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서기 1238년. 7백여년간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전래되던 황룡사는 몽고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 당시 동양 최대,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던 황룡사 목탑은 그렇게 침입자의 손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황룡사가 있었던 경주의 그 자리는 이제 천년전의 이야기를 간직한 흔적들만이 남아있는 황량한 벌판이 되어 있다. 신라 3대 보물의 하나였던 황룡사 목탑. 본서에서는 사라져 버린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다양한 사료를 이용하여 추정해 보고 그 당시 신라인의 높은 문화적 예술성과 함께,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 문화의 위대함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것이다.
황룡사 목탑의 건립 배경
진흥왕 때 삼국간의 우위를 차지했었던 신라는 제27대 선덕여왕 때 들어서, 백제 군사가 신라 서울 근교까지 쳐들어오는 등 백제와의 전쟁에서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자장법사의 요청에 의해 불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9층 목탑을 세우게 되는데, 이 황룡사 목탑은 신라 주위의 아홉 나라를 모두 항복시키겠다는 강력한 호국의지가 담긴 탑이었다. 목탑 조성의 총 책임자는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이간 김용춘 이었으며, 기술 공사의 책임자는 백제 기술자 아비지였다. 9층목탑의 건립 의도를 알아차린 아비지는 공사를 중단하려고 했으나, 꿈속에서 신인이 내려와 탑을 완성하는 것을 보고,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황룡사 목탑의 건립 배경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神人은 자장법사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과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의 침입이 횡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으니 덕이 있어도 위엄이 없소. 그러한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어떻게 이익되는 일을 해야 합니까?"
신인이 말한다.
"황룡사의 호법룡은 바로 나의 큰 아들이요. 범왕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요.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하겠소" 말을 하고 옥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정관 17년(서기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말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자 신하들은 말한다.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하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 용춘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장인들은 2백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여 어두워지는 속에서 노승 한사람과 장사 한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다. 공장이는 이를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황룡사의 목탑 또한 그러한 호국불교의 면을 확실히 보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뒤이어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며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황룡사 목탑을 지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뒤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황룡사 장육존상과 구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입니다."
이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신라 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으매 9한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
황룡사 9층 목탑은 특이하게도 다른 목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상징이 있다. 이른바 각 층마다 진압시켜야 할 주변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그 당시 신라 주변의 9나라를 지칭하고 있다. 호국불교의 목적이 바로 황룡사 목탑의 건립 배경임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몽고군에 의해 사라지는 황룡사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은 여러 번 벼락을 맞고 중수를 하게 된다. 사중고기에는 다음과 같이 황룡사 목탑의 중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 14년(553) 황룡사를 처음 세운후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이 즉위한 7년(698) 6월에 벼락을 맞았다.
33대 성덕왕 병신(720)에 다시 이것을 세웠으나,
47대 경문왕 무자(868) 6월에 두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번째 중수하였다.
고려 광종의 즉위 5년(953) 10월에는 세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1012)에 네번째 중수를 했다.
정종 2년(1035)에 네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 갑진(1064)에 다섯번째 중수를 했다.
헌종 말년(1095)에 다섯번째 벼락을 맞으니 숙종 원년(1096)에 여섯번째로 중성했는데,
고종 16년(1238) 겨울에 몽고의 병화로 탑과 장육존과 절의 전우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했다.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황룡사는 1238년(고려 고종25년) 몽고군의 병화로 탑과 장륙존상, 불전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황룡사의 소실은 우리 민족 문화사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황룡사를 경주에 옛 벌판 한가운데 다시 세울 수만 있다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기자기하고 섬세할 뿐 아니라 웅장하고 거대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황룡사가 주춧돌만 남은 상태로 있다면 우리들의 기억이나 관심은 영원히 묻혀 버릴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목탑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지어지던 불교 탑파의 한 형식이다. 이러한 목탑의 건립 기술이 삼국시대 일본에 전해졌고, 현재 일본은 목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많은 목탑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 많던 목탑은 다 화재와 병화 등으로 소실되고 오직 석탑만 남아 있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황룡사 목탑, 그 상상의 출발
경주 남산의 한 골짜기 탑곡에는 높이가 9m, 둘레가 30m에 이르는 부처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명랑이라는 신라의 고승이 삼국 통일 후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불상과 황룡사 9층탑을 이 바위에 새겨 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바위에는 탑이 새겨져 있는데, 학자들은 이 마애 9층탑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황룡사 9층탑을 본뜬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그 당시 목탑의 양식을 본 따 만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과연, 마애 9층탑의 모습은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까? 경주 사람들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부처바위에 새겨져 있는 탑을 보면 황룡사 목탑과 마찬가지로 9층인 것을 알 수 있다. 상륜부가 단순하게 처리되는 석탑과 달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목탑임을 보여 주고 있고,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들이 목탑임을 명확하게 해준다. 물론 확정적인 자료가 없어 이 마애 9층탑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애탑은 그 형태가 부조라는 점, 그리고 바위에 새겨넣어 단순화되어 있는 표현으로 인하여 세밀한 묘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황룡사 목탑의 완전한 모습을 추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은 이 마애 9층탑밖에 없는 것일까? 얼마전 북한의 문화재 도록인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국내 유일의 목탑 양식을 한 9층 금동소탑이 발견되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2층 내부에서 발견된 이 금동소탑은 높이 37cm, 기단 부분의 길이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 4면에 걸쳐 8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탑 1층에는 3면에 걸쳐 8개의 문을 달았으며 각 층마다 창문을 낸 전형적인 목탑 형식의 금동탑이었다.
이 9층 금동탑은 황룡사와 같은 시기에 백제 사람에 의해 조성된 호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신라 목탑의 양식을 충분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초기의 금동소탑이다. 또한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는 고려 4대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하는데, 광종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부인인 낙랑공주와 형제간이다. 어머니의 원당을 세우는 과정에 여동생의 남편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 과정에서 경순왕의 발원으로 금동탑이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경순왕은 경주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고 따라서 황룡사 9층 목탑 모습의 영향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황룡사는 위의 금동소탑과 마애탑을 기본으로 그 모습을 상상하는데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황룡사 목탑의 크기
황룡사가 불탄 후 700여년간의 폐허로 논밭이 되고 마을이 조성되었던 것을 1964년 농가가 철거되고 사리구를 간직했을 심초석을 발굴하였다. 그런데 심초석 위에 놓인 장방형의 돌을 들어올리고 심초석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사리공 안에 있어야 할 사리구는 없었다. 벌써 도굴이 되고 난 이후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사위원이었던 황수영 박사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진귀한 물건을 감정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도굴된 황룡사의 바로 그 사리구였다.
황수영 박사가 받은 사리구 중에는 가장 작은 사리 그릇과 네모난 청동 소함이 있었고, 사면으로 이루어진 사리 내함이 있었다. 사리 내함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이 심했지만 무엇인가 탑의 비밀을 밝혀 줄 만한 기록들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황룡사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사리 그릇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청동 소함이 감싸고 있었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금동팔각사리탑도 사리구 안에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로, 세로 23cm 크기의 사리 내함에 들어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사리 외함이 감싸고 있었다. 특히 사리 내함의 경우 세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9층탑의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가 적혀 있다. 바로 그 찰주본기에 황룡사9층탑의 높이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9층탑은 철반 이상의 높이가 7보(42자), 그 이하가 30보3자(183자)이다. 총 225자다.
이것을 지금의 수치로 환산하면 철반 이상은 높이가 14.96m이고, 철반 이하가 65.20m. 그러니까 탑의 총 높이는 80.18m가 된다. 지금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해당되는 거대한 높이이다.
사리구를 통해 밝혀진 탑의 높이 외에도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또 있다. 1976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황룡사 터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발굴품이 금당터 기와무지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수십개로 조각난 상태로 버려졌던 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발굴 위원들은 조각난 치미를 5년에 걸쳐 정성스레 이어 붙였고 마침내 치미를 복원시켰다. 그 크기가 1m 82cm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치미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다. 원래 치미는 지붕 위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던 기와인데, 복원된 치미는 황룡사 금당에 올려져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치미는 건물의 크기와 비례해야 하기 때문에 치미로 건물의 규모를 가히 가늠 할 수 있다.
황룡사의 규모는 종의 크기로도 유추할 수 있다. 지금도 종루터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의 동종은 49만7천근의 구리를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 크기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대 크기인 성덕대왕신종의 4배에 이른다.
황룡사 경내의 배치는, 경내에 들어서면 양옆으로 종루와 경루가 있었고, 탑 뒤로 금당이 셋이 배치되어 있었다. 금당 뒤로는 강당이 있고, 회랑이 둘러 처져 중문과 이어졌으며, 다시 남문과 담장이 절과 속세를 구분하는 경계 구실을 했다. 그리고 그 절 한 가운데 9층탑이 세워져 있었다. 황룡사의 경내 넓이는 8800평이므로 불국사의 8배에 해당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만약에 황룡사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지금도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가히 세계적인 사찰이었을 것이다.
황룡사 목탑의 외부 모습
황룡사 목탑의 외부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가까이에서 본 황룡사 목탑은 일단 그 높이에서 사람들을 압도하였을 것이다. 경주에서는 어디서나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landmark로서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고, 또한 황룡사 목탑에서는 멀리까지 경주 근처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 무신정변의 한 주역으로 나중에 전제적 정권을 가지게 되는 고려 상장군 이의민은 그 태몽에서 황룡사 목탑에 오르는 꿈을 꾸고 태어났다고 하였을 정도로, 그 당시 경주 사람들에게는 신비하고 영검한 탑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솔거라는 이름의 신라시대 화가가 나온다. 그는 황룡사 벽에 소나무 그림을 그렸는데, 매우 생동감이 있게 그려져, 새가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황룡사 탑의 외부에는 소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고, 그 색깔과 모습이 실제와 매우 흡사하였다. 소나무의 잎의 녹색과 기둥의 갈색은 지금도 사찰의 단청의 색깔로 쓰이고 있는 것인데, 이것으로 보아 황룡사 벽에 그린 솔거의 소나무 그림은 단청의 기원이라고 생각된다.
처마는 끝부분이 높게 올라가지 않는 형태였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물은 처마의 끝부분이 높게 올라가지 않고 밋밋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일본의 고대 건물의 특징과 흡사하다. 또한 각 층의 처마 지붕은 일정한 체감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을 것인데, 이것은 마애 9층탑이나, 불일사 금동소탑에서 보는 바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목탑의 처마는 일정한 체감비를 가지고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륵사 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인데, 이에 반해 전형적인 일본의 목탑은 아래층과 위층의 처마 지붕의 길이가 같아 체감비가 없어 불균형하게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각 층마다 처마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을 것이고, 창문이 매층마다 있어, 밖을 바라 보기 위해 열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맨위층에는 14미터가 넘는 거대한 철주가 박혀 있었을 것이고, 이 철주의 모습은 마애 9층탑과 불일사 금동소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아름다운 장식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석탑엔 더러 철주의 모습을 한 상륜을 남기고 있는 예가 있다. 남원 실상사 삼층 석탑 상륜은 거의 완벽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런 상륜이 어느 탑에나 일정하게 설치되었었는지 아니면 각기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일본 목탑의 철주 상륜 모습은 대략 비슷하다. 대체로 호류사 5층탑 철주 상륜의 모습을 닮은 예가 많다. 따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룡사 목탑의 철주 상륜도 호류사 상륜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중국의 응현 목탑과 일본의 호류사 목탑
중국 서북지역에 위치한 산서성 응현. 바로 이곳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높은 탑이 하나 서있다. 목탑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응현 목탑이다. 정식 명칭은 불궁사석가탑(佛宮寺釋迦塔)이다. 서기 1056년 요나라때 건축된 이 응현 목탑은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앞에 서면 사람들이 손수 쌓아올린 탑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함에 압도된다. 목탑은 무엇보다 규모가 세계 최대급이다. 안테나까지 포함한 높이가 67.31m, 1 층 지름이 30.27m이며, 총무게가 자그마치 743만 377t이나 된다고 한다. 더욱 기이 한 점은 모든 건축 부재가 목재이며,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구조면에서 겉모양은 5층이나, 각 층 사이에는 또 다른 층, 즉 암층이라는 것이 하나씩 숨어있다. 그래서 이런 구조를 중국학계에서는 명오암구옥 (明五暗九屋)이라고 한다. 즉,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1층과 2층사이, 2층과 3층사이, 3층과 4층사이 그리고 4층과 5층 사이에 암층이 있어 안에서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모두 합하여 9층의 목탑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동아시아 전통 천문지리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 글고 땅은 모났다는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땅을 설명하는 구조론인 4방(四方)과 하늘의 구조를 말하는 8황(八荒)에다가 중앙을 설정하면 각각 5방(五方)과 9황(九荒) 이 만들어지는데, 8황 혹은 9황은 흔히 원(圓)과 동의어였다. 천원지방 모티브는 목탑 바닥인 기단(基壇. 총높이 4m)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즉, 2층으로 구성된 기단 중 땅과 인접한 1층은 정사각형인 반면에 2층 기단은 정확 히 8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탑신(塔身)과 기단(基壇)이 모양은 다르나 같은 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목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목은 거의 1천년 전 모습을 거의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응현에 서경(西京)이라는 작은 도읍을 설치한 요(遼) 왕조는 청수(靑守) 2년(서기 1056)에 이 목탑을 건립했다. 당시 이곳 사찰은 이름이 보궁선사(寶宮禪寺)였다. 이후 금(金)ㆍ원(元)ㆍ명(明)ㆍ청(淸)왕조를 거치면서 증ㆍ개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창기 때 원형을 한 번도 잃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응현목탑은 황룡사 목탑보다 400년 이후에 지어진 목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룡사9층탑은 바로 이 응현 목탑보다 무려13m나 더 높다. 아마 황룡사 목탑이 현재까지 남아있었다면 세계 최고 높이의 목탑이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는 우리 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살아 숨쉬고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세기 이후 백제의 장인인 사공, 맥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이 일본으로 상당수 건너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670년경에 세워진 호류사의 목탑이 백제 장인의 혼이 담긴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호류사 5층 목탑은 다른 일본의 목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일본의 다른 목탑, 이를 테면, 흥복사5층탑이나 동사5층탑 등은 자로 잰 듯 아래 위 각 층의 처마의 길이가 일정한 크기를 취하고 있는데, 이렇듯 체감비가 없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일본의 탑이다. 그러나 호류사5층탑은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체감비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경주 남산 마애 9층탑의 체감비와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호류사 목탑의 양식이 일본 보다는 백제나 신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류사 5층탑은 초기 불탑의 형태로 내부가 폐쇄되어 있어 사리를 모시는 역할에 충실한 구조이다. 밖에서는 5층으로 보이지만 안에서는 맨 상층까지 뚫려 있는 구조이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응현 목탑은 층마다 계단이 연결되어 있고, 각 층마다 여러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 호류사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백제 목탑의 영향을 받은 이 5층목탑, 백제 공예가가 만든 비단벌레 불상궤, 지금은 화재로 훼손되었지만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의 벽화, 그리고 백제의 작품인 석가삼존상과 백제관음상, 구세관음상 등이 있다.
황룡사 목탑의 내부 모습 1 - 내부 계단의 존재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 목탑은 1층 이외엔 공간이 없어 사람이 상층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상층부엔 각층을 이룬 표면 구조를 결구하고 지탱하기 위해 무수하게 목재를 얼기설기하여 그 틈새에서는 운신조차 어렵다. 한편 중국 응현 불궁사 석가탑은 5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각층마다 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늘 사람이 오르내린다. 그렇다면 황룡사 목탑의 내부 모습은 응현 목탑과 호류사 목탑의 어느 것을 닮고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는 고려 시대 시인들이 지은 시에서 그 단서가 나온다. 다음은 고려시대 문장가 김극기가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서 느낀 감상을 쓴 시이다.
層層梯繞欲飛空
萬水千山一望通
俯視東都何限戶
蜂穴果蟻穴轉溟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강과 일천산이 한눈에 트이네
굽어보니 동도에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또 황룡사 목탑에 관한 시 한수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고려 후기의 승려 혜심이 황룡사 목탑에 올라서 쓴 등황룡탑(登皇龍塔)이다.
一層看了一層看
步步登高望漸寬
地面坦然平似削
殘民破戶平堪觀
한층 다보고 또 한층 보면서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지면은 깍은 듯 평평한데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이 시에서는 우선 고려 말의 경주는 피폐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경주는 1천년간의 수도로써 기와집과 기와집으로 맞닿아 연결되어 있었고, 숱을 사용하여 밥을 짓는 등, 경제력이 상당히 발달하였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말에 이르러서는 쇠잔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고려해야 할 것은 이 漢詩들에서, 황룡사 목탑 내부에서 올라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층계로 된 사다리”라던가, “한층 다보고 또 한층 보면서”라는 문장에서 황룡사는 그 내부에 층계로 된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황룡사 목탑은 응현목탑처럼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다층 목탑이었던 것이다.
황룡사 목탑의 내부 모습 2 - 계단의 위치에 관하여
몇 년전 KBS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영상복원 황룡사 구층탑”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황룡사 9층 목탑의 재현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본인도 그 방영 프로그램에 깊이 감동하여 황룡사 목탑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방송 프로그램의 컴퓨터 그래픽 재현에는 몇몇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설명하는 현대 건축가가 함께 목탑 내부로 들어가고자 하여 건물 내부로 깊이 들어섰을 때, 그림자가 그 건축가를 계속 따라가고 있다. 건물 외부에서 투사되는 태양광선으로 그림자가 생겼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태양빛의 직사광선은 거대한 목탑의 중심부까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양의 직사광선이 아니라면, 그 그림자를 비추는 내부 조명이 어디에서 있어야 하는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었다. 따라서 황룡사 내부 조명의 문제는 잘못된 재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KBS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황룡사 9층 목탑의 내부 계단은 목탑의 중심부에 있는 것으로 재현되었다. 설명하는 건축가가 목탑 중심부의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는 모습을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목탑의 구조를 생각해 보았을 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탑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심주라는 기둥이 있어 목탑 각층의 무게는 이 심주를 통하여 지면으로 전달되는데, 이 심주가 없이 바로 계단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룡사 9층 목탑의 계단은 내부에서 양 옆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김극기의 한시 “層層梯繞欲飛空” 부분에서 “繞”는 두르다, 감기다의 뜻인데, 이것으로 보아서도 황룡사 목탑을 오르는 사람은 양쪽에 있는 계단을 통하여 빙빙 돌아가면서 1층씩 계단을 올라가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목탑의 내부 모습 3 - 암층의 존재에 관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높이 면에서나 그 넓이 면에서 가히 대단한 목조 건물이다. 오직 나무로써만 그 거대한 높이와 넓이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구조는 지금의 기술로도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기술로도 3층 이상의 목탑은 짓기가 어려워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충청북도 진천에는 황룡사 목탑 이후 금세기에는 최초로 지어진, 내부에서 올라가는 형태의 3층 목탑이 지난 1996년에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보탑사 3층 목탑인데, 웅장한 보탑사는 높이만도 141척 약 42.71m에 달하는 거대한 3층 목탑이다.
보탑사 탑은 암층이라는 우리나라 건축술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였는데, 이것은 응현목탑의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목조탑의 구조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시도된 것이다. 목탑에서는 아래층 천장과 위층 바닥 사이에는 지붕이 있어 거의 1층에 맞먹는 높이 만큼의 공간이 생긴다. 이 공간을 그냥 아래층의 천장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경계를 짓는다는 것은 현대 콘크리트의 튼튼한 구조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보탑사 목탑에서는 그런 간격을 공간으로 받아들여 정리하고 암층이란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다. 보탑사의 암층은 1층과 2층사이, 2층과 3층 사이에 있다. 이 암층이 없이는 그 거대한 목조탑의 구조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황룡사 9층탑에서도 보탑사 목탑에서와 마찬가지로 암층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룡사 9층탑은 그 층계를 오르는 내부구조가 17층이 되어야 한다. 바깥에서 보이는 9층과 암층 8층이 가산되기 때문이다.
황룡사 목탑의 복원은 가능한가?
황룡사 목탑의 복원은 과연 가능할까? 대답은 NO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의 형태로 재현은 가능하겠지만, 천년전 경주에 있었던 황룡사 목탑으로의 완벽한 복원은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고, 그것의 복원을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것도 휑한 폐사지에 오면 그 그리움은 더 할 것이다. 하지만,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불완전한 고증으로 그 자리에 황룡사 목탑이라는 것이 지어진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보물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후대에 걸쳐 이룩되게 될 황룡사 목탑에 대한 창조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또 다른 형태로 역사 문화를 짓밟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황룡사 목탑이 어떤 비율로 지붕의 처마 길이가 줄어드는 지 알지 못한다. 또한, 주심포와 공포의 모습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각 층마다 걸려있던 현판의 형태와 글귀도 알지 못한다. 각 층마다 상징하는 국가를 어떠한 형태로 표시하여 놓았는지 알지 못하고, 각층에 모셔졌던 부처님은 각각 어느 분이었는지 알 수 없다. 각 층마다의 높이는 얼마였는지, 처마 물매의 각도는 각 층마다 어떻게 달랐는지, 기와의 색깔은 무엇인지, 낙뢰는 어떠한 방법으로 피하였는지, 그리고 문은 어떤 무늬의 나무살로 된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게다가 무엇보다, 우리는 5층 이상의 순수 목조 건물을 지어본 경험이 없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1400년전으로 돌아가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을 실제로 바라보는 것 뿐이다. 9층 맨위층에 서서, 서산 해넘이를 바라보며, 황룡사의 실제 모습과 당시 경주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황룡사 목탑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소박하지만, 실현불가능한 원대한 꿈이라고나 할 것이다.
현재, 경주 황룡사지 한쪽 구석에는 경주문화재연구소 사무실이 있는데, 그 뒤쪽에는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기왓장들을 많이 쌓아두고 있다. 이곳에 온 관광객들이 그 기왓장들을 많이 훔쳐간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다만, 이러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