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다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산호림>(1938)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감상적, 고답적, 관조적, 자기 응시적
◆ 표현 : 감정이입, 의인법, 공감각적 심상, 감정의 절제를 통한 언어의 절제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 사슴의 외면을 통해 정서(슬픔) 표출
슬픔의 원인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비롯된 것
* 관이 향기로운 → '관'은 사슴의 뿔에 대한 은유이며, '높은 긍지와 자존의식'을 상징함
공감각적 심상(시각의 후각화)
* 높은 족속 → 자아의 정신적 고고성과 귀족성 암시
* 물 → 자아발견, 자아성찰의 매개체
* 잃었던 전설을 생각 → 자아의 원초적 근원(예전에 누렸을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에
대한 발견
* 어찌할 수 없는 향수 → 전설은 단지 생각만 할 수 있을 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향수에 잠길 수밖에 없음.
* 먼 데 산 → '전설'과 동일한 의미를 지님
이상, 동경, 영원한 정신적 세계를 가리키는 말
◆ 주제 ⇒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고독한 자아
◆ '사슴'의 모습은 ?
㉠ 시인 자신의 고독한 자화상(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시인의 외로운 모습 연상)
㉡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고귀한 꿈을 지키며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 높은 긍지와 자존의식을 가지면서도, 어떠한 자기위로로도 치유되지 못하는
고독이라는 상처를 안고 사는 외톨이의 자의식
㉣ 현실의 속된 모습에 어울리지 못하여, 현실세계보다는 어떤 먼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자기애(나르시시즘)'에 잠기어 있는
자의 모습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사슴의 외면적인 특성(귀족적 품위)
◆ 2연 : 사슴의 내면적인 특성(동경, 향수)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겉으로는 사슴을 가볍게 스케치한 한 폭의 작은 그림 같지만, 사슴에게 인격을 불어 넣고 감정을 이입(移入)시켜 어느덧 사슴은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독자 앞에 나타난다. 불행한 현실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질곡(桎梏)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거기에 바로 노천명 시인의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두 연만으로 된 단순한 구도의 이 작품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목이 긴 것과 슬픈 것과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짐승들은 목이 짧다. 그런 가운데서 목이 길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남다른 모습이기에 홀로 외톨이가 되는 이유일 수 있겠고, 목이 길기에 높이 세운 머리가 더욱 오만하고도 고고한 외로움을 지니게도 할 듯하다. 이러한 사슴은 또한 다른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혼자 말없이 점잖고 쓸쓸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모습에서 시인은 사슴의 먼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향기롭고 우아한 뿔이 있는 것을 보면 무척 고귀한 족속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사슴은 때때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잃어 버린 전설을 떠올리며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먼 산을 바라본다. 그 때의 사슴은 더욱 가냘프고도 슬프게만 보인다.
이 시는 '사슴'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시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슴의 귀족적인 품위와 고고한 아름다움에 감정을 이입시켜 '시인 내면의 근원적인 고독과 이상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의 세계보다는 어떤 먼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정신적 고고함과 자기애에 빠져 버리고 있다. 현실과 타협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현실에 절망하지도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독한 자아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노천명 : 시인
출생 : 1912. 9. 2. 황해도 장연
사망 : 1957. 12. 10.
학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영문학
경력 : 1955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55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1951 부역의 혐의로 9,28 수복 후 투옥
1938 조선문학예술동맹 참여
작품 : 도서, 오디오북, 기타
<정의>
1911~1957. 시인·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京城)으로 이사, 진명(進明)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신동아(新東亞)』 1932년 6월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조선아동예술연구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같은해 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잡지 『여성(女性)』(조선일보사 발생)의 편집을 담당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고, 잡지 『신세기(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고, 그해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決戰文化大講演會)에 참가하여 시를 낭독했다. 그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았고, 후방인 '총후(銃後'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시작 -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매일신보』 1941.12.12)를 기고했다. 1942년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기원(祈願)」(『조관(朝光)』 1942.2),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한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2.19)·「노래하자 이 날을」(『춘추(春秋)』 1942.3) 등의 시를 썼고,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라는 주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와 「출정하는 동생에게」(『매일신보』 1943.11.10)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에 발표한 「병정」(『조광(朝光)』 1944.5) 및 「천인침(千人針)」(『춘추(春秋)』(1944.10)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944년 12월에는 '가미카제[神風]특공대'로 나가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모·미화하는 「신익(神翼) - 마쓰이오장[松井伍長] 영전(靈前)에」(『매일신보』 1944.12.6)와 「군신송(軍神頌)」(『매일신보』(사진판) 1942.12 ) 등의 시들을 썼다. 이외에도 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강조한 「싸움하는 여성」(『조광(朝光)』 1944.10)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두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했다.
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서 1946년까지, 이후 부녀신문사의 편집차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수필집 『산딸기』를 출간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및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참가와 같은 부역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9·28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거,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고 가톨릭에 입교, 영세를 받았다.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었다」를 발표했고, 1953년 「영어(囹圄)에서」와 같이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옥중시들을 담은 세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발간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했고, 수필집 『여성서간문독분(女性書簡文讀本)』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에는 미발표 유작시를 포함한 네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가, 1960년에는 170여 편의 시를 모은 『노천명 전집 : 시편』이 간행되었고,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노천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29∼26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노천명(盧天命)』(이숭원, 건국대학교출판부, 2000)
『친일문학작품선집 2』(김병걸·김규동 공편, 실천문학사, 1986)
『국민문학(國民文學)』, 『동아일보(東亞日報)』, 『매일신보(每日新報)』
『신동아(新東亞)』, 『신시대(新時代)』,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네이버 지식백과] 노천명 [盧天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감사합니다
무공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날마다 건필하는 날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