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 노천명
은빛 장옷을 길게 끌어
왼 마을을 희게 덮으며
나의 신부가
이 아침에 왔습니다
사뿐사뿐 걸어
내 비위에 맞게 조용히 왔습니다
오랫만에
내 마음은
오늘 노래를 부릅니다
잊어버렸던 노래를 부릅니다
자 - 잔들을 높이 드시오
빨간 포도주를
내가 철철 넘게 치겠소
이 좋은 아침
우리들은 다같이 아름다운 생각을 합시다
종도 꾸짖지 맙시다
애기들도 울리지 맙시다
「첫눈」은 남성화자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시로, 남성적인 어조가 시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다. 특히 ‘첫눈’이미지가 신부라는 은유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화자는 첫눈이 내리는 모습을 사뿐사뿐 조용히 들어오는 신부의 행위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화자는 첫눈, 즉 신부의 모습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비위에 맞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여성을 타자화 시켜 바라보고 있는 남성적 특권의식과 은연의 우월감이 드러난다. 등가항을 이루고 있는 첫눈과 신부는 비슷한 속성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여기에는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이들이 지니는 순백의 이미지는 단순히 시각적인 부분에서의 유사점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첫’이라는 수식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특히, 흰 눈과 빨간 포도주라는 강렬한 색채의 대립은 마치 신부의 여성적 순결을 상징하듯 권위적이고 에로틱하게 시각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천명 [盧天命, 1912.9.2∼1957.12.10]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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