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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봉헌과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사실 아이들이 자원 봉사 활동을 하러 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 활동거리도 찾아야 되고, 주의 사항을 잘 설명해야 되고, 옆에 붙어서 관리도 해야 하고 복잡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뭔가 도와보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기쁘게 함께 하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잘 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3-4)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렙톤 두 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5~600백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만원권이나 10만원, 100만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딸랑 동전 두 개를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드릴 작은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봉헌은 고통스러워야 효과가 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예수님은 액수로는 얼마 안 되지만, 전 재산을 바친 과부를 많은 재산 가운데 일부를 봉헌하는 부자들과 비교하십니다. 봉헌의 더 큰 효과를 누가 더 받을까요? 봉헌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976년은 중국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중국 탕산시에는 인구 7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지진이 일어나 23초 만에 24만2천 명이 죽었습니다. 가히 저주라 할 만한 대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일본대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참사 속에서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없었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이웃의 생명과 재물을 구하러 서로 불 속에 뛰어들었으며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행위였다는 데서 외국인 목격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시에서 1977년 12시간의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 방송에서는 그 상태를 ‘연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전등이 꺼져서 자기 얼굴이 타인에 의해서 식별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하고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불만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 일부를 주님께 봉헌하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왜 탕산시의 사람들은 이웃을 돌볼 줄 알았고 뉴욕 시민들은 남의 것을 약탈했을까요? 이는 봉헌이란 것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아프게 만들지 못하면 이웃에게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대 일본의 전설 중 하나입니다. 이 전설은 산골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이 두 아이가 있었는데, 한 명은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장애가 있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관습에 따라 강에 제물을 바치러 가야 했는데, 사람들은 여인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바칠 것으로 생각했지만, 강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신에게 더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칠 때는 더 마음이 아픕니다. 더 마음이 아플수록 내가 가진 것의 가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그러면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집니다. 이것이 탕산시와 뉴욕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봉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면 그 봉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MC인 방송인 윤택은 개그맨을 하기 전에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망해서 30세가 넘어 8억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개그맨으로 데뷔하여 돈을 다 갚았지만,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맡게 된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의 가장 인상에 남는 분은 재개발로 300억의 돈을 벌었지만, 방탕과 사기로 모든 돈을 잃게 된 자연인이었습니다. 그가 밧줄을 사서 산에 올라 나무에 걸치고 목을 매었을 때 멀리서 석양이 지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예뻐서 하루를 더 살아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밧줄을 베고 자고 나서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고는 너무 감사해서 그 땅에서 눌러앉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렇게 마음이 아플 때 비로소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봉헌이라면 그 봉헌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금은 아프더라도 십일조를 봉헌하며 자아를 매번 밟아주고 이웃 사랑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참조).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려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책에서 미국에 이민하여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30년간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노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 비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 오면서 이 부부는 서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이 들면 말없이 산책하러 나가고, 아내는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앞치마를 거꾸로 걸쳐서 설거지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채기란 불가능합니다.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척하면 알아야지.”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은 또 이렇게 항변하지요. “말해야 알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더 큰 믿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 노부부의 노하우를 따르면 어떨까요?
지혜의 삶을 사는 분을 많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지혜를 볼 수 있고, 그 지혜를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보더라도 부러움만을 가지면서 ‘내 배우자는 왜 그럴까?’라며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금더 관심갖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또 쉽게 단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헌금을 한 이 과부를 우습게 봤을 것입니다. 이 헌금함은 공개되어 있는 곳으로, 주로 부자들만 헌금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정성 어린 마음만을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비 전체를 넣은 과부의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하느님이 먼저였고, 그래서 가지고 있는 모두를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이 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알렉스 퍼거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하늘나라 저울의
눈금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무게를
가리키고 있다네.
가난한 과부는
그분에 대한
묵직한 사랑으로
마음이 풍족했지만
부자는
그분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마음이 궁핍했음을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셨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담긴 진정한 의미
한 달 소비하고 남는 돈을 나누는 것은
과부의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바칠 것을 미리 내어놓고
나머지를 검소하게 아껴 쓰는 게
과부의 헌금입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줄이고
아껴 쓰면서 나눌 때
나눔의 의미와 가치가 살아납니다.
하루 중 기도 시간을
자기 전에 하는 것보다
가장 먼저 일어나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과부의 헌금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원천징수가 될 때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나눔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떼어 나눌 때
그게 진짜 나눔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4,1-3.4ㄴ-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 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