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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벨리루스, 발틱3국(리,라,에) 역사 문화탐방
일시:2013년 8월 6일 화요일~13일 화요일(7박 8일)
탐방국:우크라이나,벨라루스,발틱3국(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2013년 8월 6일 화요일 인천공항 출발, 모스크바 공항, 우크라이나 키예프
* 인천 공항 출발
아침부터 덥다. 여름 장마가 오늘로 끝이며 이제부터 더욱 무덥기 시작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오전 일찍 출발하여 인천 공항으로 갔다. 모스크바행 낮 12시 50분 SU 251 러시아 항공 비행기를 탑승한다. 트램을 타고 110번 게이트로 갔다. 두 아들과 두 며느리의 잘 다녀오시라는, 안부 전화와 문자를 받고 답신해 주었다. 4살 된 큰 손자와도 통화를 하며, 할머니 비행기 타고 여행 갔다 온다고 했더니 할머니 로보캄 로봇 사 오라고, 비행기 타고 여행 잘 갔다 오라고, 사랑으로 가슴 적시는 음성이다. 12시 10부터 보딩타임이다. 안개 드리운 촉촉한 인천 공항이다. 나는 39K, 남편은 39H 좌석이다. 모스크바 공항은 두 번째 간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항으로 다시 간다. 인천에서 모스크바 공항까지는 9시간 30분 소요된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키예프 공항까지는 2시간 30분 소요된다. 오늘은 종일 비행기만 탄다. 탑승 후 비가 세차게 와서 1시간 지연 이륙했다. 그런데 이륙 후 차오른 상공은 청명하다. 몽고 상공,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 힘차게 비행한다. ‘남과 여’ 영화를 보았다. 예전에 보며 감동 받았던 영화다. 잔잔한 사랑 이야기로 가슴이 훈훈하다. 뮤직 비디오도 보며 기내의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활용했다. 기내식으로 중식과 석식을 했다. 모니터에 뜨는 밤낮이 교차되는 지구의 모습이 경이롭다. 이번에 탐방하는 우크라이나, 벨리루스, 그리고 발틱3국으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5개국은 여행 국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꼭 가고 싶었던 여행 국가들이어서 행복하고 힘찬 여정이다. 구소련의 잔재가 남은 동유럽이면서 북유럽에도 속하는 나라들을 잘 살펴보며 많은 것을 얻어 오리라 다짐한다.
*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 도착
모스크바 공항에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본 러시아 지상에는 침엽수림이 울창하다. 몇 년 전 러시아 여행 왔을 때 보았던 그 정경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른다. 현지시각으로 오후 6시 5분에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와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이다. 나는 두 번째 온 공항이다. 활주로에 비가 온 흔적이 있다. 비행기가 공항에 사뿐히 착륙한다. 주황색 장식의 공항이 아름답다. 승무원 제복도 주황색, 비행기 날개 끝도 주황색이다. 이곳 현재 온도가 17도인데 덥다. 우리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항으로 가기 위해 복잡한 통로를 따라 F48 게이트로 이동했다. 밤 9시 55분 우크라이나 키예프행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서다. 현지시각 밤 9시인데도 환하다. 백야기라서 그렇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 모스크바 공항에서 우크라이나 키예프행 비행기 환승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에서 우크라이나 키예프행을 환승하기 위해 탑승 게이트로 옮겼다. 21시 55분에 출발하는 우크라이나 키예프행 SU 1892 러시아 항공에 탑승했다. 우리 부부의 원래 좌석은 24E, 25F인데 보딩시 25F를 13A로 바꿔준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랬다. 우리 부부도 떨어져 앉아서 갔다. 좀 의아했지만 이곳 항공사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런 것 같다. 밤 9시 50분인데 모스크바 공항은 아직 어둡지 않다. 차창 밖에 TRANSAERO라는 747 대형 항공이 들어와 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공항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북극의 여름 백야기를 체험하고 있다. 한국이라면 밤 10시면 캄캄하고 잠 잘 시간인데 여기는 초저녁이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항 도착
모스크바 공항에서 밤하늘을 날아서 왔다. 1시간 30분 소요되었다. 한국과 시차는 -7시간이다.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모스크바와 키예프 시차는 -1시간이다. 현지시각 밤 10시 30분이다. 허름하고 조촐한 공항이다. 우리가 유숙할 호텔로 향했다. 여기서 30분 정도 걸린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8월 평균기온은 18도다. 그리 덥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다. 캄캄한 시가지를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하지만 세계여행은 언제나 이런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지구 곳곳 세계의 경이로운 체험을 할 수 없기에 나는 늘 행복하다. 이방인을 반가이 맞아주는 키예프 호텔에서 포근한 휴식과 함께 편안한 밤을 맞이했다.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우크라이나 키예프
* 우크라이나 키예프 호텔 출발
우크라이나Ukraine 키예프Kiev 호텔에서 맞이하는 이번 여행의 첫 아침이다.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했다. 호텔 뷔페식당에는 동양인보다는 서양인들이 많다. 호텔은 내부와 외부 모두 웅장하다. 로비도 넓고 실내 장식도 아주 우아하다. 바깥으로 나가보니 호텔 건물이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상당히 크다. 우크라이나 국기와 EU기가 걸려있다. 우크라이나 국기는 위쪽 파란색과 아래쪽 노란색 두 가지다. 파란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노란색은 대지를 상징한다. 파란 하늘 아래 기름진 옥토의 우크라이나를 예찬하는 국기다. 우크라이나 국화가 해바라기다. 영화 ‘해바라기’ 배경지다. 호텔 주변에는 시티은행을 비롯한 높은 건물들이 많다. 룸에서도 창문을 통해 키예프 시가지가 보인다. 숲도 있고 높은 건물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다. 오늘 오전에는 전쟁 박물관, 조국의 어머니상에 간다. 현지중식 후 오후에는 키예프의 명동인 독립광장 주변을 탐방한다. 오후 6시경에는 슈퍼마켓에 들러 필요한 간식거리를 사고 벨라루스 민스크행 밤기차를 탄다.
우크라이나는 남한의 6배 크기다. GNP 5천불이다. 인구는 4700만 명이고, 그 중에서 키예프 인구는 350만 명이다.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고 한국 서울의 1/3 크기다. 한국 차를 선호한다. 현대차가 1위 판매고, 기아차가 2위 판매다. 경제는 농업이 많고 철강 수입이 30% 이상이다. EU가입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했다. 기름값을 보면 지금 1리터당 1600원대다. 한국이 지금 1900원대인 것에 비하면 비싸다. 과거 한국이 1200원대일 때 400원대였었다.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참사와 소련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독립운동으로 점화되어 1991년 이웃나라 벨라루스와 발틱3국과 함께 구소련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그들의 대통령과 정부를 수립했다. 최근에는 유럽과 서구세계와 수교를 맺었다. 우리나라와도 1992년에 수교를 맺었다. 2005년의 오렌지 혁명으로 민주체제의 빅터 유센코를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 터키, 유럽의 영향권의 교차로에 있다.
다른 나라와 다른 우크라이나의 세 가지는 첫째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둘째 비옥한 토양, 셋째 미인의 나라라고 현지 교포 남자 가이드는 말한다. 우크라이나는 어디든 농사가 가능한 땅이다. 노는 땅도 많다. 잠재력이 풍부한 나라다. 미인이 많다. 국기에서 하늘색과 노란색으로 파란하늘에 펼쳐진 기름진 농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비옥한 토지다. 국토의 95%가 평지이며, 전 국토의 80%가 경작 가능 지역이다. 이 중 60%의 토지가 비옥한 흑토다. 서부의 카르파티아 산맥과 크림반도는 최고 높이 2061m의 산악 지대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드네프르강이 수도 키예프를 가로지르고 있어 강에서 얻는 소득도 크다. 학교에서는 우크라이나어로 공부하고, 밖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독립을 하고 자신의 국가를 찾았음에도 러시아어로 소통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다. 현재 친러는 아니나 아직 구사회적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은 낯설고 먼 나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구소련의 잔재를 보는 여정의 첫 출발이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드네프르 강변 풍경
우크라이나 키예프는 1500년 고도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민주화의 길로 이끈 오렌지 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며, 축구영웅 세브첸코의 고향이다. 우크라이나 탐방에서 맨 처음 가는 곳은 조국의 어머니상이다. 러시아 여행에서 보았던 문자들이 도로 표지판 문구로 곳곳에 있다. 아직 러시아의 그늘을 지우지 못하는 흔적이다. 조국의 어머니상은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도 울창한 숲 언덕 위에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지나자 키예프 도심을 흐르는 드네프르Dnepr강이 나온다. 드네프르강은 러시아에서 발원하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3개국을 거쳐 흑해로 들어가는 2290km의 큰 강이다. 유럽에서 3번째로 큰 강이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중요한 수상교통로다. 드네프르강을 중심으로 키예프는 지역이 2개로 구분된다. 한국의 경상도와 전라도 식으로 구분 짓는다. 언어도 서로 다르다. 드네프르강의 서편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동편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강다리를 건너서 갔다가 다시 강다리로 돌아오며 조국의 어머니상으로 가는 중에 드네프르 강변을 보았다. 강변의 백사장과 울창한 수림이 비경이다. 강변 언덕진 숲 고지대에 선 조국의 어머니상과 동굴 수도원 지구의 성당 지붕이 장엄하다. 드네프르 강변 언덕의 숲 공원은 모두 블라디미르 언덕이라 부른다. 블라디미르는 980년에서 1015년까지 재위한 우크라이나 이전 키예프 공국의 대공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키예프의 아침이 열리며 드네프르 강변이 선사하는 보람찬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조국의 어머니상
우크라이나 키예프 조국의 어머니상은 넓은 전쟁기념 공원에 있다. 높은 지대에 있어서 동상은 더욱 오롯하게 솟구쳐 오르고, 칼과 방패를 들고 있어 근엄한 위용을 드러낸다. 주변은 전쟁 박물관이어서 곳곳에 탱크와 전쟁 관련 각종 장비시설이 전시되어 있다. 무기들이 생생한 실체의 모습으로 섬뜩하다. 조국의 어머니상 앞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 양쪽 벽면에는 전쟁 관련 병사들이 조각되어 있다. 문을 지나 조국의 어머니상 앞에 다다르니 넓은 광장이 있고 어머니상 옆에는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군상이 많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아픈 고리를 보는 것 같아 소슬했다. 세계여행에서 이런 슬픈 장면을 만날 때마다 내 조국의 슬픈 마디가 떠올라 뭉클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조국의 어머니상은 전쟁 승리 상징으로 1930년에서 1940년대에 건축했다. 주변의 전쟁 박물관은1981년에 개관했다. 동상의 전체의 높이는 바닥에서부터 102미터다. 아득한 높이로 키예프를 지켜주는 어머니상이다. 동상의 무게는 530톤의 티타늄으로 만들어졌다. 동상의 오른손에는 칼이, 왼손에는 방패가 들려 있다. 칼은 원래는 12톤 무게로 16m 길이였는데 키예프 동굴 수도원 지구에 있는 성당보다 높았기 때문에 7m를 잘랐다. 종교적인 힘보다는 우위에 두지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9톤 무게의 칼로 바뀌었고 잘려나간 칼끝이 뭉툭하다. 왼손에는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심볼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고 있다. 조국의 어머니상 안에는 승강기와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도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 광장 너머로 숲으로 둘러싸인 동굴 수도원 지구의 성당 지붕이 보인다. 아래로는 키예프 시가지와 드네프르강도 보인다. 은빛 눈부신 몸체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조국의 어머니상 정경 앞에서 비록 이국의 하늘 아래지만 내 조국에 대한 애국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어머니라는 단어도 육중한 무게로 다가오는데 조국의 어머니라는 합성어에서 느껴지는 육중함은 국가와 인종을 넘어서 동일하게 다가오는 큰 애국심을 부른다. 뜻 깊고 큰 의미를 부여하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명소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가지 조망
조국의 어머니상을 관람하며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가지를 조망했다. 키예프의 구시가지는 드네프르강의 고지대에 있다. 조국의 어머니상도 조금 높은 지대에 있다. 대부분 고딕, 비잔틴, 바로크 양식의 역사 유적 건축물은 고지대에 있다. 조국의 어머니상 앞 박물관 광장에서도 울창한 숲 사이로 고지대의 성당 건물이 조금 보인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그리스정교로 개종하여 비잔틴 문화를 도입했다.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도시다. 조국의 어머니상을 시작으로 오늘 고지대를 탐방할 것이다. 조국의 어머니상 앞에서 아리래 바라보이는 키예프 시가지는 현대적인 모습이다. 1934년 우크라이나의 주도가 하르코프에서 키예프로 옮겨왔다. 드네프르강과 함께 아침이 열리는 촉촉한 시가지다. 교통수단으로 버스 외에 유람선이나 지하철이 있다. 우뚝 솟은 현대식 건물도 보이고 짙푸른 숲도 보인다. 350만 명이 거주하는 서울 1/3 크기의 도시 키예프는 60%가 녹지다. 부러운 대목이다. 드네프르강에 접하는 비탈진 언덕을 통틀어서 블라디미르 언덕이라고 부른다. 넓은 공원을 이루고 있다. 드네프르강에는 길이 1,600m의 패튼 다리와 지하철 철교 등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조국의 어머니상 앞에서도 긴 다리가 보인다. 조국의 어머니상을 다 관람하고 동굴 수도원 지구로 이동하면서도 시가지 곳곳을 조망했다. 나무숲 사이로 고운 주택도 있고 현대식 아파트단지도 우람하게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2월 10일 공식적인 수교관계를 맺은 나라다. 먼 나라 우크라이나에 여행 온 것에 대하여 흐뭇하고 보람된 여정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워 갈 것이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전쟁 박물관
우크라이나 키예프 조국의 어머니상을 관람하고 동굴 수도원 지구로 이동하면서도 전쟁 박물관은 계속 이어진다. 조국의 어머니상이 있는 그곳 역시 전쟁기념 공원이며 전쟁 박물관이다. 조국의 어머니상 주변 곳곳에도 탱크를 비롯한 무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울타리를 쳐 놓고 탱크를 비롯한 전쟁관련 장비를 전시하여 삼엄한 경계 속에서 무서운 전율이 흐르는 박물관도 있다. 키예프는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키예프 공국의 수도로 동슬라브 문화의 중심지였다. 1240년 몽골의 침입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산업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급속히 복구하여 구소련연방에서 3위의 대도시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 현장은 키예프에서 불과 100km 북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그 당시 북쪽으로 바람이 불어서 키예프는 다량의 방사능 오염을 피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그로인해 인접국인 벨라루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91년 구소련연방의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했고, 1500년 고도의 키예프는 수도가 되었다. 어느 국가인들 아픈 역사가 없겠는가. 박물관의 무기들을 보며, 그 곁을 지나오며 내 조국의 강점기 아픈 역사도 떠오르고 동란의 고통스런 분쟁도 떠올라 가슴 서늘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동굴 수도원 지구 삼위일체 사원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상징인 지역이 페체르스크 라브라Pechersk Lavra, 즉 동굴 수도원 지구다. 드네프르 강가의 공원 안에 있다. 키예프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다. 이곳은 슬라브 지방 최대의 수도원이며 러시아 문화의 원천인 곳이다. 1051년 동굴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의 수도승, 안토니와 테오도시스가 동굴 위에 수도원을 지은 데서 시작되었다. 페체르는 동굴이라는 뜻이고 라브라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 수도원이 세워진 것은 11세기 중반, 키에프 대공국이 영토를 확장하고 비잔틴 제국의 정교가 급속히 퍼져나가던 시대였다. 그 당시 키예프는 정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900년에 걸쳐서 여러 교회와 수도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지하 동굴 묘지는 이곳에서10분 거리에 있다. 성모 승천 사원인 삼위일체 사원은 우스펜스키 사원과 함께 동굴 지구의 대표 사원이다. 두 사원은 아주 가까이 있다. 천 년 전, 1108년 건립된 사원이다. 외벽에 다양한 성화가 그려져 있다. 사원 입구에는 예수 세례 성화가 있다.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사원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부는 좁았는데 내부에도 금빛 장식과 함께 성화가 많다. 종교적 역사를 성화로 말하고 있다. 수많은 관람객들이 입장하여 들고나며 매우 복잡하다. 이곳 동굴 수도원 지구가 우크라이나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인지 증명하는 대목이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동굴 수도원 지구 우스펜스키 사원
우스펜스키 사원은 매우 크고 웅장하다. 페체르스크 라브라, 동굴 수도원 지구에서 삼위일체 사원과 함께 대표 사원이다. 동굴 수도원 중심 언덕 넓은 지역에 많은 성당과 동굴 수도원이 모여 있다. 12세기 초에 건축된 유적들이다. 우스펜스키 사원 옆에는 엄청난 높이의 거대한 종루가 보인다. 96미터 4층 건물이다. 2층까지는 도서관이고, 3층에는 13개의 종들이 있다. 그중 3개만 보존되어 있다. 밖에 종 1개가 잘 보존하여 전시되었다. 종탑 앞에는 키릴문자 글씨가 있다. 우스펜스키 사원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폭격을 받아 무너지기도 했다. 주변에는 문화재 박물관과 인쇄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과 사원이 나란히 한 공간에서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듯 생생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휴식하며 우크라이나의 속살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동굴 수도원 지구 지하 동굴 묘지
이곳은 페체르스크 라브라, 동굴 수도원 지구에 있는 지하 동굴 묘지다. 입장할 때는 여자는 머리를 천으로 감싸야 한다. 내부에서는 철저하게 사진촬영 금지다. 관람시간은 입구에서 출구까지 15분 정도다. 입구와 출구는 서로 다르다.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촛불을 들고 좁고 캄캄한 미로를 따라 내려갔다. 무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소슬한 지하 동굴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통로를 따라 줄줄이 이동하며 관람했다. 통로의 양 옆 벽면 유리관 안에는 천 년 전 이곳 지하 동굴에서 생활하던 수도사들 약 100여구의 미이라 관이 있다. 유리관 머리 쪽에는 수도사의 초상화가 있다. 시신은 옷을 입은 채 동여매어서 보존해 놓았다. 좁고, 낮고, 어둡고, 무서운 공간에서 잠시나마 옛 수도사들의 생활을 체험하고 나왔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전통식당 중식
우크라이나 키예프 민속식당이다. 키예프 도심 대로변에 있다. 식당입구의 문 장식에서부터 정통민속식당임을 알게 한다. 기타와 비슷한 우크라이나 전통악기 반두라 연주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전통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오이, 빵, 닭고기, 과일, 차 등 풍성한 식단이다. 식당 내부 장식이 독특하다. 창가에 우크라이나의 국화인 해바라기 꽃도 꽂아 놓았다. 천막 형식의 천장과 벽면에는 아기자기한 민속품을 전시해 놓아 아주 그윽한 정경이다. 중세 향기가 물씬 배어 중세 사람이 된 낭만을 선사한다. 식당 앞 뜨락에는 우크라이나의 국화인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고운 꽃들을 심어 놓았다. 순간마다 보고 만나는 모든 것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소중한 체험이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가지 풍경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크라이나 키예프 도심 풍경을 둘러보았다. 맑고 쾌청한 날씨와 파란 하늘이 시가지 풍경을 곱게 그려낸다. 식당 앞에는 예쁜 꽃들이 화사하다. 아름다운 조형의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보인다. 대부분 주상복합 상가 건물로 1층은 상가, 2층부터는 아파트다. 이곳 아파트는 같은 동이어도 평수, 구조가 다 다르다. 버스로 중식식당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마이단 독립광장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중에 우크라이나의 푸쉬킨으로 불리는 문학인이며 대학총장인 세브첸코 동상을 보았다. 같은 이름의 축구 선수 세브첸코도 있다. 키예프에는 축구장이 있으며 유명한 축구 선수가 많다. 회색 국립오페라 극장 건물도 있다. 이곳은 오페라 공연 가격이 저렴하여 2만 원~3만 원 정도다. 대학 학비가 현지인은 2천불 미만, 외국인은 4천~5천불이다. 한국 유학생이 20명 정도다. 월급 초봉은 보통 520불, 외국기업은 1천불 정도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는 완전히 다르다. 우크라이나어는 폴란드어와 비슷하다. 우크라이나 공연단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놀이동산 등에서 공연을 많이 한다. 대사관 거리도 지나고, 금색 돔 지붕의 성소피아 성당지구도 지나고 키예프 도심을 가로질러 마이단 독립광장에 도착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마이단 독립광장
우크라이나 키예프 마이단 독립광장은 한국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마이단 독립광장에서 제일 먼저 외인을 반기는 것은 코사크 부족의 말 동상이다. 말 앞에서 전통악기 반두라를 연주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주 목가적이다. 넓은 잔디광장 앞에는 높은 천사동상이 월계수를 들고 솟구쳐 오른다. 광장 앞 도로는 크리스챤 로드다. 이 길을 따라가서 드네프르강에서 침례의식을 행했다. 그래서 이 길을 침례도로라고도 부른다.
또한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던 독립광장 대로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은 2004년 10월 여당 후보가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야당 후보 유셴코 지지자들의 군중집회로 결국 야당 후보 유셴코를 대통령으로 세운 사건이다. 시위자들은 오렌지색 옷을 입고 오렌지색 깃발을 들었는데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색은 정치적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색이다. 유셴코 지지자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선택하면서 이 혁명을 오렌지 혁명이라 부른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키예프 도심 독립광장에 5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시위로 번지면서 헌법까지 개정하여 재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결국 2004년 12월 결선 재투표를 거쳐, 2005년 1월 중앙선관위는 야당 후보 유셴코의 대통령 당선을 발표했다. 오렌지 혁명은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후에도 구체제에서 탈피하지 못한 쿠치마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적 시민 혁명이다. 권력과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인권침해가 빈번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로 국민들은 혁명을 통해 쿠치마 대통령과 여권의 집권연장을 거부했다. 오렌지 혁명은 우크라이나에서 민주주의와 법질서가 확립되는 시발점이고, 인근 국가의 민주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차들을 모두 차단시키고 이곳 광장에서 혁명시위를 했다. 도로와 광장이 상당히 크다. 아름다운 꽃도 조성해 놓았다.
마이단 독립광장에서 가장 중요한 삼형제 동상을 보았다. 키예프 삼형제 동상은 키예프 도시 이름을 탄생시킨 사람들이다. 키, 예, 프 이렇게 삼형제 이름을 합하여 오늘의 키예프라는 이름이 탄생된 것이다. 여자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 여자는 키예프 삼형제의 여동생이다.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는 분수대에서 용감한 삼형제 동상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라는 이름을 높이 휘날리고 있다. 이 나라 시민들은 분수대에 앉아 물에 발을 담그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유리건물 위 옥상 전망대에 올라가서 광장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이단 독립광장과 천사동상, 시가지 등이 한눈에 보인다. 독립광장 주변에는 주상복합 상가들이 많다. 대단히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이다. 키예프에는 공원이 100개 정도 있다. 마이단 독립광장도 블라디미르 언덕 숲 공원과 연결되어 있어 평화스런 풍경이다.곱게 장식한 꽃시계 언덕길을 따라 내려왔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우정의 공원
우크라이나 키예프 우정의 공원에는 올라서니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큰 무지개 조형물 안의 두 동상이다. 코사크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화합하는 모습이다. 곁에는 코사크인 부족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모여서 화합하는 동상이 있다. 여러 부족들의 화합하는 모습의 상징 동상들이다. 주변은 울창한 숲 공원으로 키예프 시민들이 휴식하고 있다. 놀이공원도 있다. 강변으로는 전망대가 있어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 시가지를 조망했다. 드네프르 강 중류에 위치한 인구 300만의 대도시 키에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드네프르강의 아치형 높은 강다리와 우뚝 솟은 도심의 높은 건물들이 나무숲과 함께 비경이다. 키예프는 50%가 녹지다. 한때는 러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이며,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라고도 불렸다. 9세기말 러시아가 키예프를 장악하면서 최초의 러시아 도시였다. 11세기의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한 여러 성당과 웅장한 페체르스크라브라 동굴 수도원 등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역사적 도시다. 우정의 공원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서 공원에 담긴 우정의 깊은 뜻과 함께 키예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여정이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성미카엘 수도원 성당
오후에는 성미카엘 수도원 성당, 안드레이져 언덕에 있는 성안드레이져 교회, 성소피아 대성당 세 군데 성당을 탐방한다. 금빛이 난다고 이름 붙여진 황금의 문을 지나 이곳에 왔다. 옛날 사원의 성문이었던 황금의 문은 성소피아 사원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 문은 11세기에 많은 금으로 지었으나 몽골군에게 파괴되었다. 오늘날 황금의 금은 겨우 복구되어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만 남아있다. 버스로 지나며 커다란 문을 보았다. 천 년 전에 지어진 금색 돔 성미카엘 수도원 성당과 역시 천 년 전에 지어진 성소피아 성당은 도로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성미카엘 수도원 성당 입구에 서니 성소피아 대성당이 보인다. 키예프 도심에 우뚝 솟아있다. 역시 성소피아 대성당 앞에서는 성미카엘 수도원 성당이 보인다. 성미카엘 수도원 성당 앞에 이르렀을 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육중하고 아름다운 조형의 성당이 넓은 품으로 앉아 있다. 12세기 대천사 미카엘에게 헌정하기 위해 건축된 성미카엘 성당은 모두 금색 돔 지붕이다. 찬란한 금빛이 파란 하늘에 영롱하게 드리워 더욱 엄숙함이 서리어 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성안드레이져 교회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하얀색 멋진 건물 앞을 지나 성안드레이져 교회로 향했다. 먼저 안드레이져 언덕에서 교회를 조망했다. 가을빛이 촉촉이 잦아드는 나무 사이로 푸른 빛 돔이 아름답다. 안드레이져 언덕은 프랑스의 몽마르트 언덕과 같은 언덕이다. 언덕을 걸어서 교회로 갔다. 언덕진 골목은 문화의 거리로 그림을 전시하고, 기념품 가게들이 많다. 낭만이 배인 중세풍 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서 성안드레이져 교회를 만났다. 성안드레이져 교회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건축가가 건축했다. 18세기에 세운 바로크 양식으로 키예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교회이다. 중앙에는 높이 60m의 큰 돔 지붕의 교회 건물이 오롯하고 네 귀퉁이에는 작은 돔 지붕의 건물이 오롯하다. 하얀색 벽면에 푸른색과 금으로 장식된 지붕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상당히 아름답다. 내부의 벽화도 잘 보존되어 그대로 남아 있다. 긴 계단을 따라 교회 건물 앞으로 올라가 교회도 둘러보고 키예프 시가지도 조망했다. 나무가 울창하고 고풍스런 건물이 늘어선 아름다운 거리다. 성안드레이져 교회는 이런 주변의 풍경과 함께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빛낸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성소피아 대성당
우크라이나 키예프 성소피아 대성당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그래서일까. 햇살이 역광으로 성당이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키예프 시가지를 이동할 때 차 안에서도 성당을 보았다. 성당 바로 앞의 광장에는 코사크 부족 족장의 동상이 용감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성소피아 대성당은 키예프를 천 년 역사의 사원이며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다. 11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파괴와 복구를 반복하다가 17세기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금색 돔 종탑이 오롯하다. 낮은 녹색 돔 지붕 건물이 많이 있다. 중앙에 있는 금색의 큰 돔 지붕 건물도 보인다. 흰색 벽면과 대비하여 아름다운 조화다. 소피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예지라는 뜻이다. 성당 안에는 원래의 상태인 성모 마리아 상과 성찬 모습 등 프레스코화가 소중한 가치로 보존되어 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과 맞먹는 성당이다. 몇 년 전 터키 여행에서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도 보았다. 두 성당 모두 외관상의 아름다운 조형도 대단하고 종교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도 대단하다. 키예프 성미카엘 성당과 가까운 거리에 마주보고 있어서 조금 전 탐방한 성미카엘 성당 앞에서도 성소피아 성당을 조망했다. 마찬가지로 이곳 성소피아 성당 앞에서는 성미카엘 성당이 보인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도심을 빛내는 거룩하고 엄숙한 성역이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코사크 부족 동상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성소피아 성당 곁의 광장에 있는 기마 동상이다. 우크라이나 남쪽 크림반도의 코사크 부족 족장 동상이다. 코사크 족의 영향력 넓히는데 기여한 사람이다. 말을 힘차게 몰고 전진하는 형상이다. 손에는 도깨비 방망이를 들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휘봉인 도깨비 방망이는 손님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념품 가게에 이런 도깨비 방망이가 많다. 성소피아 성당을 탐방 왔다가 용감한 코사크 부족 족장의 동상까지 보는 행운을 얻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가지 거리
우크라이나 키예프 성소피아 대성당과 코사크 부족 족장 동상 앞의 시가지 거리는 차들이 많이 왕래한다. 아름다운 건물과 나무 사이의 낭만적인 시가지다. 조금 전 탐방한 성미카엘 성당도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아름다운 자태로 보인다. 자연재해가 없는 도시다. 노란색 전차도 지나간다. 시민들도 종종 지나간다. 이곳 사람들은 해만 나오면 일광욕한다. 겨울엔 해가 없어 일조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이동하며 버스 안에서 노란 색 건물 앞의 동상을 보았다. 문학인 세브첸코 동상이다. 러시아의 푸쉬킨격인 인물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동명이인의 세브첸코 두명이 있다. 한명은 축구선수 세브첸코이고, 또 다른 한명은 지금 보고 있는 문학인 세브첸코다. 심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상이다. 중후하고 고풍스런 키예프 시가지 거리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오션 플라자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대형 쇼핑매장이다. 최근에 오픈했다. 우크라이나에도 개방 물결이 시작되고 있다. 건물이 아주 크고 깨끗하다. 안으로 들어가서 상가를 둘러보았다.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화려한 장식이 시선을 흡입한다. 꽃과 물고기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대형 슈퍼마켓도 들러보고, 여러 곳곳을 다니며 우크라이나의 생활용품들을 구경 했다. 쇼핑하기 좋도록 복도에 의자도 놓여있고 화장실 등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오션 플라자 건물 앞에 사람들이 참 많다. 아주 큰 번화가다. 지하도에서 올라오는 계단에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청년이 있다. 곁에 있는 다른 청년은 무언가를 행인에게 준다. 아마도 자기네 가게를 선전하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의 음악 선율을 들으며 키예프의 시민들 속에서 낭만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서울가든식당에서 한식으로 석식을 했다. 부대찌개, 잡채, 김치, 가지나물, 숙주나물, 시금치나물, 수박 등 푸짐한 한식 식단이다. 이국에서 먹는 우리 한국의 음식이 어찌나 맛있는지 모두들 흐뭇한 표정이다. 저녁식사 후 벨라루스 민스크행 기차를 탑승하기 위해 키예프역으로 이동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 기차역
우크라이나 키예프 기차역에 왔다. 벨라루스 민스크행 밤 9시 5분 기차를 타기 위해서다. 어둠이 내리는 기차역은 얼핏 보면 아담한데 매우 웅장하다. 대합실로 들어가니 상당히 크고 혼잡하다. 창밖으로는 기차가 들어와 사람들이 승하차로 분주한 걸음이다. 조명등이 기차역 철로를 밝히고 있다. 기차역 외부도 넓고 큰 규모다.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할 기차의 구역이 뜨기를 기다렸다. 몇 번 홈인인지 배정 받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루하지만 기다리며 우크라이나의 사람의 생활상을 보는 것도 유익한 시간이다. 드디어 홈을 배정 받고 기차를 타기 위해 나갔다. 청색 야간열차 N.TRAIN 꾸베가 들어오고 오늘밤 여정을 이끌어주는 기차에 승차했다.
*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벨라루스로 민스크로 가는 야간열차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벨라루스 민스크 구간의 N.TRAIN 꾸베 야간열차다. 객실은 4인 1실이며 양쪽 벽에 접이식 침대가 2층으로 놓여있다. 우리 부부와 다른 부부 4명이 같은 객실에 승차했다. 화장실과 세면장은 객실 밖에 있어 공동으로 사용한다. 객실 안에 여러 가지 사용시설에 대한 스위치가 설치되어 있다. 인도 뉴델리에서 갠지스강이 있는 도시 바라나시로 가던 야간 침대열차와 비슷하나 그보다 훨씬 편리한 시설이다. 우리들 객실은 12호실 4번방이다. 객실 문에는 VI 라는 글자와 21, 22, 23, 24 좌석이라는 안내 글자가 쓰여 있다. 4인 1조로 하여 2층 침대에서 자면서 간다. 나는 1층 침대에서 남편은 2층 침대에서 자면서 갔다. 침구 세트를 새 것으로 주어서 깨끗하다. 복도 통로는 좁고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아늑하다. 새벽 1시경 우크라이나 국경선에서 직원이 방마다 다니며 여권을 검색한다. 노트북 컴퓨터에 작업한다. 출국수속이다. 새벽 2시경에는 벨라루스 입국절차로 다른 직원이 객실에 들어와 입국수속을 했다. 구소련 복장 차림의 남자 직원은 아주 근엄한 복장이다. 아침에는 남편과 같이 1층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밤사이 지내온 얘기로 여행의 꽃을 피우고 기상을 준비했다.
* 벨라루스의 아침 풍경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기차 차창으로 바깥 풍경을 조망했다. 일출이 비경이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해가 솟는다. 캄캄하던 기차의 어둠을 지우고 고운 햇살이 기차 안으로 들어와 눈부시다. 벨라루스의 들녘이 서서히 전개된다. 벨라루스의 주택도 독특한 형태로 시선을 끈다. 새로운 풍경들이 눈앞에서 행복한 여정을 선사한다. 세계여행은 이렇듯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명소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지나가는 풍경 하나, 하나에도 나는 늘 감탄하고 소중한 선물로 담아간다. 남편과 나는 기차의 이곳저곳 창문을 통해 벨라루스의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기차 여행은 국내에서도 아름다운데 멀고 먼 나라, 우크라이나에서 벨라루스의 국경을 넘어오는 이번 기차 여행은 아주 고운 낭만의 아름다운 여행이다. 먼 훗날, 우리 인생에 석양이 드리울 때 이토록 행복한 날의 이야기로 추억을 회억하면 그래도 조금은 서럽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의 세계여행은 건강과 주변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후손에게도 세계여행을 권할 것이며 자손들과 함께 세계여행도 추진할 것이다. 여행이야말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교육의 효과를 얻는 최소비용 최대효과라는 명언을 나는 늘 새기며 산다. 이 순간도 나는 그 명언을 절감하고 있다.
* 벨라루스의 시골 기차역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국경을 넘어 온 기차가 벨라루스의 어느 시골 기차역에 정차한다. 기차역에는 다른 기차도 정차해 있다. 기차들은 우리나라의 기차에 비해 낡은 모습이다. 예전의 우리나라 기차와 같고 기차역도 그런 인상이다. 이곳 주민들이 하차하고 승차한다. 벨라루스의 시골 기차역 풍경은 소박한 향수를 선사한다.
* 벨라루스의 시골 마을 풍경
우크라이나는 산이 없는 나라다. 평원에는 유채농사를 짓는 풍경이 보인다. 시골 마을의 집들은 지붕이 뾰족하다. 눈이 많이 오는 나라의 지붕 모습이다. 중후한 갈색 톤의 집들이 이국적인 향수를 머금고 있다. 철도 도로변에는 침엽수림이 울창하다. 마을 곳곳에도 나무들이 많아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다.
* 벨라루스 민스크역 하차 준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밤새 달려온 기차는 이제 곧 벨라루스 민스크역에 도착한다. 현지시각으로 오전 8시 35분에 도착 예정이다. 짐을 정리하고, 옷도 갈아입고 하차 준비를 했다. 벨라루스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 참으로 행복한 아침이다.
2013년 8월 8일 목요일 벨라루스 민스크, 하틴 마을
* 벨라루스 민스크 기차역 도착
벨라루스Belarus의 수도 민스크Minsk 기차역에 도착했다. 조선족 교포 남자 가이드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기차역이 아담하고 예쁘다. 벨라루스 민스크가 우크라이나 키예프보다 1시간 빠르다. 한국과 시차는 -6시간이다. 벨리루스 인구는 970만 명이다. 민스크 인구는 180만 명이다. 벨라루스의 특징은 하얀 색 의상, 하얀 눈빛, 하얀 집들 등 모두 하얀 색을 좋아한다. 벨라루스 민족은 14세기 민스크를 중심으로 정착한 동슬라브계다. 백색의상을 좋아하는 깨끗한 민족이라는 데서 백러시아 또는 벨로러시아로 알려졌는데 지금의 벨라루스는 1991년 국호로 정한 것이다. 민스크는 2차 세계대전으로 80%가 파괴된 도시다. 현재는 대부분 새로 건설되어 도시가 깨끗하다. 구시가지의 삼위일체 마을만 파괴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있다. 한국 교민은 100명 정도다. 거의 대사관 직원과 단기연수 학생들이다. 발틱3국에는 모두 합해서 교민이 50명 정도다. 관광산업이 최근 시작되어 모든 것이 부족한 실정이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 대비하여 호텔 30개를 증축했고 시가지도 보수 중이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수교하였고 1997년 루카센카 대통령이 방한했었다. 북한과도 1992년 외교관계를 맺었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민스크 시가지를 달린다. 민스크의 중심 도로인 독립대로가 상당히 넓다. 조식 후에는 54Km 떨어진 하틴 마을로 간다. 하틴 마을을 보고 다시 민스크로 돌아올 것이다. 오늘 기온은 20도~30도다. 요즘은 덥다. 봄이 없이 여름으로 넘어간다. 먼 나라에 왔다. 스쳐지나가는 풍경 하나, 하나가 소중한 여정이다.
* 벨라루스 민스크 호텔 조식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벨라루스 민스크 호텔 6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민스크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붉은 성당과 독립광장, 독립대로, 그리고 육중한 건물들이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식사는 현지식 요리다. 샐러드, 치킨, 감자튀김, 과일, 차 등이 맛있는 식단이다. 이곳은 생선이 없다. 닭고기가 많다. 쇠고기는 있는데 젖소 고기라서 맛이 없다. 물가는 싼 편이다. 우리가 먹은 메뉴도 그리 비싼 것은 아닌데 푸짐한 식단이었다. 호텔 식당 남녀 직원들이 정성껏 음식을 날라다준다. 독립 20년 된 민스크 도시를 조망하며 맛있게 먹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 흔적이 많은 나라다. 수도 민스크는 벨라루스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이며 독립국가 연합CIS 사무국이 있다. 러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교통 중심지다. 약 94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데 2차 세계대전으로 80% 이상 파괴되었다. 전쟁 폐허를 딛고 이제 겨우 새롭게 눈뜨는 도시다. 외모로 보아서는 전쟁을 겪었다는 아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육중하고 활기찬 도시 민스크의 첫 인상이 참 좋다.
*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광장 조망
아침식사를 한 벨라루스 민스크 호텔 6층 식당에서 독립광장이 내려다보인다. 독립대로의 곁에 있는 독립광장은 예술적인 조성으로 아주 아름답다. 식사를 마치고 독립광장을 조망했다. 독립광장은 오후에 다시 자세히 둘러볼 계회이어서 그냥 지나며 전체적인 경관만 조망했다. 아침 햇살이 촉촉이 내리고 광장에는 꽃들이 아름답다. 청소하는 요원도 있고 민스크 시민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지나간다. 벨라루스의 아름다운 여정이 시작되는 행복한 아침이다.
*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대로
벨라루스 민스크의 중심 도로다. 민스크 시내를 관통하는 꽤 긴 도로다. 교통은 한국과 비교하지 말란다. 건설 시작 단계로 허술한 단계다. 도시 건물 역사가 겨우 40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거리가 깨끗하고 건물도 새 것이 많다. 독립대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독립 광장이 넓은 품사위로 있다. 독립광장에는 레닌 동상, 정부청사, 가톨릭 성당, 벨라루스 국립 대학교, 시청, 중앙 우체국, 민스크 호텔 등 주요 기관 건물들이 많다. 민스크의 대부분 건물들은 1944년 소련군이 진입하여 세워진 것들이다. 그래서 민스크는 소련의 도시계획 중 가장 좋은 예다. 독립대로를 따라 이동하며 러시아 풍의 벨라루스 민스크 시가지 모습을 제대로 본다.
* 벨라루스 민스크 승리 기념비
오늘 아침에 벨라루스 민스크 기차역에서 시가지로 들어올 때 보았던 승리 기념비가 도로 가운데 우뚝 솟구쳐 오른다. 민스크 승리의 광장에 높이 솟은 독립 기념의 승리 기념비다. 벨라루스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인구의 30% 정도가 사망했다. 그래서 많은 기념비가 곳곳에 있다. 이곳 독립대로의 중앙에 있는 승리의 광장의 기념비도 그 중의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전승 독립기념탑이다. 높은 승전 탑 곁에는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다. 신혼부부들이 구소련식 전통에 따라 결혼식을 마치고 이곳 승리의 광장에서 헌화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하다. 경축일 때는 이곳에서 군인들의 근무 교대식도 한다. 주변에는 도심을 흐르는 스비슬러치 강과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하틴 마을로 이동하며 본 벨라루스의 역사 유적이다.
* 벨라루스 하틴 마을 가는 길
벨라루스 독립대로를 지나 승리 기념비를 지나 민스크 시가지를 점점 벗어나고 있다. 민스크에서 하틴 마을까지는 1시간 소요된다. 외곽으로 나라면서 도로변에 울창한 나무숲이 장관이다. 도로 중앙에는 중앙분리대 대신 잔디밭을 조성하고 꽃을 심어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세계여행에서 명소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동할 때 그 나라의 진면모를 볼 수 있어서, 나는 이런 시간을 매우 좋아한다. 조선족 가이드는 우리나라 언어를 못 할 때가 많다고 토로한다. 리투아니아에 유학 왔다가 거주하게 되었단다. 리투아니아에 15년째 거주한단다. 진솔하고 아주 성실한 인상이다.
벨라루스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5개국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하다. 인구는 970만 명인데 81%가 벨라루스인이고 소련인도 있다. GNP 6500 달러다. 80%가 동방 정교다. 1991년 8월 25일 독립하여 6개주와 1개 자치주로 구성되어 있다. 1994년부터 대통령 중심제로 알렉산드르 대통령이 24년간 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국회의원은 4년 임기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겨울엔 영하 8도, 여름엔 영상 20도 정도다. 국토 절반 이상이 평원이고 최고 높은 산이 350m 정도다. 수림과 평원이 대부분이다. 경제는 국가에서 경영한다. 그래서 어렵다. 농업 9%, 공업 40%, 서비스업 50%다.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권 국가와 수출입 거래를 하고 있다. 호텔직원 등 서비스 수준이 부족하다. 여행 5개국 중 가장 미발달된 문화의 국가다. 독립국 중 변화가 가장 적은 나라로 옛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국도에 진입하는 입구에서 통행요금 지불하려고 버스기사가 내려갔다. 직접 내려가서 내고 오는 모습이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잘 정비된 국도를 따라 하틴 마을로 달리고 있다. 들녘에는 유채 농사를 짓고 있다. 노르스름한 유채 열매가 맺혀 있다. 평원의 대량 경작지다. 평평한 땅에 울창한 나무숲도 있다. 산이 아닌데 수림을 이뤄 신기한 풍경이다. 짙푸른 산속 마을 하틴에 도착했다.
* 벨라루스 하틴 마을 학살
벨라루스 하틴 마을은 카틴 숲 학살지와는 다른 곳이다. 이곳 마을은 카틴이 아니라 하틴KHATYN이다. 민스크에서 약 54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군의 잔악성을 고발하는 학살현장이다. 하틴 마을은 나무들로 울창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데 아름다운 풍경인데 슬픈 영역이어서 모두들 엄숙한 분위기다. 하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긴 돌길로 잘 다듬어 놓았다. 멀리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선 남자 동상이 보인다.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소슬한 정경이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기록의 벽이 있다. 기록의 벽에는 나치 수용소와 희생자들, 학살에 대한 내용 등을 기록해 놓았다. 1943년 3월 22일 독일군이 하틴 마을에 진입하였다. 그때 벨라루스 279개 도시 중 80%인 209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촌락은 9200개가 파괴되었다. 독일 나치군이 2,230,000 명을 학살시켰다는 등의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벽이다. 벨라루스 인구 1/3이 학살당했다.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기록의 벽을 보고 다시 하틴 마을로 향해 걸었다.
기록의 벽 앞에서부터는 길 중앙에 붉은 꽃들을 심어 놓았다. 죄 없이 희생당한 하틴 마을의 붉은 절규로 다가온다. 눈앞에는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처참한 남자 동상이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가까이 다가온다. 계속 걸어가서 동상 가까이 가보니 그 비통함이 할아버지와 손자를 휘감고 있었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마을 할아버지 유지프카민스키가 희생된 손자를 들고 서서 절규하는 동상이다. 곁에는 이 마을 교회였던 건물이 있다. 독일 나치군이 쳐들어와 하틴 마을 주민들 모두 이곳 교회에 가두었는데 소리를 지르자 불을 질러 모두 학살했다. 주민 149명 중에서 75명이 어린아이였다. 그때 이 할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있어서 무사했었다. 마을에 돌아왔을 때 죽은 손자를 안고 망연자실한 할아버지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진한 전율로 지구상의 가혹한 참상을 거부하고 있다. 어찌 이것이 벨라루스만의 슬픈 역사일까. 내 조국의 슬픈 역사가 떠올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동상 곁에 오래도록 머물며 다시는 이런 없기를 기원했다.
동상 뒤편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 텅 빈 하틴 마을이 시작된다. 온통 짙푸른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마을 문이 열린 채로 교회로 모이라 하여 갔다가 모두 학살당한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집집마다 금방 올 줄 알고 문 열고 갔다는 그날의 열린 문이 보인다. 집터 주변의 우뚝 솟은 기둥은 그 당시의 굴뚝이다. 뼈만 남은 굴뚝이 주인을 잃고 슬픈 표석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붕이 있는 마을 우물도 있다. 높은 종탑도 있다. 하틴 마을에는 아직도 종소리가 매 30분마다 24시간 동안 울린다.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종소리로 후손들에게 전쟁의 참혹성과 조국애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희생된 민간인들을 추모하는 비석들이 파란 잔디밭에 줄지어 있다. 독일군에 의해 전몰된 다른 벨라루스 186개 마을을 기리는 마을묘지도 있다. 그 지역의 흙을 담아서 전시하고 있다. 투명하게 흙을 담아 놓았다. 사라진 땅의 흙은 고요한 시위다. 하틴 마을 어린이 75명의 학살 추모관도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던 장난감 인형 등이 놓여 있다. 가슴 아픈 장면이다.
주위의 자작나무숲이 아름답다. 그날에도 저리 아름다웠을 텐데, 마을과 사람은 고운 풍경만 남기고 간 곳이 없다. 그날의 슬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불을 켜 두고 있다. 단의 가장자리에는 자작나무 세 그루가 서서 지키고 있다. 하틴 마을은 과거의 모습은 없지만 지난 역사를 상기시키며 전쟁의 잔인성 상징하는 학살현장이다. 하틴 마을에서 40분 동안 머물며 벨라루스의 아픈 상처를 생생하게 보았다. 다시 들어가던 길을 따라 하틴 마을을 나왔다. 곳곳에 민들레가 많다. 노랗게 민들레꽃이 피었다. 우리나라의 민들레와 같다. 고사리도 많은 나라다. 이곳은 동유럽 동슬라브 지역이다. 1966년에서야 오픈된 나라다. 화장실을 한국과 비교하지 말란다. 지저분하단다. 그런 것들은 세계여행에서 이미 겪어온 일이다. 우리나라만큼 잘 된 화장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 조국의 높은 위상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다음 여정을 위해 서둘러 하틴 마을을 떠나왔다.
참고로 카틴 숲 학살 사건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카틴은 나치수용소 희생자들의 추모 도시다. 카틴 숲 학살은 소련군이 폴란드 유명인사들 작가, 정치가, 의사 등을 학살한 곳이다. 1939년 독일과 비밀협정을 맺고, 스탈린의 지시로 1940년 폴란드로 진입한 구소련의 비밀경찰이 폴란드 동부 러시아 스몰렌스크 근교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 교수, 의사,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사회 지도층 인사 2만 2천여 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다. 구소련의 폴란드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집단을 제거한 것이다. 이 사건의 조사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는 외교 마찰을 겪어 왔다. 결국 독일군이 바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면서 소련으로 침공해 들어간 이후인 1943년에 독일군이 집단 매장된 4,100여 구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처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시신 발견 당시 소련은 독일군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으나 독일 측의 조사로 구소련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소련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독일군의 소행으로 주장해 왔지만,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1990년 4월에 구소련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여 독일은 오랜 누명에서 벗어났다. 러시아는 구소련군이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국가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4년 러시아는 카틴 숲 사건과 관련해 구소련이 자행한 만행임을 인정하면서 보유하고 있는 기록을 폴란드에 제공하겠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이라 관련자 처벌은 물론 국가적 책임은 질 수 없다는 입장만 밝혔다. 하지만 폴란드는 대량학살이 인류에 반한 범죄인만큼 관련자를 기소하는 데 시효가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러시아 군법원은 2005년 1월 11일에 이 사건이 유엔이 규정한 집단 인종 학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카틴 숲은 이곳을 방문하던 폴란드 대통령 비행기 추락으로 폴란드의 대통령, 차기 대통령, 은행총재 등 유명인사 132명이 사망한 비참한 현장이기도 하다. 2010년 4월 10일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내외가 정부 요인들을 동석하여 러시아를 방문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폴란드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려던 것은 푸틴 러시아 총리가 양국의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카틴 숲 학살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식에 폴란드 총리를 처음 초청한 것에서 발단이 시작 되었다. 그동안 러시아를 강력히 비판해 오던 폴란드 대통령은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폴란드 카친스키 대통령은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개별적으로 추모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현재 카틴 숲은 벨라루스에 속해 있다. 카틴 숲 학살 사건도, 하틴 마을 학살 사건도 가슴 아픈 비극이다. 두 사건 모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지구상에서 이런 참혹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벨라루스 들녘
벨라루스는 절반 이상의 땅이 논다. 지층이 낮아서 농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농사 작물도 몇 종류 안 된다. 밀, 옥수수, 감자, 사탕수수, 유채, 아마, 등 정도만 재배한다. 기후 변화가 심해서 농사는 거의 불가능하다. 여름에는 온도가 35도까지 상승한다. 여름 일조량도 16시간으로 많이 덥다. 겨울은 눈과 비가 많이 온다. 겨울 온도는 영하30도까지 하강하고 날씨가 매우 춥다. 나무는 두 종류가 주로 있는데 소나무와 자작나무다. 이곳은 블루베리가 산에 많다. 허리가 아파서 못 딸 정도란다. 사과나무도 많은 나라다. 현지 교포 가이드도 가방을 메고 가서 따다 먹는다고 한다. 산에는 열매가 지천이란다. 버섯도 많단다. 이곳 나라들은 모두 낮은 지형으로 산을 만나가는 어렵다. 산이 있어도 언덕 정도의 낮은 산만 보인다. 벨라루스 들녘은 상당히 넓게 전개된다. 유채농사를 짓고 말아 놓은 사초더미가 광활한 평원에 놓여 있다. 그리고 파란 옥수수 밭이 아득하다. 평화로운 농촌 마을도 지나간다. 하틴 마을을 떠난 버스가 민스크로 가면서 벨라루스의 고운 들녘 풍경을 선사한다.
* 벨라루스 민스크 현지 중식
벨라루스의 음식은 러시와와 아주 비슷하다. 현지 중식으로 돼지고기, 감자요리, 샐러드, 차와 커피 등을 먹었다. 이번 여행에서 먹는 음식은 대부분 이런 식단이다. 그리고 항상 야채 샐러드가 푸짐하게 접시에 담아 제일 먼저 내온다. 육류와 야채 균형진 영양식으로 양도 알맞아 남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바람직한 식사 문화다.
* 벨라루스 민스크 시가지
민스크는 벨라루스의 수도이자 민스크 주의 주도이며 벨라루스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다. 스비슬로치 강이 도심을 흐른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아 고난을 겪다가 벨라루스의 수도가 된 것은 1919년이다. 2차 세계대전 때 80% 이상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당하여 오늘날의 도시는 거의 새로 건설된 것이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매우 깨끗하고 우람한 현대식 건물이 많은 도시다. 하지만 역사적인 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삼위일체 마을에서나 중세 시대 풍경을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 중심지로 도로망이 잘 발달 되어 있어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심의 웅장한 건물은 소련의 건축양식에 따라 지은 것이다. 대부분의 명소들이 민스크 중앙로인 독립대로를 따라 위치해 있어 민스크 여행은 수월한 편이다. 실제로 이번 민스크 탐방에서 가장 많이 왕래한 곳도 독립대로 주변이었다. 민스크에서 시외 나갈 때나, 또 시외를 나갔다가 들어올 때도 독립대로를 거쳐서 이동했다. 그러면서 독립대로 주변에서 민스크의 활기찬 모습을 보았다.
벨라루스는 아직 독재주의다. 차츰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잘못하면 경찰에 끌려간단다. 가이드도 기사편이 되어 다투다가 경찰에 끌려간 적 있단다. 그래서 여행할 때 긴장되는 국가란다. 복지, 학비, 출산비가 무료다. 노인 연금 등도 부족하나 유럽 중에서는 양호한 편이다. 실업율 30%이며 평균월급은 500불이다. 집은 모두 소유하고 있다. 지하철이 있다. 승용차는 리투아니아에서 수입하는데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리투아니아는 승용차를 독일에서 수입한다. 특산물은 보드카와 민속품이다. 발트3국 특산물은 송진이 굳어서 된 호박 보석이다. 도시에 공원이 많다. 이곳은 역사 유적이 없다. 삼위일체 마을에만 유적지가 있다. 우리는 민스크에서 54Km 떨어진 하틴 마을에 다녀와서 민스크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식당 주변에는 숲 공원이 있어 아름다운 민스크 시가지에서 흐뭇한 시간을 보내고 눈물의 섬으로 이동했다. 오후에는 1시간 30분 동안 도보 투어를 할 것이다. 민스크 시가지 대로변에 한국의 삼성전자 광판이 크게 보인다. 먼 나라에서 내 조국을 만나듯 반가웠다.
* 벨라루스 민스크 눈물의 섬
벨라루스 하틴 마을에서 민스크로 다시 돌아와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이곳 눈물의 섬에 왔다. 민스크 도심의 스비슬로치 강물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섬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가니 작은 섬 안에 참전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구소련 시절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에 동안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한 아프카니스탄과 러시아의 싸움에 참전했다가 희생당한 벨라루스 용사들이다. 이 전투에서 벨라루스인 778명이 사망했다. 그래서 이 섬을 눈물의 섬으로 명명했다. 그때는 벨라루스가 독립하기 전이다. 그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투는 패배한 전쟁으로 판정되어 전사자들과 참전 용사들에 대한 아무런 보상과 대우가 없었다. 구소련이 붕괴된 후에야 전사자들의 어머니들과 미망인들이 모여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의 형상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인들의 슬픔으로 조각되어 있다. 기념비 중앙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 모습의 조형물이 우뚝 솟아있다. 그 내부에는 헌금 항아리가 있다. 사람들은 그 항아리에 돈을 던져 그들의 넋을 추모한다. 기념비 앞에는 헌화가 많이 놓여 있다. 스비슬로치 강과 눈물의 섬 주변에는 현대식 우람한 건물들이 비경이다. 대조적으로 마주 선 고전적인 삼위일체 마을도 비경이다. 우리나라의 손연재 리듬체조 선수가 국제리듬체조 경기에 참가했던 민스크의 리듬체조 경기장도 나무 사이로 보인다. 강물 위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가 다 아물었다는 듯이 유유히 유람하는 조각배들이 떠다닌다. 눈물의 섬을 떠나 강변을 걸으면서도 그 아픈 이름이 잊혀지지 않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 벨라루스 민스크 삼위일체 마을
벨라루스 민스크 올드 타운으로 민스크의 옛 모습이 남은 마을이다. 이름이 삼위일체 마을로 독특하다. 눈물의 섬 바로 앞에 있다. 눈물의 섬에서 조망하면 마을은 나무 사이로 곱게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색상의 낮은 건물이 길게 이어져 있어 중세 유럽 분위기를 자아낸다. 민스크 시가지에서 18세기에서 19세기의 민스크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은 이곳 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 전쟁 속에서도 이 마을만은 파괴되지 않았다. 민스크 도심을 흐르는 스비슬러치 강변에 있어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현재 대부분의 건물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여름에는 강변 노천카페에서 축제와 공연이 열린다. 주변에 고층 현대식 아파트와 여러 건물이 높이 솟구쳐 고전과 현대의 모습을 접목하는 교차로 같은 인상이다.
* 벨라루스 민스크 동방 정교회
벨라루스는 동방 정교회가 많다. 80%의 사람들이 종교가 개신교인 동방 정교회이기 때문이다. 결혼도 동방 정교회 안에서 거행된다. 지금 보는 이 정교회는 눈물의 섬에서 조금 걸어 올라와 약간 높은 지대에 있다. 1642년 지어진 바로크 양식으로 민스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은 유적이다. 두 개의 십자가 첨탑이 높이 솟아 있고 러시아 여행에서 보아온 교회 외벽의 성화가 빛난다. 성령 성당으로 불리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다. 내부에도 들어가 보았다. 러시아 정교회를 상징하는 많은 성상과 성화가 금색 장식으로 엄숙하면서도 화려하다. 여러 면에서 러시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정교회 앞에는 스비슬러치 강과 강변 풍경이 아름답다.
* 벨라루스 민스크 구시청사
벨라루스 민스크 구시청사는 동방 정교회에 가까이 있다. 고풍스런 건물 양식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구시청사 광장에는 말과 마차를 장식해 놓았다. 그 옛날 중세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람들은 마차에 올라 그날을 재현하듯 흥겨워 한다. 우리 부부도 마차에 올라 잠시 중세의 고전 향수에 젖었다.
* 벨라루스 민스크 10월 광장
벨라루스는 구소련 지배에서 1991년 발틱 3국과 함께 독립한 국가다. 이곳 10월 광장은 민스크 시내 중심 한 복판에 위치한 광장이다. 광장에 들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세 건물이 있다. 가장 웅장한 건물은 국립회관, 그 곁으로는 전쟁박물관, 맨 끝부분에는 동상으로 장식한 문화회관이다. 국립회관은 구소련 지배시절 공산당 전당대회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현재는 국립극장으로 문화공연 장소다. 모스크바의 레닌의 묘를 모방하여 지은 건물이다. 전쟁박물관은 3층 건물로 구소련 당시 2차 세계대전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이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에 대한 기록과 사진, 전투 무기, 활약상 등을 전시해 두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조국에 대한 소중함을 후세들에게 유산으로 전해주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0월 광장에는 또한 0Km 라는 이정표가 있는데 이것은 민스크가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중심임을 상징한다. 벨라루스의 다부진 모습을 보여주는 광장이다.
*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광장
벨라루스 민스크의 독립광장은 민스크의 중심이며 주변에는 정부기관 및 교육 등 여러 주요기관 건물이 있다. 이곳은 민스크 시내를 관통하는 독립대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독립광장은 총 길이 500m의 아주 넓고 긴 폭의 광장이며 독립대로변에 있다. 우리가 식사를 한 민스크 호텔 쪽 끝에서 바라보는 독립광장은 아득하여서 분주한 걸음으로 왕래하며 둘러보았다. 독립대로 쪽부터 민스크대학교, 바로 곁은 중앙우체국, 그리고 독립대로 맞은편에는 독립광장이 있다. 독립광장 맨 윗부분 끝 건물은 민스크 부속 사범대학, 중앙엔 분수, 오른쪽으로 맨 윗부분 끝엔 정부청사, 레닌동상, 시몬과 헬렌 성당, 맨 아래쪽엔 민스크 호텔이 있다. 광장 지하는 전체를 개조하여 현대식 쇼핑센터로 개장한 빅토리 팔래스 건물이다. 벨라루스 대통령은 지금 52세다. 24년 동안 독재 정치를 하고 있다. 대통령 임기는 있으나 법을 바꿔서 자꾸 연임한다. 독재지만 경제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정부 청사 앞에는 레닌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다. 아직 소련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다. 그러나 독립광장은 벨라루스의 활기차고 힘찬 발전을 보여주는 당당한 한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 벨라루스 독립광장 벨라루스 국립 대학교
벨라루스 국립 대학교가 민스크 독립광장 맞은 편 독립대로 옆에 긴 품사위로 자리하고 있다. 5층 학교 건물이 아주 웅장하다. 1921년 창립된 대학교다. 종합 국립대학으로 벨라루스에서 가장 크고 학교 수준이 제일 높은 대학교다. 동유럽권에서도 우수한 대학에 들어간다. 주요학과 건물만 독립광장 앞에 있고 다른 학과건물은 흩어져 있다. 벨라루스 대학교 부속 사범대학 건물은 독립광장 끝부분에 위치해 있다. 벨라루스의 유명 인물을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다. 독립광장을 바라보는 독립대로변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국가에 대한 소중함과 깊은 애국심을 부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광장 시몬과 헬렌 성당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광장 옆에 시몬과 헬렌 성당이 있다. 가톨릭 성당으로 붉은 벽돌로 지어서 붉은 성당이라고도 한다. 1908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건물 크기가 그리 큰 것은 아닌데 붉은 색상의 아름다운 성당이 오롯이 앉아 독립광장을 빛내고 있다. 처음엔 성당으로 지은 건물인데 러시아 침공 후 구소련 시절에는 영화관과 박물관, 카페로 사용되다가 1991년 독립 후 가톨릭 기능을 되찾았다. 전쟁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유적이다. 성당에 담긴 유래와 역사도 독특하다. 시몬과 헬렌 성당은 두 자녀를 잃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 그 부모가 지은 성당이다. 시몬과 헬렌 부부는 민스크에서 덕망 있고 부유한 귀족이었다. 두 자녀를 두었는데 전염병으로 어린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딸이 18세, 아들이 12세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큰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자신들의 전 재산을 헌납하여 성당을 지어 하나님께 바침으로 다소나마 아픈 마음을 달랜 것이다. 지붕에 탑이 네 개 있는데 중앙 건물의 높은 것 두 개는 부모를, 낮은 것 두 개는 자녀를 상징한다. 세상을 떠난 두 자녀의 넋을 기리고자 세운 탑이다. 고딕 양식 건물로 붉은 색의 아름다움과 헌납자의 마음이 담긴 정성어린 유적이다. 내부에도 들어가서 둘러보았다. 이토록 고운 성당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자식을 둔 어미로서 동일한 심정으로 가슴이 아팠다. 부모에게 가장 큰 아픔은 자녀가 아플 때인데, 하물며 두 자녀를 저 세상에 먼저 보낸 그 아픔이야 무슨 말로 표현할까. 한 가정의 슬픈 애환이 담긴 성당이 세계인의 걸음을 숙연하게 모으고 있다.
*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광장 레닌 동상과 정부청사
벨라루스 민스크 독립대로 옆 독립광장 끝 부분에 레닌 동상이 있다. 그 동상 바로 뒤 건물은 정부청사다. 레닌은 볼세비키 혁명으로 소련연방 창설의 핵심 인물이며 사회주의 혁명가다. 처음에는 왜 정부청사 앞에 레닌 동상이 있을까 의아했는데 아직도 러시아의 잔재가 많은 국가라고 알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벨라루스의 육중한 정부청사 건물을 육중한 자태로 레닌이 지키고 있다.
* 벨라루스 민스크 출발
벨라루스 민스크 여정을 모두 마치고 리투아니아로 간다. 옛 소련의 유적을 많이 본 곳이다. 독립대로를 따라 시가지를 빠져 나간다. 상당히 복잡한 거리를 지난다. 승용차과 전차가 함께 운행하는 거리다. 이색 풍경이다.
* 벨라루스 민스크 소련 기념비
벨라루스에는 구소련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유난히 그 여운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러시아에 대하여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나라다. 구소련 지배시에는 교회 건물도 공공 건물로 국가에서 사용했다. 최근에서야 교회로 사용 되는 중이다. 민스크 시내 대로변에 소련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 벨라루스 민스크 올림픽 경기장
벨라루스는 얼마 전 우리나라 손연재 리듬체조 선수가 국제리듬체조 경기를 치른 나라다. 우수한 성적이어서 인상 깊게 보았다. 아까 낮에는 민스크 눈물의 섬에서 그 경기장을 조망했다. 벨라루스는 리듬체조가 세계1위인 나라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 대비해서 연습하는 올림픽 경기장을 지나고 있다.
* 벨라루스 민스크 정교회 건물
벨라루스 종교는 80%가 개신교 정교회다. 이웃 나라인 리투아니아는 80%가 가톨릭이다. 지금 민스크 외곽에서 아름다운 정교회 건물을 본다. 울창한 숲 사이로 지붕만 금색, 부속 건물은 붉은 색이고 모두 하얀 색인 정교회 건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몇 년 전 러시아 여행에서 보았던 건물 모습이다. 아직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 벨라루스 호수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여정을 마치고 리투아니아로 가는 길이다. 민스크 시가지를 벗어나자 숲 사이로 시원한 호수가 보인다. 벨라루스를 비롯한 이번 여행국 모두 호수가 많은 나라다. 지대가 낮아 늪지대도 많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울창한 숲 사이에서 비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산 사이에서 보는 우리나라의 호수와는 풍경이 다르다. 산이 없는 나라에서 땅 사이에, 또는 숲 사이에 이룬 저지대 영토의 호수를 본다는 것은 세계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 벨라루스 소나무 숲 도로
벨라루스에서 리투아니아로 가는 길의 도로변에는 소나무 숲이 많다. 소나무의 기둥이 모두 붉다. 붉은 발목에 푸른 머리,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적송과 유사하다. 도로변에는 오직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숲 군락을 이룬다. 더러 다른 나무숲도 나오지만 거의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이다. 어떤 곳은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섞여 있기도 한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 동일한 모양으로 쭉 뻗어 하늘 향해 서 있는 모습이 비경을 선사한다. 이국의 향수를 제대로 내뿜으며 이것이 아름다운 벨라루스라고 외치는 듯하다.
* 벨라루스 농촌 풍경
벨라루스의 농촌 마을을 지나간다. 밀타작을 한 밭이 누렇게 풍요롭다. 사초뭉치를 말아놓은 곳도 있다. 밭 가운데 큰 전선 철탑도 있다. 넓은 평야 가운데 농춘 주택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집들은 모두 작고 아담하다. 동화 속 정경이다.
* 벨라루스 자작나무 숲 도로
벨라루스의 도로변에 자작나무 숲이 아름답다. 소나무 숲과 자작나무 숲이 도로변에 계속 이어진다. 벨라루스의 도로변에서 만나는 비경이다. 자유롭게 자라는 자작나무 숲들이 넓게 전개되기도 한다. 이런 풍경은 북유럽 여행에서, 특히 러시아에서 많이 보았던 풍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은사시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 나무다. 하얀 나무의 기둥이 참으로 예쁘다.
* 벨라루스 고운 마을 풍경
벨라루스의 아름다운 마을을 지난다. 도로변에 고운 색상의 주택들이 있다. 담장도 낮고 집 주변에는 사과나무가 많다. 정원에는 꽃이 곱게 피어 있다. 또 집 뒤뜰에는 닭들이 풀을 뜯는다. 동화 속에서 도란도란 거리는 이야기 같은 정경이다. 어릴 적 고향 집 마당에 놓아기르던 닭들이 떠오른다. 유년의 향수를 자아내는 풍경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도 우뚝 솟아 있다. 동유럽의 나라, 벨라루스의 매력을 드러내는 한 장면을 담아간다.
* 벨라루스 광활한 평원
벨라루스는 모스크바와 폴란드 사이에 있는 나라로 지형이 아주 평탄하다. 다. 가도 가도 산이 없는 평원이다. 도로변에 오직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할 뿐 산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가 다니기에는 아주 안전한 길이다. 우리 버스는 계속해서 그런 평탄한 길로만 달린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풍경이다. 넓고 푸른 초지 위에 젖소가 평화로운 모습으로 서 있다. 광활한 평원의 옥수수 밭이 비경이다. 숲 사이로 철로도 보인다. 벨라루스의 아름다운 평원을 달려 우리는 리투아니아로 가고 있다.
* 리투아니아 국경선 도착
벨라루스에서 리투아니아의 국경선을 넘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왔다. 국경마을에 가까이 오자 차가 많이 밀린다. 오후 7시 20분경, 현지 가이드는 거의 도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버스가 국경 주유소에서 주유를 한다. 우리는 하차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녁 무렵 잔잔한 햇살이 내리는 벨라루스의 들녘은 벌써 가을빛이 물드는 놀놀한 풀과 울창한 나무로 비경을 자아낸다. 노르스름한 사초더미가 있는 곳곳에 놓인 땅도 있다. 산이 없는 평원이다. 울창한 숲이어도 둔덕일 뿐이다. 앞으로도 동일한 풍경이 이어질 거란다. 초지 사이로 난 국경도로에는 벨라루스로 가는 트럭을 비롯한 많은 차량들이 길게 줄 서 있다. 고속도로 티켓을 구입하려고 대기 중이다. 20Km까지 트럭 등 차량 줄 서 있기도 한단다. 다시 승차하여 국경선으로 갔다. 오늘 우리 버스만 국경선 넘기를 기도 한다고, 가이드 힘주어 말한다. 경찰이 올라와서 검색한다. 국경선 사무소에서 여직원이 나와 출국 수속증을 수거한다. 벨라루스가 비자국이라서 일일이 출국증을 컴퓨터에 이름 입력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리 여행객 33명과 가이드 2명 총 35명을 입력한 것이다. 출발 직전 소독 구간을 돌며 발을 소독하고 승차했다. 일교차가 심하여 저녁엔 최저 15도란다. 차에서 내리면 쌀쌀할 거란다. 이제 리투아니아로 넘어간다.
* 리투아니아 땅 진입
벨라루스의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 땅에 진입했다. 국경선을 왕래하는 수많은 차량 행렬이 이어진다. 승용차나 트럭은 2~3시간 걸리는데 우리 버스는 그래도 빨리 국경선을 통과했다. 1시간 정도만 소요되었다. 울창한 나무숲이 먼저 외객을 반긴다. 도로 양 옆으로 모두 푸른 숲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숙할 빌뉴스 호텔까지는 40분 소요된다. 우리 기사 러시아 남자 이름은 빅토르다. 47세인데 아들이 26세로 오늘 손녀를 출생했단다.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하여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우리와 같이 한국에서 같이 온 남자 가이드와는 동갑이란다. 그런데 우리 가이드는 할아버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리투아니아는 동유럽 발트해 연안에 있는 나라다. 한국의 1/3 크기인 나라다.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는 도로가 양호하다. 이번 여행하는 5개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모두 EU 가입국이다. 그러나 에스토니아만 유로존에 가입했다. 그래서 유로통화는 에스토니아에서만 가능하다. 에스토니아가 유로화폐 사용으로 발전했으나 경제사정이 힘들고 물가 상승이 심하다. 리투아니아 인구는 350만 명이다. 수도 빌뉴스에는 60만 명이 거주한다. 국교는 가톨릭이며 80%가 가톨릭 종교다. 리투아니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대통령제이며 GNP 1만 2천불 국가다. 에스토니아는 1만 5천불, 라트비아는 1만 1천불, 발틱3국이 비슷하다. 리투아니아는 농업이 4%, 공업 28%, 서비스업 60%다. 러시아 쪽으로 기계설비를 수출한다. 국토는 대부분 평평한 지형이며, 제일 높은 지역이 294m에 불과하다. 리투아니아의 4분의 1이상은 삼림지대다. 발트해 연안을 따라 100여 ㎞의 해안이 펼쳐져 있고 3천500여 개의 강과 호수가 있다. 산이 전혀 없는 나라다. 여름에는 호수와 구릉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지만, 겨울은 일 년의 반으로 온통 눈 세상이다.
지금 시각 밤 10시다. 그런데 이제 어둠이 시작된다. 한국의 초저녁과 같다. 백야기 때는 12시에야 밤이 시작되는 나라다. 또한 금방 낮이 시작된다. 새벽 3시면 훤히 밝는다. 이런 백야기는 몇 년 전 러시아 여행에서 체험했다. 리투아니아는 1940년에는 소련, 1941년부터는 독일의 지배를 받아온 나라다. 1944년에는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어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1990년 3월 독립을 선언하고 이듬해인 1991년 독립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더욱 강하게 발전한다. 한국과는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91년 10월 14일 수교하였다. 남북 동시 수교국이다. 약 30여 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단기연수 목적으로 오는 한국학생이 늘고 있다. 작년 9월 한국 경주에서 국제펜대회를 개최할 때 우리 부부는 리투아니아의 대학 교수와 동석하여 만났다. 그땐 아득히 먼 나라로만 알았는데 지금 그 나라에 온 것에 대하여 가슴 박찬 일이다. 어느새 리투아니아 빌뉴스 호텔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여정이다.
2013년 8월 9일 금요일 리투아니아 빌뉴스, 트라카이, 슈레이, 라트비아 룬달레
* 리투아니아 빌뉴스 호텔 주변 산책
우리가 유숙한 리투아니아 빌뉴스 호텔은 숲 공원 옆에 있어서 주변 경관이 상당히 아름답다. 조식을 서둘러 마치고 숲 공원을 산책했다. 오늘 기온 15도~29도로 아침인데도 그리 쌀쌀하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다. 숲 공원은 아주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큰 개를 끌고 나온 시민도 있다. 빌뉴스는 비가 많이 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연간500~700m의 비가 온다. 발틱과 연결된 도시다. 발틱은 흰 바다란 뜻이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는 16세기에는 동부 유럽의 대도시였고, 17세기에는 폴란드의 황금기에 한 몫을 했으며, 19세기에는 유태인 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했 다. 20세기에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아직도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주변 국가들의 문화적 중심지로 활약하던 600여 년 전 중세 시대의 역사적 숨결이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인과 유태인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독립투쟁의 본거지로 소련의 붕괴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리투아니아는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나도 처음엔 생소한 나라였다. 발틱 3국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모두 그렇다. 에스토니아는 몇 년 전 핀란드 여행 때 수오멘린나 섬에서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다고 상상하던 나라였기에 조금은 낯익지만 그 외 라트비아나 리투아니아는 이름조차 외우기 어려운 낯선 나라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세계여행에서 항상 느끼는 문구다. 이론으로 백번을 공부한들 지금 이렇게 땅을 밟고 선 한 번의 체험만 할까. 각 나라에서 유익한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은 세계여행이 주는 아주 중요한 선물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가서 내 조국에 알릴 것이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게디미나스 대로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중심대로다. 게디미나스 대로라고 한다. 구소련시대에는 레닌대로, 스탈린 대로라고 불렀다. 시대를 거치면 이름도 다양한 역사적 도로다. 게디미나스 대로를 달려 빌뉴스 대성당으로 가고 있다. 차창에 빗방울이 맺힌다. 아침 시간인데 투명하지 않은 하늘이다. 그러나 이곳 발틱 날씨는 변동이 심하여 금방 비가 그친다. 출근 차량들이 많다.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빌뉴스 역사지구에는 중세도시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이곳은 13세기에서 18세기말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중세시대 동안 동부 유럽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다. 그런 연유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심지였던 빌뉴스는 동유럽의 중세 문화 중심부로 성장하였다. 빌뉴스의 중세 건축물들의 양식은 동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 우리는 리투아니아에서 중세 역사의 유적을 보고, 중세 거리를 산책할 것이다. 게디미나스 대로 끝에 우뚝 솟은 빌뉴스 대성당이 보인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성당
리투아니아 빌뉴스 성당은 아주 너른 품사위로 앉아 있다. 멀리서부터 바라본 그 위용이 대단하다. 13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인 빌뉴스 대성당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관식 장소로 사용되었다. 빌뉴스 대성당 정면에 위치한 넓은 대성당 광장은 19세기 말 성당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리투아니아의 주요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성당 건물 바로 곁에 게디미나스 기마상도 있다. 그는 철갑을 두른 늑대 울음소리를 듣고 리투아니아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빌뉴스로 옮긴 대공작이며 왕이다. 리투아니아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말과 함께 힘차게 전진하는 모습이다. 기단에는 철갑을 두른 늑대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 게디미나스를 향해 울고 있는 모습도 새겨 놓았다. 오롯하게 높이 솟은 종탑도 있다. 성당 바로 앞에는 그의 이름을 딴 게디미나스 도로가 쭉 뻗어 있다.
성당 광장에는 인간의 띠가 시작된 출발점 기념 돌판이 있다. 에스토니아에서 바라보면 이곳 돌판은 도착점이다. 리투아니아는 발트3국 세 나라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인구도 많다. 위치는 북에서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이런 순서로 세 나라 중 가장 남쪽에 있다. 영어글자로 기적이란 뜻의 STEBUKLAS 알파벳이 둥글게 새겨 있다. 인간의 띠는 여기서부터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까지 600Km를 사람들이 손잡고 이은 독립을 갈망하는 무혈혁명의 행렬이다. 수도인 빌뉴스 구시가지 역사지구 안에는 빌뉴스 대성당, 대통령궁, 빌뉴스 대학교, 성 안나 교회 등을 비롯하여 중세도시 모습이 잘 보존된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물이 많다. 빌뉴스 역사지구는 1994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외부와 내주 모두 하얀 색상으로 고결한 정감을 드리운 빌뉴스 대성당도 대표적 중세 유적이다. 이국의 성스러운 영역에서 빛나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은혜롭게 행복한 순간이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인간의 띠 기적의 돌판
리투아니아 빌뉴스 성당 앞 바닥에 기적stebuklas이란 뜻의 영문 알파벳을 새겨놓은 사각 돌판이 있다. 대문자로 영문 글자 STEBUKLAS을 둥글게 이어 놓았다. 즉 인간의 띠는 기적이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알파벳을 오른편 방향으로 읽으면 된다. 이곳은 발트3국의 독립을 위해 1989년 8월 23일 발트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국민 1/4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까지 600Km를 인간의 띠로 이은 리투아니아의 출발점이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에서 볼 때는 이곳이 도착점이다. 인간의 띠는 역사상 가장 긴 띠로 무언의 독립 시위 행렬이다. 그 긴 행렬의 길을 발트의 길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띠가 계기가 되어 발트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전쟁이나 폭력 없이 평화로운 절차로 독립을 이루었다.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시달온 발트3국은 1991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영향으로 독립 소원을 이루었다.
자유의 사슬인 인간의 띠는 50년을 기다린 무혈혁명이며 노래하는 혁명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러시아와 독일의 외무부장관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두 외무부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러시아와 독일이 유럽을 나누어 갖자는 비밀조약이다. 독일 동편의 폴란드와 발트3국은 러시아 지배국이었는데 독일이 협정을 깨고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발트3국은 독일과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왔고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소련으로 귀속되었다. 폴란드와 체코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주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독립국이 되었으나, 발트3국은 세계의 지도에서 사라져버리는 아픈 역사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1989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대표들이 소련의 발트3국 지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났다. 이 모임이 바로 독립에 대한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시작은 아주 엉성했다. 대규모 행사를 준비할 시간도 충분치 않았고, 국민들 참여가 없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소련의 침공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졌다. 드디어 1989년 8월23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지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까지 거대한 인간 띠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 띠의 길이만 자그마치 600㎞가 넘는 627Km였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200만 명이 넘는다.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긴 띠다. 빌뉴스 성당의 엄숙하고 웅장한 건물 앞에서 기적이라는 마크인 인간의 띠 출발점 돌판 앞에 서니 숙연해진다. 돌판 위에 서서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돈 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만큼 위대하고 소중함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발틱국가 여행에서 그 동안 잘 몰랐던 이곳 나라들의 슬픈 역사를 잘 배우고 간다. 뜻 깊고 보람된 여정이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통령궁
리투아니아는 현재 최초 여성 대통령이다. 대통령궁은 대통령의 집무실이다. 14세기에 처음 지어진 건물로 수세기 동안 증축과 보수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역대 대주교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주교 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맞은편에는 빌뉴스대학교가 있다. 빌뉴스 대학생들은 날마다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학교생활을 할 수 있다.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은 구시가지 안의 작은 도로 곁에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담장도 없고, 쇠줄로 울을 쳐놓았을 뿐이다. 건물도 베이지색 2층으로 아담하다. 경계하거나 보초 서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대통령이 거하는 집일까 싶을 만큼 소박하고 고요하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학교
빌뉴스 대학교는 대통령궁 바로 곁에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공부 잘 하면 대통령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1579년에 리투아니아 최초의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역사 깊은 대학 중 하나다. 지금은 사립이어서 학비를 자비로 지급한다. 수많은 문학가와 사상가, 철학가들 그리고 노벨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다. 교내에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 두 명을 동시에 기념하는 성 요한 성당도 있다. 구소련 지배 당시에는 이 성당을 음악학교로 사용했다. 강의실 복도와 천장에는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담긴 벽화로 중세의 향기를 연출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대학교 건물 자체가 유물이자 박물관이다. 빌뉴스 대학교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학교 건물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영화 해리포터의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처음 입학한 학생들은 강의실을 찾는데 힘든 경우도 있다. 안내지도를 받아 이동하기도 한다. 리투아니아 여행에서 빌뉴스 대학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바쁜 여정으로 오래 머물진 못했지만 잠시 본 것만으로도 빌뉴스 대학교의 높은 학구열과 역사를 가늠할 수 있었다. 특히 대통령궁 바로 곁에 있어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큰 뜻을 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구시가지 거리 중세 건물들
빌뉴스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북유럽에서 가장 큰 빌뉴스 구시가지에는 20개 정도의 성당이 현존하고 있다. 종교 행위가 금지되던 소련 시절에는 이곳 성당들이 모두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어느 성당은 무신론 박물관이 되기도 했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던 리투아니아인들은 독립과 동시에 모든 성당의 기능을 다시 이전으로 회복시켰다. 이와 비슷한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는 대다수의 성당들이 기능을 잃고 아직도 박물관이나 전망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에 비하면 리투아니아인들의 높은 신앙심을 전하는 대목이다. 구시가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필리에스Pilie 거리와 디지요이 대로를 빼면 대부분 좁은 골목길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붉은 벽돌 건물들에서 중세 역사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세계대전 시절 유대인들이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때 빌뉴스는 북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유대인들이 많았다. 구시가지에 위치했던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는 당시 유대인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숨죽이며 살던 곳이다. 구시가지 중심인 필리에스 거리가 지금은 과거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장식과 함께 카페, 가게, 식당, 호텔 등이 밀집한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로 바뀌었다. 또한 아주 고풍스런 저층의 아파트도 있다. 신비로움이 감도는 영역이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성 안나 교회
성 안나 교회는 나폴레옹이 손바닥에 얹고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던 교회다. 1812년 러시아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빌뉴스를 들른 나폴레옹이 성 안나 교회를 보고 반해서 그런 말을 남겼다. 그 만큼 아름다운 교회다. 빌뉴스 뿐 아니라 리투아니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교회 중 하나다. 처음에는 나무로 지어졌는데 화재로 손실되고 15세기에 다시 벽돌로 견고하게 건축했다. 33종류의 벽돌을 구워서 건축한 중세 고딕 양식 건물이다. 성당 내부는 러시아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다. 교회 근처에 카페를 선전하기 위해 곱게 장식된 나무가 있다. 그것도 이색 풍경이다. 발트 국가 중에서 면적이 가장 큰 리투아니아는 깨끗하고 정숙한 인상이다. 수도 빌뉴스도 역시 그렇다.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우아한 도시를 더욱 빛낸다. 그중에서도 성 안나 교회는 하늘 높이 솟구치는 붉은 첨탑과 함께 건축미가 돋보이는 아주 우아한 건축물이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게디미나스 성채
게디미나스Gediminas 왕은 빌뉴스를 탄생 시킨 사람이다. 그는 1316년부터 1341년까지 재위한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다. 독일 기사단의 침범으로 분열된 리투아니아공국을 재통일하고 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통합하여 대공국을 건설한 사람이다. 그런 공적으로 사람들은 그를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왕이라고 불렀다. 14세기 당시 트라카이가 수도일 때 게디미나스 왕은 수도를 빌뉴스로 옮겼다. 그래서 빌뉴스 구시가지가 700년 역사를 지닌 것이다. 우리는 구시가지를 산책하며 중세 문화를 체험했다. 게디마나스 성채를 본 곳도 구시가지 팔리에스 거리에서다. 구시가지 건물들 사이로 분홍색 벽돌의 성채 건물이 보였다. 수도를 옮기기 전 게디미나스는 현재 저곳 게디미나스 성채에서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다. 늑대는 총을 쏴도 안 죽고 계속 울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늑대가 철갑 두르고 있었다. 수상히 여겨 점술사에게 물어보니 그곳이 리투아니아 수도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울음은 이 나라의 번성을 뜻한다고 했다. 그래서 게디미나스 왕은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이곳 빌뉴스로 옮겨온 것이다. 성채 안에는 빌뉴스의 역사 전시물과 갑옷, 칼 등 중세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성당 뒤쪽의 나지막한 산에 위치해 있어서 성당 광장에서 걸어가면 성채에 갈 수 있다. 리투아니아의 국교는 가톨릭이다. 게디미나스 성채를 뒤로 하고 중세 향기가 배인 팔리에스 거리를 계속 걸어 다음 여행지로 이동했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구시가지 팔리에스 거리
이곳 팔리에스 거리Pilies Street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의 구시가지 중심거리다. 도로 바닥도 중세의 도로 형태다. 교회가 많이 있고 13세기에서 19세기에 지어진 중세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도 많다. 예전에는 구시가의 대부분이 유대인 강제 거주지구로 사용되었다. 팔리에스 거리는 대성당 광장에서 구시청사 광장까지 이어진다. 노천카페와 함께 거리 풍경이 상당히 아름답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서명의 집
리투아니아 빌뉴스 구시가지 팔리에스 거리에서 서명의 집을 보았다. 2층 베란다에 독립선언 국기가 게양된 집이다. 리투아니아는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 점령당했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종전 해인 1918년 제정러시아의 붕괴와 독일의 패전으로 독립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때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투사 20명이 이곳 서명의 집에 모여 독립 선언문에 서명하고 세계에 리투아니아의 국가재건을 선언했다. 2월 16일은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날로 국가재건 국경일이다. 그러나 1940년 독.소 조약에 의해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당했다. 1941년에는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16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21만 명이 희생당했다. 그후 1944년에 소련군에 의해 다시 점령되면서 50년 넘게 소련의 지배를 받아온 아린 역사를 지닌 리투아니아다. 구소련이 붕괴 되면서 1990년 3월, 리투아니아는 연방 소속 국가들 중 최초로 독립을 선언했다. 아직도 리투아니아 360만 명 인구 중 7% 정도의 러시아인이 남아 있다. 서명의 집은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3층 건물이다. 러시아로부터 완전 독립한 1991년에 정부에서 2개의 국기를 게양했다. 국기의 세 가지 색에서 노랑은 대지, 초록은 숲, 빨강은 역사를 상징한다. 리투아니아의 대표적 상징 색상이다. 내 조국의 아픈 마디를 보는 것 같아 소슬한 느낌이 들었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구시청사 광장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구시가지인 팔리에스 거리를 걸어서 구시청사 광장에 도착했다. 주변은 번화가로 상가와 노천카페 등 풍경이 아주 아름답다. 오랜 역사가 배어 있는 고딕 양식의 하얀 색 구시청사 건물이 광장 끝에 우람하게 서 있다. 그 앞에는 넓은 구시청사 광장이 전개된다. 이곳 구시청사 광장은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상업뿐만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다. 이 주변이 모두 구시가지여서 더욱 중세 향기를 드러내는 고운 풍경이다. 빌뉴스의 시청은 신시가지로 이전했고 이곳 구시청사 건물은 현재는 갤러리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광장 앞의 분수와 팔리에스 거리가 구시청사와 광장을 더욱 빛내고 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데 다음 여행을 위해 아쉬운 걸음으로 떠나 왔다.
* 리투아니아 빌뉴스 새벽의 문
리투아니아 구시가지의 아홉 개문 중 유일하게 남은 문이다. 구시가지의 입구와도 같은 새벽의 문이다. 이 문을 거쳐야 시가지에 진입 할 수 있었다. 구시가지를 따라 비스듬하게 올라온 언덕 끝에서 만났다. 양쪽으로는 건물들이 연결 지어 붙어있어 현재도 이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간간이 빌뉴스 시민들이 새벽의 문으로 들고나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의 문 위에는 검은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화분 장식과 함께 아름다운 마리아 조각상이 창문이 있어야 할 곳에 놓여 있다. 새벽의 문 위에 있는 건물은 교회다. 실내 계단을 따라 교회 안으로 올라가 보았다. 작은 공간의 기도실이다.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가진 못하고 다시 내려왔다. 마리아 성녀가 원래는 모두 금색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옮기면서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해서 얼굴만 검은 색으로 변한 것이란다. 마리아상이 온통 금빛인데 얼굴만 검은색인 것이 독특하다. 이 검은 마리아상은 기적의 성화로 불리기도 한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종교의 힘은 대단히 위대하다. 먼 나라 리투아니아에서 체험하는 종교의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다음 여행지로 가기 위해 새벽의 문을 통과하여 신시가지로 나왔다.
* 리투아니아 신시가지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새벽의 문을 나서서 리투아니아 트라카이로 이동한다. 여기서 40분 소요된다. 빌뉴스 신시가지를 지나간다. 구시가지와는 다른 분위기다. 울창한 가로수 나무 사이로 신식 건물이 보인다.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가자 영문으로 MAXIMA라는 상호가 있다. 그리고 다른 글자는 청색인데 X자는 붉은 색이다. 또한 상호 곁에 XX라는 추가 글자를 붙여 놓았다. 그것은 슈퍼마켓 상호이며 X자의 개수는 슈퍼마켓의 크기 규모다. X자가 많을수록 슈퍼마켓이 큰 규모이고 판매품종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최고 많은 곳이 X자 3개다. 새로운 것을 보며 신기했다. 리투아니아 출생의 여인으로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티브이에서 잘 알려진 박칼린이다. 리투아니아 여인과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심히 음악활동하는 모습을 나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리투아니아 출생이라는 사실은 이곳에 와서 알았다. 신시가지를 벗어나자 들녘의 아담한 주택 풍경이 곱다. 버스는 점점 빌뉴스를 떠나 트라카이를 향해 리투아니아의 평원을 달린다.
* 리투아니아 트라이카 성
트라카이Trakai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28km 거리의 가까운 위치에 있다. 14세기까지 수도였던 중세 역사 도시다. 2만 명이 사는 소도시지만 매년 20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다. 영국 여왕, 중국 강택민 주석, 일본수상도 다녀간 후로 더욱 명소가 되었단다. 호수 위 섬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트라카이 성은 장관이다. 하늘의 파란색, 숲의 초록색, 벽돌의 붉은색 이렇게 빛의 3원색을 발하며 비경을 자아낸다. 600여 년 전 독일 기사단의 침략을 받았을 때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군이 힘을 합하여 싸워서 승리했다. 그때 전투를 이끈 사람은 리투아니아의 대공작 비타우타스다. 그는 승전 기념으로 트라카이성에서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이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독일 기사단들의 침략도 멈추고, 수도까지 빌뉴스로 옮기자 트라카이 성은 쇠락했다. 그 이후로도 1,2차 세계대전 등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폐허가 되어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간 도시였다. 20세기 초에 와서야 트라카이 성 주변에서 중세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복원과 발굴사업을 거치면서 보수하여 현재는 예전 모습을 회복했다. 그곳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이다. 화창한 날씨는 아니지만 트라카이 성은 넓은 호수에 고요히 앉아 중세의 위용을 그대로 분무하고 있었다. 호수에는 여러 종류의 배들이 떠 있고, 더러는 정박해 있다. 트라카이 성을 유람하는 배들이다. 우리는 요트로 트라카이 성을 유람할 것이다. 항구에서 요트를 기다리며 호수와 나무와 붉은 성을 조망했다. 가슴 벅찬 낭만의 시간이다.
* 리투아니아 트라이카 성 요트 유람
라투아니아 호수 한가운데 자리한 트라카이 성을 요트 유람했다. 칼베 호수 위에 뜬 트라카이 성을 가까이 다가가 보기 위해서다. 요트은 4인승이다. 우리 부부와 다른 부부 이렇게 4명이 같은 요트에 승선했다. 트라카이 칼베 호수도 아름답고, 청빛 물 위에 앉은 붉은 색 트라카이 성이 비경이다. 유럽 북부의 발트해를 끼고 있는 발틱국가 세 나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아름다운 자연과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는 여행지다. 발틱3국 호수는 모두 5천개 정도로 매우 많다. 벨라루스의 호수는 1천개 정도다. 이곳 트라카이에는 수십 개의 호수가 모여 있고 깊은 곳은 70m나 된다.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국가지만 동유럽과 북유럽의 접목으로 동유럽이 그리울 때, 북유럽이 그리울 때 찾을만한 유익한 여행지다. 트라카이 성 안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작을 비롯한 대공작들의 역사 전시물과 중세 시민들의 생활상이 담긴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공작들은 개인 호위병으로 흑해 크림반도 지역의 터키계 타타르인들을 불러들였다. 트라카이 성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양식이 전시되어 남아 있다. 지금 호수에서 트라카이 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중세의 향기가 물씬 배어 나온다. 요트를 조종하는 리투아니아 남자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만으로 넓은 천의 돛을 공중에서 움직여 배를 이동시킨다. 눈앞에서 보는 신비로운 정경이다. 배 유람은 바다든, 호수든 항상 나의 가슴을 벅차가 만든다. 시심에 젖고, 향수에 젖고, 소녀로 물드는 붉은 낭만의 시간이다. 한 동안 우리를 기쁨에 물들인 요트는 다시 출발했던 항구로 간다. 우리를 무사히 내려준 요트 조종사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아름답고 행복한 여정이다.
* 리투아니아 트라이카 성 호수 주변 풍경
트라카이 성 요트 유람을 마치고 트라카이 호수를 보며 걸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돼지고기, 야채, 아이스크림, 맥주 등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호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름다운 관광지다. 트라카이 성 뿐만 아니라 호수 주변도 상당히 아름답게 조성해 놓았다. 호수변에는 울창한 수생식물들이 장관이고 곳곳에 전통 조각 작품도 세워 놓았다. 오늘은 트라카이 호수에서 요트 경연대회가 있는가보다. 청소년들이 줄지어 조각배에 앉아 노를 저으며 호수를 달린다. 진풍경이다. 한낮이라서 날씨는 덥지만 싱그런 호수 주변 풍경으로 상쾌하다.
* 리투아니아 트라이카 거리의 사과나무
리투아니아에는 야생 사과나무가 많다. 이곳 트라카이 시내에서도 거리의 사과나무를 많이 본다. 주인이 없어서 아무나 그냥 따도 된다. 그런데 사과가 잘고 맛이 없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사과를 즐겨 먹지 않는다. 현지 교포 가이드도 이곳에 처음 와서는 배낭을 메고 야생 사과를 따러 이곳저곳 다녔단다. 나중에는 질려서 먹기 싫더란다. 그런 말을 할 때 과연 그럴까싶었는데 트라카이 거리에서 야생 사과나무를 만나니 참으로 신기하다. 직접 사과를 따기도 하고 먹기도 했다. 한국 사과보다 알이 작고 맛은 없지만 세계 여행에서 만난 소중한 체험이다.
* 리투아니아 들녘 평원
발틱 국가는 영토가 작은데도 들녘이 아득한 평원이다. 그것은 산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달리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들녘도 평원이다. 가끔 도로변에 나무숲도 나오지만 평평한 들녘이 더 많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풍경이다. 농작물도 골고루 있지 않고 단일 품종이다. 리투아니아 들녘에는 유채 농사가 많다. 꽃이 지고 노랗게 맺힌 열매들이 황금물결이다. 발칸 국가 여행에서는 해바라기와 옥수수가 많았는데 이곳 발틱 국가에서는 유채가 많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 리투아니아 휴게소
세계 여행에서 재미있는 풍경 중 하나가 휴게소다. 그 나라의 여과되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광명소만이 여행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곳이든 그 나라의 땅을 밟아 보는 것도, 풀을 보는 것도, 농토를 보는 것도, 그 외 지나가는 모든 것을 보는 것 등 모두 세계 여행에서 소중한 체험이다. 이곳 휴게소에서는 아주 이색적인 풍경을 만났다. 유채꽃이 지고
파란 꼬투리가 맺힌 드넓은 평원이다. 아득한 먼 곳까지 동일한 품종의 유채 농작물 재배지다. 유채꽃 밭 열매 사이에 들어가 이 나라의 농사 풍습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큰 행운을 만난 것이다. 가슴에 넉넉한 풍요를 담아간다.
* 리투아니아 샤울레이 가는 길
리투아니아 트라카이에서 샤울레이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리투아니아의 광활한 평원을 달린다. 이곳 들녘에는 유채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밭에 대부분 유채꽃 열매가 여물어서 노랗게 매달려 있다. 수확을 하고 사초용으로 베어서 더미로 묶어 놓은 모습도 보인다.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을 재배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풍경이다. 도로도 언덕지거나 높은 곳이 없이 거의 평원에 있다. 그래서 매우 안정감이 든다. 이런 이국적인 모습들이 지나고 나면 고운 추억으로 남아 그리울 것이다.
* 리투아니아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
리투아니아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에는 말 그대로 십자가로 장식된 언덕이다.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들녘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갔다. 시골 들녘 가운데 십자가 언덕이 웅장하게 앉아 있다. 언덕을 중심으로 십자가 행렬이 양 옆으로 비행기 날개처럼 전시되어 있다. 리투아니아 하늘의 구름도 참으로 아름답다. 십자가 언덕 가까이 다다랐을 때 상상 그 이상으로 많은 십자가 행렬에 놀라웠다. 약 5만개 이상의 십자가들로 뒤덮인 십자가 언덕이라고 하지만 점점 십자가가 자꾸 늘어나서 실제로는 수십만 개가 될 거란다. 십자가를 못 세우도록 해도 자꾸 세운다.
구소련 지배 당시 독립에 대한 갈망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그때마다 세우지 못하도록 했고 여러 번 불도저로 밀림을 당했지만 다시 세워졌다. 십자가 언덕 입구 조그만 광장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세워져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거나 자식이 아플 때 찾아와 기도하며 소원 비는 곳이기도 하다. 그럴 때 십자가를 세운다. 자손이 아플 때마다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유래는 어느 부녀 이야기에서부터다. 아버지와 딸이 살았는데 딸이 많이 아팠다. 아버지가 십자가를 세우라는 꿈을 꾼 후 십자가를 이곳에 세우니 딸의 병이 치유 되었다. 그 후부터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이곳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나도 숙연해진 가슴으로 자손들을 위해 무병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십자가 언덕을 내려와서 들길을 걸으며 자꾸 멀어지는 모습에 아쉬워 뒤를 돌아보곤 했다. 종교의 위대함을 보며, 이국에서 신앙의 엄숙한 체험으로 은혜 충만한 시간이었다.
* 리투아니아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 휴게소
리투아니아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을 둘러보고 휴게소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십자가 언덕으로 왕래하는 돌문을 나오니 여인이 전통악기로 연주하고 있다. 이곳 휴게소는 리투아니아 들녘과 가까이 있어서 리투아니아의 전원 풍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확 트인 평야에 서서 깊은 호흡으로 이국의 정취를 체감했다. 이제 리투아니아의 관광을 모두 마치고 라트비아로 떠난다. 국경을 넘어 먼저 라트비아 룬달레로 이동한다. 리투아니아 샤울레이에서 라트비아 룬달레까지는 1시간 30분 소요될 예정이다.
*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국경선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국경선은 따로 구분이 없다. 여기는 작은 국경선이다. 갈 때는 큰 국경선을 넘는다. 유럽여행에서 가장 부러운 국경선을 이곳에서 또 만난다. EU 가입국이서 그렇다. EU 가입국은 27국이고 유로존 가입국은 17개국이다. 발틱 3국에는 모든 군인이 3만 명뿐이다. 버스가 국경선을 멈추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한다. 차 안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저 어느 마을 하나 지나가듯이 고요히 넘어간다. 이것이 국경선이라니 우리의 시각으로는 놀라운 정경이다. 국경 사무국 건물을 지날 때도 경계하는 사람이 없다. 우람한 나무들만이 줄을 서서 출국을 배웅하고, 입국을 환영한다. 발틱 국가 간의 아름다운 국경선이다.
* 라트비아 진입
리투아니아의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에 진입했다. 도로 양변으로 울창한 나무숲이 외객을 반긴다. 동유럽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이 발틱해의 동쪽 해안선에 있는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나라다. 반세기 동안 구소련의 지배를 받았으나 소련 붕괴 후 러시아로부터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발전하고, 2004년에는 유럽연합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국토는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한 면적이다.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해발 311미터로 대부분 저지대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발틱해의 수도들 중 가장 국제적인 수준이다. 12세기에 세워진 리가는 교역과 기술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빈부격차가 크다. 리가는 은으로 만든 수탉이 우는 도시라고, 그만큼 슬픔이 남아있는 도시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지금 우리는 라트비아의 영토를 달려 리가로 가고 있다. 도로 사정이 좀 나빠 버스가 흔들리기도 한다. 룬달레 고성까지만 그렇고, 그 이후부터는 도로사정이 좋단다. 라트비아 들녘이 아름답게 전개된다. 노랗게 익은 유채꽃 씨앗무리가 장관이다. 광활한 들녘에 농가 주택이 있다. 어쩌다 볼 수 있는 민가다. 산이 없는 평원이 계속 이어진다.
* 라트비아 결혼 말타기 풍습
라트비아 여행에서 흥겨운 진풍경을 보았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 말을 타고 가는 신랑과 신부가 있다. 라트비아에서는 결혼할 때 말을 타는 풍습이 있는데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나는 버스의 앞부분 좌석에 앉아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차와 함께 행진하는 신랑 신부의 말타기 정경이 푸른 나무와 들녘 사이에서 한 폭의 수채화로 뜬다. 이국에서 만나는 소중한 결혼 풍습의 한 장면이다.
* 라트비아 룬달레 고성
라트비아의 베르사유라 불리는 룬달레 고성에 왔다. 라트비아 바우스카 지역에 있는 고성이다. 지금은 없어진 공국의 200년 간 통치한 궁전이다.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많이 파괴되었다. 내부는 아직도 공사 중이다.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푸른 들녘에 노란 색상의 범상치 않은 건축물이 앉아 있다. 한눈에 룬달레 고성임을 알게 하는 큰 규모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짙푸른 숲길을 따라 고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룬달레 고성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건축한 이태리 건축가가 지은 궁전이다. 나는 전에 러시아 여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보았다. 대단히 우람한 건축물이었다. 그 겨울 궁전을 건축한 건축가가 지었다는 룬달레 고성 또한 대단히 우람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1730년대에 이탈리아의 천재 건축가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에른스트 요한 폰 뷔렌 공작의 여름궁전으로 지었다. 라트비아의 베르사유라고 불릴 만큼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라트비아 귀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약 20여 개의 궁전 박물관을 보았다. 온통 금으로 장식된 황금의 방, 무도회장 인 하얀 방, 예카체리나 방, 네덜란드 방을 비롯한 각 나라의 방 등 138개의 방이 있다. 방에는 벽난로가 장식되어 있다. 화려한 벽장식이 독특하다.
내부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고성의 정원 또한 대단히 아름다웠다. 룬달레 고성의 지붕에는 오래된 황새 둥지도 있다. 라트비아에서 황새는 행운의 길조다. 그래서 궁전 지붕 위에 지은 황새 둥지를 허락하고 있다. 먼 나라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다. 넓은 터전에 자라잡고 있는 룬달레 고성은 주변 경관도 수려하고 고성 건축물도 구조나 색상에서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자태다. 라트비아의 고운 역사 한 자락을 보듬고 간다.
* 라트비아 룬달레 고성 정원
라트비아의 베르사유라 불리는 룬달레 고성은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정원도 상당히 아름답다. 룬달레 고성 내부를 관람하며 바라본 정원은 더욱 아름다웠다. 정원 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조각하듯 나무와 꽃을 가꾸어 놓았다. 체코에서 본 쉔부른 궁전의 정원과 유사하다. 룬달레 고성 주변의 풍경도 매우 수려하다. 울창한 나무도 많고 시원한 물줄기도 흐른다. 아직도 발굴 중인 지역도 있다. 오랜 역사를 전시하는 우람한 나무 숲길을 따라 고성을 떠나왔다.
* 라트비아 룬달레 고성 사과나무
라트비아 룬달레 고성을 관람하고 버스를 타기 위해 가는 길에서 만난 사과나무다. 한국의 사과나무 과수원 같은데 이곳 라트비아에서는 야생 사과나무다. 지천으로 떨어져 구르고 있다. 붉게 잘 익은 것으로 몇 개씩 주웠다. 사과가 작고 맛은 없지만 한국의 사과가 아닌 라트비아의 사과라는 신비로움으로 맛있게 먹었다.
*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들녘
룬달레 고성을 출발하여 라트비아 리가로 간다. 여기서 1시간 30분 거리다. 라트비아 인구는 220만 명이다. 한국의 1/3 크기 국가다. 인구의 절반 정도인 100만 명이 수도 리가에 거주한다. 제2의 도시에는 10만 명, 그 외 도시에는 2~3만 명만 거주한다. 수도에만 집중되어 있다. 현재 여성이 대통령이다. 농업3%, 공업 20%, 서비스업 60%에 종사한다. 석유는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1991년에 독립한 나라다. 라트비아Latvia를 발트의 스위스라고 한다. 그만큼 자연경관이 좋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라트비아 국토의 대부분은 산악지대가 거의 없고 평평한 땅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달려도, 달려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드넓은 평원이다. 광활한 들녘은 초지이거나, 유채꽃 등 농작물을 재배하는 모습이 보인다. 비닐하우스도 있다. 농사가 비닐하우스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울창한 나무 군락이 있고 시내가 흐르기도 한다. 라트비아 국토의 1/10은 해수면보다 낮다.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끼어 있는 국가로 습지가 많은 축축한 나라다.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는 해안 도시로 경관도 좋고, 중세 유적이 있어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다. 리가에서 시굴다성, 가우야 국립공원, 룬달레 고성 등을 여행한다. 라트비아는 신생독립국가로 국가건설에 주력하고, 새로운 개혁을 진행했고 있다. 그러나 라트비아 인구의 30%는 러시아인이고, 수도 리가는 러시아인이 더욱 많아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다. 우리들을 태우고 달리는 버스기사도 러시아인이다. 그는 아주 성실한 운전사다. 내부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사회일지라도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들녘은 아주 평화롭고 고요하다.
* 라트비아 리가 호텔 석식
우리가 유숙할 라트비아 리가 호텔에 도착했다. 상호가 코끼리 호텔이다. 호텔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로 모여 혼잡하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다우가바강 양쪽에 위치하며 도시의 입구인 리가만에서 약15km 떨어져 있다. 리가는 북부유럽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322호실 방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하기 위해 호텔 뷔페식당으로 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코끼리 동상이다. 그리고 창밖으로 울창한 숲이 보인다. 우리 부부는 창가 좌석에 앉아 라트비아 리가의 아름다운 숲을 보며 멋진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오이, 채소 등 풍성한 식단으로
행복한 식사를 했다.
2013년 8월 10일 토요일 라트비아 리가, 시굴다, 에스토니아 티르투
* 라트비아 리가 호텔 출발
라트비아 날씨가 쌀쌀하다. 쉐타를 입었다. 오늘 아침은 13도, 낮에는 19도란다. 코끼리 호텔이라는 간판처럼 호텔 내부와 외부 곳곳에 코끼리 동상이 많다. 숲 정원이 매우 아름답다.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울창한 숲과 호텔 곁 도로의 아침 풍경을 보았다. 출근하는 자동차들이 분주히 지나간다. 발트3국 한가운데 있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라트비아뿐만 아니라 발트3국 전체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리가에 진출해 있어 발트3국 중에서는 한국인 교민의 수나 한국과의 교역량도 가장 많은 곳이다. 그러나 라트비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1201년 독일 브레멘의 주교였던 알베르트가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1282년에는 한자동맹 도시로 발트해 연안의 상업도시로 번창했다. 1621년에는 스웨덴이 점령하였으나, 172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리가는 1918년 라트비아의 독립과 함께 수도가 되었다. 리가 인구는 약 74만 명이다. 45%가 라트비아인, 40%가 러시아인, 그 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등이 산다. 러시아인이 많아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지만 일부는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 옛 리가를 둘러싸고 있는 신시가지는 19세기와 20세기 초부터 건설되었으며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공존하고 있다. 먼 나라 라트비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 라트비아 리가 다우가바강 다리
라트비아는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있는 나라다. 리가는 라트비아의 수도이며 발트3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항구 공업도시로 라트비아의 공업생산의 약 70%를 차지한다. 발트해와 다우가바강에 접해 있어 아름다운 도시다. 다우가바강은 라트비아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다. 러시아에서 발트해로 흐르는 이 강은 리가를 무역적 요충지로 성장 시켰으나 강대국들의 침범으로 비극을 낳기도 했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가 붉은 색 이미지라면 리가는 푸른 색 이미지인 바다와 숲이 많은 항구도시다.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또는 옛 소련의 라스베이거스 등으로 불리던 유흥과 환락의 도시였다. 중세시대 한자동맹 거점 도시로 해외에서 들어온 상인들이 뿌린 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풍요로운 땅 리가로 들어와 보드카 공장과 담배 공장에서 돈을 벌어 가기도 했다.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다우가바강변에는 고딕양식 건물과 현대풍의 고층 빌딩이 독특한 비경을 자아낸다. 한국의 삼성전자 광고판도 자랑스럽게 서 있다. 또한 강의 다리가 곳곳에 여러 구조 형태로 많이 놓여 있다. 드넓은 다우가바강 다리를 건널 때, 그 비경은 대단했다. 웅장한 물줄기를 따라 늘어선 강변의 숲과 여러 양식의 우람한 건축물들이, 이것이 바로 라트비아 리가라고 힘껏 외치는 듯하다.
* 라트비아 리가 자유의 기념비(자유의 여신상)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머리 위로 손을 뻗쳐서 별 세 개를 높이 들고 서 있다. 리가 시내 한가운데 브리비바스 대로에 하늘로 솟구쳐 있다. 높이 42미터의 푸른색 소녀 석상은 라트비아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밀다’의 모습이다. 라트비아 국민들은 자유의 상징인 이 탑을 ‘밀다’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자유의 기념비는 1차 대전 종전 후 잠시 독립을 이루었던 1935년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워졌다. 라트비아인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다. 하단에는 1차 세계대전 때 라트비아 용사들의 활약상과 라트비아의 민족서사시 라츠플레시스를 소재로 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테브제메이 운 브리비바이’(Tevzemei un Brivibai)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조국과 자유’를 의미한다. 오랜 지배의 역사에 맞서 싸운 라트비아인들의 투쟁 흔적을 보여준다. 2차 대전 때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가거나 독립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라트비아인들을 추모하는 헌화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이 탑에 꽃을 바치거나 집회를 하면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래서 ‘밀다’는 시베리아행 편도 티켓을 받게 하는 ‘여행 대리인’이라는 말까지 퍼졌다. 라트비아인들의 지배당한 슬픔과 독립 염원이 담긴 자유의 기념비를 보며 내 조국의 아픔이 서렸던 역사가 떠올라 가슴이 시렸다.
* 라트비아 리가 다우가바 강변 공원
라트비아 리가는 러시아에서 발트해로 흐르는 다우가바강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다우가바 강변 공원은 매우 아름답다. 조그만 다리도 고전적이고, 잔디와 꽃길, 그 사이로 물이 흐르며 비경을 선사한다. 다리 위에는 사랑의 열쇠가 많이 매달려 있다. 물 위에 휴식할 수 있는 공간과 벤치도 놓여 있어 더욱 낭만적이다. 라트비아는 발트3국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경제무역 중심지다. 수도 리가는 발트해를 통해 해양으로 나아가려는 독일인에 의해 1201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다. 그 후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지배를 받아 독특한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독일 작곡가 바그너는 1837년부터 1839년까지 2년 동안 리가에 거주하면서 크리스마스 캐럴 ‘소나무야’의 영감을 얻었다. 유럽 건축사에 큰 족적을 담긴 미하일 아이젠스타인이 설계한 아르누보 양식의 리가에 있는 건물들은 유럽 전체에서도 최고로 꼽는다. 1985년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백야’의 주연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고향이기도 하다. 다우가바 강변 공원을 거닐며 그 옛날의 풍경은 아니겠지만 예술적 감성이 서린 고운 정경에 가슴 훈훈했다.
* 라트비아 리가 트램 거리
라트비아 리가 도로에서 인상 깊은 것은 트램 거리다. 차도에 트램 선로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전차도 다니고, 일반 차들도 다닌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거리 풍경이어서 신기하다. 고전적인 건물과 도심의 푸른 나무숲이 트램 거리를 더욱 빛내고 있다. 리가는 작고 아담한 도시지만 유럽 문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발트3국 최대의 도시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 라트비아 리가 문장탑
화약탑을 보기 위해 왔는데 먼저 보이는 것은 리가의 문장탑이다. 스웨덴 막사 건물 벽에 아름다운 문장들이 색색으로 곱게 새겨져 있다. 리가 지방들의 길드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리가 건설의 시작은 1201년부터다. 리가가 발트해 무역거점 도시로 부각될 무렵, 독일이 리가를 무역 거점 도시로 지정했다.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 대주교가 리가만에 배를 댄 것이 리가 역사의 시작이다. 독일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합하여 리보니아라는 공국을 건설했다.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는 농노로 전락했다. 이후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가 번갈아가면서 라트비아를 지배했지만 발트독일인이라 불리던 독일의 귀족들은 권리를 인정받으며 1차 대전 전까지 라트비아에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리가 구시가지에는 발트독일인들과, 리가를 거점으로 무역활동을 해온 중세 상인들이 건설한 건물이 아주 많다. 화약탑 곁에 고운 무늬들로 그려진 리가의 문장탑 앞에서 잠시나마 라트비아 역사를 조명해보는 유익한 여정이었다.
* 라트비아 리가 화약탑
라트비아 리가 시가지에서 붉은 원통 모양의 화약탑을 보았다. 리가의 여러 지방 문장을 새겨놓은 문장탑 옆에 있다. 지붕은 고깔 모양이다. 이 탑은 14세기에 도시를 이끌었던 방어용 성채로 샌드타워, 즉 모래탑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1625년 이 탑은 스웨덴 침략의 승리로 화약탑으로 새워졌고, 화약저장고로 사용되었다. 25년 동안 잘 보존되었다가 스웨덴 점령 당시 거의 파괴되어 14세기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지하뿐이다. 지금의 탑은 1650년 다시 세워진 모습이다. 높이 25.5m, 직경 14.5m, 두께의 벽 3m의 둥근 원통형 건물이다. 외벽 곳곳에 작은 창문들이 뚫려 있다. 화약탑은 리가 도시의 가장 주요한 도로인 샌드로드를 지켜오면서 리가의 탑들 중 가장 중요한 탑이 되었다. 1938년에는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건물 전체를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우람한 화약고 건물은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만 했다. 리가 문장탑 곁에서 화약고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자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화로운 세상이기를 염원하는 여인의 형상이다.
*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 성곽
라트비아는 수백 년 동안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지배를 받아왔던 나라다. 리가 구시가지 곳곳에는 외부세력의 지배와 그에 맞서 싸우기 위한 투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를 걸으며 성곽을 보았다. 13~18세기에 축조된 방어벽이다. 높은 성곽은 독일,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세력들의 흔적이다. 다우가바 강변에 위치한 리가 성은 1340년 리보니아 기사단 사령관의 관저로 건설된 곳이다.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국가의 지역사령부 건물로 사용되어 왔다. 리가 성에 어떤 나라의 깃발이 꽂혔는지에 따라 라트비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구별했다하니 소슬한 이야기다. 현재는 라트비아 공화국의 국기가 펄럭이며 라트비아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리가 성은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문학박물관, 사진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 화약탑을 본 것도 도심에서 만나는 성곽도 고풍스런 유적이지만 라트비아 내면의 아픔이 서리어 있어 내 조국의 슬픈 한 단면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 라트비아 리가 성문(스웨덴 문)
라트비아 리가 성문은 스웨덴 문이라고도 한다. 리가 구시가지는 육중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으나 전쟁과 침략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그 일부만이 구시가지 동편에 복원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문이다. 사자 얼굴이 양각되어 있다. 스웨덴과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관계를 품고 있는 문이다. 라트비아를 지배하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웨덴이 1698년 라트비아 지배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다. 스웨덴의 도시점령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문이며 그 이름도 스웨덴 문이라니, 그것도 서러운데 아직도 그 이름을 품고 성문은 오롯이 서 있다니, 참으로 소슬한 문이다. 그러나 문이 만들어진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라트비아는 제정 러시아가 지배했다. 성문 입구에 다시는 전쟁하지 말자고 대포를 거꾸로 세워 놓았다.
성문 곁에서 라트비아의 한 여인이 악기를 연주하며 ‘백만 송이 장미’ 노래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노래다. 나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민요로 잘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는 리가 태생의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작곡한 라트비아의 노래다. 후일 러시아의 여가수 알라 푸카초바가 불러 세계에 알려졌다. 이 노래가 푸가초바의 음반에도 수록되면서 그만 러시아의 노래로 알려진 것이다. 그의 딸도 가수다. 그런 연유로 백만 송이 장미가 러시아의 노래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러시아와는 상관없는 라트비아의 전설 속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다. 이번 여행 중 버스에서도 들었다. 언제 들어도 애잔한 선율이 가슴을 울리는 노래다. 백만 송이 장미에는 라트비아의 가난한 남자 화가와 여가수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담겨 있다. 가난한 화가 남자가 한 여가수를 사랑했다. 그 남자는 재산을 모두 털어서 백만 송이의 붉은 장미를 사서 여가수의 창문 앞에 꽂아 놓았다. 여가수는 아침에 그것을 보고는 어떤 부자가 갖다 놓은 줄로 알았다. 가난한 남자 화가는 숨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가수는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갔다. 결국 남자 화가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다. 라트비아에서는 기쁜 날은 홀수 개의 꽃을, 슬픈 날은 짝수 개의 꽃을 선물로 한다. 그런데 100만 송이는 짝수여서 슬픈 상징으로 사랑이 실패 했다는 전설이다. 스웨덴 문을 통과하여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왔다. 골목길이 아름답다. 과거에는 군사시설이었으나 현재는 골목길 주변에 우아하고 고풍스런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 골목
라트비아 리가 성문인 회색의 스웨덴 문을 지나자 구시가지 골목길이다. 옛 모습 그대로의 좁은 도로와 고풍스런 주택들이 중세의 자태다. 그 좁다란 길목에 꽃과 화분으로 장식된 아담한 노천카페가 동화 속 풍경이다. 구시가지에는 성 베드로 성당과 성 야곱 성당, 돔 성당,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다. 고전주의 고딕, 바로크, 현대풍의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 구시가지를 탐방하기 위해 성문에 들어선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아르누보 양식 건물들도 볼 것이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대문이 있다. 이것이 리가라고 전시하듯 웅장한 중세의 향수를 머금고 있다. 리가의 아름다운 면모다. 골목길 끝에 제이콥 성당이 보인다. 붉은 색 성당의 초록 첨탑이 우뚝 솟구친다. 골목길을 따라 상큼한 걸음으로 제이콥 성당을 향해 갔다.
* 라트비아 리가 제이콥 대성당
라트비아 리가는 14세기 이전에는 신 중심사회였다. 그때 신과 내통하기 위해 건축물을 고딕양식으로 뾰족하게 지었다. 그 후 14세기~16세기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다. 제이콥 성당 문 위에 ‘ANNO 1225’라고 씌여 있는데 ANNO는 ~부터란 뜻으로 즉 ‘1225년 부터’란 뜻이다. 제이콥 성당은 리가의 상징의 루터 교회다. 오롯하게 치솟은 첨탑이 높지만 외형도 내부도 아담하다. 구시가지여서 주변 도로가 아주 좁다. 옛 모습을 그대로 전시하는 골목길이 성당을 감싸고 있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국회의사당 건물이 우람하게 서 있다.
* 라트비아 리가 국회의사당
라트비아 리가 국회의사당은 제이콥 성당 바로 앞에 있다. 문 입구에 국기 2개가 걸려 있다. 육중한 건물이다. 하지만 주변 도로가 매우 협소하다. 고전적인 도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리가이기에 국회의사당 건물 주변도 고전적인 풍경이다.
* 라트비아 리가 삼형제 집
삼형제 집은 서로 다른 세 가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리가의 상징과도 같은 삼형제 건물이다. 이 세 건물은 리가에 있는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세 자매 건물과 비교되기도 한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진 집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다. 오른편 흰 건물이 15세기에 세워진 가장 큰형 건물이다. 그 다음 중앙의 노란색 건물이 둘째 형으로 큰형 건물보다 1세기 늦게 지어졌다. 마지막 왼편의 회색 건물이 막내로 역시 둘째 형 건물보다 1세기 는제 지어졌다. 나이가 한 세기씩 차이나는 삼형제 건물은 분명 색상과 문양 건축양식이 모두 다르다. 현재는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이콥 성당에서 골목길을 따라 간 끝에서 만났다. 좁은 도로 바로 곁에 있어서 전체를 카메라에 담기가 힘들었다. 세 건물을 삼형제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정겨웠다.
* 라트비아 리가 돔 성당
라트비아 리가 돔 성당은 아르노바 양식 건물이다. 아르누보 양식은 19세기에 자연과 사람을 소재로 꾸민 양식으로 유럽적인 소재만이 아니라 이집트, 이슬람, 자연 등 다양한 요소들을 사용한 건축양식이다. 돔 성당 첨탑 꼭대기에는 금빛 수탉 모양의 풍향계가 있다. 아르노보 양식을 상징한다. 수탉 동상은 루터교의 상징 동물이며, 리가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리가의 높은 교회 첨탑마다 저런 수탉 동상이 서 있다. 무역도시인 리가에서 풍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닭이 어둠을 내쫓고 새벽을 부르는 신령한 동물이라는 믿음으로 리가의 높은 첨탑에는 수탉이 올라가 있다. 리가에 있는 건물 중 1/3 이상이 유럽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르누보로 양식의 건물이다.
돔 성당은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최초로 지은 성당이다. 13세기 초 리보니아 지역을 관할한 알베르트 대주교가 리가 건설을 시작할 당시부터의 관저와 대성당으로 사용했다. 이 성당은 수백 년 동안 증축되면서 세 가지 건축양식이 접목된 것이 특징이다. 고딕양식 위에 바로크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이 혼합된 모습이 웅장하다. 발트에 있는 성당 중에는 가장 규모가 크고, 성당 안에 있는 오르간은 유럽 최대 규모다. 돔 성당 광장은 리가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광장 중 하나로 노천카페가 많아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곁에 있는 분홍색 건물은 박물관이다. 베를린 영화 촬영지이기도 하다. 돔 성당 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모두 아름답고 화려하다. 고풍스런 거리를 걸어 나오며 중세의 향기에 흠뻑 젖었다.
*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 도로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 도로는 걸어도, 걸어도 다부진 돌길이다. 닳아서 맨질거려도 뿌리 깊게 박힌 돌은 튼튼해 보인다. 리가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도로는 주변의 고풍스런 중세 건물과 함께 역사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 라트비아 리가 길드조합 건물과 검은 고양이 건물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에서 이상한 건물을 보았다. 검은 고양이 동상이 뾰족한 지붕 위에 올라서 있다. 검은 고양이 건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중세시대에 상인들이 대길드조합과 소길드조합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소길드조합에 속했던 저 건물의 주인 갑부가 맞은편에 있는 대길드조합에 가입하길 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갑부는 복수심으로 지붕꼭대기에 검은 고양이 동상을 세웠고, 고양이 엉덩이를 대길드조합 건물로 향하게 하여 속상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이런 모습을 본 대길드조합에서 검은 고양이 건물 주인을 가입시켜주었다. 갑부는 그 고양이를 바로 돌려 세워 고양이 머리가 길드조합 건물을 바라보게 했다는 이야기다. 검은 고양이가 지붕 위에 세워진 이유를 듣고 참으로 묘한 발상임을 알았다. 기이한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저런 전설 같은 내용이 담긴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여 전시하는 리가 구시가지가 대단하다.
*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
리가 구시가지는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딕양식 건축물들이 가는 곳마다 도시를 빛내고 있다. 잘 조성된 꽃과 잔디 광장에서 고운 색상과 독특한 양식의 건물을 보고 있는데 그런 건물 너머로 첨탑이 보인다. 지금 가 보려고 하는 피터 대성당이다. 리가 구시가지의 다양한 건물들의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의 중요성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리가는 발트해와 접하고 있어 중세시절부터 무역도시로서의 명성을 떨쳐왔는데 그 당시의 부강했던 면모를 아직도 보여주고 있다. 그날의 아르누보 건물들이 오늘날에는 관공서, 학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시가지는 어디를 가도 아름답다. 비둘기도 광장에 모여들어 평화로운 풍경이다. 주상복합 건물 앞에도, 노천카페에도 꽃화분으로 장식해 놓아 구시가지를 더욱 빛낸다.
* 라트비아 리가 피터 대성당(베드로 성당)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의 피터 대성당은 붉은 색 벽돌 건물로 우람했다. 베드로 성당이라고도 한다. 1209년에 건축된 가톨릭 성당이다. 123m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첨탑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리가의 부를 상징했다. 처음에는 목재로 만든 탑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금속으로 복원되었다. 첨탑 끝에는 수탉의 조각상이 있다. 이곳 피터 성당, 즉 베드로 성당에 가장 먼저 수탉 모양 풍향계가 설치되었다. 성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한 것과 연관된 것이다. 수탉은 아르노보 양식으로 루터교 상징 동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피터 성당은 루터 교회다. 루터교는 라트비아의 국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첨탑에 오르면 다우가바강과 강을 중심으로 건설된 아름다운 리가의 옛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피터 성당 앞에는 브레멘의 음악대 동물들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구시가지로 고풍스런 분위기다. 카페와 기념품 상가도 있고, 거리의 상인들도 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곳곳을 둘러보았다.
* 라트비아 리가 브레멘의 음악대 동물들 동상
피터 성당 앞에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등장하는 동물 군악대 동상이 있다. 아래에서부터 당나귀, 개, 고양이, 닭 순서로 쌓여 있다. 브레멘 음악대의 네 동물들이 철의 장막 밖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정경이다. 행운 상징 동물로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전해진다. 높이 만질수록 더 큰 행운이 온다하여 사람들은 발돋움하여 만진다. 나도 만졌다. 그러나 맨 아래 당나귀가 내 키 높이의 최고 동물이다.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사랑받으며 반들반들 빛난다. 1201년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 알베르트가 이 지역을 무역 본거지로 조성하고 검의 형제 기사단을 발족하여 발전시켰다. 독일 주교 기사단은 리보니아, 오늘날의 라트비아와 남부 에스토니아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그 당시 리가는 중세 한자동맹의 중심지로 리보니아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한자동맹의 자매도시인 독일의 브레멘시가 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서, 또한 라트비아의 해방을 축하하며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렸던 800년 역사의 도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세워준 것이다. 귀에 익은 브레멘의 음악대 동물들 동상을 이곳에서 만나니 아련하게 생각했던 동화가 눈앞에서 아주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구시가지로 피터 성당과 브레멘의 음악대 동물들 동상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와 거리의 상인들이 라트비아의 기념품을 판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라트비아에 대한 소중한 체험이다. 발틱 여행에서 만난 동화 역사의 값진 한 장면은 내 가슴에 저장되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라트비아 리가 검은머리 전당
리가 시가지에서 중세시대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표적인 건물은 검은머리 전당이다. 라트비아 리가를 대표하는 상인들의 건물로 리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1344년부터 이곳에서 발틱 여행자나 길드의 무역 상인들이 머물며 회의하던 호텔이다. 중세시대 무역 거점 도시로 성장하면서 지은 훌륭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사용한 검은머리 길드는 아프리카, 남미 등을 돌아다니며 무역하던 미혼 상인조합이다. 이집트 출신 흑인 성인을 수호신으로 여겨 건물마다 그의 얼굴을 장식했다. 이 길드 회원들이 상상 속의 아프리카 흑인 무어인인 ‘성 모리셔스’를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은 데서 검은 머리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검은머리는 흑인을 뜻한다. 백인이면서도 흑인을 섬겼고, 검은머리를 우상으로 숭상했다. 그들의 신적 존재다. 700여 년이라는 역사를 간직한 검은머리 전당은 독일 르네상스풍 건축양식과 고딕양식, 로코코양식이 접목되어 눈부신 자태다.
검은머리 전당 광장에서 보면 피터교회 123m 높이의 첨탑이 오롯하게 보인다. 시청사도 앞에 있다. 점령 박물관도 가까이 있다. 소련시대 라트비아 출신 소총수들이 독일군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스탈린의 호위병이 된 업적을 기린 기념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1차 대전 후부터 1991년 독립까지 라트비아인들의 투쟁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라트비아 소총수들의 붉은 석상이 아직도 그 옆에 상반된 전시다. 광장 한쪽에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자리가 있다. 1510년 겨울, 길드 회원들이 장식한 전나무를 세우고 밤새도록 즐긴 것이 유래가 되어 크리스마스트리가 전 세계로 퍼졌다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폭격으로 건물이 많이 파괴되고, 독일의 잔재라 하여 잔해마저 옛 소련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저 건물은 독립 후 2001년 리가 건설 800주년을 기념하며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다. 현재는 관광안내소, 콘서트홀, 검은머리 전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건물 입구 벽면에는 아직도 검은머리 흑인 수호성인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어찌 저럴까 싶은데 그런 애잔한 역사의 유적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인의 걸음을 부르는 명소가 된 것이다. 광장에는 자국인과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 구시가지 탐방을 모두 마치고 리가를 떠나려 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가는데 길가의 광장에 라트비아 독립투사들을 기리기 위한 두 사람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쌍둥이처럼 등을 맞대고 우람하게 서 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데 아쉬운 걸음으로 그곳을 떠나 왔다.
* 라트비아 리가 시가지 출발
라트비아 시굴다로 이동한다. 비가 온다. 모두 관광을 마치고 난 뒤라서 좋은 비다. 다우야바 강변을 달려간다. 강변의 아치형 모양의 독특한 건물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리가 시가지의 도로에는 자동차도로와 전차선로가 함께 있다. 전차와 자동차가 함께 통행한다. 우리나라와 다른 도로표정이어서 신기다. 리가 도심 복판 고층 건물 상단에 한국의 삼성전자 광고가 뜬다. 이곳 북유럽 발틱 국가 라트비아, 먼 나라까지 진출한 내 조국의 기업이 큰 자부심을 갖게 한다. 한국의 드높은 위상을 보는 순간이어서 흐뭇했다. 다시 다우야바 강변을 달리며 요트 등 비경을 선사한다.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철도도 있다. 점점 리가 시가지를 벗어나고 있다.
* 라트비아 시굴다 산길
라트비아 리가에서부터 오던 비가 시굴다로 가는 중에도 오락가락 한다. 버스가 산속 길로 들어선다. 점점 오르막길이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발틱 국가들은 산이 없는데 시굴다에는 산이 있다. 우거진 산속에 흐르는 강줄기가 비경이다. 좁은 산길 도로는 계속 이어진다. 며칠 동안 산을 만나지 못 하고 평원만 달렸는데 숲속 울창한 산길을 달리니 70%가 산인 내 조국 한국에서 종종 만나는 어느 산길을 연상시킨다. 이곳 산속에 가우야 국립공원도 있고, 트라이다 성도 있고, 시굴다 사랑의 동굴도 있다. 우리는 지금 시굴다 가우야 국립공원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 라트비아 시굴다 가우야 국립공원
라트비아 시굴다Sigulda는 작은 마을의 휴양도시다. 120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요새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동굴인 구트마니스 동굴도 있다. 시굴다는 리가에서 동쪽으로 53km 거리에 있으며 라트비아 비제메 지역에 있는 도시다. 산으로 오르며 이동하고 급경사도 만나는 곳이다. 트라이다 성과 박물관 등을 관람할 것이다. 발틱국가는 평균수명이 73세다. 우리나라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높은 편이다. 가우야 국립공원은 1973년에 지정된 라트비아 최초, 최대, 그리고 유일의 국립공원이다. 라트비아의 알프스로 불리는 아름다운 경관의 지역이다. 시굴다 도시는 가우야 국립공원의 주진입로다. 미성년자를 위한 건강휴양지이고 동계스포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림 같은 경관을 자랑하는 가우야 강 계곡의 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붉은 사암으로 형성된 강둑의 가파른 바위와 동굴의 경관이 아름다워 라트비아의 스위스라고 불린다. 스키, 봅슬레이 등 겨울 스포츠가 발달되어 있어 라트비아의 겨울의 수도라고도 불린다. 이곳 날씨는 다른 발트해 지역처럼 온화한 편이나, 6월~8월까지는 비가 많이 오며 매우 더운데 8월인 오늘은 서늘한 편이다. 걸음을 걷기에 알맞고 기분 좋은 온도다. 리가보다 고도가 높아 대체로 시원한 편이다. 1991년 라트비아의 독립 이후 역사적인 자연경관과 문화유산들을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전원적인 풍경을 감상하며 가우야 국립공원을 탐방했다.
* 라트비아 시굴다 트라이다 장미의 묘
라트비아 시굴다 쿠트마니스 동굴에 얽힌 전성의 여인 묘다. 진한 사랑과 죽음이 심금을 울린다. 트라이다 성에 살던 마이자Maija 또는 마요로즈, 즉 5월 장미란 뜻의 이름을 가진 19세의 여인이 이곳에 독일인이 거주하던 그 당시 독인인 정원사 남자와 사랑했는데 폴란드 군인에 의해 사랑을 강요받다가 죽음으로 사랑의 전설을 남긴 묘지다. 이곳에서 가까운 쿠트마니아 동굴에서 벌어진 일인데 묘는 이곳에 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묘 앞에서 결혼 행사를 치르는 장면도 보았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소중한 사랑의 언약에 동참하고 있다. 사랑은 죽음보도 강하다는 명언을 떠오르게 하는 현장이다.
* 라트비아 시굴다 트라이다 교회
라트비아 시굴다 트라이다 성으로 가는 길에 교회를 만났다. 아담한 건물이 고요하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세 전통 복장을 한 신도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준다. 소박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숙연해진다. 가우야 국립공원의 푸른 풍경과 붉은 색과 회색의 교회가 이름다운 조회다.
* 라트비아 시굴다 트라이다 성
트라이다 성은 라트비아 시굴다 가우야 국립공원에 있는 고성이다. 성탑과 리브인들의 역사가 전시된 박물관도 있다. 13C에 독일인이 세웠다. 전쟁을 치르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19C에 복원된 성이다. 13C에 독일인이 세웠다. 주차장에서부터 서서히 고지로 올라간다. 해발 15m로 그리 높은 성은 아니나 산이 보이지 않는 평원을 달려 이동하다가 산을 오르니 새로운 기분이 든다. 붉은 색상의 트라이다 성은 라트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아주 고풍스럽다. 성에 가까이 다다랐을 때 한 남자가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중세의 향기를 선사한다. 라트비아의 스위스라고 알려진 시굴다 주변에는 중세의 성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가우야 계곡의 가장 아름다운 지류를 따라 전설을 지닌 동굴도 있다.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구트마니스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도 갈 것이다. 성의 정상에 오르니 성탑이 우람하게 서 있다. 성탑 꼭대기까지 빙글빙글 돌아 힘들게 올라갔다. 둥근 공간의 벽면에 구멍을 내어놨다. 그 구멍으로 밖을 보니 비경이다. 적군을 감시하던 구멍인데 이렇게 명소로 변하여 외객을 맞이한다. 가우야 국립공원의 푸른 나무 물결과 붉은 성 건물과 성 안의 정원이 매우 아름답다. 가우야강 강줄기도 굽이굽이 돌아 흐르며 탄성을 자아내고 걸음이 돌아서지지 않는다. 다시 내려와서 정원을 거닐어 보고, 잠시 박물관도 관람하고 성을 내려왔다. 중세의 공기를 흡입하며 세계여행의 멋진 한 페이지를 채워간다.
* 라트비아 시굴다 트라이다 성 박물관
트라이다 성 안에 있는 박물관이다. 성탑 옆에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외경만으로도 트라이다 성과 함께 아름다운 건물이다. 박물관에는 13세기 리브인들의 역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당시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묘사하여 벽면을 장식해 놓았다. 입구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외인을 반긴다. 잠시 중세에 머문 체험의 시간이었다.
* 라트비아 시굴다 가우야 국립공원 민속마을
라트비아 가우야 국립공원 안에 민속마을이 있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 리브족들이 정착하여 12세기 초까지 거주하였다. 이후 13세기 초반 독일 십자군병사들에 의해 가우야 강을 중심으로 2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강의 남쪽은 십자군 병사들이, 강의 북쪽은 리가의 대주교가 점령하였다. 그들은 각각 점령지에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들을 지었다. 수많은 외세와의 전쟁 이후 시굴다는 1889년 프스코브 리가 철도역이 완공됨과 동시에 휴양도시로 발전하였다. 트라이다 성에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이 민속마을은 도로변에서 중세의 전통가옥으로 전시되고 있다.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며, 그들을 만나고 생활상도 보았다. 고운 색상의 집이 동화 속 집 같다.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울창한 국립공원과 함께 라트비아의 전통가옥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 라트비아 시굴다 쿠트마니스 동굴
이 동굴은 트라이다 성에서 5분 거리에 있다. 라트비아 비제메 지역의 시굴다에 있는 쿠트마니스
Gutmanis 동굴은 자연경관도 아름답고 사랑과 죽음의 동굴로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길이 19m, 너비 12m, 높이 10m로 발틱3국에서 제일 큰 대형 동굴이다. 발틱3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 35m다. 사실 이 동굴은 산이 많은 우리나의 동굴에 비하면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다. 시굴다 쿠트마니스 동굴에는 사랑과 죽음에 대한 전설이 있다. 트라이다 성에 마이자Maija 또는 마요로즈, 즉 5월 장미란 뜻의 이름을 가진 19세의 여인이 살았다. 그 당시 트라이다 성에는 독일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가까이서 보던 독일인 정원사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폴란드 군인이 그 여인을 이 동굴로 끌고 와서 강탈하려고 하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며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그녀의 눈물처럼 졸졸 물이 흘러나온다. 동굴 속 약수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다는 치료사 이야기도 전해진다. 슬픈 사랑을 했던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얽힌 동굴 앞에서 죽음으로 이끈 비정함은 소슬하지만 참사랑이 무언지 가르쳐주는 깨우침으로 사람들은 모두 숙연하다. 동굴 벽면에는 16세기의 그래피티가 있어 예술적 향기까지 자아낸다. 작지만 웅장이 기운이 서려 있고 애련하면서도 아름다운 동굴이다.
* 라트비아 들녘
라트비아 시굴다에서 여행을 마치고 중식 후 에스토니아 타르투로 이동한다.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아름드리 울창한 나무 숲길을 달린다. 북유럽의 향수를 드리운 목가적인 농촌 마을도 지나간다. 조그만 민가는 온통 나무와 초지로 둘러싸여 있다. 집 앞에는 자가용도 주차되어 있다. 농촌 사람들도 문화생활을 한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동물이 수놓고 있다. 이런 동물 풍경은 자주 보이진 않지만 어쩌다 보일 때는 광활한 평원의 드넓은 국가로 착각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발틱 국가들은 작다. 단지 산이 없어서 끝없는 들녘이 넓은 국토를 연상케 할 뿐이다. 들녘 사이로 난 길을 평화롭게 달린다. 초지의 풀을 목초로 둘둘 말아 놓은 풀 덩이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모두 라트비아들녘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 라트비아 휴게소
라트비아에서 에스토니아로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다. 이곳 휴게소는 특이하다. 숲속에 그네와 놀이터 등 위락시설이 있다. 어린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지만 조금 큰 아이와 어른들은 높이 올라가는 그네에서 묘기를 즐기기도 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데 신나게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다. 또 곁에는 라트비아의 들녘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거닐어 보았다. 잠시나마 라트비아의 자연 속에서 함께 호흡한 행복한 휴식이었다.
* 라트비아 시골마을
휴게소에서 출발하여 우람한 숲길 도로를 달려간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이동할 때마다 보아오는 풍경은 대대 동일하며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대부분이다. 에스토니아에서 자작나무는 숲속의 여왕이다. 쓰임새가 커서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벽난로용 나무, 목재, 수액채취, 사우나용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자작나무 사우나는 물에 잎사귀를 담그고 나뭇잎 줄기로 몸을 두드린다. 자작나무 향기가 물씬 배이며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사나우로 대접하기도 하고 다 함께 즐기는 자작나무 목욕문화다. 시골마을을 지나간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목가적인 풍경이다. 집 앞에 자작나무 더미를 쌓아 놓은 풍경이 이국적인 정경이다. 어릴 적 유년의 마당이 떠오른다. 그때는 나무가 꼭 필요한 땔감이었는데, 이곳 에스토니아에서 그런 정경을 본다. 주택도 대부분 나무로 지었다. 2층으로 지은 아름다운 구조의 집도 있다. 사과나무 정원과 노란 해바라기가 더욱 정겨운 풍경을 선사한다.
* 에스토니아 국경선 통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작은 국경선이다. 다음에 에스토니아 탈린과 합살루 여행을 마치고 다시 라트비아로 갈 때는 큰 국경선을 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곳은 버스가 멈추지도 않고 고요한 국경마을을 지나 무사통과다. 어디가 국경선인지조차 모르게, 자국 안을 이동하듯 자연스럽게 통과한다. 전에는 국경선에서 이웃 간에도 비자를 발급해야 이동했는데 발틱3국이 EU에 가입하면서 무비자로 쉽게 통과한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틱3국은 2004년 EU 가입하면서 여행국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제 여행국가 초입 단계지만 해마다 세계인들이 점점 많이 찾아든다. 이웃나라와 국경이 허물어지면서 여행이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유럽여행에서 가장 부러운 풍경이었는데 나는 오늘 이곳에서 또 뜨거운 부러움의 국경선을 넘는 체험을 했다.
* 에스토니아 진입
국경선을 통과하여 에스토니아에 진입했다. 에스토니아는 인구 130만 명이다. 수도 탈린 인구는 40만 명이다. GNP 1만 5천불이다. 화폐는 유로화를 사용하는데 물가 상승이 크다. 농업이 4%, 공업이 25%, 서비스업이 68%다. 대통령제 국가이며 국회의원이 101명이나 된다. 수출품은 목재와 전자제품이다.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서유럽에서 많이 수입해 간다. IT 기술이 발달로 인터넷 보급율이 80%다. 탈린 시민의 종교는 40%가 루터교, 20%가 러시아교다. 에스토니아 북부는 덴마크가 지배했고, 남부는 독일이 지배했다. 1991년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발틱 국가들은 러시아가 공용어다. 라트비아는 인구 중 러시아인이 60%나 된다. 에스토니아는 1/3이 숲이다. 그래서일까, 국경부근에서부터 싱그러운 숲이 외객을 맞아준다. 들녘에도 푸른 초지가 넘실거리고, 더러는 경작지로 보이는 농토도 있다. 황새가 밭에 앉아 있다. 에스토니아에는 황새가 많은데 길조로 여긴다. 한국에서는 자식을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데 에스토니아에서는 자식을 황새가 물어왔다고 한다. 버스가 빨리 지나가는 관계로 카메라에 담지는 못 했지만 여러 차례 황새를 보았다. 숲 사이로 자 다듬어진 도로를 따라 에스토니아 타르투로 가고 있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시가지
에스토니아 타르투Tartu는 규모나 인구에서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다. 수도 탈린Tallinn과 함께 중요한 국가 기능을 함께 담당하고 있다. 1030년의 역사를 지닌 에스토니아 남부지역의 중심도시다. 에스토니아는 물론이거니와 북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교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교가 위치해 있고, 교육부, 최고법원, 국가기록원 등을 비롯해 에스토니아 과학단지 등 중요 기관들이 바로 이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수도 탈린이 정치, 경제의 중심 도시라면 타르투는 교육, 문화의 도시다. 시내 중심부에는 에마강이 흐르고 있다. 인구가 겨우 10만 명인 타르투를 에스토니아 제2의 대도시라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에스토니아 전체의 인구가 130만 명에 불과하고, 그 중 3분의 1인 40만 명이 수도 탈린의 인구라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타르투 시가지에 들어섰을 때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나무가 울창하고 소박한 분위기의 도심 거리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에마 강변 공원
에스토니아 타루트 시가지에 내렸을 때 도로변에는 강이 있고 강변에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시인 동상이 있었다. 타르투 도시 한가운데 흐르고 있는 에마 강은 어머니의 강이라고도 불린다. 에스토니아어로는 에마외기Emajõgi 강이다. 에마강은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호수 2곳과 연결된다. 이 물줄기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시인의 시에 한 많은 에스토니아 민중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강이 넓은 것은 아니지만 울창한 나무들이 있어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치형 다리도 있다. 상단에도 걸어 다니던 길이 있던 다리다. 강변의 공중에 걸린 꽃 화분이 더욱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길 건너에는 시청사가 있고 토메매기 언덕으로 이어진다. 타르투의 여정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시청사
에스토니아 타르투 시청사는 18세기에 독일인의 설계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건축양식과 색상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답다. 현재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타르투는 탈린에 이어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다. 타르투에 도시가 세워진 것은 1030년부터다. 그런 연유로 타르투는 발트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탈린이 정치적, 경제적 도시라면 타르투는 정신적, 문화적인 도시다. 또한 타르투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격동의 시기에 에스토니아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민족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광장에는 분수가 솟구치고 분수 속에는 우산을 받쳐 든 남녀가 키스하는 동상이 있다. 시청사가 위치한 이곳은 시내 한가운데다. 주변에 토메매기라는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주위에 주요건물이 다 몰려있다. 시청사 주변은 타르투의 중심거리로 카페, 식당, 갤러리 등 아기자기한 옛 건물들이 많이 있다. 우아한 타르투 시청사와 멋진 낭만을 공유하는 광장의 정경 속에서 평화로운 휴식을 했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시청사 광장
에스토니아 타르투 시청사 앞에는 독특한 광장이 있다. 그리 넓지는 않은데 우람한 분수에서 솟구치는 물속에 떠오르듯 서서 키스하는 동상이 애잔한 낭만을 선사한다. 18세기에 지어진 타르투 시청과 시청광장이다. 자갈돌 사이사이로 알록달록한 빛깔의 조명이 설치되어 밤이 되면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광장 주변은 아름다운 장식의 노천카페와 식당이 많다. 바로 뒤편에 타르투 대학교가 있어 노천광장에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채워져 더욱 낭만적인 공간이다. 이런 타르투의 모습을 상징하듯 분수 속의 동상이 ‘키스하는 학생Suudlevad tudengid’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진 것 같다. 1998년 제막되어 타르투가 대학도시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고 있다. 우리 부부도 분수 곁에서 그 동상처럼 포즈를 취해 보았다. 젊은이는 아니지만 학창시절의 회억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우산까지 받쳐 든 두 남녀가 활기찬 모습으로 사랑을 선사한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교
에스토니아 타르투는 유명한 관광도시는 아니지만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다. 아직 관광객에 대한 시설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둘러보았다. 타르투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은 타르투 대학교다.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에스토니아의 자부심이 서린 이 나라의 소중한 명소다. 타르투 대학교Tartu Ülikool는 1632년 당시 스웨덴의 왕이었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설립되었다. 400년 역사를 간직한 대학이다. 초기에는 독일 귀족의 자식들만 입학할 수 있었으나, 19세기 제정 러시아에 의해 농노제도가 철회되면서부터 에스토니아인들에게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타르투 대학교는 에스토니아의 지성과 문화를 이끄는 중심이 되었다. 이웃나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대학교가 1832년부터 1919년까지 폐교되는 관계로 발트 연안의 유일한 대학교가 되었다. 발트3국의 문화적 역사적 기틀을 만든 사람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에스토니아를 넘어 발트3국 전체의 민족운동을 이끈 도시로 발전해 왔다. 노벨 수상자도 배출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이곳 타르투를 북방의 아테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르투는 1030년부터 역사가 시작된 도시로 문화교육 중심 도시다. 탈린보다 200년 앞선 도시다. 타르투 도시 인구는 10만 명인데 그 중 1/5이 대학생이다. 지금은 방학이라 안 보이지만 학생들의 도시라서 학생들이 많다. 시청 뒤편 오른쪽 큰길로 걸어가서 탐방했다. 학교 건물 외벽에 그 당시의 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이 가장 먼저 외인을 반긴다. 역사를 머금은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교정으로 들어서니 대학교 백색 본관 건물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위용이다. 본관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은 풍경이 예스럽고 소박하다. 교직원과 학생들도 간간이 보인다. 강의가 열리는 강의동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으나 대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은 바로 이곳 토메매기 언덕 주변에 모여 있다. 본관 옆 건물 벽면에는 현재 타르투 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대표 지성인들의 얼굴로 장식되어 있다.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빌헬름 오스트발트, 천문학의 대가 슈트루베, 기호학의 아버지 유리 로트만, 발생학의 아버지 카를 베어 등 세계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타르투 대학교 맨 위쪽에는 과거 학생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중세의 대학 감옥이 아직도 있다. 화재 이후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중세시절 수감되었던 학생들이 남겨놓은 낙서도 있다. 점령과 전쟁을 치르면서 학교가 닫히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에스토니아와 발트지역의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당당하게 에스토니아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타르투 대학 기숙사에서는 여름 동안 배낭여행객들에게 빈방을 빌려주고 있다. 대학교 곁에는 토메매기 언덕의 공원이 있어 학교경관이 더욱 아름답다. 발트 국가 여행 중에서 명문대학을 탐방한 것은 아주 소중한 여정이다.
한국에도 600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명문대학교가 있다. 바로 성균관대학교다. 나의 두 아들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교사였다. 나 또한 퇴직 후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시창작과정을 수학했고, 시인으로 등단했다. 교육은 한 나라의 중심이며, 국가를 책임지는 대들보다. 내가 두 아들을 키울 때 우리 집 가훈이 ‘국가가 있어야 내가 있다’였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나란 존재도 국가가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문명과 문화가 발달해도 굳건히 지켜야할 그 나라만의 오랜 전통과 역사는 무너지지 않도록 잘 보존하여 이어가도록 하는 것도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듯이 오늘이 없는 미래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타르투 대학교에서 잠시나마 국가에 대한, 애국에 대한 충정을 다짐해보는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토메매기 언덕
에스토니아 타르투는 구릉지 도시다. 그래서 더울 땐 매우 덥다. 얼마 전에는 30도로 매우 더웠단다. 그러나 오늘은 서늘하여서 두터운 옷차림으로 타르투를 여행한다. 타르투는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아니다. 소련시절엔 군사도시였던 관계로, 외국인에게는 방문이 허용되지 않던 곳이기도 하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과는 185km 떨어져 있고, 기차와 버스가 자주 왕래한다. 타르투의 볼거리는 시내 한가운데 있는 토메매기Toomemägi라는 이 작은 언덕 위와 그 주위에 다 몰려있다. 타르투 대학교에서 약간 언덕진 길을 따라 걸어서 올랐다. 토메매기 언덕 정상에 오르니 평평한 숲길이다. 숲길을 따라간 곳에서 대성당과 법원을 보았다. 그리고 악마의 다리와 천사의 다리도 보았다. 또한 토메매기 언덕 곳곳에는 타르투 대학교와 관련된 여러 위인들의 동상과 기념비들이 조성되어 있고, 에스토니아 출신 문학가와 에스토니아를 구한 전쟁군인들의 동상이 있다. 토메매기라는 이름이 귀엽기도 하고, 투박스럽기도 하였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그 이름에서 풍기는 것과는 다르게 매우 깊은 뜻과 소중한 정서를 담고 있는 아늑한 언덕이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토메매기 언덕 대성당
에스토니아 타르투 토메매기 언덕 정상에 올라오니 두 개의 건물이 있다. 붉은 색 건물은 대성당이고 하얀색 건물은 법원이다. 대성당은 이 언덕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토메매기의 뜻도 대성당 언덕이란 뜻이다. 독일기사단이 12세기에 지은 대성당은 한때 발트3국 최대의 규모였으나 수백 년에 걸친 전쟁으로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대성당의 한쪽 부분만이 복원되어 현재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직도 대성당은 높고 우람한 형상으로 그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토메매기 언덕 악마의 다리
에스토니아 타루트 토메매기 언덕에서 타르투 대성당 주변에 있는 이색적인 이름의 두 다리를 보았다. 하나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악마의 다리, 또 다른 하나는 고운 이름으로 천사의 다리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 다리가 만들어질 당시 제정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설, 다리를 설계한 독일인의 성의 의미가 악마라는 설, 마주 보고 서 있는 천사의 다리를 의식해서 만들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악마의 다리를 먼저 보았다. 회색 톤의 석조 교각으로 생김새가 소슬하다. 이 다리는 독일인니 만든 다리다. 그 이름이 에스토니아어로 악마의 다리란 뜻과 유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그 외의 큰 의미는 없다고 하여 악마의 다리가 무섭게 보이진 않았다. 악마의 다리와 같은 길로 이어진 반대편에 있는 천사의 다리로 갔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토메매기 언덕 천사의 다리
악마의 다리와 가까이 있는 다리다. 언덕과 언덕을 이어주고 있다. 러시아인이 만든 다리다. 그 후 천사의 다리는 주변 공원의 모습이 영국식이라는 의미로 ‘영국식 다리’로 이름이 붙여졌으나, 에스토니아어로 영국이라는 단어와 천사라는 단어의 음이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천사의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악마의 다리처럼 그 이름에는 큰 의미는 없다. 이 다리는 악마의 다리보다는 색상이 살색 톤으로 곱다. 아름다운 천사의 다리를 건너 내려와서 다리 밑으로 지나 토메매기 언덕을 걸어서 내려왔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 토메매기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
타르투 시내의 거리 곳곳을 보며 자유로운 걸음으로 토메매기 언덕에서 내려왔다. 언덕길 도로가 돌을 박아 만든 단단한 돌길이다. 타르투 대학을 비롯한 고풍스런 건물과 주택들이 중세의 자태를 드러낸다.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교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가게와 갤러리 등이 많다. 꽃을 사랑하는 에스토니아의 문화를 전시하듯 창문에 예쁜 꽃 화분을 놓은 카페가 사랑스럽다. 아까 지나갔던 공원에는 시민들이 쉬고 있다. 타르투 대학교 곁이어서 학생들도 있다. 울창한 나무 곁에는 조각상이 서 있다. 타르투에는 이런 조각상들이 많다. 다시 시청 광장을 지나 타르투 대학교 앞 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 탈린으로 출발했다. 잠시 머문 도시 타르투지만 고전적인 향수가 배인 잊혀지지 않을 여행지다.
* 에스토니아 타르투에서 탈린으로 가는 길
에스토니아 타르투에서 여행일정을 다 마치고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가는 길이다. 탈린까지는 185Km로 2시간 30분 소요된다. 타르투 시가지를 벗어나자 울창한 나무 숲 사이의 강이 보인다. 유채꽃이 노랗게 핀 들녘도 있다. 발틱의 다른 나라에서는 유채꽃이 진 열매를 보았는데 에스토니아는 북쪽 나라여서 그런지 아직 노란 유채꽃이 있다. 들판 사이로 철도가 놓여있다. 농토, 초지, 나무숲, 목장이 줄기차게 차창을 따라온다. 그 동안 보아왔던 발틱 국가들의 들녘과 유사하다. 자동차들이 낮에도 라이트를 켜고 운행한다. 주간 점등 운전으로 교통사고가 줄어들어서 그렇게 운행하도록 한 것이다. 주간 운행에도 불을 안 켜면 교통법에 걸린다. 사초더미가 곳곳에 많다. 목장에서 동물들이 풀을 뜯는다. 작은 나라지만 넓은 평원이 아주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 에스토니아 탈린 시가지 진입
에스토니아 시가지에 진입했다. 확 트인 도로가 반갑게 맞아준다. 차창에 빗방울이 약간 맺힌다. 현지시각 오후 8시 30분, 저녁 무렵의 낭만이 곱다. 에스토니아 타르투에서 이곳 탈린까지 오면서 한국 EBS 방영 세계테마기행 에스토니아편을 시청했다. 에스토니아 탈린 공항 곁을 지나간다. 시가지 도심에 들어서니 화사한 느낌이다. 여기는 북유럽 또는 동유럽으로 분류되는 발틱3국 중 맨 위쪽 나라 에스토니아다. 에스토니아 인구는 130만 명이고 그중에서 40만 명이 탈린에 산다. 탈린은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는데 고지대는 귀족이, 저지대는 상인서민이 살아왔다. 지금 저지대 신시가지를 지나고 있다. 빨간 전차가 공중의 줄을 타고 간다. 지상의 전차 선로와 공주에 걸린 전차용 전깃줄이 이국의 풍경을 자아낸다. 하늘 닿을 듯 높은 교회 첨탑이 푸른 나무들 사이로 솟구친다. 세계여행 중 유럽에서 종종 보던 정경이다. 에스토니아에는 한국교민이 50명 정도 산다. 추운 나라로 겨울 난방비용이 월 150유로, 한화로 약 20만원 정도다. 발틱3국은 결혼이 조혼 풍조다. 20세에서 23세 무렵에 결혼한다. 이혼하면 재산을 절반씩 나누어 갖는다. 실업율이 13% 정도다. 성인이 되면 부모는 자식에 대한 책임이 없다. 탈린은 발트3국의 수도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곳으로 유명하다. 회색의 성벽들이 도시 중심을 둘러싸고 있으며, 탈린 곳곳에 있는 녹음 짙은 숲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도심의 울창한 숲 도로를 달려 호텔로 갔다.
* 에스토니아 탈린 호텔 도착
에스토니아 탈린 호텔에 도착했다. 라디싼 호텔이다. 라디싼 호텔은 미국 여행에서 유숙했던 호텔로 낯익은 상호다. 내부가 아늑하고 좋다. 우리 부부의 방은 1901호실이다.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오르내린다. 창문을 열어보니 탈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여장을 풀고 2층 식당으로 가서 석식을 했다.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숙면을 취했다.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에스토니아 탈린, 합살루, 라트비아 리가
* 에스토니아 탈린 호텔 출발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보니 탈린Tallinn 시가지가 훤히 보인다. 발트해의 핀란드만이 에스토니아 탈린 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인구 120만 명에 영토도 남한의 반 정도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저곳이 바로 발트해의 진주, 발트해의 순결한 보석, 발트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에스토니아Estonia의 수도 탈린Tallinn이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호텔 뷔페로 조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청명한데 아침 기온이 쌀쌀하다. 대형 관광버스가 많이 들어와 있다. 우리를 기다리는 관광버스도 들어와 있다. 오늘은 에스토니아의 탈린 고지대 톰페아 언덕부터 관광한다. 톰페아 성의 성곽이 원래는 4Km였는데 지금은 2Km만 남았다. 탈린 시가지 조망대도 간다. 800년의 역사가 담긴 돌담길도 걸어보고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긴 듯한 구시가지도 갈 것이다. 탈린은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이후, 독립 20주년이던 2011년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다. 먼 나라 에스토니아에 온 것도, 수도 탈린에 머문 것도, 오늘 이곳을 탐방하는 것도 모두 소중하고 뜻 깊은 여정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성당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의 알렉산드리 네프스키 대성당은 19세기 말 탈린의 러시아화를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러시아화의 상징 성당이다. 돔 성당이며 십자가가 2개인 러시아 정교회다. 지붕에는 12개의 종이 있는데 큰 것은 15톤이나 된다. 탈린시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당이다. 외형도 상당히 아름답다. 러시아에서 본 성당과 유사하다. 성당 내부에는 의자가 없다. 거룩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이곳 신자들로 가득하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성당 바로 앞에는 국회의사당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 에스토니아 탈린 국회의사당
탈린 국회의사당은 톰페아 언덕으로 오르는 초입에서 알렉산드리아 대성당과 함께 만났다. 성당과 마주 보고 있다. 지금은 보수 중으로 청색 그물망을 씌워 놓았다. 이곳 국회의사당은 1229년 독일 기사단이 최초로 요새를 건설한 탈린의 탄생지인 톰페아 성이다. 탈린 고지대 전체는 톰페아Toompea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톰페아 언덕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바로 언덕의 이름을 지어준 이곳 국회의사당 건물인 톰페아 성이다. 현재 이 성은 국회 건물이어서 일반 관광객들의 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톰페아 성의 꼭대기에는 덴마크를 필두로 이곳을 지배해오던 권세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고 에스토니아의 국기가 걸려 있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이제 에스토니아인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살빛 도는 분홍색 건물이 아름다운데 오늘은 보수 중으로 푸른 그물망이 건물을 가려 아쉬운 정경이나 그 위용은 대단하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 교회
톰 교회는 13세기 탈린 최초의 교회이며 루터교 교회다. 에스토니아의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는 교회다. 1219년 덴마크인들이 이곳에 진출한 이후 최초로 지은 교회다. 톰 교회는 탈린의 변천사를 거쳐 온 소중한 건물이다. 내부는 중세 시절 탈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길드들이 사용한 문장들을 전시해 놓았다. 탈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발트해의 해상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1219년 덴마크의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그때 덴마크는 톰페아에 요새를 강화했고, 최초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하얀색 건물에 시계 첨탑이 오롯하다. 코발트빛 하늘과 하얀 구름 사이로 비경이다. 창문과 외형이 아주 단아하고 깔끔하다. 톰페아 언덕 톰 교회 주변에는 역사가 배인 주택들도 많다. 중세의 향기가 물씬 배인 경관으로 톰 교회는 더욱 아름다운 정경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 정부청사
톰페아 언덕 정상의 전망대 입구에 있다. 노란색 건물로 아담하다. 아주 조용하여서 정말 이곳이 정부청사인가 싶을 정도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드나드는 사람도 안 보이고 좁다란 골목길에 소슬하게 서 있다. 맞은편에는 네덜란드 영사관이 있다. 톰페아 언덕에는 여러 나라들의 대사관이 있는 곳이다. 정부청사 건물 외벽에는 독립 운동가들의 명단이 걸려있다. 에스토니아 경찰가가 정부청사 건물로 온다. 우리나라의 경찰차 색상이라서 정겹다. 한국과 에스토니아는 1991년 10월 17일 수교를 맺었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 전망대
톰페아 언덕 전망대에서 에스토니아 탈린 시가지를 바라다보았다. 에스토니아는 북쪽으로는 핀란드, 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라트비아 국경과 맞닿아 있다. 탈린은 발트해의 핀란드만 연안의 도시다. 시가지 끝에 발트해의 푸른 바다가 도시를 감싸고 있다. 몇 년 전 핀란드 여행에서 마주 바라보았던 그 바다이기에 더욱 감회가 새롭다. 핀란드 바다에 질주하던 고운 배 한척이 에스토니아에서 오는 배라고 할 때, 막연하던 에스토니아였는데 그 나라에 내가 지금 와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이 밀려온다. 저 아래로 바다와 맞닿은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예술로 그려내는 자연 풍광 속에 탈린 시가지는 비경이다. 짙푸른 숲에 둘러싸인 회색 성벽과 붉은 지붕의 성탑은 고풍스런 중세 유럽의 정취를 자아내며 탈린 시가지를 더욱 빛내고 있다. 탈린은 11세기에서 15세기에 가장 발전하였고 그때의 도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우뚝 솟은 구시가지의 첨탑들이 중세의 향기를 선사한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탈린의 지배세력들이 정치와 행정목적으로 사용하던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고지대와 13세기경부터 발트해의 주요 무역 거점지로 자리 잡기 시작한 무역상들의 건물이 밀집해 있는 저지대다. 에스토니아는 국토 전체가 평지여서 고지대라고 해도 해발 45미터 정도다.
지금 톰페아 언덕 전망대에서 바라보고 있는 성벽은 다 보이진 않지만 푸른 숲 사이로 그 풍채를 들어내고 있다. 탈린이 가장 강성했던 15~16세기에는 그 성벽을 따라 총 길이 4.7km에 이르는 46개의 성탑이 있었지만 현재는 1.85km의 성벽과 26개의 성탑만 남아 있다. 전망대 곁에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에스토니아는 발트3국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낮은 지대의 나라로 습지와 야생동물 서식지가 많으며, 신비스런 이야기와 전설의 성터, 영주가 살았던 저택도 많다. 나는 꿈 속 어느 동화의 나라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런 것들이 유럽, 그 중에서도 동유럽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의 체험 현장이다. 에스토니아의 아름다운 정경은 내 오랜 기억 속에 머물러, 쓸쓸한 노을이 뜨락을 적실 때에도 그리운 회상으로 행복할 것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 피의 골목
옛날에 이 좁은 골목에서 귀족들이 서로 교행하며 싸워서 피의 골목이라고 불려졌다. 특히 귀족 부인들이 넓고 긴 치마를 입고 다니던 그 시대에 서로 마주 오는 부인과 교행할 때 도로 폭이 좁은 관계로 부딪히면 말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인들끼리 다투게 되고 심하게 싸우면 피를 흘리며 죽기도 하여 이 거리를 그렇게 부른다. 보기에는 그렇게 좁게 보이지 않는데, 요즘 같으면 충분히 두 사람이 아무런 문제 없이 교행할 것 같은데 그렇다. 아마도 귀족들 간의 우월 의식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닌가 싶어 조금 씁쓸한 골목이다. 오늘날은 오가는 행인들이 교행하면서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유유히 거닐고 있다. 나도 그 길을 행복하게 걸어 나왔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
톰페아 전망대에서 탈린 시가지를 조망하고 피의 골목길을 지나 톰페아 언덕을 걸어서 내려왔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중세의 체험이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13세기에 십자군 원정대가 성을 세우면서 형성되었다. 한자 동맹의 주요 중심지로 발전한 이 도시는 화려한 공공건물, 특히 교회와 상인들이 거주하던 건물을 통해 과거의 영화를 과시하고 있다. 이곳은 화재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용케 파괴되지 않아 보존 상태가 매우 우수하다. 탈린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톰페아 석회암 언덕이다. 톰페아 석회암 언덕에는 요새와 교역소가, 그리고 산기슭에는 항구가 있었다. 서쪽에는 성이 있고, 성벽이 서쪽과 북쪽, 동쪽에 남아 있다. 성벽 안쪽에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 있으며 이 성당은 중세 이후 여러 차례 확장 재건되었다. 도시 저지대에는 중세 도시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거리의 상당수가 중세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훌륭한 공공건물과 개인의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건축부지는 13, 14세기 이래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그 배열이 잘 유지되고 있다. 성벽은 특질상 주요 도시 건물과 떨어진 곳에 있다. 톰페아 언덕에서 내려올 때 육중한 중세의 건물들을 보았다. 예쁜 기념품 가게들도 많다. 고풍스런 언덕길은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 긴 다리
에스토니아 톰페아 언덕을 내려오며 신기한 이름의 두 길을 만났다. 긴 다리와 짧은 다리라는 두 갈래의 길이다. 특별한 뜻은 없다지만 아주 재미있는 이름의 두 길이다. 긴 다리라는 뜻의 ‘픽 얄그(Pikk Jalg) 거리다. 이 재미있는 이름의 두 거리는 고지대에서 저지대를 이어주는 골목 두 개를 일컫는다. 긴 다리 수로가 도로변 건물 지붕 끝에 걸려 있다.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또는 그 반대로 이동할 때 짧은 다리와 긴 다리를 거친다. 긴 다리 골목길은 톰페아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목에서 곧바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짧은 다리 길보다는 넓고 수월해 보인다. 우리는 긴 다리가 아닌 짧은 다리의 길을 택하여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이동했다.
* 에스토니아 탈린 톰페아 언덕 짧은 다리
톰페아 언덕에서 내려오며 곧장 가는 길은 긴 다리고, 꺾어진 좁은 길은 짧은 다리다. 짧은 다리라는 이름의 뤼히케 얄그(Lühike Jalg) 거리다. 이 길은 귀족들이 다니던 길이다. 우리는 귀족처럼 이 좁고 가파른 계단 길로 내려 왔다. 내려온 곳은 에스토니아 탈린 도시의 저지대다. 짧은 다리와 긴 다리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오르내릴 때 이용하는 골목길이다. 저지대에는 상공업자들의 공동조합조직인 길드 건물들이 많다. 무역 거점이었던 탈린에 정착해 경제와 무역활동에 종사하던 흔적이다. 3, 4층 높이의 단아한 건물들은 중세 상공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건물은 식당, 갤러리, 호텔, 공연장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지만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남겨둔 내부 장식은 탈린 시민들에게 역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대로 전달해준다. 굴속 같은 미로를 지나 아득한 계단을 내려오던 짧은 다리 골목길은 독특한 감성으로 저장되어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성 니콜라스 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는 톰페아 성벽 안에 있는 13세기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1226년부터 1227년까지 탈린은 교황의 직접 지배 하로 들어가면서 이 지역은 요새의 고지대와 도시의 저지대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1230년에는 독일 상인 200명을 탈린으로 불러들였다. 상인들은 성 니콜라스에게 봉헌된 이 교회 주위에 정착했고, 그 옆에는 기존의 에스토니아인과 스칸디나비아인, 그리고 러시아인의 교역소가 있었다. 그러다가 에스토니아가 1710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군대에 항복한 이후 반세기 동안 상업과 문화가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성을 소재지로 하는 지방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침체기에서 벗어났다.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에스토니아는 잠시 독립하였다. 하지만 다시 독일에 점령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 도시는 심한 폭격을 받아 성 니콜라스 교회와 그 주변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훗날 성 니콜라스 교회는 원형 그대로 정교하게 재건되었고, 재건된 교회는 주위의 공간과 함께 오늘날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교회 주위의 건물은 스탈린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지만, 역사 도시로서의 규모와 크기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 교회는 에스토니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복원된 성 니콜라스 교회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회당 양식으로, 탈린 학파 특유의 매우 높은 둥근 천장과 정교한 기하학적 양식이 살아 있다. 하얗고 높은 첨탑이 중세의 기상으로 오롯하다. 첨탑 앞에 있는 낮은 건물은 기하학적 무늬로 창문을 내고, 벽면은 회색과 살색의 은은한 조화다. 붉은 색 지붕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가지 거리
탈린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3개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의 수도이며 발트해 연안의 항구도시로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구시가지는 더욱 아름답다. 중세의 시간이 그대로 고여 하나하나가 다 고운 정경이다. 튼튼한 돌로 장식된 거리는 걸어도, 걸어도 이어지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리움 가득 고인다. 에스토니아 탈린은 중세풍의 건물과 성벽이 아름다워 발틱의 여왕이라는 도시다. 지리적 여건으로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에 시달려 왔지만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여 이제는 어엿한 한 국가가 된 것이다. 건물의 창문도 곱게 나 있다. 노천카페와 길가의 꽃들은 더욱 고와서 자꾸 시선이 고인다. 이런 풍경은 유럽 여행에서 느끼는 큰 선물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청사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청사는 톰페아 언덕에서 내려와 저지대에서 만났다. 저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이 시청사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꾸밈이 없는 회색 건물에 붉은 지붕이 고풍스런 자태다. 오롯한 첨탑 끝에는 토마스 할아버지가 아이 모습으로 앉아 있다. 탈린 시가지를 지켜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톰페아 성탑과 탈린의 중요한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1371~1404에 건축되었다. 구시청사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주변에는 마켓광장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중세 복장을 입은 장인들이 만드는 중세분위기의 시장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데 지금은 여름철이어서 그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보았다. 노천카페 역시 중세로 이끄는 풍경으로 에스토니아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시청사 앞 골목에는 600년 된 약국도 있다. 구시청사를 비롯하여 에스토니아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공간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청사 주변 라에코야 광장
에스토니아 구시청사 주변에는 넓은 라에코야 광장이 있다. 구시청사 광장이기도 하고 마켓광장이기도 하다. 광장 주위에는 길드의 집과 주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름철 시청광장은 중세의 시장으로 바뀌어서 다양한 수공예품과 예술작품들이 가득하다. 구시가지의 성벽안쪽에는 수공예 기술자들과 광대들과 연주자들, 음유시인들로 중세시대의 풍경을 연출한다. 그래서 이곳은 많은 축제가 열렸으며 죄인들을 처형 하는 장소로도 사용 되었다. 겨울철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장터가 열린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한 달 동안 광장에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많은 사람들의 걸음을 부른다. 이것은 1441년부터 이어져오는 전통이다. 중세시대의 카니발을 재현하는 구 시가지의 날 행사기간 동안에는 중세시대의 에스토니아 전통행사인 카니발 퍼레이드, 중세기사 경연대회, 활쏘기 대회 등이 펼쳐진다. 오롯한 첨탑의 구시청사와 함께 에스토니아의 숨결이 고인 광장에서 한낮의 시간을 엮은 보람된 여정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청사 앞 마켓광장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청사 주변의 마켓광장이다. 카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오늘날에는 도시의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리 콘서트가 열리고, 수공예품 전시장, 중세풍의 시장이 열리는 장소다. 지금은 여름이어서 노천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카페가 시선을 끈다. 크리스마스에는 큰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세계인의 걸음을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마켓광장 주변을 돌아보며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중세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600년 된 약국
에스토니아 탈린 시청 광장에 있는 약국이다. 1422년부터 현재까지 한 곳에서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역사적인 약국이다. 6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약국은 2층 건물에 큰 창문들이 화사하다. 입구 문의 문양도 아름답다. 약국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말린 두꺼비, 이집트 미라, 불에 그을린 벌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약초 등 다양한 재료들이 있다. 모조품이긴 하지만 중세시절의 분위기를 되살리며 전시되어 있다. 약품이 있는 진열장 안에는 약 200년 전, 이 약국을 운영하던 사람이 후세의 약사들을 위해 남겨둔 편지도 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간 날은 휴일이어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작은 아들은 약사다. 그 아내인 작은 며느리도 약사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그리고 세계여행에서도 약국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큰 아들은 고등학교 교사다. 나 또한 교사였다. 그래서 역시 세계여행 중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약과 교육은 동일한 척도로 그 나라의 건강과 미래를 책임지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토록 오랜 역사를 이어가며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는 오늘 만난 이 약국은, 그 동안 보아온 그 어느 약국보다도 내 가슴에 오래도록 저장될 것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기념품 가게
에스토니아는 발틱3국 중에서 유일하게 유로존에 가입한 국가다. 1999년 1월 유로화 도입 이후 자국 통화를 독일 마르크화에서 유로화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에스토니아에서만큼은 유로화 통화에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 나도 그 동안 거쳐 온 나머지 발탁국가 2개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그리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서도 사용하지 못했던 유로화를 이곳에서야 사용했다. 시청사 광장 주변과 골목길 곳곳에 기념품 가게가 많다. 이곳은 시청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 오랜 세기 동안 시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여기뿐만 아니라 톰페아 언덕 곳곳에서도 예쁜 기념품 가게를 보았다. 기념품으로 전시된 물건들은 대개 아기자기한 에스토니아 상징의 인형과 천으로 짠 제품 그리고 에스토니아 주산물인 호박 장신구 등이다. 나도 에스토니아의 전통 머플러를 샀다. 나와 두 며느리 것을 샀다. 에스토니아는 사랑하는 사람에서 꽃을 선물하는 문화다. 그래서 꽃모양을 자수로 새긴 머플러를 샀다. 거리에서 중세 전통 의상 차림으로 물건을 파는 상인도 있다. 모두 아름다운 풍경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중세기사 식당
에스토니아 탈린 여행 중 현지 중식으로 들렀던 식당이다. 아치형 문 입구에 포크와 나이프가 중세기사 식당 상징처럼 우람하게 걸려있다. 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에 앉아보니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소슬하면서도 우아하고, 묘한 지극을 불러일으킨다. 벽면에 걸린 호롱불, 벽면을 장식한 중세시대 그림, 중세풍의 옷차림으로 서빙 하는 사람들, 나무 식탁과 식탁 위 촛불 등 어느 것 하나 현대문명의 바람이 스미지 않았다. 투박한 질그릇에 담아온 음식은 더욱 그랬다. 고기와 생선을 구워 보리와 함께 담아온 요리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 화장실에서 또 낯선 체험을 했다. 나무 뚜껑을 덮어둔 변기와 주전자에 물을 담아 벽면에 매달아둔 물, 세제를 작은 질그릇에 담아놓은 모습 등이 눈과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야말로 이 중세기사 식당은 모두가 중세사회의 한 단면을 담아놓은 곳이다.
*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가지 중세 풍경
중세기식당에서 중식을 마치고 자유로운 시간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구시가지 주변에는 아름다운 카페와 중세풍의 옷차림을 한 남녀들이 왕래한다. 외객을 반갑게 맞아주며 눈인사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어준다. 나 또한 중세의 한 여인처럼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에스토니아 탈린 구시가지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탈린은 완벽하게 잘 보존된 중세 북유럽 무역 도시다. 독특한 양식의 경제, 사회적 공동체의 뚜렷한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이다. 좁은 골목거리에 그 옛날의 물건들을 전시해 놓고 중세사회의 문화를 고스란히 선사한다. 한 남자는 중세시대의 놀이를 하도록 권한다. 나에게도 고리를 3개 주며 던져서 둥근 판에 꽂힌 고리걸이에 걸으라 한다. 2개를 성공했더니 기념주화를 준다. 중세의 구시가지 거리에서 누구든지 함께 참여하며 그날의 문화를 즐기게 하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훈훈한 정경이다. 탈린은 한자동맹 지역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명성을 날린 도시였다. 이렇게 확보된 경제력으로 도시를 방어하고 건축과 자유로운 예술 활동의 기회가 많이 주어져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다. 탈린의 구시가지 거리에서 중세의 신비한 분위기 속에 동화되어 역사의 낭만을 소유해보는 행복한 여정이었다.
* 에스토니아 탈린 세 자매 건물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다. 15세기에 건축된 주택의 집합 건물이다. 중세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양이 여성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어 세 자매 건물이라 불린다. 지금은 호텔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좁은 골목에서 만난 이 세 자매 건물은 우람하고 높지만,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특히 뾰족한 지붕의 외벽에 난 창문이 아름답다.
* 에스토니아 탈린 시가지 출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일정을 마치고 합살루로 떠난다. 합살루는 에스토니아의 서북쪽에 있는 오래 된 도시다. 발트해의 해안 도시이며, 여름 휴양도시다. 합살루에는 대주교성과 성니콜라스 돔 교회,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벤치와 유명한 합살루 역, 철도박물관 등이 있다. 탈린에서 합살루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오늘 우리는 합살루 탐방을 마치고 라트비아 리가까지 갈 것이다. 합살루에서 라트비아 리가까지는 4시간 소요된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국경까지는 2시간 걸린다. 버스 이동이 많은 날이다. 그러나 명소만 보는 것이 세계여행은 아니다. 나의 세계여행 철학은 모두 점으로 연결시킨다. 매 순간마다 그 나라의 자연과 들녘, 건물구조, 도로, 사람들, 시가지 등을 포착하여 저장해두며 두고두고 그 나라에 대하여 배우고 익힌다. 항상 우리를 기다려주는 러시아인 버스기사가 고맙다. 탈린 도심의 울창한 나무들이 마지막 시선을 집중시킨다.탈린 시가지를 떠날 때 빨간 전차가 인상적으로 도로를 지난다. 전차선로와 일반 차량 차도가 함께 있어 종종 저런 풍경을 보곤 했다. 참으로 낭만이 흐르는 정경이다.
* 에스토니아 들녘 공원
에스토니아 탈린 시가지를 벗어나 시외 들녘을 달린다. 이제 에스토니아 합살루로 간다.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나무숲도 만나고 초지의 들녘도 만난다. 두둥실 뜬 구름이 장관이다. 합살루 도시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신기한 공원을 보았다. 넓은 잔디 공원에 사람도 많이 모였고, 말을 타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무슨 말에 대한 행사가 있나보다. 발틱 국가 에스토니아, 이 작은 나라에서 대륙적인 우람함을 보며 놀라웠다. 울창한 나무들이 에워싼 공원에서 진풍경을 본 순간이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대주교성
에스토니아 합살루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한 대주교성은 에스토니아 전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곽 중 하나다. 당시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고, 성을 둘러싸고 있는 803m 길이의 성벽 역시 상태가 훌륭하다. 높이가 10m, 두께가 1m로 상당히 장엄하다. 성벽 안쪽에 해자와 대포를 갖춰 주택을 요새화 했다. 16세기에 성 외벽과 대포 등을 완성함으로써 지금 현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13세기 말부터 1559년까지 합살루를 포함해 에스토니아 서부지역과 서부 연안 섬의 성당을 관장하는 대주교가 있던 성이다. 성의 전망대에서는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과 주변 전망을 즐길 수 있다. 성에서는 노천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다양한 콘서트와 연극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오랜 성벽과 옛 성터는 산책을 하기에 좋다. 성 내에는 성니콜라스돔 교회와 가장 오래된 건물인 작은 성, 1270년에 지어진 최고의 방음시설을 갖춘 성당이 있다. 성 앞 광장은 한때 시장이었으며 이곳에서 합살루의 모든 옛 거리가 시작된다. 18세기에 지어진 옛 시청 건물은 현재 레네마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박물관 바로 뒤에 위치한 성요한 성당은 15세기에 창고를 개조해 만들어졌으며, 성당의 위치가 남북 방향이라는 점에서 다른 성당과 구별된다. 성당에는 5m 높이의 돌로 된 제단(1630) 과 나무로 된 연단(1707)이 있고 제단 앞의 바닥은 기록이 쓰여진 석판으로 되어 있다. 이 성곽엔 비교적 큰 규모의 대성당 건물이 딸려있다.
합살루 대주교성은 들어가는 문에서부터 우람했다. 높은 성벽에 아치형 작은 문이 있는데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될 것 같은 느낌이다. 성 안으로 들어서니 길고 높은 성벽이 성을 감싸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허름한 성곽이 중세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성의 한쪽에는 글게 성니콜라스 돔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그 건물 역시 성벽과 같은 회색으로 전혀 꾸미지 않은 색상이다. 뜨락은 잔디를 깔아놓았고 중앙에는 나무 의자가 많이 놓여 있다. 성 주변은 나무를 심어 울창하다. 청명한 하늘과 하얀 구름이 고운 빛을 더해주어 비경이다. 성안의 잔디밭 산책로를 거닐며, 성벽 가까이 나무숲을 거닐며, 돔 교회의 성스런 숨결을 느끼며 편안한 쉼과 고풍스런 정취에 행복을 엮었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대주교성 성니콜라스 돔 교회
에스토니아 합살루 대주교성 안에 있는 교회다. 대주교성에 들어섰을 때 회색 돔 교회가 오랜 역사의 미소로 외객을 맞아들인다. 허름하고 꾸미지 않은 건물과 돔 기둥이 오롯하여 중세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양식으로 전환되던 126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합살루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바닥에서 둥근 천정인 돔까지의 길이가 15.5m이며 면적은 425㎡로 단일 본당으로는 발트해 국가에 있는 성당 가운데 가장 크다. 벽기둥의 중앙 장식은 로마네스크 장식으로 보이고 끝이 뾰족한 아치로 된 성가대는 고딕 스타일의 흔적이 엿보인다. 주 출입구 위에 있는 문은 원형 아치 모양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교회가 지어질 당시에는 시스터 수도회 율법에 따라 타워가 없었고 성가대와 입구 위에 있는 장미 유리창은 아주 간결하게 장식되었다. 실내 벽은 거대한 벽화와 성인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14~15세기에 건축된 독특한 원형 침례실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제단이 있었고 벽면은 그림으로 덮여 있다. 북쪽의 제의실에는 교회의 둥근 천장까지 가는 아주 좁은 계단이 있는데 이곳은 유사시 은신처로 사용되었다. 이 계단은 돔 성당이 사레-레네 교구 관할이었을 때 부르노라는 당시 교구장의 명령에 의해 천장에 홈을 파 만들었다.
돔 성당은 초기에는 성 요한에게 헌정되었으나 리보니안 전쟁(1558~1583) 때 에스토니아가 루터교도인 스웨덴의 속국이 되면서 루터교의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1688년 성당 지붕의 구리판이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복구됐으나 1726년 폭풍우로 다시 파괴되었다. 당시 파괴된 건물은 15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재건축이 이뤄져 낭만적인 성곽 공원으로 되었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웅장한 입구는 유사 고딕 양식의 계단이 있는 입구로 바뀌었다. 남아 있는 벽화도 이때 덧칠되었다. 1979년 성당은 콘서트홀로 재단장되었고 에스토니아가 소련에서 독립되면서 다시 교회로 단장되었다. 1992년 어머니날에 구소련시절 죽음을 맞이했던 에스토니아의 수많은 어머니들을 추모하기 위한 ‘어머니 제단’도 만들어졌다. 드넓은 대주교성의 정원 가운데에 의자도 있다. 그 옛날 신도처럼 앉아보며 멋진 중세의 향수에 젖었다. 창문이 독특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대성당은 수시로 출몰하는 하얀 옷을 입은 귀신 때문에 특히 더 유명하다. 8월이면 대성당 벽에 나있는 길쭉한 창문에 하얀 옷을 길게 입은 여인의 모습이 지금까지 출몰한다고 한다. 연구 결과 그곳은 조명이 반사되어서 만드는 환영이라는 결론이 났지만, 여전히 그 형상은 ‘하얀 옷의 여인’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성에서는 매년 하얀 옷의 여인의 이름을 딴 축제도 열리고 있다. 축제도 열리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있고, 성곽 내부에는 중세유물을 보관한 박물관과 함께 대성당의 종탑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대주교성과 이어진 교회 건물을 따라 성을 나왔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시가지
에스토니아 합살루는 에스토니아 서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자그마하지만 래네 주의 주도다. 수도 탈린에서 100km 떨어져 있으며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형태는 직사각형으로 해변을 따라 형성되었다. 합살루는 인구 2만 명의 아담한 도시다. 1279년 세워진 합살루는 맑은 경치와 아름다운 해안선으로 에스토니아의 유명한 여름 휴양도시다. 바다에 있는 진흙은 오래 전부터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825년 러시아 제국의 군의관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에게 보고한 것을 계기로 전 세계인들 사이에서 질병 치료를 위한 여름 휴양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물이 많아서 발트해의 베네치아(베니스)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13세기 스웨덴인이 이주한 뒤부터 도시 전체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지만 1944년 스웨덴인 대부분이 에스토니아를 떠났다. 도시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짠 숄로 유명한 도시다. 합살루는 휴양 도시답게 다양한 이벤트와 페스티벌도 즐길 수 있다. 특히 여름에는 올드 뮤직 페스티벌,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 연주, 클래식, 우울한 연인을 위한 8월의 블루 페스티벌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음악 경연대회도 열린다. 주요 페스티벌은 하얀 숙녀의 날인 팔월 보름에 열린다. 대주교성을 떠나 합살루 해변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벤치를 찾아 가는 길에 본 합살루 시가지 풍경은 고풍스러웠다. 시민들은 지나가며 동양인인 우리를 자꾸 쳐다본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낯선 이방인인데 그들에게는 우리가 낯선 이방인이다. 자동차도, 건물도, 사람들도 낯설지만 낭만과 정이 흐르는 아름다운 시가지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골목 민가
에스토니아의 작은 도시 합살루는 700년이 넘는 고도로서 도시 곳곳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골목길에 있는 나무로 된 집들은 건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으며 특히 합살루는 물이 많아서 노르만의 베니스라고 불린다. 에스토니아가 독립했을 때 합살루 원예클럽에서는 시내와 쿠르살, 프로메나데 거리에 꽃을 심고 잔디를 가꾸고 조각상을 세우는 등 온 도시를 정비하였다. 이때 아름답게 장식된 도시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합살루가 여름 휴양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 벤치를 보기 위해 합살루 해변으로 가는 길에 민가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집 앞 도로변 주차라인에는 자가용이 주차해 있다. 맞은 편 빈터에는 민들레와 질경이 등 한국의 야생식물과 유사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야트막한 나무 담장 너머로 집안을 들여다보니 잔디 정원에 아기 놀이터로 보이는 모래가 있고, 나무로 지은 집 건물 옆에는 자작나무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이 집은 울안에 자가용을 주차해 놓았다. 빨랫줄에 빨래도 널어놓고, 꽃도 기르고, 사과나무에 사과도 주렁주렁 열리고 정겨운 풍경이다. 대부분 집들이 이런 모습이다. 마을 골목길에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강아지를 중에 매어 끌고 가는 여인도 있다. 나도 합살루 골목의 아름다운 길을 따라 해변을 향해 걷고 있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해변
에스토니아 합살루는 발트해에 접해 있는 작은 도시다. 합살루 시가지와 아담한 마을을 지나 해변에 들어서니 만발한 장미꽃이 외객을 맞이한다. 청명한 하늘의 하얀 구름과 코발트빛 바다가 비경이다. 이곳은 19세기 중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합살루의 여름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합살루 해안은 긴 쪽의 길이가 25Km이며 이중 해변의 길이가 14km나 된다. 그래서 스파 리조트로 유명하다. 따뜻한 바다와 치료 효과가 있는 진흙 그리고 맑은 공기로 수 세기 동안 알려져 왔다. 1886년 해변가에 쿠르하우스를 짓기로 계획되었으나 실제로는 11년 뒤인 1897년 합살루 원예클럽에 의해서 착공되었고 1898년 완공되었다. 프로메나데 해안에 쿠르하우스와 노천 밴드공연장이 완성되면서 여름 휴양지가 되었다. 현재까지 재건축되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에스토니아 유일의 쿠르하우스이다. 쿠르하우스는 사람들이 여름철 휴가를 보낼 수 있는 휴양 건물로 에스토니아 도시 곳곳에 건설되었다. 쿠르란 요양, 치료의 뜻으로서 리조트나 온천의 의료기관, 트레이닝 등의 시설을 복합해서 총합적인 건강 만들기를 목적으로 하는 시설이란 뜻이다. 독일에서 퍼진 것으로 건강산업과 서비스업이 결합한 새로운 사업의 형태로 주목받았다. 합살루의
쿠르하우스가 위치한 곳은 해변가이지만 바다와 아주 근접해 있기 때문에 거의 바다 속에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소련연방 시절 합살루 쿠르하우스는 창고로 쓰여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독립 후 도시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통해 쿠르하우스도 복구되었다. 쿠르하우스 내에는 1997년 여름 카페 쿠르살홀이 생겼으며 라이브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 프로메나데 해안의 쿠르하우스와 노천 밴드공연장은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합살루 여름 휴양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루에 2번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리며 탈린에서 많은 연주가들이 모여든다.
프로메나데 해안은 한때 해수욕장으로 쓰였고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로 유명한 아프리카 해변부터 시작한다. 에스토니아 조각가인 로만 하바메기가 만든 해시계 조각이 있는데, 해시계의 배경에는 아이부터 어른을 거쳐 노인에 이르는 인생의 여러 가지 양상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쿠르살 홀 근처에는 온천을 발견한 카를 아브라함 훈니우스 기념관도 있다. 훈니우스는 바다 진흙을 사용해 몸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치료한 최초의 의사이며, 1825년 합살루에 최초의 스파 건물을 지은 사람이다. 재활센터 근처에 차이코프스키 벤치가 있고 길 건너에는 합살루 온천 건물이 있다. 그 앞쪽에 있는 베이케 비크 해변에는 스파로 치유된 사람을 상징하는 조각상인‘지팡이를 깨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해변을 즐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차이코프스키 벤치를 보기 위해서다. 차이코프스키 의자가 있는 곳까지 걷는 합살루 해변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바다 가운데 백곰 동상이 반갑게 맞아들이는 환상이다. 바다와 하늘, 구름, 장미꽃, 건물들 등 어느 하나 이탈하지 않고 해변을 지키며 합살루의 가슴 벅찬 전설로 가슴에 박힌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해변 차이코프스키 벤치
에스토니아 합살루 해변에 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앉았던 벤치가 있다. 차이코프스키 벤치가 있는 곳은 해변에 위치한 평화로운 프로메나데 길을 따라 항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합살루는 19세기 러시아에서 가장 좋은 스파 리조트로 알려졌으며 차이코프스키와 여러 명의 황실가족이 휴가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1867년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도 27세 때 이곳 합살루 해변에 3개월 동안 여름휴가 와서 장관인 석양을 감상하고, 이 벤치에 앉아 ‘합살루의 추억’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사실 이곳은 여행 일정에는 없는데 차이코프스키를 만나고 싶고, 또 그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가는 것이다. 합살루 발트해변에 들어섰을 때 바닷가의 장미가 만발하여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눈부신 낭만이 눈과 가슴을 뜨겁게 채운다. 긴 해변을 걸어서 들어가는 것조차도 아름다워서 조금 먼 곳에 위치한 차이코프스키 의자가 금방 다가왔다. 바닷가 안온한 정원에 회색 시멘트 의자를 놓고 의자 중앙에는 차이코프스키 두상부조, 그 아래에는 P.I. TSAIKOVSKI 1840-1893라고 쓰여 있고, 양 옆면에는 오선지 악보가 그려져 있다. 원래는 나무의자였는데 지금은 돌의자로 바뀌었다. 우리 부부는 잠시나마 벤치에 앉아 그날의 차이코프스키를 만나는 환상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러시아 작은 마을에서 탄생했다. 10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였다. 모스크바 음대를 졸업했다. 결혼 2개월 후 이혼했다. 우울증도 앓았다. 동성애자였고, 콜레라로 사망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사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가 콜레라에 걸렸는데도 면회가 허용됐고 죽은 뒤에는 손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도록 허용됐다. 전염병을 앓았는데 격리되지 않았다. 또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다. 당시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처형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을 보냈는데 대법관, 검찰 부총장 등 권력 핵심에 있던 동창들이 그의 명예를 고려, 콜레라 전염으로 죽었다고 위장하기 위해 사약을 내린다. 사약은 비소로 추정한다. 비소를 먹으면 콜레라 증세인 쌀뜨물 같은 설사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의 사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울증, 동성애, 그리고 자살에 관한 것이다.
그의 성장과정을 보면 우라르의 윕트킨스크에서 광산 감독관인 아버지와 프랑스 이민 3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다방면으로 재능을 보였다. 음악뿐 아니라 언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6세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이해하였으며 7세에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음악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귀를 지녔으며,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처음에는 법률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나중에는 음악을 더 좋아해 1862년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 어린 차이코프스키는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떼어놓아야만 했다. 어머니에 대해서 지나친 사랑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래다주고 돌아가려 하자 그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뛰쳐나와 어머니가 타고 가는 마차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 어린 시절의 체험은 영구적인 쇼크가 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어머니 이외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숙명적으로 거부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의 이러한 동성애의 원인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사랑, 그리고 그가 14세인 1854년 되던 해에 유행한 콜레라로 인한 어머니의 사망이다. 즉, 이렇게 영원히 문이 닫혀 버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다시는 어떤 여성과도 사랑할 수 없는 상처를 만든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고자 결혼이 그것을 해결해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감상적인 성격인데다가 우울증이 찾아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일생을 불안과 고독으로 살았다. 그는 신경질적인 데다가 겁이 많았다. 집에 있어도 불안했고 집을 떠나 여행을 해도 불안했다고 적어 놓았다. 그 불안의 원인을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스스로가 한심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눈물을 자주 흘렸다고 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눈물 제조기라고 표현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생활을 위해서 신문사와 교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1876년이 되자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폰 메크의 미망인인 나데주다가 그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후 13년간에 걸쳐 그를 위해서 6000루불의 종신 연금 등 거액의 돈을 지출하기도 했다.
37세까지 독신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7월에 자신보다 10년 연하의 28세 음악원 여학생 안토니나 이류코바와 결혼을 하였으나, 9주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것은 안토니나가 히스테리성 여성으로 그녀의 강력한 구혼에 저항할 수 없어 결혼했으나 2개월만에 파탄이 오고 더욱 심한 우울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바람을 피워 3명의 아이를 낳고, 차이코프스키는 이혼을 원했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부부관계의 지속을 원해 법률상으로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이혼에 대해 강하게 나오지 못한 것은 그녀가 그의 동성애를 폭로 할까봐서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아내의 성관계 요구에 자살 기도도 했었다. 결혼 전의 우울 상태가 심화되었고 작곡 활동도 완전히 저하되었다. 모스크바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꾀했으나 미수로 끝났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면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돈을 대준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몹시 좋아했었다. 그녀는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경제적인 후원을 하겠다는 독특한 제의를 해왔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를 쾌히 수락하여 그 후 14년에 걸쳐 많은 액수의 후원금을 받았다.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 대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편지의 수가 무려 1,100여 통이나 되며 편지 속에는 음악에 대한 의견과 개인적인 속사정까지 쓰여 있어 훗날 학자들이 차이코프스키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서 폰 메크 부인이 차지했던 비중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890년 10월 4일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파산하기에 이르러 앞으로는 그에게 보내던 지원금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하고, 편지의 끝에는 그들의 우정도 끝났다는 것을 암시했다. 폰 메크 부인과의 편지 왕래가 끊긴 데서 온 낙심과 울분은 차이코프스키의 만년을 온통 어둡게 채색했다며,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이 엄청난 충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임종 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격분하고 원망스러운 어조로 계속 ‘저주받을 그녀’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이 단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사인은 콜레라가 아니고 자살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콜레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최후의 걸작이라고 전해지는 교향곡 ‘비창’을 1893년 10월 28일 초연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째 되는 날인 1893년 11월 6일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자살설이 제기되어 왔다. 차이코프스키가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작곡했다고 자랑하는 ‘비창’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 그리 시원치 않은 것에 참담한 실패감을 느껴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연애자였다. 그 상대는 스텐본크 툴몰 공작의 조카였다. 그는 근사한 청년이었다. 그 두 사람의 교제에 무엇이 있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코프스키를 고소하는 편지를 썼고 그 고소장이 입법부의 주임 소추인이며 부 검사총장이었던, 니콜라이 볼소비치 야코비의 손에 넘어간 일이었다. 동성애는 그리스도와, 러시아 정교에서 기피되었는데 그것은 최대의 파렴치이며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당시 그와 같은 자는 투옥을 당하거나 유형에 해당되는 범죄였다. 야코비는 차이코프스키의 명예를 생각하여 그에게 자살을 권했다. 또한 독사발을 받고 강요된 자살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은 그 당시 권세가였던 스텐복크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의한 것으로, 비밀재판의 결과로 독약을 먹고 죽으라는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이코프스키는 독물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는 독약이 몸 안에 퍼지는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이 되자 그는 ‘이것으로 죽는다. 마지막이다’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는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다. 이것은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가장 중요한 소견이다. 그러나 그런 증상을 보이는 독극물이 있는데 바로 비소다. 즉 차이코프스키는 비소가 들어간 독극물을 먹고, 콜레라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사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선율을 만들었던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에 따른 자살을 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특징은 우울하고 감상적이고 정서가 끈끈한 작품이 많다. 교향곡 ‘비창’을 초연했을 당시 청중들은 냉담과 무료함을 나타냈으나 사후에 즉시 이 곡이 재현되자 청중은 감동하고 흐느껴 우는 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곡은 어둡고 우울하며, 특히 제 4악장은 차이코프스키가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뮌헨 정신과의사 폰 뮤렌다르 박사에 의하면, 차이코프스키는 26세부터 52세까지 26년 동안 12회의 울병기를 보냈다고 한다. 박사는 정신과 입원 환자에게 여러 가지 음악을 들려줘 보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들려주면 내인성 울병환자의 증상이 심해지고 절망적이며, 때로는 자살하려는 마음까지 갖게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따라서 박사는 차이코프스키의 울병은 내인성일 것이라고 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힘차고 화려하며 또 정열에 넘친 일면과, 우울하고 감상적인 일면이 있다. 이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정신적인 양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눈과 얼음에 갇힌 조국 러시아를 그린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의 우수의 느낌,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밝은 햇빛 아래서 작곡한 교향시 ‘이탈리아 기상곡’에서 보는 명랑함과 경쾌함, 그리고 라로의 ‘스페인 교향곡’을 듣고 만든 바이올린 협주곡의 화려함과 같은 식이었다.
나는 오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0년이 된 2013년 8월 11일 여름 오후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이토록 눈부신 바다와 청명한 하늘, 하얀 구름 모두 합하면 미술 걸작품 명화 같은 이 해변에서 그의 숨결을 만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벤치로 명명된 그곳까지 걸어서 오가며 본 발트해의 해변 풍경도 비경이다. 에스토니아는 꽃 문화가 발달된 나라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준다. 발트해변 입구에서 본 아름다운 장미는 그것을 증명하듯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에스토니아 작은 도시 합살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품고 가는 소중한 여정이다.
* 에스토니아 합살루 기차역
에스토니아 합살루 기차역은 러시아 때 건설한 역이다. 에스토니아의 기차역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물이다. 주황색 톤의 길고 고운 건물이 고요한 자태로 서 있다. 이 역은 러시아 황제가 관여한 디자인으로 아주 우아한 분위기다. 러시아 황제가 가족과 함께 즐겨 찾던 역이다. 아직도 잘 보존되어 색상과 건물 구조 등 그 아름다움이 대단하다. 현재는 기착역으로써의 구실은 정지되었다. 1905년에 처음 기차가 이 역에 들어왔다가 1995년에 기차가 끊어졌다. 지금은 에스토니아 철도 박물관으로 에스토니아의 철도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216m의 긴 플랫폼 앞에는 그 당시 운행되던 여러 기관차들만 전시되어 있다. 텅 빈 대합실 안을 거쳐 밖으로 나가보니 기관차들이 군데군데 멈춰져 있다. 철로에는 정지된 역임을 증명하듯 파란 풀들이 자라고 있다. 다시 쓸쓸한 대합실을 나와 버스를 타는데 탐방 온 이 나라의 학생들로 보이는 남녀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이별을 고한다. 어쩌면 떠나고 떠나보내는 그 옛날의 합살루 기차역이 연상되는 순간이다. 이런 건물을 보존하여 그 당시의 기차역 풍경을 선사하는 에스토니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에스토니아 들녘
에스토니아 합살루를 떠나 라트비아 리가로 이동한다. 여기서 라트비아 리가까지는 총 4시간 걸린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국경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합살루 조그만 시가지를 벗어나 들녘을 달린다. 나무숲과 평원의 풍경만이 차창에 어린다. 에스토니아뿐만 아니라 이곳 나라들 들녘은 모두 초지의 평원이거나 나무숲이다. 토양이 흙층이 얕아서 작물재배가 되지 않는다. 또한 농사를 지어도 국가 보상이 없어서 농사를 안 짓는다. 집단농장이었는데 지금은 넓은 땅이 모두 사유화 되어 임자가 있다. 그러나 외국인은 땅을 소유하지 못 한다. 주택구입만 가능하다. 개인소유로 땅 주인이 있는데도 대부분 잡풀만 자작자작하게 자라는 밭이다. 더러 재배하는 작물이 유채, 보리, 밀 정도다. 포장한 마른 목초 덩어리도 종종 보인다. 가끔 강과 촉촉한 물길이 있지만 역시 나무나 풀만 무성하다. 아까운 땅이다. 우리나라에 저런 평원이 있다면 모두 농사를 지을 텐데, 참 안타까운 들녘 풍경이다.
* 에스토니아 도로
에스토니아에서 라트비아로 가는 길이다. 도로가 참으로 한산하다. 어떤 때는 차들이 많이 교행하거나 나란히 가지만 대개는 텅 빈 도로를 우리를 태운 버스 홀로 간다. 이런 현상은 이번 5개국 여행 내내 느껴 왔다. 소나무 숲이나 자작나무 숲 도로에서도, 평원의 도로에서도 거의 그렇다. 그리고 5개국 모두 산이 없는 나라여서 달려도, 달려도 평원 아니면 나무 숲길이다. 그런 연유로 차들이 안정 속도로 주행한다. 또 그 어떤 곳에서도 절벽과 같은 위험한 길이 없다. 산이 없으니 도로는 모두 평평한 곳에 있어 사고가 난다고 해도 길을 이탈하여 동일한 높이의 들녘에 들어가는 정도일 것 같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길과는 많이 다른 이색 도로 풍경이다. 어느 구간에서는 자동차 차도 옆에 따로 조그만 도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자전거 그림을 그린 곳은 자전거 전용도로인가보다. 안전한 도로에서 운동하는 아이들이 평화롭다.
* 에스토니아 낮에도 불 켜고 운행하는 차들
대낮인데도 차들이 라이트를 켜고 주행한다. 그것은 교통법상 그렇게 해야 되어서 그렇다. 주간 점등 운행을 실시했을 때 교통사고 비율이 훨씬 줄었기 때문이다. 만일 낮에 불을 끄고 주행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 앞에서 다가오는 차들마다 어떤 차종이던 모두 불을 켜고 운행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라트비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차츰 보면서 익숙해졌다. 신기한 도로 표정이다.
* 에스토니아 국경선 통과
에스토니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가는 국경지역이다. 출국수속을 밟는 동안 버스에서 내려 20분 정도 휴식했다. 어느 휴게소 하나 머무는 듯한 느낌이다. EU에 가입하면서 국경선이 무너진 것에 대하여 절감하는 순간이다. 상가도 있어 그곳에서 건과일과 사탕을 샀다. 값이 싼 편이다.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국경선을 넘는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넘듯 국경선은 그렇게 가볍게 통과 되었다. 참으로 부러운 국경선이다.
* 라트비아 인간 띠의 길,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에서 국경선을 넘어오자 곧바로 인간 띠의 길이 나타난다. 리투아니아에서 보았던 그 출발점이 떠오른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600㎞의 길이다. 1989년 8월 23일 이 길에 200만 명이 모여 줄을 서서 자유를 외치던 길이다. 그로 인해 1991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수십 년 간 품어온 독립의 염원을 성사시킨 길이다. 인간 띠의 길, 그 위대한 족적의 길 한 도막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 발트의 길로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 되었다.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발트3국은 도시간 거리가 상당하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끝없이 숲과 평야가 펼쳐진다. 그런 숲과 평야의 한 가운데 길에 사람들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 당시엔 승용차 소유 국민이 10% 정도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정시에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600㎞에 이르는 거리를 독소 불가침 조약 50년을 상징해 50구획으로 나누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매 4㎞ 구간마다 리투아니아 전통 제단을 세웠다. 성스러운 불이 점화된 전통 제단의 수 역시 50개였다. 행사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람들을 운송할 차들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버스회사들은 버스 노선을 급하게 바꾸면서까지 협조했다. 세 나라를 잇는 도로 위에 사람으로 가득찼다. 사람들 위로는 민간비행기가 그 역사적인 장면을 촬영했고, 사람들은 국가를 부르며 국기를 흔들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저녁 7시에 펼쳐졌다. 7시가 되자, 그곳에 모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15분 동안 함께 손을 맞잡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라이스베스laisves, 라트비아 사람들은 브리비바briviba,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비바두스vabadus라고 외쳤다. 600㎞에 걸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자유라고 외친 것이다. 동시에 각 마을과 도시의 성당에서는 그 시각에 맞춰 종소리를 울려댔다. 어떤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서 1살짜리 손녀와 함께 집에서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7시를 기다렸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손녀의 손을 잡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로 중계됐다. 소련의 무력진압은 없었고, 행사는 대성공을 이뤘다. 그 후 1990년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선포했고, 1991년 마침내 소련으로부터 발트3국 모두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인간 띠의 길, 발트의 길은 총 한 자루 사용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엄청난 결과를 얻었다. 이 길은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도 기록됐다. 발트의 길이 성공하자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소련 내 다른 공화국에서도 억압에 대항하는 인간 띠를 만들었다. 지난 2004년에는 대만에서도 2·28학살, 1947년 2월 28일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장제스 정부가 대만 현지인 2만여 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을 기념하는 대규모 인간 띠 행사가 열렸다. 지구를 감싸는 띠를 만드는 장면은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에도 나올 정도로 평화와 인류 화합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 띠의 길, 발트의 길은 살상용 무기와 학살이 난무하는 전쟁에 경종을 울리고 인류 화합에 대한 은은한 메아리를 울려주는,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 길을 지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에스토니아에서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도중에 만난 길이다. 여전히 숲은 울창하고, 그날을 회억하듯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길이다. 평화롭고 위대한 인간 띠의 길을 지나는 것은 세계여행 중에서도 아주 뜻 깊고 소중한 여정이다.
* 라트비아에서 보는 발트 해
에스토니아에서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중에 도로변의 발트 해를 잠깐 보았다. 발트 해의 항구를 지나간다. 그리고 숲 사이로 발트 해 해변이 보인다. 숲이 울창하여 많이 보이진 않지만 소나무 군락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북유럽을 여행할 때 핀란드 헬싱키에서 스웨덴 스톡홀롬으로 발트 해 크루즈 배 실야라인을 타고 가던 지난 여정이 떠오른다. 하룻밤을 배에서 유숙하며 발트 해의 일몰과 일출을 보던 그 발트 해가 아닌가. 지금 발트 해의 서쪽 길을 달리고 있다.
* 라트비아 숲속 도로 버스 정류장
끝없이 이어지는 숲속 도로변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산 깊은 곳에 누가 살까 싶은데 종종 저런 정류장이 지나간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 있다. 양쪽에 똑 같은 모습의 정류장이 마주 보고 있다. 눈이 저리도록 차창을 수놓는 숲길에서 사람의 숨결을 보는 애잔한 영상이다.
* 라트비아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 도로
이곳 소나무들은 독특한 모양이다. 붉은 다리를 곧게 뻗어 하늘로 오른다. 이 나라의 소나무는 종류가 2가지다. 아래에서부터 가지가 나오는 가문비 소나무와 저렇게 키만 쑥 크고 위에만 가지가 있는 소나무다. 붉은 다리의 소나무 숲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다리가 하얀 자작나무 숲 도로가 나온다. 저런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 도로가 라트비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 특징적인 것 중 하나가 여러 나라에서 저런 울창한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을 보아왔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감탄하며 시선을 집중한다. 우리나라에서 잘 보이지 않는 풍경이 나왔을 때 내가 세계 어느 곳에 머물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발틱 3국 중 라트비아의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 도로를 지나고 있다.
* 라트비아의 들녘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라트비아 들녘을 달릴 때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 라트비아는 11월 초부터 4월까지는 기온이 영상 4도 이상 오르지 않는다. 겨울에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밖에 해가 나지 않는 나라다. 6월에서 8월의 낮 시간에는 보통 14도에서 22도 정도까지 기온이 오른다. 7월과 8월은 가장 더운 시기이지만 소나기가 지속적으로 온다. 이런 기후에 대하여 알고 왔는데 정말 화창하던 여름 날씨를 보다가 눈앞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니 놀라우면서도 이것이 세계여행이라는 대목에 이르게 된다. 버스 운전기사는 사정없이 와이퍼를 눌러 작동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또 비가 언제 왔냐는 듯이 그치고 햇살이 나오기도 한다. 날씨의 상큼한 선물이다. 라트비아 들녘에서 만난 소나기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라트비아 리가의 강과 호수
라트비아에는 호수가 많다. 리가 도심을 흐르는 큰 강도 있다. 라트비아 들녘을 지나, 리가 시내에 다다를 무렵 우람한 강과 호수를 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호수에서 수영과 요트 등 수상 스포츠를 즐긴다. 산이 없는 나라에서 큰 강과 호수를 보는 것은 신기한 체험이다.
* 라트비아 리가 시가지
라트비아 리가 시가지에 들어왔다. 이번은 여행을 하기 위해오는 것은 아니다. 리가 여행은 지난번에 다 했고, 오늘은 내일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내일 라트비아 리가공항에서 러시아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환승할 것이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여기에 왔다. 리가 시가지에 진입하지 낯선 풍경들이 들어온다. 오래된 러시아 시대의 집도 보이고, 잔디 위에 놓은 전차설로도 보인다. 갑자기 내리던 비는 잦아들고 있다. 리가 시내의 도로에도 빗물이 고인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비가 내린 것 같다. 도로 바닥에 깔린 전차 레일을 보며 점점 구시가지로 들어설 때 웅장한 건물들이 시선을 끈다. 전차도 이색 풍경으로 다가온다. 공중에 매달린 전선을 따라 차가 움직인다. 세계여행 중에서 유숙했던 Radisson Hotel이 높은 자태로 시야에 반갑게 들어온다. 지난번 여행에서 보았던 자유의 기념비도 높다랗게 솟아 있다. 해는 서편으로 기울고 촉촉하게 노을이 깔리는 저녁이다. 리가 도심을 흐르는 다우가바강이 드넓은 품사위로 시야에 담긴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정경이다.
* 라트비아 리가 다우가바 강변
리가는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의 도심에는 큰 강이 흐른다.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다우가바강이다. 러시아에서 발트해로 흘러들어 가는 이 강은 아주 크다. 버스가 이 강변을 따라 달려오며 비경을 선사한다. 강다리와 강변의 건물들이 장관이다. 저녁 어스름 석양 풍경이 더욱 큰 낭만을 깔아준다. 다우가바 강변에서 내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한인식당으로 갔다. 한국은 오늘 최고기온이 38도로 살인더위라고 한다. 이곳은 20도 정도로 쾌적하고 상큼한 날씨다. 같은 지구상인데 세상은 분명 이렇게 다르다.
* 라트비아 리가 한인식당 석식
이번 동유럽 5개국 여행지는 한인 교포가 많이 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한인식당도 지금이 처음 온 곳이다. 설악산이라는 영문 상호가 걸려있다. 라트비아 리가의 구시가지 골목 입구에 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메뉴는 육개장인데 음식보다 더 진한 시선을 끄는 것은 내부 풍경이다. 한국 전통적인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다. 고추, 부채, 하회탈, 키, 수묵화, 한국어 액자 등이 고국의 향수를 진하게 부른다. 어디에 살던지 내 조국을 잊겠는가. 조국을 식당에 품고 사는 모습이 보여 동포애가 진한 전율로 느껴졌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나의 조국을 이국에서 만나는 순간이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우리 동포들이 조국을 자랑스럽게 품고 사는 모습을 보아왔다. 나 또한 어느 곳에 있던지 항상 나의 조국을 사랑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아직 밖은 환하다. 북쪽 나라의 여름은 백야기로 늦게까지 환하다. 다시 다우가바 강변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갔다.
* 라트비아 리가호텔 도착
이곳 호텔은 두 번째 온 곳이다. 지난번 라트비아를 여행할 때 왔고 이번에는 에스토니아까지 여행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들렀다. 하룻밤 유숙하고 내일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왔다. 주변의 푸른 숲과 아름다운 정원이 우리를 반긴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라트비아 리가 출발, 모스크바공항 환승
* 라트비아 리가호텔 출발
오늘은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나무도 많고 상큼한 풍경이다. 이 호텔은 상호가 코끼리 호텔이다. 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는 모르나 호텔 안과 밖에 크고 작은 코끼리 동상이 있다. 울창한 정원과 코끼리 동상이 참으로 아름답다. 호텔 바로 앞에는 오래된 러시아 시대의 집도 있다. 여러 가지 독특한 풍경들이 훈훈하게 가슴에 저장되는 순간이다. 버스가 일찍 와서 우리를 기다린다. 버스기사는 러시아 사람이다. 리투아니아에서 살며 손녀를 본 47세 할아버지란다. 7박 8일 5개국 일정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벨라루스까지만 기차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스로 이동했는데 이 버스로 이 운전기사가 끝까지 운행했다. 그런데 운전을 참으로 잘한다. 아주 안정적인 속도로, 아주 밝고 편안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해주며 평화로운 여행으로 이끌었다. 오늘 아침 감사하다고 인사했더니 나와 사진도 함께 찍어주고, 버스 운전석에 앉아보라하고 호의를 베풀어준다.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될 여정이다.
* 라트비아 리가 오래된 집
발틱3국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는 오래된 집들이 많다. 1991년 독립하기 전 러시아시대의 주택들이 도심에 그대로 남아 있어 종종 보인다. 어제 에스토니아에서 리가로 돌아올 때 그런 집을 리가 시내에서 보았는데 오늘 아침 리가호텔을 출발하려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산책하다가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아주 오래된 집을 또 보았다. 지붕 아래에 1937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76년 집이 우람하게 서 있다. 겉은 좀 허름하지만 견고해 보인다. 색상과 지붕 모양 등 집의 형태가 어제 보았던 그 집과 유사하다. 지배에서 벗어났고, 독립했는데도 그 시대의 집을 그대로 소유하고 사는 모습에서 애잔한 감동을 준다.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 더욱 고운 정취를 자아낸다. 바로 앞 도로에는 우리를 태우고 공항으로 갈 버스가 있다. 이제 리가를 떠날 시간이다.
* 라트비아 리가공항 가는 길
호텔에서 오전 9시 30분에 버스가 출발하여 리가공항으로 간다. 여행을 미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공항이 있다. 리가 시가지를 벗어나 울창한 나무숲 도로를 달린다. 우람한 나무와 키가 큰 자작나무들이 마지막 이별을 고한다. 많이도 보아왔던 저 나무들이 아쉬운 정경으로 가슴에 담긴다. 상가의 크기를 나타낸다는 붉은 X 표시가 4개나 되는 건물도 자나간다. 1개면 작은 규모, 2개면 큰 규모라던 저 표식이 4개인 것으로 보아 꽤나 큰 상가인가보다. 여전히 자작나무 숲이 차창에 어리고 라트비아의 고운 풍경을 보는 시간이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스쳐지나가는 순간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버스는 이제 큰 도로에서 나와 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리가공항 건물이 보인다. 서서히 공항으로 진입한다. 아담한 라트비아의 리가공항에 나의 족적을 남기는 여정이 흐뭇하다.
* 라트비아 리가공항
에스토니아에서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라트비아로 내려와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곳 리가공항에 온 것이다. 여기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인천행으로 환승한다. 날씨는 덥지도 않고 알맞은 온도로 쾌청하다. 리가공항은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하다. 티켓팅을 마치고 게이트를 향해 갔다. 낯선 나라에서는 글자 하나도, 물건 하나도 신기하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공항에서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표기하기 때문에 쉽게 소통이 되긴 한다. D게이트를 향해 가는데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TV가 시선을 끈다. 내 조국의 향수가 배인 물건이 자랑스럽고 반가웠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리가공항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초록 나무숲이 장관이다. 투명한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구름도 아름답다. 이국의 하늘이라고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 라트비아 리가공항 출발
오전 11시 45분 모스크바행 러시아 항공 비행기는 정시에 리가공항을 출발한다. 우리 부부의 자리는 3, 3 좌석제에서 17A, 17B로 창가 좌석이다. 활주로로 진입할 때 공항 주변은 온통 푸른 나무숲이다. 라트비아 여행 중 그렇게도 많이 보아왔던 나무숲을 마지막 떠나는 이곳 리가공항에서도 두 눈에, 가슴에 새겨진다. 그래 모두 품고 가리라. 북쪽 나라의 청명한 하늘과 하얀 구름과 청빛 나무숲의 고요를 두 눈에, 가슴에 뜨겁게 저장하였다가 먼 후일 내 영혼이 곤고해질 때 꺼내보며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부르리라. 세계여행이 주는 황금 같은 이 행복을 마디마디 담아가리라. 이륙 준비를 하느라 승무원들도 바삐 움직인다. 러시아 항공의 상징 색인 주황색 제복을 입은 여승무원이 승객들의 안전을 살펴준다. 주황색 날개 끝이 고운 비행기는 힘찬 질주로 이륙했다.
* 라트비아 리가 상공
이번에 여행한 5개국은 공통점이 모두 산이 없고 평원이라 점이다. 그리고 그 평원에는 나무숲이 많고 호수와 강이 많다. 러시아 항공 SU2101 비행기가 창공을 향해 힘차게 비상할 때 라트비아 리가 상공은 어김없이 온통 푸른 물결이다. 더러는 반듯하게 다듬어 놓은 경작지도 보인다.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다우가바 긴 강이 도심을 큰 획으로 긋는다. 리가 도시는 나무 반, 건물 반이다. 나무 속에 사람이 사는 곳인지, 사람 속에 나무가 사는 곳인지 나무와 사람들의 건물이 구분되지 않는 풍경이다. 상공의 구름은 몽실거리는 솜털처럼 아름다운 덩이로 떠 있다. 비행기는 그 구름층을 서서히 뚫고 창공으로 진입한다. 코발트빛 청명한 하늘과 상면하며 하얀 구름 융단 위를 비행기의 몸을 빌어 날고 있는 지금, 나는 다 비운 무념의 평화다.
* 러시아 모스크바 상공
러시아 모스크바 상공에 가까이 진입하자 탁한 구름층이 걸쳐있다. 라트비아에서 본 하얀 구름이 아니다. 구름층을 뚫고 점점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러시아 지상은 온통 푸른 물결이다. 산이 없는 평평한 땅에 파란 나무숲과 호수와 마을군락이 비경을 자아내고 있다. 모스크바 강이 길게 흐르는 모스크바 시가지에도 나무숲은 여전히 많고 고운 색상의 집들이 동화 속 세상 같다. 나는 몇 년 전 북유럽 여행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갔다. 그때도 8월이었다. 지금처럼 저렇게 파란 도시가 나의 가슴을 많이도 벅차게 했는데, 오늘도 나는 모스크바 상공의 푸른 물결에 이국의 진한 감동이 스며든다.
* 러시아 모스크바공항 도착
발틱3국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5개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중이다. 라트비아 리가 공항에서 온 비행기가 모스크바 공항에 낮 3시경 정시에 착륙했다. 라트비아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다. 라트비아와 러시아 모스크바와는 1시간의 시차가 있다. 모스크바가 1시간 빠르다. 그래서 라트비아 시간으로는 낮 2시인데 이곳 시간으로는 낮 3시다. 활주로를 달리는 러시아 항공 에어로플롯의 주황색 날개 끝이 곱다. 모스크바 공항 건물도 가까이 다가온다. 인천행 비행기를 환승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 러시아 모스크바공항에서 환승
인천행 비행기가 밤 9시 40분에 있다. 라트비아 리가에서 온 비행기가 러시아 현지 시각으로 낮 3시경 도착하여 환승대기 시간이 길다. 보딩타임이 9시다. 입국수속과 환승구역으로의 이동시간을 제하고 5시간 정도 모스크바공항에서 머물며 휴식했다. 지난번에 갈 때도 마찬가지로 이곳 모스크바공항을 경유했다. 그때는 F구역 48번 게이트였는데 이번은 D구역이다. 자막에 아직 게이트는 나오지 않는다. 둥근 선으로 위치한 모스크바공항에는 러시아 항공 AEROFLOT 비행기가 많다. 우리도 왕복 그 비행기를 이용한다. 투명한 하늘에 흰구름이 떠 있어 북극 나라의 고운 정취를 자아낸다. 그리고 러시아 항공 에어로플롯의 타이틀 색인 주황색이 공항 건물에도 장식되어 있어 아름답다. 승무원들도 주황색 제복을 입고 비행기 날개 끝에도 주황색으로 포인트를 준다. 유리창 밖의 이런 저런 공항 풍경을 보며, 공항 내부도 둘러보며, 또는 면세점에 들러 러시아의 물건들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밤 9시가 다 되는데도 아직 밤기운이 돌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러시아 여행을 할 때도 8월이었는데 밤 11시 무렵이나 되어야 어두워졌고 또한 새벽 3시경에 환해졌었다. 여름은 백야기라서 낮이 이렇게 긴 것이다. 게이트가 모니터 자막에 뜬다. D구역 28번이다. 바로 옆에 있는 탑승 게이트로 이동했다. 게이트 앞에서 대학 동창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북유럽 여행을 마치고 가는 중이란다. 먼 나라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신기하고 참으로 반가웠다. 많은 시간을 보낸 모스크바공항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러시아 모스크바공항 출발
어스름 석양빛이 돌 때 러시아 항공 SU250 비행기에 탑승했다. 원래 밤 9시 40분이던 비행기가 15분 연착하여 밤 9시 55분에 출발한다. 승객들이 자리에 착석하고 이륙 준비를 하는 동안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서서히 비행기가 활주로로 이동한다. 이제 조국으로 돌아간다.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 그리고 그 고요한 들녘이 많이도 그리울 것이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에스토니아 탈린까지 기차로, 버스로 5개국을 관통했다. 새로운 세계의 국가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가는 뜻 깊은 여정이다.
* 러시아 항공 기내 모니터
러시아 항공 기내 모니터가 의자 바로 앞 등받이에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한국 서울 인천공항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비행노선도가 모니터자막에 뜬다. 지금 몰골 고비사막 상공을 날아가고 있다. 비행기 창밖으로 몽골의 사막이 보인다. 나는 지금 몽골 사막지대를 날고 있다. 러시아 항공은 좌석이 2, 4, 2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 부부는 창가 쪽 2개의 좌석 32H, 32K에 앉아 있다. 모스크바에서 밤에 출발한 비행기가 점점 낮으로 진입하여 서울로 날아간다. 인천에서 모스크바로 갈 때 보았던 영화 ‘남과 여’의 후속으로 나온 ‘남과 여 20년 후’ 영화를 보며 기내의 시간을 아름답게 보냈다. 환상의 주제곡 음악도 좋고, 주인공 남자의 20년 후에도 홀로 사는 모습이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세계여행 중 기내에서 보는 영화는 항상 큰 감동으로 남는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인천공항 도착
* 인천공항 도착
비행기가 인천공항 상공에 진입한다. 고도를 빠르게 낮추며 빙그르 돌아 인천 바다 위를 낮게 비행한다. 섬들이 바다 위에 아름답게 앉아 있다. 우리나라 공항 주변의 아름다운 비경이다. 러시아 항공 SU250 비행기가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쾌청한 내 조국의 여름날이다. 모스크바에서 인천까지 8시간 35분 정도의 비행시간을 거쳐 오전 11시 10분 예정시간에 맞춰 정시에 착륙했다. 갈 때보다 1시간 정도 단축된 비행시간이다. 트램을 타고 공항 터미널로 이동하여 입국수속을 밟았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매우 더운 날씨다. 북유럽 여행 중에도 약간 더울 때가 있었는데 그 더위보다 훨씬 강한 더위가 몸을 휘감는다. 이런 것도 세계여행에서 체험하는 하나의 배움이다. 동일한 지구상에서 같은 날에도 날씨는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며 귀가를 위해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 내 조국의 아름다운 풍경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내 조국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잠시나마 외국에서 보았던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꼈었는데 리무진 창밖의 내 조국 풍경은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외국에서 저런 풍경을 본다면 감탄할 것이다. 바다와 산, 그리고 풍요로운 들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놀라운 비경이다. 집을 떠나면 집의 소중함을 안다고 했던가. 조국을 떠나보면 조국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빛나는 한반도 금수강산이다. 오늘 따라 하늘은 왜 이리도 청청한가. 북유럽에서 청청한 하늘과 하얀 구름이 눈부실 때 부러워했는데 지금 내 조국의 청청한 하늘과 하얀 구름이 눈부시게 빛난다. 하늘과 구름까지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내 조국을 나는 지금 가슴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첫댓글 구경 잘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