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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 1624년 경 ~ 1677년 7월 9일)는 독일의 가톨릭 사제이자 물리학자이다.
생애
1624년 12월 25일,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세례명 요한네스 셰플러(Johannes Scheffler)]는 오늘날 폴란드에 속하는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신교파와 구교파가 전쟁을 벌이던 30년 전쟁이 발발한 지 6년째 되던 해에 태어난 요한네스 셰플러는 아버지에게서 엄격한 루터파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다 1639년에 그와 두 어린 여동생은 아버지를 잃고, 2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다. 그리고 누구였는지 전해지지 않는 이의 도움을 받아 그는 브로츠와프의 엘리자베스 김나지움에 진학하게 된다. 그때 교사들은 셰플러에게 시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1643년, 열여덟 살이 된 그는 대학에 진학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학을 공부하려 한다. 고향의 대학에 1년간 머무르다 홀란드의 레이던(Leiden)으로 건너간 그는 약초학을 공부하는 한편, 신비주의자 그룹을 접하게 된다. 요한네스 셰플러가 태어난 해에 죽은 슐레지엔 지방 출신의 신비주의자인 야코프 뵈메(Jakob Böhme, 1575∼1624)의 저술을 접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는데, 이는 특별한 내적 사건이 되었다. 1648년, 마침내 30년 전쟁이 끝나 가고 그는 당시 체류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융성했던 도시 파두아(Padua)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자격을 취득하는 한편, 그 지방의 반 종교 개혁의 기운이 왕성한 가톨릭 신앙을 접하며 영향을 받게 된다.
1649년, 요한네스 셰플러는 25세의 나이로 브로츠와프의 대공 질비우스 님로트의 궁중의(宮中醫)가 되는데, 대공은 루터파 신앙을 견지하는 인물이었다. 대공의 곁에는 크리스토프 프라이타크라는 궁중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매우 강직한 태도로 루터파 교의가 잘 지켜지는지 관리 감독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1652년, 요한네스 셰플러에게 야코프 뵈메의 저술을 알려 주고 영적으로 이끌어 준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가 세상을 떠난다. 셰플러가 빛나는 영적 통찰과 직관으로 ≪방랑하는 천사≫를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시들을 그와 마찬가지로 신을 찾아다니는 이들에게 전달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 때문에 요한네스 셰플러는 루터파의 교리를 주관하는 권력, 이를테면 궁정 목사 크리스토프 프라이타크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를 위한 추모시>를 발표하고 신비주의 경향의 앤솔로지를 출간하려다 갈등을 빚으며 출판을 금지당한 일이었다.
1652년, 셰플러는 궁중의 자리를 내놓고 궁에서 물러난다.
1653년 6월 12일, 그는 브로츠와프의 성 마티아스 교회에서 로만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로 개명한다. 그의 개종은 큰 주목을 받았는데, 신교 측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게 되자 그는 개종의 변으로 가톨릭의 장점을 제시하며 자신을 옹호했다. 이때부터 그는 슐레지엔 지방의 반종교 개혁 운동의 선봉에 섰고, 마르틴 루터를 악마(Luzifer)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며, 죽을 때까지 반종교 개혁 진영에 서서 55편에 이르는 극도로 논쟁적인 글들을 발표하며 논쟁을 벌인다.
1654년,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명예 궁중의가 되고 로사리오 형제단의 일원이 된다.
1657년, 그의 대표작인 ≪방랑하는 천사≫를 첫 출간한다.
1661년에는 브로츠와프 주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1664년부터 브로츠와프의 후작 주교 제바스티안 폰 로슈토크의 대신(大臣)으로 봉직하다가, 그가 죽자 질레지우스는 공직에서 은퇴한다.
1675년에는 ≪방랑하는 천사≫의 6부를 마저 출간한다.
1677년 병고를 겪다 5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그는 죽기 전까지 성 마티아스 십자수도회에 머물며 신학 논쟁적인 글을 쓰고 프란체스코회원으로서 자선을 베풀며, 마지막까지 기도와 명상에 침잠하다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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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루스 실레시우스 OFM(,c. 1624년 ~ 1677년 7월 9일)은 독일의 가톨릭 사제, 의사, 신비주의자, 종교 시인입니다. 루터교 신자로 태어나 자란 그는 네덜란드 유학 시절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고 뵈메의 친구인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를 통해 독일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1] 실레시우스의 신비로운 믿음의 표시는 루터교 당국과 긴장을 야기했고 1653년 그가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이끌었고, 그는 안젤루스(라틴어로 "천사" 또는 "하늘의 전령")라는 이름과 "실레시우스"라는 별명을 채택했습니다.[2] 그는 프란치스코회 아래에서 신성한 명령을 받았고 1661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10년 후인 1671년, 그는 예수회 집으로 은퇴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2]
교회론 (1677)
열정적인 개종자이자 성직자였던 실레시우스는 실레시아의 독일 개신교인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도록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2] 그는 개신교를 비난하는 55개의 트랙과 팜플렛을 작곡했는데, 그 중 몇 개는 에클레시올로지아(Ecceliologia)라는 제목의 두 개의 폴리오 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주로 신비로운 시로 기억되고 있으며, 특히 1657년에 출판된 두 개의 시적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사용해 온 200여 개의 종교 찬송가 텍스트를 모은 'Heilige Seelen-Lust'(영혼의 성스러운 욕망)와 1,676개의 짧은 시를 모은 'Cherubinischer Wandersmann'('Cherubinic Pilgrim'), 대부분 알렉산드린 커플입니다. 그의 시는 정통 가톨릭의 맥락에서 신의 위대함, 삼위일체에 대한 신비한 해석, 조용한 관습, 범신론 등의 현대적 주제를 탐구합니다.[2]
인생
초기 생활과 교육
그의 정확한 탄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레시우스는 1624년 12월 실레시아의 수도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고 믿어집니다. 그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은 162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그의 세례를 등록한 것입니다. 그 당시 실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주였습니다. 오늘날, 이것은 폴란드의 남서쪽 지역입니다. 요한 셰플러 세례를 받은 그는 세 자녀 중 첫째였습니다. 1624년 2월에 결혼한 그의 부모는 루터교 개신교 신자였습니다.[3] 그의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 셰플러 (1562–1637)는 폴란드 혈통이었고 하위 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스타니슬라우스는 자신의 일생을 군대에 바쳤고, 보로비체의 영주(또는 보르비체)가 되었으며, 지기스문트 3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1] 아들이 태어나기 몇 년 전, 그는 크라쿠프에서 군복무를 은퇴했습니다. 1624년, 그는 62세였습니다. 아이의 어머니 마리아 헤네만(Maria Hennemann, 1600–1639)은 합스부르크 제국 궁정과 관련이 있는 지역 의사의 24세 딸이었습니다.[4]
셰플러는 브레슬라우에 있는 엘리자베스 체육관 (세인트 엘리자베스 체육관 또는 고등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초기 시는 이 형성기에 쓰여지고 출판되었습니다. 셰플러는 아마도 최근 출판된 시인이자 학자인 마틴 오피츠의 작품과 그의 스승 중 한 명인 시인 크리스토프 쾰러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4]
그는 그 후 1643년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 대학교(또는 스트라스버그)에서 1년 동안 의학과 과학을 공부했습니다.[1]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받아들인 루터교 대학이었습니다. 1644년부터 1647년까지 라이덴 대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야콥 뵈메(1575–1624)의 글을 접했고 뵈메의 친구 중 한 명인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1593–1652)와 알게 되었는데, 그는 아마도 그에게 고대 카발주의 글, 연금술, 해석학을 소개했고 암스테르담에 사는 신비주의 작가들을 소개했을 것입니다.[1][4][5] Scheffler가 네덜란드에 거주할 당시 Frankenberg는 Böhme의 작품 전집을 편찬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유럽의 다른 곳에서 박해받는 많은 종교 종파, 신비주의자, 학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4] 그리고 나서 셰플러는 이탈리아로 가서 1647년 9월 파도바에 있는 파도바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년 후, 그는 철학과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1]
의사
1649년 11월 3일, 셰플러는 뷔르템베르크-오엘스 공작 실비우스 이 님로드(Silvius I Nimrod)의 궁정 의사로 임명되어 175명의 탈러(Thaler)의 연봉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가 "좋은 자질과 의학에 대한 경험 때문에 공작에게 추천"되었지만,[1] 셰플러의 친구이자 멘토인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가 공작과의 친밀함을 고려하여 임명을 주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랑켄베르크는 공국 내의 오엘스 근처 루트비히스도르프 마을 출신의 소수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5] Frankenberg는 재작년에 그 지역으로 돌아갔습니다.[5] 또한 뷔르템베르크-오엘스 공작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셰플러의 처남 토비아스 브뤼크너가 셰플러를 추천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4] 셰플러는 루터교 교리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신비주의와 비판적인 견해(특히 아우크스부르크 고해성사와의 의견 차이)가 공작과 공작 법정 구성원들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에 곧 그의 입장에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작은 역사적으로 "열정적인 루터교 신자이고 매우 편협한 사람"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1] 공교롭게도 이때 셰플러는 신비한 환상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공적 선언과 함께 지역 루터교 성직자들이 그를 이단자로 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1652년 6월 프랑켄베르크가 사망하자 셰플러는 그의 자리를 사임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보호 아래 피난처를 구했습니다.[6]
사제와 시인
개신교 당국은 실레시우스를 물약, 묵주, 도박 카드와 주사위, 안경, 그리고 다른 부도덕한 물건들의 행상인으로 묘사한 Wohlverdientes Kapitel (1664)의 캐리커처와 같이 그의 가톨릭과 신비주의적인 믿음에 대해 비난하고 비난했습니다.[7]
제국의 개혁주의 국가들의 루터교 당국은 셰플러의 증가하는 신비주의에 관대하지 않았고, 셰플러는 이단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들(가톨릭 신자들)은 반종교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고 유럽의 재가톨릭화를 주장했습니다.[7] 셰플러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원했고 1653년 6월 12일 브레슬라우에 있는 성 마티아스 교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천사라는 이름을 얻자마자 그리스의 ἄγγελος(메신저)에서 유래한 라틴어 형태의 천사(Angelus)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그의 별명은 실레시우스(Silesius, 라틴어로 "실레시아"를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가 왜 이 이름을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그의 고향인 실레지아를 기리거나 가장 좋아하는 학자, 신비주의자 또는 신학자를 기리기 위해 이 이름을 추가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스페인의 신비주의 작가 후안 데 로스 앙헬레스(사랑의 승리의 작가)나 다름슈타트의 루터교 신학자 요한 앙헬레스(Johann Angelus)[1][4]와 같은 당대의 다른 유명한 작가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는 더 이상 셰플러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그의 이름인 요한을 사용했습니다. 1653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와 요한 안젤루스 실레시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654년 3월 24일 실레시우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궁정 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실레시우스는 제국의 재판소를 위해 비엔나로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루터교 공격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명예로운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가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의학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1]
1650년대 후반, 그는 빈과 브레슬라우의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그의 시를 출판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구했습니다.[1] 그는 어린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1641년과 1642년에 한 소년이 되었을 때 가끔 몇 편의 작품을 출판했습니다.[4] 그는 뷔르템베르크-오엘스 공작에서 일하는 동안 시를 출판하려고 시도했지만, 공작의 정통 루터교 궁정 성직자인 크리스토프 프라이탁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657년 가톨릭 교회의 승인을 받은 후, 그의 시집 두 권이 출판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알려진 작품인 Heilige Seelen-Lust (영혼의 성스러운 욕망)와 The Der Cherubinische Wandersmann (The Cherubinic Pilgrim)입니다.
1661년 2월 27일, 실레시우스는 프란치스코회 신자로서 거룩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3개월 후, 그는 성공적으로 재천주교가 된 지역이자 지역 내 두 개의 기독교 국가 중 하나인 나이세의 실레시아 공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의 친구 세바스티안 폰 로스토크 (1607–1671)가 브레슬라우의 주교가 되었을 때, 실레시우스는 그의 라순 호프마르샬 (상담가이자 체임벌린)로 임명되었습니다.[7] 이 시기에 그는 루터교와 종교개혁을 공격하는 50여 편의 글을 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에세이 중 39편은 나중에 에클레시올로지아(Ecclesiologia, 1676)라는 제목의 두 권의 폴리오 모음집으로 편찬되었습니다.[2]
죽음.
1671년 브레슬라우의 주교가 사망한 후, 실레시우스는 브레슬라우에 있는 성 마티아스 교회와 관련된 예수회 집인 붉은 별이 있는 십자가 기사회 호스피스(Matthias stift)로 은퇴했습니다.[2][4] 그는 1677년 7월 9일에 사망했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어떤 소식통들은 그가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그의 병을 "낭비성 질병"으로 묘사합니다.[1]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의 개신교를 비난하는 몇몇 사람들은 실레시우스가 목을 매 죽었다는 사실이 아닌 소문을 퍼뜨렸습니다.[4]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아버지의 고귀한 재산에서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을 고아원을 포함한 경건하고 자선을 베푸는 기관에 분배했습니다.[2]
중요성
Des Angelus Silesius Cherubinischer Wandersmann (1905)
그의 작품 해석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시는 주로 바로크 시대에 독일 시와 신비주의 문학을 지배했던 양식인 알렉산드린 커플트 형태의 경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 베이커에 따르면, 에피그램은 신비주의를 전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함과 날카로움에 대한 경향이 있는 에피그램은 신비주의적 경험의 비효율이라는 미적 문제에 대처하기에 적합한 장르이기 때문입니다."[8] 백과사전 æ 디아 브리태니커 11판은 이 경구들을 림스프뤼슈(Rimsprüche) 또는 운율적인 디스트리흐(hymmed distichs)로 식별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야콥 뵈메와 그의 추종자들의 글에서 주로 그려진 이상한 신비주의적 범신론을 구현하는 것. 실레시우스는 신비주의의 미묘한 역설 속에서 특히 기뻐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주장했고, 신은 자신보다 열등한 것은 사랑할 수 없지만, 외출하지 않고는, 말하자면 자신의 무한성을 유한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고는, 다시 말해 인간이 됨으로써 자신에게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9]
실레시우스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물질적 또는 육체적 욕구와 인간의 의지를 회피함으로써 원하는 영적 상태, 즉 영원한 고요를 향한 길을 모색하도록 지시합니다. 아포파적 신학과 대립과 역설의 개념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10] 범신론 또는 범신론과 경계를 이루는 실레시우스의 몇몇 저술과 신앙은 실레시우스와 지역 개신교 당국 사이의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케루비니셔 완더스만에 대한 소개에서 그는 가톨릭 정통의 틀 안에서 그의 시(특히 그 역설)를 설명하고 가톨릭 교리에 위배될 수 있는 범신론을 부정했습니다.[2]
그의 신비주의는 유명한 작가 마이스터 에크하트 (1260–1327), 요하네스 타울러 (1300–1361), 하인리히 수소 (1300–1366), 얀 반 루이브뢰크 (1293/4–1381) 뿐만 아니라 뵈메와 프랑켄베르크의 영향에 의해 알려졌습니다.[4] 비평가이자 문학 이론가인 게오르크 엘린저는 실레시우스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그의 시는 (특히 그의 부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외로움, 통제되지 않은 충동, 그리고 개인적인 성취의 결여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했습니다. 그의 시의 많은 부분을 고백적으로 만들고 내적인 심리적 갈등을 보여줍니다.[11]
찬송가에 사용
실레시우스의 몇몇 시들은 개신교와 가톨릭 예배에서 사용되는 찬송가로 사용되거나 각색되었습니다. 많은 초기 루터교와 개신교 찬송가에서 이 가사들은 개신교에 대한 비판과 옹호로 유명한 가톨릭 실레시우스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익명"에 기인합니다.[6] 많은 경우, 실레시우스의 구절은 "익명의" 또는 "I.A."에 기인합니다. I.A.가 Iohannis Angelus의 라틴어 이니셜인 반면, 그것들은 종종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의미하는 Incerti autectris로 잘못 해석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몇 개의 진정한 익명의 작품들은 나중에 같은 모호한 이니셜 덕분에 실레시우스에게 잘못 귀속되었습니다.[6] 뉘른베르크 게상부흐(1676), 프릴링하우젠의 게상부흐(1704), 포르스트의 게상부흐(1713), 부르그의 게상부흐(1746)에 실린 찬송가 가사에 실레시우스의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의 구절을 사용한 79개의 찬송가들은 니콜라오스 진젠도르프의 그리스도-카톨릭 노래 벳뷔클라인 (1727)에 포함되었습니다. 18세기 동안, 그것들은 루터교, 가톨릭, 그리고 모라비아 교회에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6] 이 찬송가들 중 많은 것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 교회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대중문화에서
브로츠와프의 기념물
1934년, 휴고 디슬러는 케루비닉 순례자의 텍스트에 토텐탄즈의 14개 모테트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시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시에테 노체스("Seven Nights")(1980)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시의 본질을 실레시우스로부터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17세기에 안젤루스 실레시우스라는 이상하게 현실적이고 시적인 이름을 사용한 시인의 훌륭한 대사로 마치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밤 제가 말한 모든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가 추론과 모의 추론을 통해 말한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스페인어로 먼저 말하고 독일어로 말하겠습니다.
포케에서 라로제; 포케 포케 포케 포케 포케.
Die Rose isothne warum; sie bluhet weil sie bluhet.[12]
그가 인용한 대사는 Die Rose는 ohne warum 입니다. sie bluhet, weil sie bluhet... 실레시우스의 '케루빈 순례자'(1657)에서 "장미는 '어디를 위한 것'이 없다. 그녀는 꽃을 피웠기 때문에 꽃을 피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의 영향은 보르헤스의 작품, 특히 실레시우스와 그의 작품을 자주 언급하는 그의 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13]
이 같은 대사는 마틴 하이데거(1889-1976)의 작품에서 자주 언급되었는데, 그는 (라이프니츠와 헤겔의 작품을 바탕으로) 그의 많은 작품에서 신비주의를 탐구했는데, 그는 진리 이론을 경이롭고 이성적인 설명을 무시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14] 하이데거는 실레시우스의 동시대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1646–1716)의 이성 철학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신비주의의 시를 "아름답다"면서도 "비범하게 대담하다"고 불렀습니다. 실레시우스의 신비주의가 라이프니츠의 원칙적인 적색화에 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비유들로 가득 차 있고 거의 신이 없는 것으로 기울어진"[15][16] 것은 충분한 이성의 원리입니다.[16]
이 영화의 가학적 적대자인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1991년 미국 영화 케이프 피어에서 맥스 캐디(로버트 드 니로 분)는 실레시우스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17]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0. 이치빈 위 고트, 언 고트위치.
Ichbin so gro ß gott, eristic so klein:에르칸 니치트 über mich, Ichunteri micht sein.[18][19]
나는 하나님과 같고 하나님은 나와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처럼 크고, 하나님은 나처럼 작습니다.
그는 나보다 위에 있을 수 없고, 나보다 아래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영화에 사용되는 영어 번역
그러나 영화에서 이 대사의 맥락은 안젤루스 실레시우스가 의도한 의미와 모순됩니다. 막스 캐디는 신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실레시우스의 시를 인용하여 의도된 희생자들에게 개인의 의지의 힘과 폭력적인 복수를 실행하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강조합니다. 실레시우스가 의도한 맥락은 신과 동일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는 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영적 잠재력, 즉 신과 동등한 존재로서 신과 직접적인 사랑의 교감을 경험하는 신비로운 신적 연합 또는 신의 의미에서 동일한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9]
작동하다
1674년판 데르 케루비니쉬 반데르스만의 제목 페이지
시
1642년: 보너스 콘실리어리우스 (트랜스). 좋은 상담가)
1657년: 하일리제 실렌-러스트, 아이렌 제슘 벌리베텐 프시케의 가이스틀리케 히르텐 리에데르 (트랜스). 영혼의 거룩한 욕망, 또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에 있는 목자의 영적인 노래)
디클리벤, 마이네 슈테르크
미르나흐, 프리히트 크리스투스, 언서 홀드
모르겐슈테른 나흐트
1657: Geistreich Sinn-und-Schlussreime zur göttlichen Beschaulichkeit (트랜스). 1674년 제2판에서 데르 체르비니슈 완더스만(Der Cherbinische Wandersmann)으로 개명된 "신의 평온에 대한 종말론적 경어" 또는 "신의 평온에 대한 종말론적 경어"(Witty Aporism in End-Rhymes to Divine Tranquity). 케루빈 순례자)
1675년: Druck Geeben에서 Sinnliche Beschreibung der vierletzten Dinge, zuheilsamen Schröken und Auffmunterungaller Menschen inn. Mitterhimlischen Procession vermehrt, &c. (트랜스) "마지막 네 가지를 감각적으로 표현..."
신학문과 논설.
편집하다
1653년: 그룬틀리치 우르사헨 폰 모티븐, 워럼 에르반 뎀 루터엄 abbgetten, undich zu der Catholischen Kyrchen bekennet모자. (트랜스) "왜 루터교에서 벗어나 가톨릭교회에 고백했는지 그의 동기에 대한 철저한 검토")
1663년: 튀르켄슈리프 폰덴 우르사헨 데어 튀르키셴 위베르지흥. (트랜스) 터키인에 관한 글: 터키 침공의 원인 중")
1664년: Kehr-Wishch Zu Abkehrung des Ungeziefers Mitwelchemine wolgemeint Tückenschrifft Christianus Chemnitius who wollen verfast machen. (트랜스) "크리스티누스 켐니티우스가 터키인에 대한 그의 선의의 글을 채우기를 원했던 헛소리의 소탕")
1664: Zerbrochen Triumps-Wagen auff 웰체머 Uber die Luther triumphirendeinzufahrenim im Traumvorkommen lassen. (트랜스) "부러진 승리의 마차, 그는 루터교인들에게 그것이 꿈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1664년: Christen-Schrifft Von demherlichen Kennzeichen de ß Volkes Gottes. (트랜스) "기독교 경전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랑스러운 표식이라는 것")
1664년: 언 셰플러 리데트노치! 다 ß주의자 요하니스 셰플러스 슈츠-레드 퓌르시쿤다인 크리스텐-슈리프트. "그리고 셰플러는 여전히 말을 합니다! 요한 셰플러가 자신과 그의 기독교 경전을 위해 한 보호 연설")
1665년: 코메테른과 세헤트미트 베르뉘프티겐 오겐비 요제프와 카톨리셴 게흐레트 너머의 헤이겐 사망. (트랜스) "이리 와서 보라, 천주교인들이 요셉과 성자로 합당한 눈으로 찬미하소서")
1665년: 칼뱅리스텐 아브고트 데어 버넌펜트블뢰스세트 다르게스텔트 박사. (트랜스) "루터들과 칼뱅주의자들이 보여준 이성의 신은 비난했습니다.")
1665년: 귈덴-그리프 벨처 게슈탈트알레 케체라우치 폰 뎀 웅겔레르테스텐 라이히틀리히 쾨넨 게마이스터트렌.
1666: 데스 뢰미셴 바피스트 오버하우프트만샤프트 über die gantze all gemeine Kirche Christi. (트랜스) "그리스도 교회 전체에 대한 로마 세례자들의 리더십")
1667년: 요하네스 셰플러스 그룬들리체 오 ß 후룽 다 ß는 루터교 아우프케인의 바이스노흐베헤렌 글라우벤 인더 쉬리프츠 자이겐 베르뫼겐 운디히르 고테인 꽃피는 완 빌트오더 딩기러 베르운프티세이. (트랜스) "루터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단순한 환각이나 이성의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경전에 대한 믿음의 통로가 없는 철저한 대처")
1670: 슐레지엔데르의 쿠르트제 에외르테룽 데어 프리지 오브 디 루터교 인 인스트루멘토 파키스데넨 아우크스부르크히센 고백-베르반텐 베리에헤넨 종교-프레이헤이트 게트로스텐 쾨넨. (트랜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평화의 도구로 주어진 실레시아의 루터교인들과 종교적 자유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짧은 토론")
1670: Christiani Concensitiosi Sendschreiben An Ale Evangelische Universitäten in Welcher seine Gewissens-Scrupel proponirt. (트랜스) "모든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그가 양심의 가책을 제안하는 모든 개신교 대학에 보내는 편지")
1671: 요한 셰플러스 에르웨이 ß 다 ß 데어 그뢰스테 하우페 디 리히테 키르체시; 운만시치 쿠르트줌 주 데어 카톨리셴 키르체베벤 무스 여자 위그 셀리베르덴 윌. (트랜스) "진정한 교회가 가장 위대한 집이라는 요한 셰플러의 지식 - 당신이 영원히 축복받을 가톨릭 교회에 가는 것")
1672: J.E. Information Schreiben Wegen des Feuers a EV. Welchemun überwindlicherwiesen wird da ß merhals zwey Orte der Seelenach dem Tode under Fegfeuersey. (트랜스) "순교에 관한 유익한 편지로, 죽은 후 영혼의 두 곳 이상과 연옥을 극복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1673: Hierothi Boranowsky Gerechtfertigter Gewissens-Zwang Oder Erwei ß 다 ß의 남자 die Ketzer zum wahren Glauben zwingen kön und solle (트랜스) Boranowsky의 "양심의 정당한 강요" 또는 이단자들을 진정한 믿음으로 강요할 수 있고 강요해야 할 것에 대한 지식")
1675: 요하네스 셰플러 알레니게스 그[m]elreich Dasist Abweisung Des Schädlichen Wahnsda ß 남자 wol Seeligwerden könne wenn mangleicht Catholisch wird. (트랜스) "요한 셰플러의 천국은 가톨릭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해로운 망상을 거부합니다.")
1675년: D. J. Schefflers Vernünfftiger Gottes-Dienst. (트랜스) "J. Scheffler의 신에 대한 합당한 봉사")
1675년: Catholisch gewordene Bauer Und Lutherische Doctor (트랜스). "가톨릭 신자는 농부가 되고 루터교 의사가 됩니다")
1677년: 에클레시올로지아 오데르 키르체-베슈라이붕. (트랜스) "교회의 말씀, 혹은 교회의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