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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박정희 대통령--첫아내 김호남과 애인 이현란 편
사도 추천 0 조회 45 13.11.27 2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간 박정희와 애인[이현란 편]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케네디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애인[이현란 편]



1947년 가을 춘천에서 8연대 경리장교 박경원(육군중장, 내무부 장관 역임)대위가 결혼식을 올렸다. 사관학교 중대장 박정희는 친 구들과 함께 하객으로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박정희는 박경원보다 여섯 살이 많았으나 "박형"이라 부르면서 접근하는 박경원과 친했 다. 이 결혼식의 신랑측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였고 신부 고금옥의 들러리는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김점곤은 그날 밤 이 현란과 하객들 하고 유쾌하게 놀았다. 이현란은 미인이었다. 몸매 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 데다가 성격이 쾌활했다. 나 이는 김점곤보다 많게 보여 친구들이 "다른 건 다 맞는데 나이가 안맞는군"이라고 농담도 했다. 몇 달 뒤 김점곤은 용산에 있는 육 군장교 관사로 박정희 대위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 들러리 아가씨가 박대위와 같이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주 예비 군관장교때 박정희                

 

           만주 군관학교 졸업식때 대표로 경례하는이가 박정희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시절 박정희 대통령            

 

    육군군본부 근무시절 박정희 ---이때 이현란을 만나고 어머니 마져 돌아가시고...여순반란사건때 남로당(남조선로동당 연맹) 가입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면하고 무기징역에서 집행면제로 풀려나와 군복을 벗어야 했던 박정희의 어렵고 힘든 시절이였다...             


놀란 것은 박경원도 마찬가지였다. 박경원도 결혼한 뒤에 용산 관사에서 살림을 차렸다. 이 관사촌은 미군들이 사용하다가 철수한 뒤 우리 장교들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서양식을 한국식으로 개조하 여 온돌과 장작아궁이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 한 집에 방이 서너개 있는 좋은 집이었다. 박경원이 하루는 퇴근하여 오니 아내 고금옥 이 말하는 것이었다.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친구가 아무래도 박정희씨와 같이 살 고 있는 것 같아요.".

고금옥은 원산에서 출생하여 루시여고를 나온 뒤 교사생활을 잠 깐 하다가 월남했다. 이현란과는 여고시절 동창 사이였다. 박경원 은 섭섭했다.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 왜 나에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더구나 한 3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관사인 데. 다음날 박경원 부부는 박정희의 관사를 찾아갔다. 이현란은 정 말 미인이었다. 박정희-이현란은 원만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가 아무 내색도 하지않고 박경원 부 부를 맞아주니 이쪽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두 박 대위는 그냥 세 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고금옥과 이현란은 부엌에서 무어 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박경원 대위는 짚이는 데가 있어서 같은 경리장교인 이효에게 물어보았다. 이대위는 껄껄 웃으 면서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함남출신인 이효는 사관학교 2기생으 로서 박정희와 동기였지만 나이는 다섯 살이 많았다. 이효는 2기생 들 가운데 최연장자였다. 박정희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기 때문 인지 두사람은 생도 시절부터 친했다. 이효 장군은 몇년 전 작고했 는데 부인 우정자(81세) 할머니에 따르면 박정희는 생도시절에도 신당동에 있던 이효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그분은 이야기를 아주 구수하고 재미있게 하셨어요. 자기 자랑 을 전혀 안하시는 분이라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현란은 남편의 조 카와 함께 영어학원에 다녔다고 해요. 우리 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 습니다. 들러리를 서게 된것도 남편이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효 대위가 박경원 대위한테 털어놓은 사정은 이러했다.

"당신 결혼식 날 우리끼리 한 잔 했지. 그 자리에서 박정희가 내게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형, 나도 혼자서 쓸쓸하게 지 내는데 아까 들러리 섰던 아가씨 하고 잘 좀 되도록 도와주시오'.

그래서 내가 소개시켜주었지.".

그때 스물 두 살이던 이현란은 고향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 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화여대에 보존되어 있는 이현란의 성적표를 보면 율동과목의 점수가 가장 높다(79점). 이현란은 생전증언(1987년)에서 '나는 그때 이화여대 다닙네 해서 포부도 크고 전성기였다'고 말했다. 화사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이현란은 토요일 오후에 이효 대위가 자꾸 나가자고 해서 명동 삼호정에 갔다고 한다.

"윤태일, 이한림, 이주일 등 몇 사람이 미리 와 있었습니다. 나 는 부끄러워서 말대꾸도 못하고 구석에 앉아 있는데 미스터 박이 소개되었습니다.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이 없었습니다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그런지 박력과 기품이 있었습니다. 그 뒤 미스터 박 은 일요일만 되면 기숙사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부모들은 북 에서 못나오시고 해서 저는 있는 돈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형편에 미스터 박이 침착하고 저에게 잘 해주니 여자로서 끌렸습니다. 좀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 도 있었지만 양쪽이 다 부추겨서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현란은 은사의 도움을 받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등록금을 마 련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이현란은 1948년에 들어서 약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 독일에 간 친구 하나만 참석했어요. 피아노책을 사려고 기숙사에서 나오는데 미스터 박이 '이의 없죠?'라고 해요. 저는 부 끄러워서 대답도 못했는데 그걸로 응한 걸로 되었습니다. 가 보니 여러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명동의 한식집인데 너무 당황해서 간판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 친구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있었던 줄 알았나봐요.".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자신이 이미 장가를 들어 열 살이 넘은 딸 까지 두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즈음부터 본처 김 호남과 이혼을 하려고 애쓴다.

 

큰 딸 박재옥의 기억 .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오셨습니다. 집안 어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하셨는데 아마도 이때 이혼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 다. '너희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에 딴 여자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쩐지 내가 이 집 식구가될 수는 없을 것 같구나'라고 하 셔요.".

 

 

박정희대통령 첫부인 김호남 여사가 몸을 숨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첫 아내인 김호남 여사가 60대이던 시절의 사진        

 

       원내의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 첫아내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딸 박재옥 이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옛 모습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서울시청앞에서 좌측의 박종규 소령과 우측의 차지철 대위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박재옥은 "엄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하고 물었다.

"이혼을 한다는 거지."
"엄마 이혼이 뭐예요."
"이제 너희 집에서 못살고 쫓겨나게 된 거야.".

그러면서도 김호남은 "절대로 내 손으로는 이혼을 안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이 썩었으니 자기도 당해봐야 돼"라고 했다.

박정희 대위가 여덟 살 아래인 이화여대 1학년생 이현란과 사귀면서 본처 김호남의 소외는 더욱 깊어졌다. 이런 사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이 열한 살의 큰딸 재옥이었다.

'내 가슴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이 충격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엄마가 최고인데… 예쁘고 날씬하고 나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그 뒤로는 어머니가 어 디 가신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안해졌다. 이 혼하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어머 니와 나의 애처로운 모습에 할머니는 얼마나 속을 끓이셨는지 모른다. 아들을 대놓고 나무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머니를 마냥 잡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할머니 입장이었다. '불쌍한 내 새끼. 사촌형제들 사 이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축 처진 내 모습을 볼 때 마다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는 늘 무언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사촌들이 볼세라 내 입에 슬쩍 넣어주 시곤했다. 감이 하나 있으면 할머니는 화로의 재속에 파묻어두었다가 내가 혼자 방에 들어가면 재를 걷고서 뜨뜻해진 감을 꺼내주시는 것이 었다.'.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그때 일흔을 넘긴 나이였다. 늘 막내 며 느리의 음식솜씨와 바느질이 최고라고 칭찬했지만 김호남에게는 큰위로 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재옥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다섯 살때까지 젖을 먹었다. 남편의 사랑을 잃은 김호남의 딸에 대한 집착, 그런 어머니에 대한 딸의 집착도 그만큼 강했다. 김호남은 이윽 고 박재옥을 데리고 구미를 떠버렸다. 죽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에게 만 이야기하고 사라져 버렸다. 백남의 할머니는 며느리와 손녀를 찾아 헤맸으나 알 길이 없었다.

 

박재옥에 따르면 모녀는 대구로 갔다고 한다.

'대구로 가보니 어머니에게도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나이에 비 해서 조숙하고 눈치가 빠른 나는 대번에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상황이 싫었다. 결사적으로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반기를 들었다. 열살 남짓한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거부 의 표시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조리 있는 말로 어머니를 설 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울었다.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 이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48년 조선경비사관하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현란과 약혼한 박정희 대위는 곧 이현란을 용산의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하기 시작 한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여름방학 때는 대학 기숙사를 비워 주어야 하는데 마땅히 머물 곳도 없어 친구와 함께 박정희의 관사를 쓰 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다는 친구는 나타나지 않아 혼자 쓰고 있는데 한 20일이 지나 박정희가 관사로 들어왔다. 박정희가 자신을 '계획적으로 관사에 오게끔 했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이현란 은 이 관사를 나와 친구 집으로 옮겼는데 "명동에 칼국수를 먹으러 갔 다가(박정희에게)들켜서 다시 관사로 잡혀왔다"고 한다.

"맨날 피했다가 들켜서 다시 관사로 오곤 했습니다. 그분은 신사 였습니다. 내가 나이가 어린데도 '식사하쇼'라면서 존대를 했습니다. 인격있고 무게 있고 말이 없고… '내가 말이 없어 재미 없지요'라고 하 기에 '말이 핀꽃에 열매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은 술은 노상 마셔도 정신은 항상 말짱했어요. 자세가 흩어지지 않고요. 내가 술을 싫어하니까 집에서는 안마셨어요. 술 한 상이라도 우리 집에서 받 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누가 오기만 하면 벽장에 숨어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다칠까봐 했던 때이니까요. 그분은 일본교육을 받은 탓에 독한 사람이었지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자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데 철두철미했어요. 그 이상 다정다감할 수 가 없었습니다.".

이때 박정희는 이현란 몰래 사라진 김호남과의 이혼수속을 하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김호남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거절하고 어디론가 가버린 데다가 김호남의 아버지도 딸을 대신하여 도장을 찍어 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있으 면서 한편으로는 좌익에 빠져들고 다른 편으로는 이현란이란 미인을 만나 난생 처음으로 연애를 체험하고 있던 1948년 여름 뭉게구름이 모여 들더니 폭풍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해 8월17일 윤희중외 2백18명 의 7기 특별반 사관후보생들이 입교했다. 이들은 거의가 일제시대에 군 간부로 근무하였던 경력자들. 일본 육사58기 출신인 정래혁(육군중장 예편·국방장관과 민정당 대표 역임), 박정희의 만주군관 학교 동기 이 주일(감사원장 역임)도 이때 들어왔다. 8월20일 이들 생도는 완전무장을 하고 태릉 학교 근처의 산을 돌아오는 10㎞의 구보를 했다. 여기서 민영식 서청하 생도가 일사병으로 죽었다. 그해 8월1일로 소령으로 승진하였던 박정희 중대장은 사고의 책임을 지고 직위해제되고 말았다.

군내의 남로당 조직에 깊숙이 빠져 있던 박정희 소령은 북한 공산주 의를 체험하고 월남한 만주군관학교 선배 최창윤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최창윤은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월북했다가 김일성 일당의 행태를 가까이서 본 뒤 절망한 과정을 설명했다. 최창윤, 박창암, 박임항, 방원철 등 만군출신장교들은 해방 직후 박승환을 중심 으로 서울에 모였다가 여운형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의 인민군 창설에 참여하기 위하여 1946년 초에 월북했었다

여순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지자 최남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체포되었다. 최창윤에 의한 설득 때문에 마 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반란사건을 맞아놓으니 진압군도 아니고 반란군 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소령의 체포에 대해서는 용산관사에서 동거하던 이현란의 증언이 실감난다.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효대위(편집자 주-- 박정희를 이현 란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가 찾아왔어요. 술을 마신 모양인데 저에게 돈을 얼마 주면서 당분간 기다리라고 해요. 미스터 박이 출장갔다는 겁 니다. 그랬다면 아래 채로 전화를 했거나 메모라도 전해왔을텐데 밤새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다음날 강문봉 대령 부인에게 찾아가서 물었더 니 부인이 "아직도 몰랐느냐"면서 남편을 불러서 (체포사실을)알려주는 거예요.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릴 정도로 쇼크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사에 왔다갔다 했습니다.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는 저로서는… 이북에서 그게 싫어 왔는 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얼마 후 (수사담당자) 김창룡이가 찾아와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의 메모도 전해주었습니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육사7기생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를 하고 아침에 국방부로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타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아는가.' 그러나 난 괘씸했 습니다'.

숙군수사팀에 구속된 박정희 소령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이현란에게 쪽지를 써 고백한 내용 -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는 데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여덟 살 아래인 그녀 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만약 이때 이현란이란 여인이 없었 고 박정희가 달아났다면 그의 생애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했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동 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 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애절한 고백은 그러나 '빨갱이가 싫어서 월남했는데 빨갱 이 마누라라니'하면서 배신감을 가누지 못했던 이현란에게는 효과가 크 지 않았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구속된 얼마 뒤 조카 박재석과 한 여인이 서울로 올라와 관사로 찾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이 현란에게 "재옥이 엄마(편집자 주-박정희의 본처 김호남)가 알게 될지 모르니 서대문형무소에 면회를 다니지말라"고 하더란 것이다. 박재석과 같이 온 여인은 박정희의 죽은 형 박상희와 친한 서울 여자였는데 이현 란을 보고서는 "이렇게 참한 색시가 어쩌나"라면서 김호남이 가출한 이 야기,박정희가 이혼수속을 하려고 했으나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현란은 이때 처음으로 박정희가 결혼하여 열한살 딸이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포되기 전 어느 날 박정희는 이현란의 손을 잡고 한참 쳐다보더니 "참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의아했는데 일이 닥 치고보니 '말 못할 사정'을 전달하려 한 것임을 알았지만 이현란은 '배 신감으로 용서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아내로 맞을 때 암시를 주었어야지. 장가를 가서 아이까지 낳았 다고 하니 정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성의 '이'자도 모르는 여자인데 도저히 이해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
.....

박정희가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와 민간인 신분으로서의 박정희의 가정 생활도 서서히 파국로 치닫고 있었다. 이현란과의 싸움은 박정희가 손찌검을 하는 정도로 발전하여 용산의 관사 촌에서도 알려지고 과원들도 짐작할 정도였다. 이현란이 멍이 든 얼 굴을 하고 다니고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현란은 1950년2월 6일 밤에 몰래 관사를 나와 박정희와 영원히 헤어진다. 두 사람은 싸 움을 한 후인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박정희는 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자는데 이현란은 메모를 써놓고 몸만 빠져나왔다는 것이다.메 모의 내용은 '그동안 고마왔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나를 찾으러 오면 투신자살하겠어요'라는 요지였다.

이현란이 며칠 뒤에 나타나서 자신의 소유물을 싣고 가는 것을 목 격한 사람이 있다. 같은 과에서 근무했고 같은 관사촌에 살던 한무협 대위였다. 1950년에 첫 봄비가 내린 날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저녁 에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짐 실은 트럭을 타 고나오는 이현 란을 보았다. 두 사람은 트럭을 가로막고 "가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트럭은 돌진하여 한무협은 몸을 급히 피하여야 했다고 한다.

박정희에게 이현란의 가출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격이 서로 강 해서 자주 부딪히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한 쪽은 박정희 였다. 이현란의 박정희에 대한 정은 냉담해갔지만 박정 희의 그녀에 대한 연정은 그럴수록 더 절박해졌다. 군인직업과 어머니와 미래까지도 모두 잃었던 박정희가 붙들고 있던 유일한 끈은 이현란이 었다.그녀가 떠난 것이다. 박정희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넓은 관사에 혼자 남게 되었다. 서른세 살의 홀아비가 된 것이다. 박정희가 친구들을 배신하여 살아 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의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 했다. 박정희도 자격지심에서 사람접촉을 피했다. 어머니도, 친구도, 연인도 떠난 1950년의 봄은 박정희의 생애에서 최악의 나날들이었다.

이때의 박정희를 아주 가깝게 관찰한 것은 육사2기 동기생인 한 웅진중령이었다. 당시는 이름이 한충렬이었던 그는 한웅진으로 개명 할 때 박정희와 의논할 정도로 형제처럼 가까웠다. 3연대 3대대장으 로서 지리산에서 여순14연대반란사건의 지휘자 김지회 홍순석을 사 살한 한웅진은 중령으로 특진하여 정보국 산하의 방첩부대(CIC)본부 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부대는 조선호텔 건너편에 대륙공사란 회사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었다. 보안사의 전신인 이 조직은아직 독립 부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한웅진은 방첩수사 책임자로서 박정희를 마음놓고 만날 수 있었고 박정희는 동생처럼 아끼던 네 살 아래의 한웅진을 하나의 보호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웅진은 결혼하여 전주에 집이 있었지만 이때는 경교장 근방의 언덕바지(옛 고 려병원근방) 2층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퇴근한 뒤에 이 하숙집에 자주 놀러 왔다.

한웅진의 생전(생전)증언-.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기어들 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 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 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 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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