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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 믿음은 큰 사랑과 같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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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은 큰 사랑과 같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당신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실까?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을 믿지 않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열렬한 복음 선포자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주님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일까요?
제 생각에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해도 주님은 제자들을 믿으셨고,
그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을 겁니다.
제 생각에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을 키웁니다.
다시 말해서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래야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고,
자라게 하지 못하는 믿음은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번 배신으로 믿음이 끝나는 믿음은 가장 작은 믿음입니다.
열 번 배신했는데도 여전히 믿는다면 그만큼 큰 믿음입니다.
아무튼 큰 믿음이란 자기 믿음을 배신해도 믿는 믿음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큰 믿음은 자기 믿음을 배신해도 그로 인해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큰 믿음은 배신할 것을 알고도 믿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어줌으로써 그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고 속아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신당해도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지 않으며
그저 큰 믿음이란 이런 거라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큰 믿음은 큰 사랑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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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 있습니다.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입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사람이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류의 지능과 일류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뛰어난 지능이 네 번이나 대통령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그의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뛰어난 운동 능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자기 통제를 통해 타락의 길로 떨어지는 운동선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재능이 뛰어나도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기질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훌륭한 재능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저 자신을 통제하는 기질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기질의 변화를 조금씩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유혹이나 충동 그리고 본능에 탐닉하는 순간에 주님을 떠올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가 가장 행복한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어야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면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게 되면,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자기 기질의 향상을 가져오고, 기질의 변화를 통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성격이나 환경은 또 어떻습니까? 앞서 이야기했던 기질도 형편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으면, 예수님과 함께했을 때 들었던 수난과 죽음 예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포기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포기하기보다는,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한 제자이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과 함께했을 때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스스로 이를 인정한다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부족한 제자들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성공적으로 거둔 것처럼, 우리 역시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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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 마라(닐스 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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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이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이요,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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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는 이들의 사명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입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내 안이 주님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명에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믿음은 더 확고해집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오늘 나를 통해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당신, 주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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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내(忍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忍)은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낼 정도이니 그 아픔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耐)는 수염을 하나씩 뽑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수염을 하나씩 뽑아내니 그 수치스러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채찍질을 받았습니다. 가시관을 썼고, 창에 찔리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은 달리는 중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통증을 참아내는 것은 완주 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통증일 뿐입니다.
아이는 주사를 무서워합니다. 그 통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주사의 통증을 알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야 더 큰 통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통증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독화살을 맞은 팔의 독을 치료할 때 통증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워낙 체력도 강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과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증과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뇌는 사회와 역사를 위한 선택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고 가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사제 ‘인사적체’가 심각했습니다. 저의 선배 사제들은 보좌신부 4년 하면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보좌신부 8년을 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8년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직책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보좌신부로 20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구는 ‘협력사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사목을 한 다음에는 특수사목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사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교구에서 이런 제도를 보완하기 이전에 몇몇 선배 사제들은 기꺼이 자리를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본당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본당신부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좌신부님들이 본당신부가 될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기꺼이 받아 주셨고,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에게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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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주님의 부활 소식은 전해 졌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해진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실 제자들의 모습이 이해가 갑니다.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모든 사람이 보았습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도 봤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분이 살아나셨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것 같으십니까?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맞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분은 늘 당신이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 나는 부활을 믿고 있었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완고함을 꾸짖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더욱 단단히 하시려는 꾸짖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끔 꾸짖음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주님께 파견받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셨듯이 우리도 파견될 것입니다.
파견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파견될 자격이 있습니다. 꾸지람을 듣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가끔 꾸지람을 듣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러므로 파견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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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멀스멀
아스팔트 한 귀퉁이
개미 한 마리 스멀스멀 지다닌다.
길을 잃은 건가?
이리저리 고개저어 찾고 찾는다.
무엇을 찾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방향 잡아 걷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는 것처럼
우리 맘 한 모퉁이
빛 닮은 희망 한 마리 스멀스멀 지다닌다.
길을 잃은 건가?
이리저리 고개저어 찾고 찾는다.
무엇을 찾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방향 잡아 걷기 시작한다.
그분 가신 길 어딘지 아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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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無知)에 대한 답(答)은
“진리(眞理)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이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주님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진리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말씀은 거의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과 그 변화를 보여줍니다. 사실 성서는 거의가 주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대로 만남, 회개, 자비, 지혜, 겸손, 용기로 이어지는 인간 현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닥치는 대로 벌면 닥치는 대로 쓴다. 사람답게 쓰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벌어야 한다.”-다산
‘사람답게’는 막연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하면 분명해집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가? 치욕을 참고, 목숨을 걸고, 친구를 버리고, 의로움을 버리라.”-순자
부자가 되려는 마음은 무지의 절정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의 대화중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착함과 약함의 차이를 새삼 깨닫습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형제에 대한 수도형제의 진단입니다.
“착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정신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력이 강한 이들을 멘탈 갑이라고 말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그분은 매우 섬세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했습니다. 그분은 겸손했고 누구에게 부담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참 고귀한 인품의 두 어른 교황님들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마지막 만남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베네딕도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분의 의식은 여전히 또렸했으나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꼭 쥐었고 내 말하는 것을 이해하였으나 한마디도 분명히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보면서 그분과 함께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분의 맑은 눈을 기억한다. 나는 그분께 애정 가득한 몇마디 말씀을 드리고 강복을 드렸고, 서로는 말없는 중에 작별인사(goodbye)를 했다.”
이어지는 회고담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현인(賢人)”인 교황들입니다.
“교황들 사이에는 일관성(continuity)이 있다. 각 계승자인 교황은 언제나 일관성으로 특징지어 진다. 일관성중에 각자 고유의 은사가 빛을 발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고, 파탄(rupture)은 없다...몇몇 추기경들이 베네딕도 교황에게 가서 내가 이단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모두를 경청했고 위엄을 지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단이 아니다.’ 그분은 이렇게 나를 방어해 주었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방어해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전임 교황을 회고하는지요!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위대한 인품과 우정의 교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던 분들의 고백을 듣고 불신했던 무지한 제자들의 반응과 더불어 주님의 꾸중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불신과 완고한 마음’ 이것이 주님을 만나기 전 무지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회개와 더불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음이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사명의 부여가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는 이들의 최우선의 책무가 복음 선포입니다. 안으로는 친교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가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정직과 용기의 제자요 사도가 됨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유언대로 선교사로서 맹활약이 시작된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특징은 담대한 용기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유롭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다음 묘사가 참 좋은 증거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들의 담대한 용기는 다음 고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 자유로워지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박해자들에 대한 순교자 영국의 토마스 모어(1478-1535)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좋은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선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왕의 종’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우선이라는 고백이요, 담담히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가톡릭 교회는 2000여년 동안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온 위대한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히 문맹의 사람들은 물론 고도의 지성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는 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고도의 관상과 신비주의와 성성(聖性)은 모두에게 주어진 동등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과 사랑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자비와 지혜, 담대한 용기의 사람으로 변모되니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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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내게 그러하시듯>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요한 21,14)
나를 믿으시는
당신이 계시어
당신을 믿는
내가 있사오니
나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
당신의 믿음처럼
굳건하게 하소서
나를 바라시는
당신이 계시어
당신을 바라는
내가 있사오니
나의 바람이
사그라들 때에
당신의 바람처럼
피어나게 하소서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이 계시어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있사오니
나의 사랑이
식어갈 때에
당신의 사랑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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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6.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마르 16,9).
부활 축제 거행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해가 더 이상 어둡지 않고 만물이 빛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이 더 이상 찢어지지 않고 교회가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종려나무 가지를 들지 않고 새 영세자들을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 이날이 참으로 그날입니다. 승리의 날, 부활 풍습으로 축성된 날, 특별한 은총을 입은 날, 영적 어린양을 함께 먹는 날, 새로 태어난 이들에게 젖을 주는 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술집으로 달려가지 말고 순교 성지로 서둘러 갑시다. 만취를 대단하게 여기지 말고 절제를 사랑합시다. … 장터에서 춤추지 말고 집에서 시편을 노래합시다.
… 이날은 아담이 해방된 날이요, 하와가 고통에서 벗어난 날입니다. 이날은 잔인한 죽음이 벌벌 떨고, 단단한 돌이 부서져 산산조각 난 날이며, 무덤의 빗장이 쪼개지고 치워진 날입니다. 이날은 죽은 이의 육신이 예전의 생명으로 되돌려진 날이며, 끄덕없이 맹위를 떨쳐 온 지하 세계의 법이 폐지된 날입니다. 이날은 주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늘이 열린 날이며, 무성하고 풍성한 부활 나무가 인류의 선을 위하여 온 세상을 정원 삼아 가지를 뻗은 날입니다. 이날은 새 영세자들의 백합이 싹튼 날입니다. 죄인들을 먹여 살리던 개울물이 말라 버리고, 악마의 힘이 빠져 버리고 마귀들의 군대가 해산된 날입니다.
-위-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평등과 일치가 없는 곳에서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는 펑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참된 평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 안에서 평등합니다. 하느님이 남자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드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남자의 머리나 발로 여자를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둘이 있는 곳에서는 결함이 발견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쪽은 다른 쪽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차이를 만들어 내는 ”같지 않음”은 쓰라린 아픔일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그러하듯이 우리 사랑도 만물과의 평등한 사귐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만물이 하느님 안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사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이중적인 에너지, 곧 주고받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에너지를 밖으로 펼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흔쾌히 우리에게 갚는다. 설령 어떤 사람들이 인척 관계나 우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와 더 가까워진다고 해도, 우리는 만물을 대할 때와 똑같은 우정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궁극적 선인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만물을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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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재앙
한번은 프란치스코가 그레치오의 은둔소에서 지내고 있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일련의 재해 때문에 형편이 나쁜 처지에 빠져 있었다. 탐욕스런 늑대 떼가 그 지역의 가축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것이며 옥수수밭과 포도원은 매년 우박으로 황폐한 채로 남아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설교하던 중에 그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나를 믿고 참된 고백을 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자신들을 위해 자비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으로써 이러한 온갖 재난이 곧 끝날 것이며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축복을 풍부히 내리시리란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태도가 불손하게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간다면 당신의 곤경은 되살아나고 전보다 더 극심해질 것이며 하느님의 분노가 두 배로 가중될 것이라는 것도 또한 약속합니다."라고 말했다.마을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의 충고대로 회개하였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그들의 고통은 끝이 났다. 위기는 지나갔고 늑대 떼와 우박은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았다. 사실 이웃 땅을 황폐시킨 우박을 동반한 폭풍은 그들의 땅 가까이 와서는 멈추거나 진로를 바꾸어 갔다.
우박과 늑대 무리는 프란치스코와 맺은 계약을 지켰으며 동의한 대로 사람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한 그들을 괴롭히려 하지 않았으며 지금 그들은 선한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너무나 놀라운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야생동물들을 복종하게 하고, 숲의 짐승들을 길들이고, 이미 길들여진 동물들을 훈련시키고,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인간들과 원수가 되었던 맹수들을 다시 순종하게 한 성 프란치스코의 사랑에 찬 경건심에 대해 가장 큰 존경심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심이며 이 경건심은 모든 창조물을 사랑이란 하나의 계약으로 뭉쳐 주기에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그것은 현세의 생명을 약속해 줄 뿐 아니라 내세의 생명까지도 약속해"(1티모 4,8)주는 덕이다.
리에띠라는 지역에 한 치명적인 병이 소떼와 양떼에게 덮쳐 급속히 많은 소와 양을 죽게 하니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 한 믿음깊은 사람이 밤에 한 환시에서, 즉시 성 프란치스코가 머물고 있는 수사들의 움막으로 가서 그가 손발을 씻은 물을 얻어 가축떼 위에 뿌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움막으로 가서 성인의 동료로부터 은밀히 물을 구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병든 소떼와 양떼에게 뿌렸다. 그 동물들은 땅에 기진한채로 누워 있었으나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닿는 순간 그들은 즉시 정상적인 기운을 되찾고 일어서서 마치 언제 병들었었느냐는 듯이 목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오상에 닿았던 물의 기적적인 힘이 질병을 쫓아내고 가축들을 치명적인 병에서 구했다.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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