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사랑의 가객, 김현식」을 편자한 육상효씨가 日刊스포츠 기자로 활동 했을 때 김현식의 자서전을 담당하면서 쓴 내용입니다.
언젠가 그가 술묻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세상에 적이 있어. 그 적이 누군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밤마다 그 적들은 나의 방에 찾아와서 목을 죄어들어."
그는 그 적들의 정체를 모르는 채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 「사랑의 가객, 김현식」 中에서 -
그는 1958년 1월 7일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충남 홍성에서 조그만 사업과 함께 농사를 짓는 유지였고, 외할아버지는 충북 옥천에서 만석꾼으로 통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외국에 나가 영문학까지 공부하고 온 인텔리였다. 아버지는 이것저것 조그만 사업들을 벌이던 멋쟁이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며, 아이들을 돌보던 가정주부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와 어릴 적부터 늘 함께 지내선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가 가장 말을 잘 들은 사람은 그의 누나였다. 그는 성격에 독기가 가득해 동네 아이들과의 싸움에서도 좀처럼 지기 싫어하는 아이로 자랐다고 한다. 그는 혜화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입학식 날 아이가 안보여 찾아보니 학교 뒷마당에서 선배격인 아이들과 피투성이로 나뒹굴고 있었다는 얘기는 지금도 그의 가족들이 그를 추억하는 단골 얘기감이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그는 옥천에 있는 죽향국민학교로 전학한다. 당시 옥천에 있던 외가에서 마(麻)를 삼아서 벽지를 만드는 갈포 공장을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 사업에 참여하기로 해 식속들을 데리고 내려간 것이다. 국교 3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약 1년 남짓이던 이 옥천 시절은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어느 술자리에서나 어릴 적 얘기가 나오면 마치 그 옥천에서의 1년이 어린 시절의 전부인 양 얘기를 했고, 누가 고향을 물어도 서슴없이 옥천이라고 대답했다.
학교 뒷산의 대나무밭을 휩쓸어가던 바람 소리, 전설처럼 아이들에게 이야기되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이라는 이야기, 그 옥천 한쪽을 돌아호르던 맑은 금강 물,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던 옥천 아이들과 강가에서 싸우던 이야기, 갈포공장의 높았던 굴뚝, 아흔아흡 칸이라고 자랑하던 괴기스럽게 생긴 집,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어린 시절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가수가 된 이후에도 술만 취하면 입버릇처럼 사람들에게 옥천에 가자고 말했고, 또 실제로 많은 곡들은 그 옥천의 어느 강가를 거닐면서 만들었다.
4학년 때 그는 다시 삼청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 학교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거의 없다. 다만 동료 가수 전인권이 그때 그보다 두 학년 높은 상급생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무슨 대단히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1966년 11월 춘천 성심여대에서는 의문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 경기여고를 나온 빼어난 미모의 불문과 재학생이 보일러실 굴뚝에서 투신자살한 것이다. 성심여대의 춘천 실절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기숙사 선배들을 통해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던 이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살한 이 여대생을 두고 당시 한 언론에서는 남자 관계에 의한 자살이라고 추정하기도 했고, 경찰은 문학소녀적인 염세에 의한 자살이라고 사건 결론을 내렸었다.
이 여대생이 가수 김현식의 사촌누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에서 같이 살면서 어린 김현식은 이 누나를 끔찍히도 따랐고, 이 누나의 돌연한 자살은 어린 그의 가슴에 원초적인 상처로 자리잡는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잘 읽지도 못하던 불어원서 등 그 누나의 유품들을 어린 김현식이 가져가 오래도록 보관했었다 한다. 그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겨운 삶과 죽음의 문제들을 그때 걸머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국교를 졸업하고 그는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로서는 꽤 명문이었고 거기다가 입학 성적도 전교 4등이라는 좋은 성적이었다. 이때 그는 정릉에 있던 큰집에서 사촌형제들과 같이 살았다. 이 사촌형들을 통해 그는 중학교 시절 기타와 음악에 접하게 된다. 지금은 가수 김현식의 추모사업 기획사인 킴스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는 사촌형 양국정 씨는 당시 홍익대 공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기타를 배우고 싶어하는 김현식의 열정에 기타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선천적 재질이 있었는지 그는 양국정 씨의 간단한 지도로도 웬만한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당시 한창 국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박인수의 「봄비」 비틀즈의 「오 달링」 CCR의 「프라우드 메리」 등의 노래들을 꽤 그럴 듯한 목소리로 부르게 됐다. 그러나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것이 행복해질수록 성적은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스케이트부에 들어가며서부터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서 점점 기타나 스케이트를 껄렁대는 문제아로 변해갔고, 급기야는 당시 자기들 깐에는 한창 세력 다툼이 치열하던 보성중과 중동중 사이의 싸움판에서도 끼어들게 되었다. 그는 싸움판에서도 어린 시절의 독기를 발휘하여 이름을 날렸다. 아마 다 큰 후에도 갖게 된 그의 주먹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나중에 중학교 시절 간장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지 않았으면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도 있었다.
- 계속 -
첫댓글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