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
빠리에 체류하고 있는 고암 이응로 선생의 부인 박인경 여사와 차 한잔을 나누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이화여고 졸업반 때였어요. 안양으로 스케치를 나갔다가 친척이 하던 양로원엘 들렀지요. 할머니들이 돌팍에 앉아 해를 쪼이고 있는데 저만치 홀로 앉아 있던 40대 여인 한 분을 가리키며 친척이 일러 주셨어요. 저분이 나혜석씨야. 다가가 인사를 드리자 스케치북을 좀 보여 달라면서, 눈부신 나이로구나 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린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 있는 그분이 더 눈부셔 보였어요. 그날 나 여사는
냄새 나고 어두운 방 한쪽에서 원고를 찾아내 와서는 손이 떨려 글을
더 못 쓰니 원고 정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빠리 생활을 기록한
글들이었지요. 훗날 빠리에서 생활하면서 문득 그 글들이 떠오르곤 했답니다.”
아직도 조선 왕조의 잔영(殘影)이 서려있는 수원. 정조 사후 한 세기 만에 수원에서는 증조부가 조선왕조 호조참판을 지낸 왕족 같은 명가(名家)에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인 나혜석(羅蕙錫.1896~1946)이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뼈저린 슬픔을 당해야 했던 내력마저 닮아 있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나혜석의 이름이다. 아직 조선이 캄캄하던 1910년대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필명을 날렸던 화려한
명성의 그 나혜석만을 기억한다. 구시대적 권위와 인습과 도덕률에 저항하며 실의와 고독 속에 삶의 종장(終章)을 맞았던 또 다른 나혜석에는 무심하거나 무지하다.
수원 서호, 목판에 유체, 30x39cm
낙조의 석양빛을 받으며 ‘서호’로 간다. 남쪽으로부터 밤새워 달려온 열차가 벌판을 흔들며 가는 소리에 놀라 갈대 숲에서 일제히 철새가
날아오르곤 하던 서호, 조선시대 옛 이름이 축만제(祝萬堤)이던 이 서호는 이젠 농촌진흥원 시멘트 담 안에 갇혀 옛 정취를 찾을 수 없다. 나혜석은 꿈 많은 여학교 시절부터 이 호수를 자주 찾곤 했다. 유학으로부터 돌아와서는 푸근하고 너른 이 호수를 바라보며 예술가의 꿈을 좇곤 했다. 두 명의 한복을 입은 여성이 호숫가에 나들이 나와 있는 그녀의 <수원 서호>를 보면 두 여성 중 하나는 화가 자신임을 짐작하게 된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부친이 용인군수를 지낸 명가에서 태어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 나혜석.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의 첫 개인전(1921년 3월, 경성일보사 안의 내청각)이 몰고온 경이로운 폭발력을 ‘매일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씨의 양화 전람회는... 인산 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제2일에는 더욱 많아
3시까지의 관람자가 무려 4, 5천 명에 달하였더라...”
한 사람의 전시회에 4, 5천 명이 몰렸다. 요즘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녀는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하여 1927년 구라파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또 한 번 세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 당시의 유럽이나 미국은 조선인에겐 풍편(風便)으로나 듣던 피안이었다.
영국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청년 장택상을 조선 총독이 마중 나갔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여성으로서는 선택 받은
신데렐라였다. 장장 16개월에 걸친 구미 여행은 벅찬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을 들러 서구 미술의 흐름을 숨가쁘게 체험하고 193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구미유기(歐美遊記)>라는
글로 월간지 <삼천리>에 집중적으로 연재한다. 빠리에서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엿보았으며,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밤 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미술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거기서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오더라도 변변한 화랑 하나 없던 경성을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했다. 예술가라고는 했지만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가사와 육아문제 등에 있어서 그녀라고 별다른 면책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 김우영만 귀국하고 그녀는 1년 동안 빠리에 남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화가 나혜석의 삶을 영위한다. 이 기간이야말로 완전히
화가 나혜석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리에 홀로 남은
그녀는 몇몇 연구소와 작가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호흡하는데 특히 야수파 계열의 격정적이고 활달한 필치가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꿈같은 빠리 체류 동안 중추원 참의 출신에 언론사 사장을 지낸
당대의 명사 최린과의 염문으로 생애의 분수령을 가르게 된다. 여성의
버선목만 보아도 허벅지를 보았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향한 어제까지의 박수가 비난으로, 선망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류화가 나혜석’의 글을 쓴 이명온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누구의 과오도 아니며 원죄다.’라고 역설한다. 이방인 특히 이방 예술가를 정신없이 취하게 만들어버리는 빠리의 분위기가 감성 여린 그녀에게는 덫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녀는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삼천리>지에 저 유명한 ‘이혼백서’를 쓴다. 그와
함께 사회적 지탄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재기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여 마침내 100여 점이 넘는 작품으로 최후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싸늘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급격하게 황폐해
갔고, 붓을 놓아버린 채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 등지에 전전하며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오른다. 언젠가는 수덕사 견성암으로 승려가 다 된
여류작가 김일엽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때 남편과 아이들은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에미노릇을 못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고 먼 발치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송림의 바람소리마저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로 들려 화들짝 놀라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육신은 무너져가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해 겨울 밤, 산사와 양로원을 떠돌던 반신불수의 그녀는 마지막으로 옛 화우 이승만의 집에 들렀다. 거의 폐인의 행색이었다. 그녀는 몰라보게 피폐해 있었다. 육신의 마비와 함께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앓고 있었으며 손은 떨고 있었다. 오만하던 미의 여왕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그녀는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입술을 달싹여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식들이...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마른 볼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 2년 후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용산의 한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고 절규했던 나혜석.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 예원의 꽃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나혜석의 모든 것은 신화처럼 묻혀버렸다. 불과 50년 세월의 안팎에서 모든 것이
지워져 버렸다. 그녀의 생가 터인 수원 ‘나 참판댁’도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지도 불명이다. 심지어 문화관광부에서 예술가들의 생가 터나
묘지에 세우기 위해 마련한 표석지마저도 수년 동안 수원시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출처 ; 김병종의 화첩기행
자화상, 1928년경, 60x48cm, 개인소장
작품설명
배경과 걸친 옷이 강한 암청색으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고, 얼굴, 목, 손 부분만을 밝은 색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화면 오른쪽 밑에 H.R.이라는 합성사인이 들어 있다. 나혜석은 당대 여성들의 자아각성을 촉구하였다. 나혜석에 있어서 자화상은 자아를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것은 동시대여성에 대한 자아각성의 하나의 실천적인 본보기로서 해석된다. 근대한국의 여성 화가로서 유일하게 자화상을 그린 나혜석은 자의식에 대단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서양화의 전통을 충분한 이해와 습득 위에 수용한 것이다
농촌 풍경, 캔버스에 유채, 27.5x39cm, 개인소장
작품설명
나혜석은 여성의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화면에 배치함으로서 평범한 농촌의 일상생활을 재현하고 있다. 그 예로 <봄>, <농가>, <농촌풍경>, <봉황산>등이 있다. <농촌풍경>은 흰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농촌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초가집단 앞을 지나 걸어오고 있는 작품으로
농촌의 서정적 현실감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의 쌓아올린 짚단으로
보아 풍요로운수확을 마친 뒤의 시기로 보이고 왼쪽의 나무는 가지가
앙상하게 남아 있다.
나부, 1928년,71x115.3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작품설명
나혜석은 세계여행과 파리 체류동안 누드라는 새로운 장르에 접하게
된다. 그리하여 「구미유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나체미는 서구에서
아주 일반화되고 보편적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서구사회 구조속에서
나타나는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를 여성해방이라는 시각과 연결시키고
있다. 파리의 미술연구소에 나가면서 야수파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뒤로 돌아 앉은 이 누드 작품은 아마도 파리 연구소에서 모델을 그린것으로 믿어지는데 색다른 포오즈와 차분한 색조, 분위기 및 충실한 대상파악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혜석작품에 등장하는 나부는 항상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있고 주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나혜석은 누드화를
통해 여성으로서 당당하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제시하였다
무희, 1927-1928년, 41x33cm,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설명
파리의 '물랭루주'같은 유명한 곳에서 본 화려한 쇼의 한장면을 주제로
삼아 그린듯한 이 소품에서는 새롭게 시도된 서구적 표현감각과 신선한 기법의 지향을 엿보게 된다. 흰색과 적갈색의 부드러운 무복을 두툼하고 넉넉하게 입은 마네킹같은 두 무희가 가볍게 무대에 등장하는 움직임이 매력적인 표정과 단순화시킨 명쾌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다. 무복속의 가느다란 몸매와 매혹적으로 암시된 무희의 작은 얼굴과 상큼하게 내놓은 다리, 그리고 나비처럼 움직이는 손들의 나긋나긋한 움직임이 대단히 감각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다만 배경이 의외의 어두운 분위기의 색조로 처리되어 있다.
화영전 작약, 목판에 유채, 34x23cm
강변, 유채, 23X32cm, 개인소장
인천풍경, 합판에 유채, 15x22cm, 개인소장
다솔사, 합판에 유채, 54x69cm, 개인소장
선죽교, 목판에 유채, 23x33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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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페미니즘문학의 원류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수원에서 출생하여 최초의 여성화가, 최초의 여성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독립운동가이며 선각사상가였다. 나혜석의 소설「경희」는 동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춘원 이광수의「무정」보다도 더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아 한국페미니즘 문학의 원전으로
조명을 받고 있다.
특히 나혜석은 3.1 독립운동에 가담. 5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쳐 우리 나라 한국 여성운동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에 정부가 2000년 2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여 나혜석의 창조적인 인간상을 확인시켜 준 바 있다. 나혜석의 세속적인 삶은 파멸일망정 자기시대를 정직하게 살다간 예술가로서 나혜석을 패배자로 쉽게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여성'으로 보다도 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당당한 사람, 나혜석이 1921년 시로 쓴 여성해방운동을 한편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