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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묵상글 ( 부활 제2주일. - 닫힘과 열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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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닫힘과 열림
오늘 부활 제2주일의 주제를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올해 저는 <닫힘과 열림>으로 잡아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문을 닫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었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보다 자기들의 힘이 없어서 그들을 두려워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호랑이가 무서워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물리칠 힘이 있거나 총이 있으면 두렵지 않지요.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아내야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한 것이
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두려워한 것이지만
이는 신앙이 빠진 인간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어렸을 때의 우리는 밤이 무섭고 강도가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함께 있거나 강아지만 옆에 있어도 무섭지 않은 경험이 있잖아요?
이는 우리가 어두운 것은 밤이 어둡고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빛이요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해함과 같은 논리입니다.
우리에게 평화 없음도 같은 논리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기에 또는 싸움을 걸어오는 누가 있기에
평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주님의 평화가 없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로우려면 오늘 제자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때 그 평화를 받아 지니면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무고(無故)의 평화가 아니라 관계의 평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간 또는 밤새 별고(別故) 없으셨느냐고 인사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별고란 특별히 안 좋은 일 곧 사고의 준말일 것입니다.
그러니 별고 없냐는 말은 특별히 안 좋은 일 사고 없었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있고 상황은 평화롭지 않아도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평화롭습니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는데 거센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난리법석인데 주님은 천하태평이십니다.
이렇게 평화의 주님께서 배에 함께 계시면 제자들은 평화롭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계시어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화롭게 되면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골방에 갇혀 있지 않고
닫힌 문을 활짝 열고 나가고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시면서.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 충만하게 되고,
사랑 충만함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며,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
무소유와 공동소유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문이 열린 것뿐 아니라 성령의 사랑으로
마음도 열리고 움켜쥐었던 손도 펴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나와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부활의 은총을 주시길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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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믿음의 크기를 강조하지요. 그런데 ‘나’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믿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늘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클까요? 아니면 자녀의 사랑이 더 클까요? 부모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자녀를 키워 본 부모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을 계속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의문만 있었지요. 자기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제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토마스 사도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셨기에 전혀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선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자신 있게 자기 삶을 살아가며,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받음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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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누구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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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자비주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줍니다. 곧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라고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하는 일,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고,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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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외아들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목숨을 내놓으셨으며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 사건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훗날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이 자비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 자신이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측량할 수도 없고 다 써버릴 수도 없을 만큼 한없이 많고 큽니다.”(성녀 파우스티나).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고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수난의 흔적을 보여주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토마스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찌 되었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좌절하여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화가 있다면 그 기쁨이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한 평화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보면,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평화’는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징벌’덕에 악행과 죄를 용서받고 치유 받은 사람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누리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지만, 믿음으로 굳건한 이들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풀려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의 위로와 기쁨을, 성령을 통하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2-23). 성령을 통하여, 이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만 유보되었던 사죄의 권리를 제자들이 행사하게 되었고 그 후계자들과 협력자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용서를 받고,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너무 답답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하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 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용서받아야 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하고 우리의 한계를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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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모호하지만 명확하다. 자연은 덧없지만 풍성하다. 우주는 무한하지만 무관심하다.” 인생에서 명확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터널과 같습니다. 암흑과 같은 터널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서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속에 자연은 이렇게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속에 ‘개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이 무한한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게 되고,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우주를 있게 한 절대자를 떠올립니다. 신앙인은 그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이외에 우주라는 커다란 화폭 위에 별들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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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 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토마스는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같이 있지 않았지요.
어디 갔을까요? 숨어 있는 제자도 먹을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혹은 돌아가는 정황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토마스는 어쩌면 제자들 안에서 궂은일을 했던 사람, 먹을 것도 구해오고 목숨을 걸고, 상황을 알아보는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누구보다 용기 있고, 누구보다 담대했을 것입니다. 이런 토마스를 예수님도 사랑하셨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습니다.’라고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주님의 부활을 믿겠습니까? ‘너는 보고야 나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토마스의 믿음이 자칫 작고, 보잘것없는 믿음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은 아직도 어두운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토마스가 믿을 수 있었을까요? 만났으면서도, 아직도, 예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들을 보고 말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부활을 보고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비방하고, 소극적이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부활했어도 그 안에는 여전히 예수님은 없고 나만 있습니다. 내 고집, 내 생각 말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본다면 물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주님이 부활하셨습니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사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당신의 안에 예수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당신의 따스함과 평화로서 말입니다.
부활의 체험은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 변화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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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은 없다.
저는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부대가 북한강을 끼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물러가는 해빙기에 야간 초소 근무를 서다 보면
겨우내 강을 덮고 있던 두꺼운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듣습니다.
짜작 짜작......웅.......툭툭.....척......
우리는 얼음이 그냥 녹는 줄 압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슬며시 물로 변화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얼음도 아픔을 견디며 물이 됩니다.
얼음이 물이 되려면 수많은 뒤틀림을 견뎌야 합니다.
얼음 녹는 것처럼 세상 쉬운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내부에서는 많은 고충을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 그냥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압니다.
그대도 그냥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도 그냥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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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일. 키엣 대주교님.
기도와 믿음, 사랑의 공동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초기 교회의 공동체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기도와 믿음의 공동체
초기교회는 작고 나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이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그들이 기억하는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함께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스승님이 하셨던 것처럼 빵을 쪼개어 나누고, 자신들이 들은 스승님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기록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간절히 갈망하는 그들의 기도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 위안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본 그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 믿음은 생명력 있는 기도가 되었고 삶 속에서, 그리고 선택의 순간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서로의 믿음을 지지해주고 성장시켜주며, 흐려지는 믿음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사도 토마스 역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믿음의 은총을 받은 것도 바로 공동체안에 있을 때였습니다. 믿음은 공동체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며 그 안에 있을 때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
참된 신앙은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만이 주님의 사랑에 이르게 합니다.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주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이웃과도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사도행전 4,32-35)
참으로 아름답고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시대가 달라져 나의 모든 것을 이웃과 공유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마음만은, 사랑만은 서로를 위하고 공유하는 이러한 공동체 삶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가장 근본은 주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증거하는 공동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대한 그들은 주님을 증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주님을 증거하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넘치는 행복으로 서로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향기가 퍼져 나가듯 주님 부활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널리 펴졌습니다. 말보다 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살아있는 기도생활을 통해, 그들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 주님의 증거는 널리 펴져 나갔습니다.
어떤 말이나 생각, 이론보다 설득력 있게 주님을 증거하는 것은 바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가 아름다운 공동체 삶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생명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눔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주님과 점점 멀어져버리고 맙니다. 사실 흔들리는 나, 다른 길로 가는 나를 붙잡아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공동체와 멀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혼자만이 아니라 주님의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부활의 공동체, 하늘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주님, 저희도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주님이 주신 사랑을 다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부활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힘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부활하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가정과 이웃, 교회는 어떤 은총을 받았습니까?
3. 기도와 믿음, 사랑, 주님에 대한 증거는 부활의 공동체에 꼭 필요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무엇이 부족한 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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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깨어나라, 감사하라, 찬미하라-
자비하신 주님을!
지금 4월 부활축제가 계속 펼쳐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토는 어디나 파스카의 봄꽃들 만개한 하늘나라 지상천국입니다. 그러나 국민현실은 어려움의 절정입니다. 새삼 이번 이번 4.10일 총선이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얼마나 절박한 선거인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정치인이 목터져라 외친 말마디가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이대로 둬서는 대한민국 다 죽는다!”
"우리나라 진짜 큰일났다!"
살아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잘 살라고 부활축제가 계속되고 있는 오늘 부활 제2주일은 하느님 자비의 주일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자비를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 천국을 살라고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하느님 자비의 주일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자비로운 마음, 지혜로운 정신으로 난국의 현실을 잘 타개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을 지내던 2000년 4월30일 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에, 하느님 자비를 선포하는 임무를 위임받았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를 성인품에 올렸고 전 세계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 자비의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자비의 사도라 일컫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성지에서의 1997년 6월중 강론은 지금 들어도 공감이 갑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지금같이 위태로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 양심이 심하게 세속화될수록, 자비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될수록, 하느님에게서 떠나 자비의 신비에 거리를 두면 둘수록, 교회는 큰 소리로 자비의 하느님께 호소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와 인류의 걱정을 자비로우신 그리스도께 의탁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어느때보다 하느님 자비의 체험과 삶이 절박한 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비를 배우고 공부하여 우리 모두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할 작금의 시대입니다. 방금 흥겹게 부른 “가,나,다”해가 동일한 화답송 후렴이 우리 모두 자비의 사람이 되도록 고무합니다. 오늘 하루뿐 아니라 평생 화살기도 노래로 끊임없이 바쳐도 참 좋은 시편구절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어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번역가의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완벽한 번역은 없다, 다만 아름다움을 옮길 뿐이다.”, 저는 번역대신 삶과 강론을 넣어 읽도 그대로 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완벽한 삶은, 완벽한 강론은 없다, 다만 아름다움을 옮길 뿐이다.” 어떻게? 사랑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사랑은 어김없이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파스카의 봄철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애가 온땅에 가득하네” 얼마전 시편 화답송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196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대중가요도 생각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펴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펴요.
아무리 못생긴 호박꽃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꽃이 펴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고 예뻐지고 아름다워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갈수록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2007년, 17년전 파스카의 봄철 이맘때쯤 썼던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시를 나눕니다.
“동안거(冬安居)를 끝낸 겨울 나목들
잎눈들, 꽃눈들 임사랑에 활짝 열려 피어나니
오, 찬란한 태양,
광활한 창공(蒼空),
모두들 깨달은 꽃나무 각자(覺者)가 되네!
내 존재의 미소(微小)함, 공허(空虛)함
깨달음으로부터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찬미와 감사
웃음같기도, 눈물같기도 한
꽃같은 깨달음이여, 새롭게 열리는 세상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아름다운 삶은 우리의 의무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을 잘 키우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교회 공동체의 모델이요 2000년 동안 공동체 운동에 샘솟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이상적 유토피아 공동체로 공산주의도 여기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가장 근접한 공동체가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인 수도공동체이고 그 빛나는 모델이 지금 여기 성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사도행전의 참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바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공동체를 키워주고 보존해 줍니다. 공동체 성립의 핵심 요소를 알려줍니다. 한마음 한뜻, 공동소유, 공동체의 중심인 부활하신 주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된, 빈부의 격차가 사라진 공평과 평등이 실현된 하늘 나라 교회공동체입니다.
둘째,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우선적 선물이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臨在)와 더불어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활짝 열린 문이 됩니다. 참으로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의 평화는 이 주님의 평화에 기반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마디에 ‘항상’을 덧붙여 “평화가 항상 너희와 함께!”말하고 싶습니다. 무려 오늘 복음에 세 차례나 나오는 주님의 참 좋은 말마디입니다. 제자들은 평화의 주님을 뵙고 몹시 기뻐했다니, 평화와 함께 주어지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주목할 바, 이 모든 선물은 공동체가 함께 할 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회의론자, 이성주의자, 토마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의 전광석화 반응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배움이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주님이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고백인지요!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부끄럽게 하면서 분발케 하고 우리의 믿음을 고무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마지막 복음 말씀이 믿음과 생명이 얼마나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참 엄중한 진리가 믿음과 함께 가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가 믿고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최상의 축복입니다. 제2독서 요한 사도의 믿음에 대한 말씀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셋째,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주님 선물중의 선물이 참 좋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자 진리입니다. 그러니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성령뿐입니다. 성령없는 인간은 반쪽의 인간일뿐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면 누구에게나 선사되는 성령의 선물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느님께서 창세기에서 사람을 창조하실때 진흙으로 만든 몸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듯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용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용서의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자비의 사도, 평화의 사도, 성령의 사도, 용서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의 사도로 살라고 수도원 형제들의 숙소 명칭도 “자비의 집”이며, 피정오신 분들은 평화의 사도로 살라고 피정집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혼자 독점하라 주신 선물이 아니라 서로 나누라 주신 선물입니다. 자비도 평화도 성령도 용서도 나눠야 서로 삽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나눔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에 대한 응답은, 자비하신 주님을 닮는 길은 감사와 찬미, 겸손과 온유, 사랑과 나눔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참 좋은 하늘 나라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주시며,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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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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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부활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부활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평화입니다. 행복의 가장 올바른 정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완전한 자기실현의 결과이며 자기실현은 자기의 부족함을 먼저 깨닫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참된 마음의 평화는 자신을 진지하게 인식해 만나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을 만나서 마침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을 안정하게 하시는 유일한 존재인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얻을 때 가능합니다.
마음의 평화의 목표는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는 언제 어디서 기도할 수 있고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마음이 겸손할 때 마음의 평화가 있고 교만이 마음안에 들어오면 평화가 사라지게 되고 무엇보다도 분노와 질투심이 자라게 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남이 알지 못하도록 나의 잘못과 약점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도 마치 자신이 훌륭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평화를 지닐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평화를 찾는 길은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안에 이 세상을 초월하는 저 세상의 어떤 것이 들어 있음을 경험합니다. 내가 내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이 바로 나를 생기 있게 하는 그 본질적인 촉진제라는 사실을 느끼고 나면 다른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현대에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살아가는 원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어느 곳에나 빠짐없이 파고들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무절제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무절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껏 부풀려 올려서 과장을 드러내 보이고 마침내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산만하게 되어 마음의 평화를 잃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싸워 이겨낼 때 우리의 마음안에 평화가 찾아와 자리잡게 됩니다. 카시안은 내적인 평화을 얻기 위해서 9개의 욕망을 극복하라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욕망과 싸워서 완전히 없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육적인 욕망이 영혼에 순응하여 참된 마음의 평화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욕망들은 욕구의 영역인 식욕, 성욕, 물욕과 정서의 영역인 슬픔, 분노, 의욕상실 그리고 정신의 영역인 명예욕, 시기심, 교만을 말합니다.
이러한 육신의 욕망의 제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한 하느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하며 성서의 말씀을 창과 방패로 삼아
자신을 유혹하는 세상의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에 대해 함께 나누며 주님께서 친히 평화 주시길 빕니다.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고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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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세 번째 발현
화요일과 수요일에 나타났었던 바로 그 똑같은 상처를 입고 있는 사람은 목요일 밤에도 쟝 뒤 브와에게 사랑 가득한 의사의 도움을 더욱 간절하게 청하였다. 그의 동생이 잠들고 있는 동안 쟝 뒤 브와는 순박하게 발현하신 분이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정말 의사를 찾을 경우에 그 의사를 어디로 보내야 합니까? 당신이 누군지 나는 전혀 모르고 또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어요"
그러자 구세주께서는 천상의 인내심을 가지시고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이 열쇠를 가지고 성당으로 가서 그 안으로 들어가거라. 그곳에서 나는 너를 찾게 될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쟝(Jean)은 활흘경 속에서 하신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 때 그는 성당의 중앙 제대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 위에 혹심한 상처로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계신 것을 보았다. 그분의 옆구리 상처에서는 신성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쟝 뒤 브와는 그분이 자기의 주님이시고 스승이시라는 것을 깨닫고서 예전의 막달레나(Magdalena) 성녀처럼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차서 앞에 넓죽 엎드렸다. 깊은 연민에 찬 큰 외침 소리가 이 예언자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와서 자고 있는 동생을 깨웠다. 그런 다음 쟝(Jean)은 자기의 침실에서 황홀경으로부터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당황해하고 있는 동생에게 자기를 이렇듯 용감하게 보호해 주었느냐고 웃으면서 나무랐다. 쟝(Jean)은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관심과 사랑과 받음으로 경배하지 않으면 그분으로서는 세상의 죄악을 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탄식하셨다고 그의 동생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쟝(Jean)은 “주님께서는 내게 다시 한번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셨어. 주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옆구리의 상처에서 당신의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었지.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그분께서 제대 위에서 새롭게 죽는 것을 보게 될 것이야!" 라고 말을 덧붙였다.(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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