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의 깊은 회의로 상처받을대로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달래주려는듯 비장의 카드를 선보였다.
허정무감독체제다. 이체제는 허정무가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 국가대표전체를 운영하는 단일화된 계획이다. 그러나 그것은 협회의 간계였다. 생각없는 한국축구의 대명사 허정무.
당시 국대들은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모이면 러닝이었다. 전술이 뭔지도 모르고 뛰었단다. 전술에 대한 주문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은 항상이겼고 일본에게도 쉽게 지지 않앗던 우리 태극전사들의 능력과 투지에 난 머리숙여 존경의 뜻을 표한다.
99년 나이지리아 청소년대회
얼마전 한국의 영웅 이동국, 김은중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갔다.
이때도 4강신화의 재현이 목표였다.
그러나 보았던가 우루과이 애들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던 참으로 좇같았던 경기를 말리라는 들어보도 못한 나라에게 0-2로 무릎꿇었던 기억을
이동국이 조기축구 총무보다도 못해보이던 그때의 경기를 기억할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이대회 준우승을 한다. 우리는 허정무처럼 머리에 아무생각없이 그 놀랄만한 일본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감독은 허정무는 아니었다. 오해없길 바란다.
조영증감독으로 기억된다. 잘 기억이 안난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의 내속은 어땠을지 여러분도 이제 이해하리라 믿는다. 글초기에 질곡이라는 단어를 왜 사용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허정무는 98대회이후 여러개의 큰 국제대회를 조중연 전무와 합작 말아먹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든 평가전만은 일품이었다. 큰대회를 앞두고 초대해서 가지는 평가전에서는 항상 최고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우린 유고, 나이지리아,라는 세계강국을 데리고 평가전을 치뤘다.
나이지리아를 5-1로 꺽기도 했다. 유고를 2-0으로 깨구락지 시키기도 하였다. 혹자는 지금 국대의 평가전 성적과 그때를 비교하면서 똑같은 일이 벌어질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란것을 후에 언급하겠다.
올림픽이었다.
이제는 안속는다^^ 못갈줄은 알았다.^^
그래두 우리 태극전사를 외면할수는 없었다. 이게 정이다. 정은 정말 무섭다.
첫경기 스페인 0-3패
그 동안의 국제대회에서 깨지는 모습의 재방송이다 과정도 어찌나 똑같은지 정확히 전반 15분에서 25분사이에 한골을 먹는다. 그때부터는 니들 맘대로다 맘만 먹으면 들어간다. 때로 오대영이되고 때론 삼대영도 된다.
모든 큰경기를 회고해봐라 이시간대를 우린 버텨낸적이없다. 진짜다
어떤경기든 이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우리는 그만큼 실력이 없었다.
둘째경기 남아공 승
이겼단다. 페널티킥으로
세째경기 칠레 승
이겼다. 그러나 의미없었다. 첫경기 3점실점이 우리를 결국 탈락시켰다
칠레는 이날 모든 선수를 빼고 대충했다 8강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진정한 의미의 승리는 아니었다.
허정무는 국제대회에서 2승을 거두웠다고 우기면서 운없어서 떨어졌다고 감독을 계속 해먹기 시작했다. 짜증 이빠이였다. 한마디로........
마지막으로 그해가을 아시안컵에서 허정무는 4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게 개쪽을 당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얼마나 무능한 감독이었다라는 것을........
이대회가 끝난후 거대한 국가 장례식이 있었다.
한국축구가 이제 실망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이다.
안티축협이라는 사이트가 생겨났고 네티즌 사이에서는 축구협회운영진의 퇴진을요구하는 소리없는 데모가 일어났다.
엠비씨는 유시민의 시사프로토론에 이례적으로 "한국축구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으로 토론까지 벌였다.
축구협회는 마지막 카드를 빼어든다. 그 당시 깨어있는 축구인으로 평가받던 세종대교수 이용수위원을 총 지휘관으로 앉혀 여론을 죽이고 외국감독 영입에 온힘을 기울인다.
감독 물망에는 98 4강신화 크로아티아의 블라제비치, 지금의 중국감독 밀루티노비치 그리고 히딩크였다.
서유럽을 선호하는 이용수는 히딩크를 선택한다. 그리고 히딩크도 한국을 선택한다. 한국축구의 큰 새로운 변화점이 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