주님의 애제자같은 분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주님은 모두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고,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같은 현실은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 머물 때 견고한 일치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밤의 허무의 어둠은 사라지고 희망과 기쁨,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이 펼쳐집니다.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바뀝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흡사 아침 미사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선교열정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명설교가 된 베드로는 옛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열화와 같은 베드로의 설교가 이를 입증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감동적인 설교 일부를 그대로 나눕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설교인지요!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날마다 축제의 삶입니다. 오늘 4월5일과 내일 6일은 총선 사전투표날이고, 4월10일은 총선 투표날입니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선거입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중인 나라의 독립운동이요, 참으로 역사의식, 민족의식, 공동체 의식, 시대정신과 좋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나라와 국민을 참으로 사랑하는 당과 사람들을 잘 분별하여 대표를 뽑아야 할 것입니다. 정당이나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살아온대로 삽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당이요 사람들이었는지 잘 살펴보고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집짓은 이들이 내버린 돌같은 예수님을, 우리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답게 주님 주시는 분별의 지혜 은총으로 투표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세육창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 만세!
부활하신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 만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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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시 당신과 함께>
홀로인
밤을 지나
낯설 수 없는
당신이건만
왜 이리 낯선
당신과 함께
새벽을
맞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힘들어
당신의 사람이
아니고자
당신 품에서
홀로의 세계로
한걸음 뒷걸음치던
당신의 사람에게
늘 그러하시듯
당신 몸소 오시니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 밝아옵니다
홀로의 세계에서
당신 품으로
새로이 한걸음
애써 내딛으려
어둠을 걷고
새벽빛 품으니
여전히 살가우신
당신이 계시고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늘
저의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새로
당신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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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요한 21,7)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물로 뛰어든 베드로
사람들이 옷을 벗고 물로 뛰어들어 진주, 곧 당신을 건져 올렸습니다! 당신께서 시람들 앞에 세우신 것은 임금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어부들과 갈릴래아 사람들의 예형인 벗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옷 입은 육체들은 당신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옷을 벗은 그들이 왔습니다. 온몸을 던져 당신께 왔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몹시 기다리셨고, 그런 식으로 당신을 시랑한 이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들은 당신께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의 혀가 그들의 마음보다 먼저 가난한 어부들을 열었고, 상인들 세계의 새 부를 만들어 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손목에 생명의 약으로 당신을 묶어 주었습니다. 옷 벗은 그 사람들은 당신께서 물가에 또 다시 나타니리라는 것을 예형 안에서 알았습니다. 진리의 사도들인 그들은 호숫가에서 창조주의 아드님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주님에 의해 바다와 호수가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갔던 이가 뭍으로 올라와 옷을 입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호수에서 헤엄쳐 나와 겉옷을 걸쳤습니다. 이 두 시람은 겉옷, 곧 당신의 사랑을 입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피조물을 사랑하는 데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고 일깨운다. 그것은 하느님이 모든 존재를 고르게 - 평등하게 –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어느 한 피조물을 다른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는 법 이 없다. 또 다른 곳에서 엑카르트는 “하느님 안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보다 더 귀하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하느님이 피조물을 사랑할 때 철저한 평등주의자가 되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 그 이유는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 안에 차별 없이 고르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의 능력만이 다를 뿐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모든 피조물에게 골고루 부어주었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저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고루고루 자신의 존재를 부어 주었다. 신적인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고루고루 미치는 우주적인 사랑이다. 엑카르트는 이 평등한 사랑의 법칙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가르침이다. 엑카르트는 또 참된 사랑은 평등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평등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평등을 창출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어떠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독재가 불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면, 사랑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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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성인의 날✝️
프란치스코의 주님 성탄과 피조물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지나며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는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들어왔다. “내가 국왕에게 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과 나의 사랑으로 그에게 우리의 자매인 종달새를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요청할 것입니다. 시장과 성주, 촌장들이 매년 주님의 탄생일에 그들의 백성들이 길에나 마을 변두리에 밀과 다른 곡식을 뿌리도록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매인 종달새와 다른 새들이 그러한 축제에 음식을 얻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그날 밤 소와 당나귀 사이에서 누워 쉬시는 성자를 흠숭하면서 소와 당나귀를 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특별한 사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마스에는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서로 푸짐하게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완덕의 거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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