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과 2009년 서면에서 열린 가두시위. 당시 부산시민 수만여 명이 광우병 쇠고기 파동과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며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불허했고, 거리행진의 끝에는 늘 강제연행과 해산작전이 뒤따랐다.ⓒ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26일 부산 서면 중앙대로에서 13만여 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1만5천)이 참가한 가운데, 박근혜 퇴진 4차 시국대회가 열리고 있다. 중앙대로 5차선을 빼곡히 메운 촛불. 경찰은 이날 처음으로 중앙대로 집회를 허용했다.ⓒ전상규
사상 처음으로 부산 서면 중앙대로가 합법적으로 열렸다. 무엇을 의미할까.
2016년 11월 26일 13만여 명의 시위대가 부산 도심을 관통하는 중앙대로의 5차선을 차지하고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스포츠 응원이나 연예인이 모이는 콘서트가 아니었다. 가장 높은 수위의 구호를 내건 정치적 집회였다. <관련기사:[부산] 13만 촛불인파 집결.. ‘6월항쟁’ 시위 재현>
굳게 닫혀왔던 서면 중앙대로
시위대 거리로 나서면 강경대응
2016년 11월 시민의 힘으로 열어내다
그러나 이 공간은 과거와 달랐다. 지난 2008년 6월 광우병 쇠고기 파동 당시에도 수만의 부산시민이 서면에서 촛불 시위를 펼쳤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 반대 여론에도 미국산 쇠고기 정부 고시 강행 등 검역주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성난 시위대는 중앙대로로 진출해 분노한 민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의 시위를 허용하지 않고 방패로 막아섰다.
이로부터 1년 뒤인 2009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의 불통에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시민의 외침은 그해 6월 10일 또다시 분출됐다. 8천여 명의 시민이 쥬디스 태화에서 집회를 열고 중앙대로로 행진하려 했지만, 당시 시위는 23명이라는 대규모 연행사태가 벌어지는 등 큰 충돌을 빚었다.
술을 마시러 나온 일반 시민부터 훈련을 마치고 나온 예비군, 경찰의 강제연행에 항의하던 참가자, 마스크를 쓴 학생, 촬영 중이던 독립영화 감독, 인권단체 활동가까지 가릴 것 없이 경찰의 눈 밖에 난 사람이면 사지가 들려 경찰버스로 태워졌다. 이를 보다 못한 푸른 눈의 외국인이 경찰에 항의를 표시했을 정도였다. 이 사태로 연행됐던 이들과 시위를 주도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법정에 서거나 벌금 폭탄을 맞아야 했다.
2011년 12월 취재진이 목격한 경찰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한미FTA 비준에 반발한 수천여 시민이 다시 서면으로 모여들었다. 당시엔 야당 정치인들도 시위 대열에 맨 앞에 섰다. 과거 경찰의 수장이었던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까지 직접 촛불을 들고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캡사이신이 가득한 최루액이었다.
경찰은 이날 30여 개 중대를 배치해 시위대가 진출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공간을 봉쇄했다. 결과는 시위대가 결국 몰래 게릴라 시위를 펼치는 방법 뿐이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서면 중앙대로는 민주주의를 분출하는 광장이면서도 결코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80·90년대를 돌아봐도 서면은 늘 경찰의 진압과 최루탄에 맞선 시위대의 풍경이 가득한 곳이었다. 1987년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던 6월 항쟁,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분노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도 정부와 경찰은 모두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부산의 중심인 서면 일대를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만드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때마다 충돌이 발생했고, 이곳은 돌멩이와 방패가 맞서는 전쟁터가 됐다.
지난 2009년 6월 항쟁 기념일에 열린 부산 서면 시위에서 경찰이 한 참가자를 연행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 서면-문현로터리 현장.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참가자가 경찰에 맞서 웃옷을 벗고 달려가고 있다.ⓒ6월항쟁기념사업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논란, 통합진보당 해산사태, 노동관련법 개정 반발, 세월호 침몰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져 나올 때마다 서면에서는 정부 규탄 시위가 열렸다. 여전히 경찰은 시위대가 쥬디스 태화 앞 특화거리 밖으로 나오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로부터 많게는 수십 년, 작게는 수년이 지난 이날 서면의 풍경은 달라졌다. 당연히 구호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하라”, “하야하라”. 오히려 국가의 수반을 강제로 끌어내리겠다는 점에서 더 정치적이었다.
이 정도 집회라면 으레 보이던 시위대와 경찰 간의 마찰은 전혀 없었다. 집회는 평화로웠고, 해학과 풍자가 넘쳐났다. 시국집회장 상공엔 ‘이게 나라냐’라는 드론이 띄워지고, 대열 곳곳엔 ‘하야그라당’, ‘** 연구회 등 기상천외한 깃발이 등장했다. 정부의 정책과 대통령을 조롱하는 구호가 수차례 외쳐졌음에도 과거 시위대와 마주쳤던 진압복의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손을 잡고 나온 연인부터 민주주의를 알려주려는 아이와 부모,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청소년, 시국을 걱정하는 80대 노인 등 남녀노소 구분 없는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경찰의 봉쇄작전이 사라진 서면 중앙대로 일대에서 마음껏 정부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차도’를 민주주의의 배움터로 만들었다.
이는 부산 시국집회 역사상 이정표가 될 사건으로 불릴만하다.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평화롭게 분출하는 공간을 보장하면 강제 연행과 진압, 충돌 역시 없다는 의미다. 경찰이 우려하는 ‘불법’은 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탄압하는 과정에서 더 두드러질 뿐이라는 것이다.
주최 측의 노력도 공이 컸다. 부산지역 100여 개 단체로 구성된 박근혜 퇴진 부산운동본부는 이틀 전 집회신고를 부산경찰청에 접수한 데 이어 26일에는 공동대표들이 경찰청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시국집회를 앞두고 시민사회가 경찰청장을 만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이 자리에서 대표들은 현 사태와 촛불, 공간 보장을 요청했고, 경찰도 안정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처음으로 서면로터리 입구에서 광무교까지 700여 미터 구간 중앙대로 5차선을 확보해 시국집회를 열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서면을 이렇게 만든 1등 공신은 대통령 자신이다. ‘비선실세’의 개입과 ‘측근비리’, ‘국정농단’ 파문을 자초한 대통령은 이미 지지율 4%의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수락연설에서 이념과 세대를 넘어 국민대통합을 달성하겠다는 선언은 어느새 사라지고, 임기 내내 ‘정치 불안’과 ‘불통’ 논란을 낳았던 박 대통령.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가 정권의 정치적 기반이자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부산 서면을 민주주의 광장으로 열게 한 또 다른 주인공이 됐다.
26일 부산 서면 중앙대로에서 13만여 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1만5천)이 참가한 가운데, 박근혜 퇴진 4차 시국대회가 열리고 있다. 서면 중앙대로를 가득 메운 촛불 인파ⓒ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