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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0만 원. 최근 중고차 매물로 올라온 랜드로버 디펜더 가격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디펜더는 희귀성과 터프한 스타일을 인정받아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토록 비싼 차는 아니었다. 디펜더의 뿌리 랜드로버 시리즈 1은 농업 및 경공업을 위해 태어난 다목적 자동차였다. 마치 366만 원 가격표를 달고 등장했던 기아 세레스처럼.
글 윤지수 기자, 사진 기아자동차
‘한국형 농어촌차’로 등장하다
“기아산업의 농촌형 다목적 트럭 시판” 1983년 여러 신문에 실린 제목이다. 세레스는 ‘포터’나 ‘봉고’처럼 평범한 트럭이 아니었다. 농업과 임업에 집중한 특수 트럭이었다. 이름부터 이미 로마 신화 농업의 신 ‘케레스’의 영어식 이름. 기아가 판매하던 1세대 봉고를 밑바탕 삼아, 바닥을 높인 고상형 1t 트럭으로 등장했다.
백미는 동력 인출 장치다. 2,209cc 최고출력 70마력 디젤 엔진 힘을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기능으로, 이를 활용해 물을 퍼 나르거나 농약을 뿌릴 수 있으며, 탈곡기까지 돌릴 수 있었다. 견고한 트럭 엔진으로 여러 농기계를 대체할 수 있는 셈. 더욱이 적재함 안쪽에 3인용 벤치식 의자를 달아 총 6명이 탈 수 있어, 인력 수송도 거뜬했다.
그러나 비싸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세레스는 당시 한우 한 마리 가격을 기준 삼아 구석구석에서 원가를 덜어낸다. 가령 지붕은 천 소재로 덮었고, 유압 장치 따위 없는 기계적인 조향 장치를 썼다. 처음 출시 땐 사륜구동도 없었다. 1983년 12월 출고 당시 가격은 대당 366만4,000원. 당시 봉고 트럭이 485만3,000원이었으니, 동급 1t 트럭이 120만 원가량이나 저렴했다.
오지를 누빌 수 있는 트럭이 전무했던 그 시절 세레스는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다. 1983년 12월 첫 출고 이후 약 10개월 만인 9월까지 2,500대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활용성은 다양했다. 농업용 트럭은 물론이고 임업, 경공업, 그리고 소방차, 덤프트럭 등 처음 개발 목적대로 다방면으로 팔려나간다.
1988년 진짜 세레스가 등장한다. 사륜구동 시스템과 함께 철제 지붕을 달고 등장한다. 특히 세레스 사륜구동은 입소문을 탔다. 70마력에 불과한 엔진으로 무려 34.5°, 그러니까 71.8% 경사를 오를 수 있는 성능도 대단했지만, 앞뒤 리지드액슬(좌우 바퀴를 하나의 막대로 연결한 구조)을 맞물린 간단한 구조는 잔고장 없이 무척 견고했다. 제주도와 산간 지방에서 세레스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세계를 누빈 우리 트럭
이런 트럭이 필요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 아니었다. 사실 기아산업 역시 처음부터 우리나라만 바라보진 않았다. 작고 견고한 일꾼이 필요한 곳, 동남아 수출을 노렸다. 시작은 1984년 12월 남미 도미니카 공화국 50대 수출 기록이다. 작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불씨는 삽시간에 번진다. 1988년엔 중동 카타르와 요르단에 발을 뻗치고 아프리카 자이르와 마다가스카르 농촌까지 파고든다.
세레스는 세계 곳곳에서 일제 소형 트럭과도 당당히 경쟁했다. 비록 마쓰다 봉고(2세대)로 빚은 기아 봉고를 바탕 삼았지만, 기아산업이 직접 개발한 우리나라 독자 트럭이었다. 해외에 지불할 기술 사용료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유다. 더욱이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험지 주파 성능으로 세계 곳곳의 오지에서 일본 트럭을 넘어섰다.
1990년대 우리나라 자동차 수출 기사엔 온통 세레스가 등장한다. 기아 프라이드와 함께 기아차 수출 주역이었던 까닭. 중동,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을 누빈다. 특히 해외 조립 생산도 활발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란, 나미비아, 파키스탄 등 곳곳에서 우리나라에서 만든 세레스 부품을 받아 조립 판매했다. 시리아 등 몇 지역에서는 상용차 판매 1위를 차지할 만큼 세레스 인기는 대단했다.
이토록 세레스는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선홍 전 기아자동차 회장 업적 중의 하나로 봉고 신화와 함께 세레스가 꼭 등장하는 이유. 1998년엔 기아차가 1980년 처음으로 1t 트럭을 생산한 후 총 100만 대 판매를 넘어섰다. 봉고와 세레스가 함께 이룩한 역사다.
세레스는 1992년, 그리고 1996년 두 차례의 부분변경을 거치며 장수한다. 그 다재다능한 성능 덕분에 1980년 등장한 1세대 봉고를 바탕으로 빚었음에도, 봉고가 두 번 세대교체를 거치는 동안 본 모습을 유지하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1999년 마침내 배기가스 규제를 넘지 못하고 17년간의 화려했던 역사를 마무리 짓는다.
기아 세레스. 우리나라 오지를 누비며 농촌 경제에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수출길에 올라 자동차 산업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어느덧 단종 후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특유의 견고한 성능을 바탕으로 지금도 국내외 도로 곳곳을 거뜬히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