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건과,
12.12사태의 원인과 진실*
우리 사회에 좌익들의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어왔다.
이것이 조국을 위험에서 건지는 일 중에 가장 시급한 될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좌익들은 이 나라를 공산화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의도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북한의 김일성 괴뢰정권의 전략전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이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해왔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1. 10.26의 전야
1979년 5월 30일 김영삼이 전당대회에서 지지율이 훨씬 우세했던 이철승과 치열한 접전 끝에 예상을 뒤엎고 신민당 당수로 당선 되자 정국이 걷 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 했다. 노동운동,도시산업선교회(소위 도산이라 불림),가톨릭 농민회, 학생 및 수많은 재야세력이 연합하여 연일 군사정권 타도와 유신타도를 외쳤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몹씨 싫어하던 카터까지 끌어 들이면서 김영삼은 특유의 독기어린 말을 계속 쏟아냈다.
1979.8월11일 YH사건이 발생 했다.
회사측의 폐업조치에 항거하여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정으로 신민당사를 40시간 점령하여 정치투쟁을 벌였다.
김재규의 강경진압 지시에 따라 진압과정에서 신민당 사람들, 취재기자,노동자들이 부상을 당하고 노조위원장 김경숙이 사망하게 되었다. YH사건은 순수한 노사분규를 악의적으로 정치문제화 시키려는 재야세력및 야당의 충동질에 의해 빚어진 사건 이었다.
이 방법은 전통적으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좌익들의 변치않는 전술이다.
사건을 직접 주도한 노조지부장 최순영,부지부장 이순주, 사무장 박태연, 그리고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인명진(목사), 문동환(목사),서경석(목사),이문영(교수),고은(시인)등 모두 8명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과 집시법위반으로 구속 됐다.
이런 와중에 조일환 등 신민당의원 3명이 나서서 김영삼 총재직 당선은 무효라고 서울지방법원에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9월7일 가처분 신청이 받아 들여 지면서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물러 났다. 김영삼은 이를 박정희정권의 공작이라고 몰아 갔다.
이때 김영삼은 9월16일 미국 NYT(뉴욕타임즈)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게 "한국의 원조를 중단하고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며 사대주의적 발언 까지 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 했다.
대통령과 여당은김영삼의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반국가적인 발언이라고 규탄 하였다.
이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군을 지탱 할 수가 없는 상황 이었다. 1956-1962년 사이 미국의 년평균 경제원조가 2.8억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 였다. 군사분야를 제외하고도 무역적자 5천만 달러를 합쳐 3.3억 달러를 새로 벌어 들여야 하는 상황 이었다.
여기다 년평균 2.88%의 인구
즉 72만명의 인구가 매년 증가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를 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실업률이 30% 였다.
지금 3.5%라 해도 난리 인데 그 당시는 어떠 했겠는가? 당시에 해마다 식량부족량이 늘어가고, 수많은 국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60년대필리핀 국민소득 170달러,태국220달러,한국은 68달러 였고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 높았다.
1979년 당시 한국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살아 갈 수가 없었고 경제역시 마찬 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의 발언은 그야말로 자기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국가 안보를 파는 행위 였다.
이 발언으로 김영삼은 10월 4일부로 의원직을 박탈 당했고 신민당이 이에 빈발하여 10월 13일,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 하였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사퇴를 모두 받아 들 일수는 없고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 했다. 바로 이것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 했다.
10월15일 김영삼의 정치적본거지인 부산에서 민주 선언문이 배포 되었다. 16일에는 50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했고, 여기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개 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등을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세무소,
방송국등을 파괴 했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및 창원으로 확대 됐다. 이른바 "부마사태"였다.
이에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1,586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3공수여단을 출동 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재판에 회부 함으로써 시위는 진정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10.26이 일어났다. 사실상 10.26은 김영삼에서 비롯된 비극의 참상이었다.
공산주의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알아야 한다.공산주의 주체사상의 포기없이 통합은 허구이며 기만이다. 사상은 핵보다 무섭다.사상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