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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웅 성가모음 No. 1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mp3
밑에 한웅씨의 스토리가 나와 지난 날이 생각이 나서 올려봅니다.한웅씨와 본인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내가 3년전에 한웅씨와 인터뷰하여 교회잡지 '한마음'에 수록한 내용의 원본입니다. 한웅씨 본인이 크리스천이고 교회잡지에 실기위한 인터뷰이기에 기독교 색체가 짙지만 재미있는 연예소식도 많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그 분의 모친, 장세정 여사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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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의 커피 한잔
대담: 한 웅(가수, 찬양사역자)
강원경(한마음 편집위원)
“지난 날의 가수생활은 오늘의 찬양사역을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한웅 집사. 그만큼 찬양사역은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원한 뮤직맨, 한웅
중년 이상의 음악 팬이라면 누구나가 기억하고 있는 ‘초원’, ‘메아리’, ‘정주고 내가 우네’ 등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던 가수 한웅이 본교회 8교구 11구역에서 구역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한웅 집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또한 그의 어머니가 한국 대중음악 초창기의 전설적인 가수, ‘연락선은 떠난다’의 주인공이었던 장세정 여사임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왕년의 인기 그룹사운드 ‘히 파이브(He 5)’를 창단하고 리드싱거로 활약했던 ‘가수 한웅’이 무대를 떠난지는 이제 오래 되었다. 그를 비춰주던 스팟 라이트도 꺼진지 오래이다. 그의 노래에 환호하던 소녀팬들도 이제는 중년부인들로 변해 있을 것이다. 한웅씨 자신도 이제64세의 나이로 초로의 인생길을 걷고 있다. 그 동안 세월은 흘러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음악 속에 살고 있다. 일생을 음악과 함께 해 온 영원한 뮤직맨, 한웅! 그의 음악인생의 전반기가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던 대중가요였다면 다른 음악이 후반기를 장식하고 있다. 이제는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사역이 그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화려했던 무대 위에서의 ‘가수 한웅’보다 알아주는 사람은 없을찌라도 지금의 ‘찬양사역자 한웅’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어째서일까? 철학자 파스칼에 따르면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빈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 공간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어떠한 인생이라도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고 파스칼은 말한다. 한웅의 가슴 속에는 그 공간이 채워졌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 속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은 것이다.
그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한웅을 만나보기 위하여 ‘한마음’에서는 오렌지 카운티의 ‘라팔마(La Palma)’시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의 빈 공간도 채워졌는가?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비어있는가? 아직도 인생이 허전한 것인가? 아직도 그 공간이 채워지지 않았다면 한웅과의 대화를 들어보자. 이 기회를 통하여 한웅이 발견한 하나님을 당신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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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경: 언젠가 고국의 '바람새'라는 음악 웹사이트에서 사람들이 한웅 집사님의 노래, ‘메아리’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데 '김은실'씨라는 분이 이렇게 말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여러 가수들이 메아리를 불렀지만 한웅씨의 메아리가 훠얼~씬 낳지 않은가요?”라며‘훠얼~씬’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한집사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금한 점이 많지만 우선 집사님께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된 동기가 궁금하네요. 어머니의 영향이었나요?
한웅: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본래는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스스로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그리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보다는 스포츠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휘문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이스하키에 열중했고 그 때문에 중앙대학교 아이스하키팀에 특기장학생으로 스카웃되어 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서구사회의 팝 컬쳐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어요. 그 때 영국가수 클리프 리챠드를 비롯한 미국과 영국의 노래들이 한국에 많이 몰려들면서 어디를 가나 이런 노래들이 넘쳐났어요. 그러면서 청년들 사이에 팝 뮤직에 관심이 높아졌지요. 저도 그들의 음악을 접하면서‘ 나도 저것을 해보고 싶다’라는 강한 도전감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대학교 2학년 때 휴학계를 내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을 모아 1965년에 ‘퍼가이스(Four Guys)라는 이름으로 4인조 그룹사운드를 결성하여 정식 데뷰를 하고 음반까지 취입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상 1966년에 퍼가이스는 해체되었고 그 뒤를 이어 ‘히 파이브(He 5)를 창단했습니다.
1966년의 히파이브. 왼쪽에서 첫번째가 한웅 집사.
히파이브는 시작부터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1967년부터 1968년까지가 히파이브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죠. 당시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사회를 맡아 진행하던 한국 최고의 TV쇼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에서 히파이브를 위한 고정출연 시간을 할애할 정도였으니까요. 히파이브는 1970년까지 활동하다가 1971년에 해체되었습니다.
히파이브 해체의 주원인은 제가 해외진출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팝 문화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 파이브를 해체하고 그린 피플(Green People)이라는 새로운 보컬그룹을 결성하여 해외진출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멤버들의 병역문제로 출국이 어렵게 되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결국은 저 혼자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한웅 집사가 창단한 세번째 보컬그룹이었던 그린피플. 그린피플은 당시 라스베가스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씨스터즈의 초청으로 라스베가스 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조직된 그룹으로 두 여성 멤버들은 김씨스터즈의 김민자씨 친동생들이다.
강: 저 개인적으로는 집사님의 노래 가운데 ‘정주고 내가 우네’를 가장 사랑합니다. 노래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사가 성경에서 많이 보던 말과 너무 비슷하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장애인 선교를 하고 있는 ‘쟈니 에릭슨 타다’는 ‘하나님께서 우실 때 (When God Weeps)’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정말 예수님께서도 ‘정주고 우셨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죄 속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어 신(神)이시면서도 이 세상의 우리를 방문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모를 감내하셨습니다. 그 이유 역시 노래의 끝부분 가사 “너무나도 사랑했기에!”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가 아니겠어요?
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랑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에서 사랑의 표현이 성경에서의 표현과 닮은 유사점을 자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강: 가수라는 직업이 유혹도 많고 일요일에도 일해야 하고 여러 면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에는 어려운 환경이라고 생각됩니다. 집사님께서는 어떻게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크리스천 라이프를 살 수 있으셨는지요.
한: 저에게는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고모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 할머니를 보면 언제나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이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할머니께서 저렇게 사실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할머니의 삶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찌기 어려서부터 교회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에나 가수로 활동할 때에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은 빼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연히 할머니의 영향이었지요. 집안에 이런 귀한 믿음의 조상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할머니의 모범을 따라 자손들에게 이러한 믿음을 전수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강: 집사님께서는 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선교사업에 헌신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199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사업에 깊이 관여해 왔습니다. 전부터 선교란 그 본연의 성격상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기에 성도의 가장 커다란 의무의 하나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1998년에 남창식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화나(Tijuana)와 바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샌 시미언(San Simeon), 그리고 최근에는 뉴멕시코주에 거주하고 있는 나바호(Navajo)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에 참여해 왔습니다.
2000년 애리조나의 나바호 인디언 부락에 선교여행 중 인디언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강: 무엇보다도 찬양사역에 매우 적극적이신데 어떤 동기라도 있었는지요.
한: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다보니 신앙이 형식적인 쪽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개인적인 삶에 어려운 문제도 많이 경험하게 되었고요. 여러가지 어려움속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친지들에게 떠밀리다시피 참석했던 찬양집회에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받은 은혜가 너무도 귀해서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음악을 한 사람이기에 음악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며 기도하던 중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어 FM 라디오방송을 하고 있던 이종환씨의 도움으로 1992년부터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라는 기독교 음악방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선교사님들의 말씀을 기독교 음악과 함께 진행했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아서 2002년까지 10년간 계속 했습니다.
특히 감사했던 것은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방송한 ‘FM서울’이 기독교 방송이 아니고 일반 방송이었기 떄문에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반 청취자들까지도 자연스럽게 찬양을 통해 쉽게 복음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국어 라디오방송, 'FM서울’에서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진행하고 있는 한웅 집사.
강: 찬양사역 중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스펄 뮤직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봅니다. 개중에는 믿음과는 전연 상관없이 시대의 유행따라, 혹은 단순한 상업적인 이유로 가스펄 뮤직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이 결여된 채 음악적 자질만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들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런 음악들은 단순히 울리는 꽹과리와 같아서 사람의 영혼을 흔들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10년동안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을 진행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어느 것이 참다운 가스펄 뮤직인가를 구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곡을 찾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힘도 들었지만 때때로 청취자들로부터 사랑의 노래들로 인하여 삶에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었다는 격려의 편지를 받을 때 힘이 났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찬양방송의 특징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누가 그 곡을 부르는지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찬양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 누가 불렀고 누구에게 크레딧이 돌아가야 하느냐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모든 영광은 부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 장래의 계획이 계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한: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지나간 가수생활은 오늘의 찬양사역을 위한 준비기간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만큼 찬양사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노래하는 탤런트를 주님으로부터 받았지만 막상 찬양사역에 나서려니 웬지 두렵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숙해지고 이만하면 됐다 할 때까지 기다리며 자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주의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그 때라면서 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1997년 찬양곡 1집도 준비했습니다. 찬양곡 1집은 본래부터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용 찬양곡들이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제 2집까지 취입을 했습니다. 아직 확정적인 계획은 없지만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서 늦기 전에 좀 더 노래할 수 있을 때에 제3집을 취입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애틀이나 포틀랜드 지역 등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의 작은 규모의 한국 교회들이 찬양사역을 하고 싶어도 힘이 부족해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이 교회들을 순방하며 찬양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찬양사역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강: 많은 사람들이 집사님의 어머니, 장세정 권사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까?
한: 어머니께서는 5년전인 2003년에 83세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강: 한국일보의 이철 주필이 소개하는 장세정 권사님의 일대기에 의하면 생전에 1천곡이 넘는 많은 음악을 취입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그 정도라면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가히 기록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와 같이 음악활동을 하기에 열악한 환경에서 1천곡이 넘는 레코드 취입이라는 한 가지만으로도 장세정 권사님의 한국 대중음악에서의 위치를 가늠해 볼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한: 어머니께서는 16세 때 평양의 화신백화점에서 레코드 담당점원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서울의 OK레코드사가 평양에 와서 콩쿨대회를 열었는데 거기서 1등으로 뽑히면서 가요계에 데뷰하게 되었지요. 데뷰곡 ‘연락선은 떠난다’는 당시 일제치하에서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연락선을 타고 떠나며 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불운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제시대에는 어머니의 노래가 일본인들 사회에서도 인기였기 때문에 한국인 가수로는 최초로 일본최고의 공연장인 국제극장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재일교포 위문 공연을 자주 다니셨던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밴드매스터로 일하던 무명의 길옥윤씨를 고국으로 불러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73년에 제가 초청하여 도미하셨는데 원래 혈압이 높으셨어요. 그런데 혈압관리를 잘못하여 1976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지시면서 언어장애와 행동장애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국에서 가요무대등 여러 가지 무대에서 섭외가 왔지만 응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어머니의 음악생활을 총정리하는 마지막 은퇴공연 무대를 마련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동이 어려우셨기 때문에 고국에 가서 은퇴공연을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1978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갖기로 하고 공연장을 물색했습니다.
그 중에서 규모에서나 명성에서나 당시 로스앤젤레스 최고의 공연장이었던‘슈라인 오디토리엄(Shrine Auditorium)’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곳의 임대규정이 까다로와서 임대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곳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사용할 만큼 품격을 갖춘 공연장이기에 돈만 낸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장소를 내놓질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당시 급성장하던 한국인 커뮤니티의 위상을 고려해서 임대를 허락했습니다.
어머니의 은퇴공연 소식이 전해지자 고국에서 30여명의 후배가수들이 우정출연을 위해 L.A.까지 찾아 왔습니다. 6500석의 좌석은 완전매진되었고 5백여명의 교포들이 그냥 돌아가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소를 못빌려 주겠다며 배짱부리던 슈라인 오디토리엄측에서 깜짝 놀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장세정이 누구길래 이렇게 표가 다 매진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이들이 L.A.교포사회의 행사에 호의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강: 저도 30년전 로스앤젤레스의 한국어 TV방송을 통해 그 은퇴공연에서 장세정 권사님이 ‘고향초’를 관중들과 함께 부르시던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고향초’야말로 타향을 헤매는 모든 사람들에게 엄마의 포근한 품을 생각나게 해주는 명곡으로 장세정 권사님이 우리 한민족에게 남겨준 불멸의 문화적 유산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한국 최고의 인기가수이기도 하셨지만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어머님께서도 고모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지요. 그러나 고혈압으로 건강의 위기에서 회생하신 후 좀 더 하나님 앞으로 다가가신 것 같습니다. 동양선교교회에서 권사로 임명을 받으셨는데 권사 임명을 받을 때가 일생에서 가장 기뻣다고 말씀하시면서 권사임명장을 액자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셨지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확실히 보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가장 즐겨 부르신 노래는 ‘연락선은 떠난다’가 아니라 찬송가 356장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였습니다.
초창기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레젼드(Legend), 장세정 여사. 그녀는 1천곡이 넘는 기록적인 레코드 취입과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한국 최고의 인기가수였으나 가수 장세정보다는 ‘장세정 권사’로 불리워지는 것을 더 기뻐했다. 세상의 인기보다도 주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이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강: 끝으로 집사님의 올드팬들 중에서도 무신론자 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저는 하나님을 믿어 덕을 많이 본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도 필요한 도구는 “믿음”이 아니겠어요?
재물, 명예, 권력… 물론 이런 것들을 다 갖출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한들 이런 것들은 여전히 임시적인 물건들 아니겠어요? 영원히 갖고 싶겠지만 영원히 내 것일 수는 없는 일이지요. 놓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쓰며 꼭쥐고 있더라도 쥐고 있던 내 손아귀에 힘이 풀리는 날이 오면 할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오면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빈 손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제외한 모든 것은 결국 2차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을 찾지 못한 여러분들께 강권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 주님을 영접하세요. 당신의 삶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 한민정씨와 자택의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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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웅 님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소중한 글 잘 보았습니다.
한웅님의 어머님 장세정 권사님께서 그렇게 유명하신 가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특히 정주고 내가 우네란 곡이 복음과 관련된 가사였다는 사실에 적지않이 놀랐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그렇죠. 옛날에 최고의 인기있는 노래라면 이난영 여사의 "목포의 눈물"과 장세정 여사의 "연락선은 떠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노래가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이라고 말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을겁니다.
히파이브 멤버이셨던 한웅님과 그의 어머니 장세정님의 얘기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군요

참 따땃해 보이십니다



김은실님 이름도 나오는 것을 보니 강원경님도 windbird 초창기 멤버신가요

눈팅멤버였어요
가스펠 송을 들으니...예전과는 또 다른 느낌
전
어쩐지 욜렛여사님과 동료의식을 느낍니다. 나도 그냥 "걍 눈팅멤버"였거든요. ^_^
메아리 곡을 참 좋아하는데 한웅님 글 잘보았습니다. 성가집도 관심이 생깁니다."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위로받고 감동 받았습니다(교회 나가고 싶은 충동)감사합니다
한웅씨에게 얘기했더니 성가집을 보내드리겠다고 합니다. 나의 이메일로 주소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할께요. 나의 이메일 주소는 my5won@yahoo.com입니다.
옛날 윈드버드 시절에 김은실님이 소나무방송을 진행하실 때 '메아리'란 노래를 여러 가수들의 버전으로 들려주셨죠. 히파이브, 김훈과 트리퍼스, 김미경 등...
전 개인적으로 김미경씨가 맑은 음성으로 부른 '메아리'를 좋아하지만 다른 분들의 노래도 개성있고 듣기 좋습니다. 그 노래가 좋아서 그런지...ㅎㅎ 그런데 한웅님이 휘문고 출신이며 아이스하키를 하셨다면 백순진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네요^^
한선생님에게 물어봤더니 나이 차이 때문인지 모르겠다는군요. 아마도 백선생님이 한 4-5살 연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1970년에 도미했기 때문에 아마 4월과 5월의 출범을 못보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 분다 비슷한 인생의 코스를 걸어오신 것 같군요. 그런데 포선생님이 김은실씨와 친하신가보네요. 나도 친구인데... 그렇다면 김은실씨 건너서 서로 친구 사이니까, 이거 사돈이라구 불러야 할지... ^_^ 그리구 포크세대 신선생님과 사촌지간이라면서요? 어째 세상이 이리 좁습니까? 사실은 신선생님께 노래를 여러개 얻었거든요. 어쨋든 반갑습니다.
한웅님이 한국에 계셨으면 백순진님을 당연히 아셨을텐데요. 지금 말레이지아에 계신 김은실님은 제가 아주 잘 알지요. 예전에 제가 그분 댁을 방문하여 인터넷방송을 한번 한적도 있었습니다. 부군이신 변선생님과 술도 자주 마셨지요. 포크세대님은 지금도 저의 음악 자문을 해주시는 아주 고마운 분이죠. 그분도 술을 좋아해서 포항에 가서 가끔 한잔씩 기울입니다^^
이제 좀 파악이 되네요.포크세대님과는 친사촌은 아니지만 종씨에다가 돌림자까지 같아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군요. ^_^ 그리구 아까 잠시 바람새친구에 들렸다가 포선생님 사진을 봤습니다. 본명은 포크락이지만 호는 '김경'선생님 맞지요? 김은실씨가 때때로 "ㄱㄱ"이라고 표기하기도하던... 전에 소나무방송에서 김선생님께서 방송하시던 것과 그 때 듣던 노래 몇곡을 녹음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거시기, 남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던 노래를 들려주시던 일도 기억이 나네요. 반갑습니다.
ㅎㅎ 포크세대님은 비록 사이버 음악카페에서 만났지만 친하게 지내고 있고 사촌이라고 한 것은 그냥 제가 농담을 한 것입니다. 강선생님은 그냥 바람새 회원이셨던 것이 아니고 아주 상세히 아시네요. 바람새에서 만난 약 20여 분들은 지금도 가족 같이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한국 나오시면 바람새친구와 사오모님들과 함께 만나시죠.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어쩌다 보니 고국에 다녀온지가 벌써 20여년이 흘렀네요. 인생이 바쁘다 보니 세월만 빨리 흘러가는군요. 사실은 고국에 대한 향수때문에 이 곳에 찾아오게 된 것인데 수십년전에 들은 후 한번도 못들어 본 노래들이 많습니다. 정말 감동되는 때가 많죠. 4월과 5월, 바람새친구, 소나무방송,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