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출생지이며 은거처
천주교회사 사료인《치명일기>에 보면 인천현(仁川縣)내의 함박리(咸朴里)는 순교자 심원경(스테파노) • 심봉학(심원경의 아들) • 박도섭 • 박사앙(박도섭의 아들)이 태어나 살았던 곳이고, 인접 마음 싯골[食谷]은 순교자 조학경 도사(都事)가 낙향하여 살다가 관헌에 잡혀 간 곳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1991년에 간행된 「소사 본당 반세기」(素砂本堂半世紀)에는 순교자 후손이었던 심낙천(沈樂天)이 서울에서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선영(先塋)이 있는 함박이로 숨어 들어와 살다 잡힌 은거처가 함박리라고 기록되이 있다.
함박리는 현재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 내에 있디. 함박리는 샛말과 건너말, 계일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옹기말은 건너말 산 발치에 있었다. 함박리 건너말 동산 너머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싯골은 Ikm 내의 두길과 숯두루지 자연부락과 맞닿아 있는데, 싯골은 광명시 옥길동에 속한다. 현재 함박리와 싯골이 속해 있는 옥길동은 인천교구 역곡 본당 관할 지역이다. 박해 때에는 인천현의 외곽 지역이었고, 인천과 수원을 통하는 길목인 댓골과 이웃하는 지역이었지만 매우 외진 자연부락이었다. 함박리는 박해가 끝난지 100년 뒤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때에도 공산군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정도로 오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혜의 조건은 말씀의 씨앗이 자라는 데 가장 좋은 지역이 된다. 인천 지역에 언제부터 천주교가 전래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인천 동부 외곽지는 서울과 안양, 수원을 잇는 지역으로 인천 지역 전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함박리 주위에는 민극가 성인이 전교를 하였으리라고 추정되는 1830년대에 신자들이 있었다고 보여지며. 차츰 교우들이 생겨나 비교적 박해가 뜸했던 철종(哲宗) 시대 중반인 1855년쯤에는 여러 마을에 교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심원경과 그의 아들 봉학이 이곳에서 살다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양지 사기막골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병오박해(1846) 당시 서울 종각 부근에 살던 청송 심씨 인수부원공파 심락천씨의 아버지가 천주교 신자라하여 포졸에게 잡혀 치명을 당하게 되자 아버지를 잃은 심락천씨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선향인 당시 인천 지역에 속해 있던 함박리로 내려왔다. 또 서울에서 관직에 있던 조학경 도사(都事)가 신앙을 위해 싯골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1866년 함박리에는 교회 사료에 드러나 있는 박도섭 • 박사앙 • 심낙천이 살았고, 싯골에는 조학경 도사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함박리에서는 심낙천이 잡혀가 순교(장소 미상)하였고. 싯골에서는 조학경이 경포(京捕)에게 잡혀 서울로 끌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며, 박도섭은 인천읍으로 잡혀 간 후 수원으로 이수(移囚)되어 매맞아 순교하였고. 그의 아들 박사앙은 도망쳐 숨어 살다가 1867년에 붙잡혔으나 풀려났었는데 1870년 10월에 다시 경포에게 불잡혀 서울 옥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함박리는 순교자 심원경 • 심봉학 • 박도섭 • 박사앙의 탄생지요 성장지였고 신자가 되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던 곳이며, 순교자 심낙천에게는 신앙생활의 온거처이기도 하였다. 또 싯골은 조학경에게 신덕울 쌓는 수계지요 은거지였다. 이와 같이 함박리와 싯골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떨어 져 새싹이 움튼 묘 터 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의 신앙의 요람이 된 곳이다.
■ 순교자
1) 함박리 출신의 순교자
◆ 심원경 스테파노 (<치명일기> 367번)
인천 함박리 사람으로서 양지(경기도 용인군 양지면) 사기막골 가 살더니 수원으로 잡혀가 막대로 치는 것을 맞아 치명히니 나이 대개 40세요 때는 정묘년(1867)이더라
◆ 심봉학 (<치명일기> 368번)
심원경의 아들로 그 부친과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20여 세라
◆ 박도섭 (<치명일기》370번)(병인박해 순교자 정리 번호 143)
본래 인천 함박리 사람이다. 병인(1866년) 10월에 본읍(인천)으로 잡혀 갔다가 수원으로 이수(移囚)하여 12월 초6일에 치명하니, 나이 70세러라. 증인은 그 아우의 아들 박 토마스인데 지금 살기는 신전골입니다.
◆ 박사앙 (<치명일기》235번)(병인박해 순교자 정리 번호 143)
수원에서 치명한 박도섭의 아들이요, 인천 함박리 사람이다. 무진년(1868년)에 잡혔다가 놓였더니. 다시 경오년(1870년) 10월에 경포(京捕)에게 잡혀 옥중 치명하니 나이는 41세요, 때는 경오 윤10월이라. 증인은 상동
2) 함박리 은거처 순교자
◆ 심락천(?-1866년)
서울 종각 부근에 살던 청송(靑松) 심(沈)씨 인수부 윤공파(仁壽府尹公派) 심락천의 아버지가 천주교 신자라 하여 치명 당했다. 그때 심락천은 부인과 함께 처갓집에 갔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잃은 심락천은 선영의 묘가 있는 함박리 옹기골이 있는 곳으로 가족과 함께 숨어들었다. 가족 생계로 옹기를 굽고. 내다 팔면서 밤이면 가족끼리 몰래 기도를 하는 둥 신앙생활을 했다. 병인년 10월. 어느 날 밤에 기도하는 그의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심락천을 잡아 끌고 갔다. 다행히 몸을 숨긴 아홉 살 어린 나이 심노정(沈魯廷. 심락천의 큰아들)은 아버지가 궁금해서 따라 가니 아버지는 나무에 매달려 매를 맞고 있었다.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심노정은 가슴올 치며 아버지가 천당에 갈 수 있도특 기도만 했다.《(소사 본당 반세기》, pp. 84-86)
3) 싯골 은거처 순교자
◆ 조학경 도사(都事)(<치명일기》91번) (<치명일기》90번)
(*都事: 의금부 종5품 벼슬 또는 오위 도총부의 종5품 벼슬)
금부도사(禁莩事)로 있다가 인천 싯골로 가 살더니. 무진년(1868년) 이(李) 마티아(<치명일기》90번 이신규(이身규). 李承薰의 셋째 아들)와 한가지로 참수 치명하니. 나이는 40여 세러라.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