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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유치 건의안 제출
박종규위원장은 1979년 2월 체육회장 겸 KOC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조상호 김세원의 두 전직대사를 부회장으로 맞아들여 스포츠외교력을 강화하고, KOC 안에 실무연구반으로 전문위원실을 설치, 올림픽유치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3월에는 제24회 올림픽 서울유치건의안을 문교부에 제출했다.
문교부는 정책적인 뒷받침을 위해 올림픽유치에 필요한 경기장과 숙박시설, 운송수단을 비롯하여 대회유치에 따른 득식 및 가능성 등에 대한 구체적인 보완자료를 제출토록 KOC에 요구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외무부등 관계기관의 의견도 청취했다. 주일대사관을 통해 일본의 64년 도쿄올림픽 관련자료를 수집해 자체적인 검토를 하기도 했다.
문교부는 79년 8월 3일 올림픽 유치 문제를 국민체육진흥심의위원회에 상정했고, 이 심의위원회는 안건의 중요성을 감안한 끝에 7인소위원회를 구성, 좀더 구체적인 검토를 거쳐 결정하기로 의결했다.
신현환경제기획원장관을 위원장으로 박찬현 문교부장관, 박종진 외무부장관, 정상천 서울특별시장, 윤일균 중앙정보부차장, 박종규 KOC위원장, 김택수 IOC위원으로 구성된 7인소위원회는 79년 8월 22일 첫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성과를 재검토한 뒤, 과중한 국민부담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국민총화와 대공산권교류 및 대북한 우위확보를 위해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민제육진흥심의위원회는 79년 9월 3일 서면결의로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을 의결했고 9월 21일에는 박정희대통령의 제가가 나왔다.
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특별시장은 박종규 KOC위원장, 김택수 IOC위원,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박충훈 한국무역협회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88년 제24회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겠다고 정식 발표했다.
10.26 사태로 주춤
그러나 그로부터 18일 뒤 "10.26사태"가 일어나 올림픽유치운동은 일단 잠잠해지게 됐다. 서울올림픽 유치의 결단을 내렸던 박정희대통령이 타계했고, 올림픽유치운동을 주도하던 박종규 위원장도 정치적 상황의 변동으로 체육행정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나 체육회, KOC안에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소극론이 대두됐고,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의 과도정부도 회의적인 처지였다.
1980년 9월 1일 제11대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올림픽유치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박종규 위원장의 뒤를 이은 조상호 체육회장 겸 KOC위원장은 올림픽유치계획에 대한 KOC의 공식의견을 조정하기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첫 회의를 80년 9월 29일에 개최했다.
11월 26일 소집된 KOC긴급확대상임위원회는 올림픽유치의 타당성과 시의성을 검토한 끝에 "올림픽개최는 국가의 대외이미지 개선과 대공산권 외교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이며, 설령 유치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올림픽유치후보국으로서의 명예가 남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KOC는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키로 결정하고 문교부에 이를 건의하였으며, 이규호문교부장관도 KOC의 결정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서울특별시측의 처지는 그 반대였다.
서울시측은 "올림픽유치의 최종 결정은 정부가 검토 판단해야 할 사항이나 서울시의 재정등 제반여건을 감안할 때, 88년 올림픽 개회 시기까지 제반시설을 갖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 되므로 제24회 올림픽을 유치할 수는 없다."고 문교부에 통고했다.
문교부는 서울시의 반대 주장도 첨부해 올림픽유치의 타당성 조사경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두환대통령은 "전임대통령이 결심하여 국내외에 공표한 중대사항을 별다른 이유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유치결의를 밝혔다.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올림픽유치 지시를 받은 문교부는 KOC에 "정부의 기본방침에 변동이 없으므로 서울시와 협의하여 올림픽유치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IOC에 제24회 올림픽 유치의사를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사태의 급진전을 맞은 KOC실무진은 80년 12월 3일부터 뉴델리에서 개최된 AGF총회에 참석중인 조상호위원장에게 보고하는 한편, 델렉스를 이용한 결재를 받아 IOC본부의 모나코 베를리우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IOC에 서울 유치 전문 발송
"KOC는 1988년 제24회 올림픽 개최 후보도시로 서울시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으며, 정식신청서는 추후 제출하겠음" 12월 4일 IOC는 한국의 수도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名古屋)시와 함께 제24회 올림픽의 공식유치 신청도시가 되었음을 발표했다.
80년 12월 15일, IOC본부는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시가 이미 확보한 시설과 앞으로 건설할 계획인 경기장, 대회경비 및 대회운영에 관한 총괄계획 등 150항목에 달하는 질문서와 함께 "이 질문서에 대한 답변서와 유치신청서를 1981년 2월 28일까지 제출하라."는 공한을 KOC에 보내왔다.
문교부는 서울시 실무자들과 KOC전문위원들로 올림픽 유치신청서 작성반이 구성된 것이 해를 넘긴 81년 1월 6일이었는데, 이렇게 늦어진 데는 서울시측의 소극적인 자세가 걸림돌이었다. 거의 KOC전문위원들에 의해 작업은 진행되었고, 40여일간의 밤샘 작업 끝에 영어판 190페이지, 불어판 16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답변서가 작성됐고, 이를 IOC의 요구대로 완성된 3백권의 책으로 인쇄를 끝낸 것은 신청마감 불과 4일 전인 2월 24일 이었다.
이 방대한 부피의 답변서를 우송할 경우 도저히 마감시한까지 로잔 IOC본부에 도착시킬 수가 없어 실무자 3명이 직접 운송하기로 했다. 2월 25일 서울을 떠난 답변서 운송팀은 이튿날 제네바에 도착, 주제네바대표부의 협조로 신청서와 함께 답변서를 IOC본부에 제출할 수 있었다.
일본 나고야시와 경쟁
오스트레일이아의 멜버른이 유치표기를 공식 발표하고, 올림픽 영구 개최론을 들고나왔던 그리스의 아테네가 신청서의 제출을 포기함으로써, 88년 제24회 올림픽유치경쟁은 서울과 나고야의 대결로 압축됐다.
로잔의 IOC본부는 3월 11일자 전문을 통해 IOC와 세계올림픽연합회(ANOC)및 국제경기연맹(ISF)조사단을 서울세 파견한다고 통보하고, 조사단이 반한할 때 서울의 기존스포츠시설과 숙박시설을 비롯한 도로교통망, 경기장건설현황, 언론관계시설 등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 제출할 것을 요청하여 왔다.
3월 28일 미국 NOC사무총장 돈밀러, 영국 NOC사무총장 리처드 팔머가 ANOC조사단으로 내한했다. KOC로서는 돈 밀러가 제일 먼저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54년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2년동안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을 보았고, 스탠드도 엉성한 서울운동장야구장에서 경기를 한 경험마저 있던 밀러는 25년만에 다시 본 서울의 발전상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KOC관계자의 안내로 건설중인 올림픽 주경기장과 태릉국제사격장 및 선수촌 등을 둘러보고 지하철 시승까지 하는 등 사전조사단으로서의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한 밀러일행은, 서울의 무서운 추진력에 감탄하고 올림픽 개최 능력을 확신하게 됐다.
이어 4월에는 IOC조사단, 6월에는 ISF조사단이 각각 내한,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전두환대통령의 강력한 올림픽 유치결심을 확인한 문교부의 새로운 훈령에 따라 체육계의 올림픽유치활동은 아연 활기를 띄게 됐다.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할 바덴바덴 IOC총회는 81년 9월 30일에 열리게 돼어있으니 2개월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KOC는 81년 7월 11일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범미주올림픽연합총회에 직업외교관 출신의 전상진부위원장을 옵서버로 파견, 12명의 IOC위원과 접촉케 해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김운용총재 순방 외교 나서
7월 12일에는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가 북중미 및 유럽 순방교섭길에 올라 해외 태권도사범들의 헌신적인 협조를 받으며 IOC위원 13명과 접촉하여 서울지지를 호소했다. 그 때까지 한국이 올림픽유치신청만 해놓고 사실상 유치를 철회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IOC위원들은 김총재의 서울 지지요청에 대해 한국이 조속히 대대적인 유치활동을 펼치지 않으면 나고야에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7월 21일 조상호 KOC위원장이 각국 NOC위원장에게 서울유치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고, 28일에는 인도 파나마출신 IOC위원들에게 방한초청장을 발송했다.
7월 30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열린 ANOC총회에 조상호 위원장이 참가, 서울유치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147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총회에는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IOC위원등 전세계 체육지도자가 대거 참가해 있었다. 이처럼 중요한 회의에서 먼저 연설한 일본대표가 사전 준비없이 2,3분동안 간단히 나고야 지지를 호소한데 반해, 조위원장의 상세하고 성의있는 연설은 서울에 대한 여론환기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평가됐다.
외무부는 이에 앞서 5월 25일 IOC위원이 거주하는 나라의 공관에 올림픽유치교섭을 벌이도록 지시하고 교섭상황과 IOc위원들의 동향을 계속 보고하도록 했다. 이 훈령에 따라 재외공관원들이 펼친 활동은 그때까지 한국의 올림픽 유치 진의를 의심하던 많은 IOC위원들에게 유치의사를 명백히 인식시켰고, 각종 정보의 수집분석 및 설득작전 등으로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8월 1일 문교부는 그때까지 외무부의 재외공관과 체육인을 통해 펼친 올림픽유치 활동의 성과를 중간 점검했다. 우리가 접촉한 50여명의 IOC위원중 5명이 한국을 적극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원표명 16명, 호의적 고려 16, 중립 16명으로 분석됐다.
미주지역과 대양주의 IOC위원들은 대체로 서울에 호의적이었으나 공산권과 유럽 및 중동지역 IOC위원들은 나고야 쪽으로 기운 듯했다. 아프리카와 남미지역위원들은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었다.
나고야는 79년 9월부터 81년 5월까지 1년 9개월동안 세계 각국의 IOC위원들을 방문하거나 일본으로 초청하여 환대하면서 꾸준히 득표활동을 벌인데 비해, 서울쪽은 유치교섭과 홍보활동 면에서 아직 미약한 실정이었다.
일본은 자신만만하였고 우리는 정부안에조차 서울유치에 회의적인 각료들이 있는 실정이었다.
81년 8월경, 노태우 제2정무장관은 나름대로 문교부, 이무부, KOC로부터 그동안의 유치활동 및 IOC위원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한 결과 "앞으로 한달동안 거국적인 유치활동을 펼치면 나고야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됐고 이를 전대통령에게 보고했다.
9월 1일 이규호 문교부장관도 청와대를 방문,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전대통령은 "제24회 올림픽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서울로 유치해야 한다."면서 유치활동의 총사령탑에 노태우 제2정무장관을 지명했다.
대규모 유치대표단 구성
노장관의 지휘를 받게 된 올림픽유치특별대책반은 바덴바덴 IOC총회 기간동안 현지에서 활동할 유치대표단을 구성 작업에 들어갔다.
바덴바덴총회를 3주일 앞두고 구성된 유치대표단은 체육관계인사는 물론 재계의 유력인사, 정부관계인사, 언론인 등 107명의 대규모로 짜여졌다.
공식대표는 박영희서울시장을 단장으로 조상호 KOC위원장,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이원경 KOC상임고문, 유창순 한국무역협회장, 이원홍 한국방송공사사장등 6명이었고, 올림픽총회대표는 김택수 IOC위원,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전상진 KOC부위원장, 최만립 KOC명예총무 등 4명이었다.
아프리카 남미 위원들 포섭이 관건
이밖에 재계 지원단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등 7명, KOC지원단 김세원 KOC부위원장 등 9명, 실무지원단 이선기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등 21명, 일반지원단 박종규 전KOC위원장등 16명이었다.
유치대표단이 바덴바덴으로 출발하기 직전 실무대책반이 최종적으로 점검한 IOC위원들의 성향을 보면 예상투표자 82명중 한국지지 26명, 호의적 고려 6명, 중립 34명, 반대 16명으로 분석됐다. 그때까지 확실한 태도를 밝히지 않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출신 IOC위원들을 어떻게 포섭하느냐에 승패가 갈랄 전망이었다.
바덴바덴 10일작전 개시
투표권을 행사하는 IOC위원들은 물론이고, 국제경기연맹회장단 및 IOC위원들과 친분이 두텁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각국 NOC위원장단, 그밖에 국제스포츠사회에서 막후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도 교섭대상에 포함시켰다. 81년 9월 18일 서울을 떠난 유치단은 20일 바덴바덴에 도착, 드디어 "바덴바덴 10일 작전"의 막을 올렸다. 그러나 현지 분위기는 서울 유치단의 사기를 위축시켰다. 완전히 "나고야 우세"로 기울어져 있었다.
특히 현지 언론들은 서울유치단에게 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서울이 과연 IOC위원 몇 명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느냐가 관심거리"라고 논평했으며, IOC수뇌진도 제24회 올림픽의 나고야 개최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올림픽전시관이 개관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9월 22일 오전, 바덴바덴시의 옛철도역 자리에 펼쳐진 제24회 올림픽 유치 신청 도시들의 전시관 개관식이 예상 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88년 하계올림픽을 신청한 서울과 나고야, 동계올림픽을 신청한 캘거리(캐나다), 팔룬(스웨덴), 코르티나 탐페쪼(이탈리아) 등 5개 도시가 준비한 전시관이 일제히 문을 열었을 때, 서울관의 짜임새있는 전시내용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99m²정도의 좁은 공간에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모형도를 중심으로 한국의 문화와 발전상을 패널과 슬라이드가 조화를 이루며 소개하고 있었고, 영상비디오는 뉴욕이나 도쿄에 손색없는 현대 도시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관 문열자 분위기 서울로
서울관의 인기를 더욱 높인 것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에 능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5명과 미스코리아출신 안내양 3명이었다. 이들은 우아한 한복차림으로 서울관을 찾는 이들에게 정성을 다한 서비스로 안내해 주었다. 반면 일본 나고야관은 사진위주의 평면적인 전시인데다 일본항공 스튜어디스들이 근무복 차림으로 안내를 맡아 서울관과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유치대표단은 107명의 대규모였으나 그곳에 모인 IOC위원들과 국제스포츠관계자들에 대한 설득작업에 중심적인 구실을 한 것은 역시 체육계 대표들이었다.
조상호 KOC위원장,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를 비롯한 전상진 KOC부위원장, 최만립 KOC명예총무, 방종규 전KOC위원장 등은 능란한 외국어 실력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활용하면서, 그동안 국제스포츠외교무대에서 쌓아올린 교분을 바탕으로 정렬적인 유치활동을 펼친 끝에 예상을 웃도는 큰 성과를 올렸다. 나고야측이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이른바 "바덴바덴 드라마"는 8월 3일 김운용, 전상진 2인이 선발대로 서울을 떠나면서 비롯됐다.
김총재는 호신용 스포츠로 범세계적인 인기를 끌로 있던 태권도의 "대부"라는 점을 활용, 북 중미 및 유럽의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를 순방하면서 해외사범들의 협조아래 그 지역 IOC위원들에게 서울올립픽 지지를 호소했다.
70년대 초반 카메룬대사를 지낸 적이 있는 전 부위원장은 케냐, 이집트, 튀니지를 돌고 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바덴바덴으로 들어가면서 그 지역 IOC위원들은 물론 체육계 정부 고위인사와 연쇄 접촉하고 서울지지를 요청했다.
조상호 위원장은 바덴바덴에 도착한 다음날인 23일 사마란치 IOC위원장을 예방, 국제정치적 상황 때문에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던 IOC수뇌진의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고, 25일에는 중동스포츠계의 실질적 리더인 쉐이크 파하드 쿠웨이트 NOC위원장과 요담, 아랍 출신 IOC위원들 사이에 서울지지 세력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상진, 최만립씨 등은 23일 저녁 서독대통령주최 리셉션, 27일 스트라스부르 관광여행, 28일 바덴바덴시장 주최 리셉션 등 각종 공식 비공식행사장을 최대한 활용, IOC위원들과 각국 NOC위원장단 및 국제경기연맹회장단긍과 접촉하면서 서울 지지 세력을 넓혀갔다.
북한 방해공작에도 대처
이같은 일련의 유치활동성과는 28일 전상진 KOC부위원장이 주최한 스페인어권 대표들을 위한 리셉션에 남미출신 IOC위원 전원과 포르투갈 IOC위원 등 50여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는 노르웨이 출신 IOC위원 스타우보로부터 북한이 서울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어 유치대표단의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바덴바덴 유치대표단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 등 경제인들의 활약도 매우 돋보였다. 정 회장은 전국역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행정관, 외교관, 경제인, 체육인 등 이질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유치단의 팀워크를 이끄는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영어네 능한 유창순 무역협회회장과 콤비를 이뤄 유럽지역 IOc위원들 사이에 영량력이 큰 영국의 엑세터 위원과 서독의 바이츠 위원을 설득했다. 탁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은 스웨덴의 칼그렌, 에릭슨 위원을 서울지지세력으로 끌어들였고, 프랑스의 두 IOC위원을 맡은 조중훈 대한항공사장은 엘조그위원이 긴여행에서 돌아와 바덴바덴 도착이 늦어지자 파리로 날아가 엘조그위원을 모셔오기도 했다.
이처럼 재벌총수들이 미지의 스포츠세계에 뛰어들어 해외에 뿌리내린 자체 기업세력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많은 IOC외원들을 서울 지지세력으로 확보한 것은 "바덴바덴 드라마'의 전기를 마련한 튼 성공작이었다. 투표일을 하루 앞둔 9월 29일 IOC총회에서 있은 올림픽유치신청도시의 설명회는 그때까지 중립적 입장이었던 IOc위원들의 표향방을 결정지은 중대한 행사였다.
성공적 유치설명회
설명회를 맡은 서울과 나고야 유치단의 자세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승리를 기정사실로 믿고 승전무드에 젖어있던 나고야 대표단이 설명회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은데 반해, 서울대표단은 최후의 심판을 받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서울대표단은 특히 제안연설이 끝난 뒤 있을 IOC위원들과 옵서버들의 질문에 완벽하게 답변하기 위해 만반의 대비를 했다. 서울에서 준비해온 150여개의 질문 및 답변 문안을 놓고 여러차례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문까지 점검하는 완벽을 기했다.
나고야측의 설명의 있은 뒤 오후 2시부터 서울유치단의 설명회가 계속 됐다. 박영수 서울시장이 유치신청도시 시장으로서 인사말을 안데 이어, 조상호 KOC위원장이 제24회 올림픽의 서울개최 타당성을 역설하는 제안연설을 했다.
이어 한국의 발전상과 서울의 올림픽 준비상황을 담은 미니영화 "제24회 올림픽이 열릴 한국의 수도 서울"이 16분간 상영됐다.
약 30분간에 걸쳐 13명의 IOC위원 및 국제경기연맹회장단의 질문이 이어졌다. 설명회가 끝나자 서울유치단에 호의적이었던 20여명의 IOC위원들이 다가와 "아주 훌륭한 설명회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9월 30일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투표결과 서울 52 나고야 27
오후2시, 80명의 IOC위원들은 제24회 올림픽개최 신청을 낸 서울과 나고야 중 한쪽을 택하는 역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외부와의 출입이 통제된 쿠르하우스 회의실에 모였다. 그로부터 1시간 40분되 사마란치 위원장이 위원들의 투표결과 집계표를 들고 발표장에 나타났다. "서울 52, 나고야 27"
예상을 뛰어넘는 서울의 압승이었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역사적인 선언에 현지 대표단은 물론 자정이 넘어 TV실황중계를 지켜보던 전국의 온 국민들도 이 엄청난 차이의 승리를 실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덴바덴 현지의 기자회견장은 만세와 환호성으로 뒤범벅이 됐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바덴바덴의 감격과 열광은 전파를 타고 한반도까지 출렁였다.
"서울 개최는 올림픽 정신의 승리"
그로부터 7년동안 한국 국민들은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하나가 됐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제24회 올림픽개최지 결정투표가 끝난 뒤 기자회견을 갖고, "IOC가 제24회 올림픽대회의 개최지로 한국의 수도 서울을 택한 것은 올림픽정신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그만큼 제24회 올림픽의 서울개최가 지니는 의미는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