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인하여
-남궁영미 수녀-
누구나 한 번쯤 ‘회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워지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회개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의 하나는 그것이 행동의 잘잘못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고해소에서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고해성사에서 이렇게 표면적인 행동에만 초점을 두어 잘못을 고백하게 될 때 ‘회개’한다는 것은 다소 의무적이고 불편한 과정이 되어버리지 않을까요? 회개한다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회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J. 플랜바흐는 ‘죄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근본적인 죄에 대한 이런 인식은 그동안 부단히 우리 자신을 힘들게 했던 많은 의무와 행위에 대한 자책에서 우리를 더욱 자유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할 일이란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변화·성장시키시도록 아무런 방어 없이 우리를 열고 그분께 내놓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는 데 어른보다 훨씬 용감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이해받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이 자신의 행위를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고,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아이들의 믿음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실수나 잘못을 통해 배울 수 있고, 그렇게 배운 것을 삶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때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사랑은 이렇듯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약한 우리의 인간성에 또는 죄로 상처 받은 이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진실한 회개를 하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는 것, 결코 쉽지 않은 그 회개의 삶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미사에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막대사탕 하나씩을 꼭 줍니다. 그 막대사탕은 일반가게에서 팔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격이 비싼 것으로, 처음에 이것을 나누어주었을 때 아이들은 너도나도 받으려고 안달이 났습니다. 사실 막대사탕 중에서도 가격이 싼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근처의 학교에서 싸구려 막대사탕을 먹다가 한 어린이가 사고 난 적이 있다고 해서 기왕이면 가장 비싼 것(우리나라 제품이 아닙니다)으로 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이렇게 막대사탕을 계속 주니까, 어른들이 아이들 주라면서 막대사탕을 몇 봉지씩 사다 주시곤 합니다. 물론 제가 주로 주는 사탕이 아닌, 다른 상표의 사탕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새로운 막대사탕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오는 막대사탕이 훨씬 비싼데도 말이지요. 하긴 제가 주려는 사탕을 보고서는 어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빨 썩어요. 살쪄요.”
어른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비싼 것,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가격에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합니다. 즉,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이들이 제 앞에 쪼르르 오더니만 학교 앞 문구점에서 뽑기를 했는데 이것을 뽑았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저는 무엇인가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지우개였습니다. 생긴 것도 조잡한 것이, 제게 돈을 준다고 해도 갖지 않을 형편없는 지우개였습니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요. 이런 것을 하느니, 차라리 먹을 것을 사먹으라고…….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100원을 넣고 직접 뽑은 것으로, 다른 아이들이 없는 자신만 가지고 있는 귀한 지우개라는 것이지요.
어른들은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의심해보고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의심하지 않고 지금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어린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다 자란 어른이 어떻게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마음으로는 그 어린이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특성인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항상 새롭게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내 마음 안에 간직하려 한다면 또한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을 따르려고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어렸을 때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이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이유가 왜 일까요? 비록 실수를 많이 하는 어린이지만, 그 순수한 모습이 더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마음인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며 산다면 지금 당장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어린이처럼 되라고…….”
빠다킹신부
“작은 이여, 나에게로 오라”
-임문철 신부-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제가 가장 탄복하게 되는 것은 수난도 아니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도 아니라, 바로 한 여인의 몸에서 한 점보다도 작은
세포 하나로 잉태되시어 점점 태아로 자라나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신 주님이시지만
제게는 그 잉태의 순간과 태중의 모습이 더욱 경외롭게 다가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도 자신을 작게 하실 수 있는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도 당신 자신을 무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묵상할 때마다
저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기가 가장 어렵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 무언가를 위해서 작위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저절로 낮아지는 삶, 그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빈 마음
-전의이 수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네 관심사는 누가 더 큰사람인가를 따지는 데 있는가 보다. 예수께서 그토록 작은 자의 길을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들 중에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살던 마을 뒤편에 산등성이가 있었다. 밥만 먹으면 동네 코흘리개들이 산등성이에 몰려와 데굴데굴 구르며 놀았다. 나지막한 산소가 작은 우리의 눈에는 커다란 성처럼 느껴졌고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는 이 세상 끝인 것 같았다. 매일매일 올라타던 마을 어귀 느티나무는 발만 대도 주르륵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훌쩍 커버린 모습으로 그 산등성이를 찾았을 때 마음 안에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 크고 광활하던 산등성이를 겨우 두 폭 걸음으로 오르다니. 거인이 된 그날 내 눈에 비쳐진 세상은 너무나 작게만 보였다.
그런 비대해진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나 쓰러지고 말았다. 세상의 온갖 잡다함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소중하고 경이롭게 보이던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비대해진 내 마음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나보다 더 큰 이를 동경하고 또 그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새 거인처럼 커져버린 내 마음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이 머무실 공간이 없었다. 주님께서 내게 심어주셨던 하느님 나라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한 현기증에 시달릴 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작고 어린 자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다시금 큰소리가 들려왔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쉽다.” 오늘 우리 세대는 마이크로 시대다. 아마 주님은 오늘의 세대를 위해 미리 이 단어를 쓰셨나 보다. ‘작은 자’는 그리스어로 ‘미크로스(mik퉛v")’로, 이 말에서 ‘마이크로(micro)’가 나왔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렇게 ‘작은 자’ 곧 영적으로 가난한 비움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 황태웅 신부 -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농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나 어떠냐?”하셨답니다. 부활하셨으니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뵙는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는 주님을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12명 중에서 누가 제일 큰사람입니까? 베드로였습니다. 그 나머지 사도들의 서열은 어떻습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군대에는 계급 순이고 또 다른 모임에는 나이순이던 직위 순이던 간에 어떤 서열이 정해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는 이것이 아주 뚜렷했고, 성전 내에서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대우를 받기를 좋아했고 모임이나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에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거기가면 무엇으로 서열을 정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조건부터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는 일”을 예수님께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입니까? 생각이나 행동의, 한마디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다인들이 추구해왔던 것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대답은 확실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중에도 착한 어린이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아니한 어린이도 있고, 또 어린이들도 다투고 속이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신체적 어린이를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냥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하지 않으시고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뽑아놓고 가까이 하시던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이름도 없고 몸집도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택되고, 내노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던 신체적으로 또 어떤 면으로 보나 보잘것없는 어린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성숙한 남자들 가운데 서 있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도 없고 자신만만하지도 않는 작은 어린이, 이런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장한 사람이 다시 유아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신체적인 어린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린이입니다. 이러한 어린이가 되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야 누가 현명하고, 뛰어나고, 자신만만하고, 성숙된 사람으로 자처하겠습니까. 보잘 것 없고 도움이 필요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자신을 잘 알면서 높은 자리다툼을 하고, 큰사람 작은 사람 따지겠습니까?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도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해 질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지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 도우심을 잘 받아들입니다. 오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항상 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여럿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중에서 “누가 더 큰사람이냐”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데 앞선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 29) 하시면서 스스로 겸손한 분, 어린이와 같은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 받고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이 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법칙으로 주신 “작은 사람이 큰사람이 되고, 큰사람이 작은 사람이 되는 법칙”은 세상 종말에도 적용이 됩니다. 또 결코 지키기 쉬운 법칙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고 또 저기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꼭 지켜야만 합니다.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권오광-
우리 부부는 큰아이 하나만 낳고 그만 낳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큰애가 다섯 살이 되면서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조르다가 성모상만 보면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집에서 기도를 가르치며 “기도할 때는 두 손을 앞으로 곱게 모으고 기도하는 거란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딸아이의 얼굴이 환해지자 “무슨 기도를 했냐?”라고 물었습니다. “동생 낳아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손을 주셔서 감사하다고요”라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손을 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하니?” 하고 묻자 “손이 없으면 기도를 할 수 없잖아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도는 손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섯 살 어린아이가 자기 ‘소원을 빌기 위해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할 수 있다’는 감사를 드리는 이 순수한 마음과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이 바라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나약하고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권능 앞에 모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나 스스로가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교만과 아집, 경험에 입각한 고정된 관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겸손은 신앙의 열쇠
-오남주 신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가면서 끊임없이 갖게 되는 것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를 통해 상대방이 나에게 인상 깊게 풍겨주는 장점을 말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장점 중에 장점은 겸손의 덕목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성품을 가진 사람치고 누구에게나 호감과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주위에 적이 없고 모든 사람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과 신앙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앞에서 들은 성경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 가봅시다. 예수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남을 속이지도 않고 앞뒤를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수함의 상태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느님 앞에서 겸손을 이런 어린아이에게만 있는 순진무구함에다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 원죄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느님에 대한 교만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 짓는 여러 종류의 죄는 모두 교만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교만심을 거두어내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마태오 11,25에 기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역시 마음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을 바꾸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만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이런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부하군인 백 명을 거느린 로마군 장교 백인대장의 얘기가 그 한 예입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집안의 종이 중풍에 걸려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직접 뵙고 자기 종의 치유를 간청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식민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러 온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분상의 우월감이나 사회적인 특권의식도 없이,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 위신이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 종의 병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에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란 말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이런 겸손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와 같은 그의 신앙은 예수님을 가장 인격적으로 만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백인대장에게 있어서 그의 겸손은 예수님께로 가는 신앙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백인대장과는 반대로 평소 돈독한 신앙인으로 자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칭 열심하다는 신앙심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언제나 교만심과 쓸데없는 아집에 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가장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내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흔히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된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현세에 대한 가치욕망으로 그 마음이 꽉 차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머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은 이 마음속에 꽉 찬 세상 가치들을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즉 겸손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울 수 있는 것과 통하지요.
돈과 과학기술이 하느님 대신으로 우상화 되어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렵겠지만 누구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첫 관문을 따주는 내 안의 열쇠와도 같은 겸손지덕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충귀신부-
수력발전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생기는 낙차를 이용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낙차가 크면 클수록 전력은 더욱 세어진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높은 곳의 하느님 능력이 사람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해서
낮추면 낮출수록 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람과 사회의 논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높은 곳에 있고 대접받으며 잘 사는 것처럼 보이고
더 적게 가지고 더 적게 배운 사람이 낮은 곳에 있으며 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나 그 자녀들에게 더 많이 가지는 방법,
더 많이 아는 것에 대해 살아가는 모든 정신을 집중합니다.
참인간으로서의 삶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남에게 뒤쳐지지 않고,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배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사람이 살아가는 유일한 것인양 너무 바쁘게 바쁘게들 삽니다.
정작 우리가 추구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인간성을 잊어버린채,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깐 나도 내 자식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뒤쳐지지 않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이들은 적당히 무시하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한 이들과 더 배우지 못한 이들도 그들의 탓으로 돌리거나
무관심하게 함께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의 이러한 삶의 논리와는 다르게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며,
당신을 따라 사는 이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 누구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저는 지금 나의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는 눈높이를 낮추는 것, 세상에 대한 기대치와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상의 눈높이를 낮추어야 그 낮아진만큼 나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눈높이가 낮아져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고, 하느님을 느끼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며,
그들도 나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낮추어진 나를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높이를 낮출줄 알고 자신의 기대치를 낮출줄 안다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아님을 알게 되며
그들도 똑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숨울 쉬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녀 데레사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합니다.
“눈 앞에 있는 이 높은 환난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성녀 데레사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뛰어 넘을 수 없으면 밑으로 빠져 나가세요”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주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가장 하찮고 낮은 종 같이 되심으로써
가장 부유하고 가장 귀하며 가장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대치와 눈높이를 우리 삶의 목표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런 나를 통해 높은 곳의 그분께서 당신의 그 놀라운 능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시면서 여러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눈높이를 하느님께로 맞추어 보시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기대치를 하느님의 기대치로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이 마음을, 이 상황을, 이 느낌을 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루의 걸음걸음들이 그분의 나라를 걷는 삶 되시길 미약하나마 기도로써 함께 합니다.
새벽을 열며
세계적인 지휘자로 유명한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번스타인은 의외의 대답을 했답니다.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과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플루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연주자는 많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줄 제2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름다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늘 1등만을 원했지요. 그래서 주연만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고, 반대로 조연이 무시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다보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주연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주연을 향해서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으며, ‘나는 안돼’라는 부정적인 언어로서 스스로 삶의 실패자라고 각인을 시키는 경우도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영화로 예를 들어보지요. 만약 영화에 조연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주연이라면 어떨까요? 가능할까요? 모두가 주연이 되도록 각본을 쓰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렇게 모두를 주연처럼 만들었다가는 모두가 조연이 되고 말껄요? 그리고 영화의 재미도 반감되겠지요. 물론 영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연들의 얼굴만을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주연이라는 것은 조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연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주연이 더욱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 삶에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뛰어난 능력과 재주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 주위에서 조연의 모습으로 그를 돕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사람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는 주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바로 이 조연의 역할, 즉 주연을 드러나게 해야 할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연을 유일하게 드러내게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의 주연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조연입니다. 즉, 주님이 이 세상 안에서 환히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인 것입니다. 특히 주연이신 주님께서는 조연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까지도 살피시는 사랑 가득한 주연이심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의 조연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지요? 혹시 주님을 조연으로 만들고, 스스로 주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착각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조연의 역할에 자부심을 가집시다.
-빠다킹신부-
작은 것들의 하늘나라(天國)
-강영구신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게
저는 요즘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김민수 목사가 펴낸 ‘내게로 다가온 꽃들’(한얼미디어)이라는 책입니다.
무심히 지나치거나 밟고 다니는 작은 풀꽃들을 관찰하고,
꽃의 생태와 꽃 말, 꽃에 얽힌 신화와 전설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진과 함께 수필 형식으로 담아놓은 책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작은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니던 길섶의 작은 꽃들이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
가꾸지 않아도,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심지어 짓밟혀도
때가 되면 강인한 생명력으로 피어나는 풀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실에서 가꾼 진한 향기와 매혹적인 모습을 가진 꽃들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길섶의 풀꽃은 꽃이 아니라 잡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크고 많고 화려하고 높고 대단한 것에 중독된 나머지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작은 것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눈을 뜬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크고 많고 화려하고 높은 것을 차지하려면
탐욕스러운 가슴으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경쟁하고 싸우고 빼앗아야 합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얻으려면 맑고 가난한 마음으로 손만 벌리면 됩니다.
당신도 작은 꽃이 되어보시겠습니까.
당신도 어린이가 되십시오. 행복할 것입니다.(一明)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시는 분들께>
보육원, 상담소, 쉼터, 그룹홈...갈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설을 두루 섭렵한 한 아이,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데려가기를 원치 않는 아이, 더 이상 보낼 곳이 없는 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저 곳 다 다녔기에 각 시설의 특징이나 장단점, 취약점 등을 귀신같이 꿰고 있었습니다. 우선 더 편안한 곳, 우선 지내기 쉬운 곳, 우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만 찾다보니 거의 모든 시설을 다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각 시설 담당자들과 통화하면서 그 아이 때문에 사람들 속이 어지간히도 상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제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맛이 간’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속상하고, 배신감 느끼고, 열불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겠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틈만 나면 귀에 못이 박히게 형제들에 이런 강조합니다.
“착하고, 말 잘 듣고, 예의바르고, 고분고분한 아이, 우리가 제시한 노선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따르는 아이들은 사실 어디 가든 잘 견뎌낼 것입니다.
예쁘고, 귀엽고, 품에 ‘착’ 안기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시다. 우리의 선택은 보다 다루기 힘들고, 보다 ‘맛이 간’ 아이들, 결국 그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는 한 마리 길 잃은 어린 양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건강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길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는 기쁨을 삶의 최고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착한 목자임을 역설하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세 아들을 두셨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걸리고, 밥숟가락 들 때 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아들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잘 풀려서 제 갈 길을 보란 듯이 걷고 있는 장남을 생각하면 걱정보다는 뿌듯한 마음에 안심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시작한 외국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고, 광활하며 청정한 주변 환경 속에 살아가는 차남 역시 생각만 하면 마음이 흐뭇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하고,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해 전국산천을 떠도는 막내,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은 없는 막내아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옵니다. 눈물이 앞섭니다.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모든 자녀들이 다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더 마음이 가는 자녀, 더 기도하게 되는 자녀는 잘 안 풀리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우선적 선택’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사에 잘 풀리는 사람들도 사랑하시지만 우선 눈길이 가는 대상은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양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입니다. 좌절과 혼동 속에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끝도 없는 병고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 너무도 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세속에서의 복락은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시는 애틋한 눈길, 각별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저 역시 제 몫을 잘 해내는 아이들, 이제 걱정 없는 아이들보다 덜 떨어진 아이들, 매일 형들에게 ‘치이고’ 부대끼는 꼬맹이들, 어릴 때 못 먹어서 삐쩍 말라빠진 ‘인간 덜 된’ 녀석들에게 훨씬 마음이 갑니다. 한번이라도 더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는 분들, 지금 이 순간 다시 못 올 길을 걷고 있는 분들, 끔찍한 외로움에 눈물 흘리시는 분들, 십자가가 너무 커서 어쩔 줄 모르는 분들,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하느님께서 한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짠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할 각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 옵션(option)이 아니라 기본(Basics)
-박상대 신부-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 밝혀두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설교의 첫 부분이다. 공동체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으로 시작되는 공동체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설교는 세 가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것"(1-5절)이고, 둘째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10절)이며, 셋째는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는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제외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는 규범도 있다.
첫 번째 규범의 도입부에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하고 물었다고 하지만, 마르코는 제자들이 도상(途上)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고, 루가는 제자들이 서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마르 9,33-34; 루가 9,46)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온정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수 어록집에서 따온 것이다. 루가는 이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을 한데 모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루가 15장)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교회공동체 안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에 권위주의와 서열다툼이 팽배하고, 형제적 사랑이 부족하여 후임자가 전임자를 마구 흠집 내는 일도 많다. "미사예물 단가가 비싸서 미사봉헌 한번 제대로 못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신자들은 소외 받고, 혼인법상 조당(阻 )에 처한 신자들을 마치 중죄인 취급하며, 조그만 잘못도 부풀려 입에 담아 회자(膾炙)하고, 나서서 단죄(斷罪)하기를 즐겨하는 신자들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 만들고, 스스로도 죄지을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일도 있다. 오늘 예수께서 내리시는 공동체 내규(內規)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여러 개를 놓고 여건(與件)을 고려하여 마음가는 대로 고르는 선택사향이 아니라, 기본(basics)에 속한다는 것이다. 기본은 곧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