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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아브라함
창세기 18: 1~15
○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천사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창13:18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19:1, 히13:2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눅7:44, 요13:14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아들에 관한 약속과 사라의 웃음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24:67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히11:11-12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마19:26. 눅1:37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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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장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러가지 말씀을 하시고 난 후에 떠나십니다. 그런데 18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늘 찾아 오십니다.
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은 24년 동안 자기 경험을 통해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생각한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고민하는 삶을 24년간이나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격려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 때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고 그 이름은 ‘이삭’이라 하라고 말씀하셨고, 수많은 약속을 다시 한 번 주셨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길렀던 사람들과 돈으로 샀던 사람 등 모든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지중해의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에 장막 입구에 앉아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얼마 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주셨던 여러 가지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옳구나. 내 아내가 임신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앞에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굉장히 존귀한 자들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을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본 아브라함은 맞이하러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걸어가지 않고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혀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이런 대접은 존귀한 자들에게만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아브라함의 지난 25년 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태도였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이렇게 반응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나타난 이 세 사람은 누구입니까?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라고 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는 그 하나님이 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관해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너는 네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도 음성으로 들었고 환상 중에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오셔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세 사람’을 삼위 일체로 해석 할 수도 있겠지만 히브리서 13장 2절을 보면 사람을 사랑하고 대접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한 사건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도 있느니라.’ 바로 이것은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 사람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두 사람은 천사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분은 이방신과 다릅니다. 이방신은 저 멀리에 있는 신, 무서운 신, 너무나 위엄 있어 인간을 숨도 못쉬게 할만큼 권위주의적인 신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로마와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신들이 바로 그런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외롭고 힘들 때 음성을 들려주시고, 절망했을 때 용기를 주시고, 길을 잃었을 때 길을 가르쳐 주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친히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가까이 계셔서 우리와 대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더 놀랍게도 우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야기도 하시고 음식도 같이 나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이런 모습은 먼 훗날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창세기에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 드리러 올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간신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만 기억해낼 뿐입니다.
이 차이는 마치 제가 이 자리에서 설교할 때 직접 나와서 설교하느냐, 아니면 미리 비디오로 찍은 것을 틀어 놓느냐의 차이와 같습니다. 또는 대개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 하면 험한 이야기도 마다하지 않고 늘어놓지만 막상 그 사람을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개념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볼 수 있는 분이시며,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욥도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욥기 4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인데 이제 만나는 하나님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이로다’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았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걸어가 맞이할 수 없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의 감격
3~4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우리는 1절에서 정말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하고, 애타게 기다렸던 한 사람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만약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면 그냥가지 마십시오.’라고 애원합니다. 마치 떠나가려는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떠나지 마시고 여기 잠시 계십시오. 떠나가시면 나는 죽고 말겁니다. 나는 당신의 발을 씻겨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잠시 쉬십시오.’
이런 모습은 지난 24년간 아브라함에게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변했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된 아브라함을 보면서 신약의 한 여인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집에 왔을 때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 그렇게 소중히 아꼈던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져나왔습니다. 예수님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것이 향기나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나 성령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난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과 예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비판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저런 값비싼 향유를 왜 저렇게 낭비를 하는가? 예수님도 원하지 않으셨을거야. 그런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발에 붓기보다는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원하실 것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맘대로 한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야, 네 생각은 옳지 않다. 이 여자는 내게 장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여인은 거룩한 낭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되면 아무데나 가서 아무 음식이나 먹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좀 들더라도 멋있고 근사한 곳에 가서 먹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에 가서 밥해 먹으면 십분의 일도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니까 돈을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자기의 시간을 다 드립니다. 몇 시간만 드려도 되지만 24시간 모두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더 드리고 싶어서 내 시간, 내 돈, 내 자존심, 심지어는 직업까지도 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동이요 감격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께 발을 씻어드렸을 뿐만 아니라 떡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 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말대로 그리하라.”
예배란 내가 드림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아주심으로 완성됩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헌금을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눈물을 흘려도 그분이 받지 않는다면 헛수고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 들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이 났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의 예배와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지길 축원합니다.
천사들과 함께 나눈 풍성한 식탁
6~7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듣자마자 장막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 자기 부인에게 빨리 밀가루 반죽해서 떡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이제는 송아지를 잡아 요리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하인에게 모든 걸 맡겨놓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골라 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흥분과 감격이 없습니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게 지쳐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신약의 인물이 있습니다.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돈도 있었고 권력과 지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외롭고 허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어른 체면에도 불구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부산 세관장이 컨테이너 위에 올라간 것과 똑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뽕나무 아래에 이르자 갑자기 삭개오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삭개오는 흥분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그 즉시 급히 내려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예수님, 내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뉘게 토색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헌금이요 예배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식탁 공동체입니다.
기독교는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하면서 참된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습니다.
우리가 힘든 것은 서로의 사랑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을 보고 사랑을 확인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네게로 들어가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참된 신앙은 서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빵으로 먹고 그의 피를 포도주로 마시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그 큰 축복을 함께 누립니다. 여기에 진정한 하늘의 평화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이 체험한 감동과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일시에 삼천명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누구의 명령이 없었지만 서로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떡을 떼었으며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새로운 기쁨, 새로운 교제,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이런 공동체의 모습에서 떠나 세상처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 세 사람은 풍성한 식탁을 나무 밑 그늘에서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라의 웃음
9절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세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나서야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자신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제를 하고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야 자기가 온 목적을 말했습니다.
먼저 예배가 있어야 사명이 존재합니다. 관계와 교제가 있을 때에야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터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이 피곤하고 힘겹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나서 일을 하면 즐겁고 신납니다. 그럴 때는 밤을 새워도 즐겁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하나님이 찾아 오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네가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배신해도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 내가 네 인생을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불가능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내가 한 약속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그 말씀을 사라에게 하시고 싶어서 그의 아내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남편이 믿음있다고 아내도 믿음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라는 불신앙과 인간적인 믿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인간적인 믿음을 버렸지만 사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1~12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도대체 나이가 몇살인데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래’가 ‘사라’로 바뀌었는데도 그녀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능력도 믿으십니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믿으려고 하지만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으면서도 외롭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불안한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불신앙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도 속이 타셨습니다.
약속의 자녀를 주시기 직전인데도 사라는 불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런 일이 마리아에게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남자를 경험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겠냐고 물었을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새로운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 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24년간 간직한 보잘 것 없는 믿음을 집어치우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도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계신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믿음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사라의 말대로 사라는 웃지 않았습니다. 단지 속으로 웃었을 뿐입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지.”
과거의 믿음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월만 낭비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