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노천명
분야: 어문 > 수필 > 경수필/수필
저작자: 노천명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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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불던 바람이 마당 한구석에 낙엽을 한 무더기 몰아다 놓았다.
나는 세수할 것도 잊고 한참 팔짱을 낀 채 쌓인 잎들을 바라다본다. 오동잎에, 버들잎에, 가랑잎에 갖가지 잎들이 섞여 있다.
의지하고 달려 있던 제 어버이 나무에서 떨어져 거센 바람이 모는 대로 저항 없이 굴러다니다가 우리 집 뜰에까지 왔겠거니 하니 어쩐지 마음이 회심(會心)해진다. 바람이 또 불면 다시 어디로 굴러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런 낙엽 지는 꼴이 보기 싫어서인지 나는 사철 중에 가을을 제일 싫어하나 보다. 포도를 걷다가도 가로수를 흔드는 바람세가 선들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봄을 밉고 가을은 싫다. 더도 덜도 말고 흔닢 나물이 바야흐로 퍼지려 하고, 두릅순이 연연하게 돌아나고, 채마밭엔 지난 가을에 심었던 마늘이 댕기 같은 잎사귀를 탐스럽게 쭉쭉 벋는 첫여름이 제일 좋고 차라리 눈 오는 겨울은 좋은데 가을철은 웬일인지 좋은 줄을 모르겠다.
내 사랑하는 조카 용자(龍子)가 간 것도 다 늦은 가을이었다.
남쪽이라 뜨락엔 석류가 빠알가니 열린 한낮, 수녀님의 인도함을 따라 그는 성모 마리아를 부르며 조용히 떠나갔다.
골롬바는 천당엘 갔다고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양지바른 곳에다 묻어 주고 나는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댕댕이덩굴을 걷고 들국화를 몇 송이 꺾어다 꽃방석을 틀어 무덤 위에 얹어 주고 무거운 걸음을 걸어 진실로 허무를 느끼며, 세상 모든 것에 이후부터는 결코 애착을 붙이지 않으리라고 저물어 가는 산과 들에 맹세를 하면서 돌아왔다.
스물두 살이나 먹어 가지고 이처럼 가슴을 뜯으며 보낼 줄은 몰랐다.
추야장 긴긴 밤을 나는 그리운 조카의 생시의 모습을 따라 헤맸다.
가슴을 파고드는 비애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서도 나는 용자를 부르면서 울었다.
누런 스웨터를 입은 경기여고 시절의 모습을 따라, 또 이화여전의 제복의 모습을 따라, 다시 출가 후의 긴 치마 입은 모습을 따라서 나는 미칠 것같이 헤매었다.
어머니를 따라, 사랑하는 동생을 떠나, 외로운 아주머니를 떠나 용자야, 너는 지금쯤 어디로 훨훨 가고 있느냐?
그 큰 허우대하고 낙엽처럼 어디로 혼자 떠나고 있느냐?
한밤중에 이는 바람 소리도 나는 이젠 무심히 들리지가 않는다. 이상한 소리를 품은 바람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베개에서 귀를 소스라뜨리며 행여 사람들의 죽은 혼이 밤이면 저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아닐까고 어리석은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