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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그리스도처럼 생활함
8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4분
기억절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도입)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이 말씀이 새 계명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좋아하며 느끼는 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정의해 주신 대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특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우리의 취향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사랑하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의 스타일대로, 생각대로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된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랑이 예수님의 계명인 것이다. 사랑의 기준은 우리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만족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생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궁극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에 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했던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려 하심이라(요3:16)고 하셨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첫째날(일)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
8월 10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교사강해 1)
예수님은 눈물과 사랑으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셨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이야기가 성경에 많지만 위의 말씀에 따르면, “먼저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신다.(마9:36) 예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첫 번째는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살기 때문이다. 목자 없는 양은 주인 없이 사는 것이다. 먹고 살기는 그런대로 먹고 사는 데 하나님은 없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싸한데 하나님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부모 없이 사는 사람이다. 육적인 부모가 없어도 슬픈 데 하나님 없이 산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못 배운 사람이 불쌍하다고 한 적도 없다. 로마의 식민지배 때문에 불쌍하다고 말씀한 적도 없다. 하나님이 없어서 불쌍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목자 없는 양~! 곧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가장 불쌍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저들이 영원한 구원을 알지 못하여 멸망하여 가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것이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사람들은 특별히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환자를 볼 때마다 항상 따라 다니는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한센씨 병을 가진 환자가 예수님께 나왔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이 말씀을 하자마자 고침을 받았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양한 병을 치료하셨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 영적인 병, 감정적인 병, 관계적인 병, 그러나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치료하시러 오신 병은 우리의 사망의 병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은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불쌍하였던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셨다. 우리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저들이 얻을 수 있는 이 하나님의 구원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불쌍함과 긍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치료는 마술적 치료가 아니라 사랑의 치료요 긍휼의 치료이시며 사망을 치료하시러 오신 구주이셨다.
둘째날(월) 네 이웃을 사랑하라
8월 11일
교사강해 2)
마 19:19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바울은 이 가르침이 곧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갈 5: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 한다.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하였다. 약 2:8절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라 하였고,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바로 이 최고의 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 최고의 법이란 곧 왕의 법이라는 뜻이다. 그냥 최고로 중요한 법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으뜸가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보다 더 큰 법이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법이고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모든 법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법 하나를 잘 지키면 다른 법을 다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롬 13: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 최고의 법은 다른 모든 법을 판단할 수 있는 근본적인 법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헌신이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가적용)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어떤 법도 최고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정죄할 수 없다. 사랑은 Royal Law이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도 결국은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명령한 것이다. 이 사랑의 법에 생명이 있고 질서가 있고 복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안이 있다. 그래서 최고의 법이다. 가장 높은 법이라기보다는 가장 좋은 법이라는 뜻이다. 종교가 없는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앞에서는 겸허한 자세를 취한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이 주는 힘은 결코 작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의 공생애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천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 사랑의 힘은 지금도 현재의 사람을 비롯해 앞으로의 사람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새 계명(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잘 알고 있다. 그대로 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 슬프게 한다.
셋째날(화) 사랑의 봉사
8월 12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교사강해 3)
한 번은 링컨이 급하게 집무실을 나오다가 서류 하나를 미처 챙기지 못하였다. 링컨 대통령이 수위에게 내 집무실에 가서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좀 가져오라고 하였다. 수위가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가지고 오니까 링컨이 수위의 집무 의자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수위가 놀라서 ‘각하! 아니, 각하께서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였더니 링컨이 씩 웃으며 ‘자네가 내 일을 하니까 내가 자네의 일을 하는데 뭐가 잘못되는가?’라고 하더란다. 그 수위가 얼마나 감동했겠는가? 모르긴 해도 그 다음부터 수위 일이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은 자리가 높아진 것이지 사람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라고 다 존경 받는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다 존경 받는 것도 아니다. 학자라고 다 존경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였다. 높은 사람, 배운 사람, 부자들이 지켜야 할 법이 바로 최고의 법, 즉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부자가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가진 것 얼마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종이 아프면 같이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종이 걱정하는 것을 자기의 일처럼 걱정하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기독교 종교의 실천 강령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위에서 말한 교훈의 집약적 친절의 태도를 잘 나타낸 백부장을 보게 된다. 눅 7:1-10절에 어떤 백부장이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달라고 하였다. 거기 보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한다.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다는 것이 얼마나 인상적인지 모른다. 종은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던 시절에 이런 표현은 그 백부장이 종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말해 준다. 유대의 장로들도 이 백부장을 존경하였다. 유대 장로들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부탁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눅 7:4-5절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점령군 장교가 피 점령지 국민을 사랑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노예 같은 종도 사랑하였다. 종이 병들어 아파할 때 그도 아파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7: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 이 백부장이야 말로 최고의 법을 실천한 사람이다. 왕의 법을 지킨 사람이다. 그의 신앙이 최고이고 그의 인격이 최고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고쳐주시려고 그의 집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백부장은 급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참으로 존경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백부장의 사랑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사랑일 뿐이다.
넷째날(수) 네 원수를 사랑하라
8월 13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교사강해 4)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원수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그가 사는 지방 이름만 TV 화면에 나와도 가슴이 쿵덕거린다고 한다. 분노와 미움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것처럼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시지 않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음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흐를 때 비로소 가능하다. 형제를 향한 사랑,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임을 보여주신다. 여러분과 저의 모습에서 이런 예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래 함께 지나면 서로 닮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주님을 닮게 마련이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구원받아야 할 이웃이 있을 뿐이며 이웃을 사랑하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함이 높은 수준의 의며, 천국백성 됨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하고, 내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속한 사람임을 본문 말씀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된다.
부가적용)
마틴 루터킹 목사는 몽고메리에서 인종 차별을 하는 버스의 승차 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는 그 때 28세의 청년 목사였다. 옥중에서 그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의 설교를 썼다. 이 설교는 1957년 성탄 때 덱스터 침례교회에서 선포한 역사에 남는 유명한 설교였다. 킹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를 투옥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밤중에 우리 마음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리고 반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의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 날인가 사랑이 승리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은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사는 모든 민중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이중의 승리를 거두리라.>고 했다. 킹 목사의 인내와 투지, 사랑과 용기는 예수님을 자신의 깃발로 앞세우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킹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없이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앞에 내세우면 참을 수 있고, 극복할 수 있고, 견딜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날(목) 예수님처럼 사는 법
8월 14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교사강해 5)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이나 시간 등을 쓸 수는 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크고 넓고 깊은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막힘이 없다. 믿을 수 있으며 영원하다. 거짓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확실하다. 현대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보험이 있다. '생명보험, 건강보험, 교육보험, 노후보장보험' 등 많은 종류의 보험이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보험을 들까? 그것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증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증수표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현금이나 다름없는 가치를 가진다. 보험에 들어 있거나 보증수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든든하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험보다 은행의 보증수표 보다 더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위해 오신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부가적용)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영상을 가지고 있다. 이 땅의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상(像)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냉혹한 하나님 아버지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이 어떠하든지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로운 아버지의 형상을 가지도록 배려하시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가득 찬 분이라고 단언한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아버지는“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요 17:24)일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요 17:26)을 새로운 성도에게 전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신다.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시작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먼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놀랍도록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탕자와 같은 인생을 위하여 아들을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