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활짝 손바닥을 펼쳐서 맞이한다. 그 바람결에 ‘브로콜리 너마저’(한국의 모던록 그룹)의 노래 <유자차>가 실려 들려온다.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제주도 바닷가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동안 옷 소매 사이로 노래가 스며든다. 노란 유채꽃을 보고 유자차가 떠오르다니! 제주올레 여행길에 얻은 보너스다.
제주올레 여행은 언론인 출신 서명숙(52)씨가 발굴한 ‘걷기여행’ 코스다. ‘올레’는 ‘골목길’이란 뜻이다. 집 대문을 나서서 골목골목을 자박자박 걸으라는 소리다.
현재 13코스가 개발되었다. 서씨는 “2008년 3만 명(제주지역민 제외)이 다녀갔는데 올해 1~3월에 벌써 3만 명이 다녀갔습니다”라고 말한다. 걷는 동안 산이, 바람이 말을 걸어온다. 솔깃해서 귀를 열면 그 사이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올레 여행의 인기비결이다.
13코스 중에서 제주올레 9코스는 가파른 언덕길과 해안절벽, 숲, 너른 해변을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여행길이다. 평탄한 흙길도 있고, 마치 신이 오랫동안 감춰두고 몰래 본 듯한 절벽도 있다. 모두 제각각 다른 색깔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육지 사람 입맛 찾아 팔도 맛순례 끝에 탄생
숲을 걷는가 싶더니 바다가 나오고 모래밭 해변을 산책하는가 싶으면 절벽이 나온다. 마치 외계의 별에 떨어진 우주인처럼 낯섬과 친근함을 경험한다. 이 코스는 제주도 남쪽 용왕난드르 마을(대평포구)에서 출발해서 박수기정을 거쳐 화순해안까지 총 8.81킬로미터거리다. 4시간이면 충분하다. 출발지인 용왕난드르마을에서 잊을 수 없는 자연의 맛을 발견했다.
용왕난드르마을은 말 그대로 용왕이 사는 난드르(너른들)란 소리다. 이곳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강된장비빔밥과 바다향이 싱그런 보말칼국수를 만났다. 올레가 주는 산뜻한 자연의 향만큼이나 청량하고 신선한 맛이다. 용왕난드르향토음식점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뉴다. 이 식당은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집이다. 체험마을로 지정이 되면서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궁리를 했다.
어떤 음식을 만들면 좋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마늘이었다. 이 마을은 제주도에서 마늘의 주산지이다. 김순실 용왕난드르마을 사무국장은 “마늘로 음식을 만들면서 매운 맛은 없애자”라고 얘기가 진행되었단다. “아이들도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주민 중에 4명이 선발되어 서울 한국전통음식연구소에서 향토음식개발 교육과정을 듣고 일부 주민들은 육지로 나가 소문난 맛집을 돌아다녔다. 제주도를 찾는 육지 사람들의 입맛을 알고 싶었다. 이런 수고의 결과로 2008년 2월15일 신기한 요리 2가지가 이 마을에서 탄생했다.
강된장비빔밥은 버섯과 해초, 나물을 밥에 얹고 이 마을에서 만든 독특한 강된장을 얹어 비벼 먹는 밥이다. 해초는 깊은 바다 속 용왕님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아삭아삭하다. 버섯은 버섯이 자란 나무를 통째로 들고 온 것처럼 숲의 향이 가득하다. 여기에 브라질 정글처럼 갈래갈래 얽힌 나물을 엮어 넣으니 마치 숭고한 대지를 만난 듯하다. 이 위로 떡하니 강된장이 올라탔다. 강된장은 먹을수록 단맛이 척척 감긴다. 눅진한 소스 사이로 부서진 땅콩처럼 보말(바닷고동의 일종)이 씹는 맛을 더한다.
보말수제비도 인기의 한몫을 한다. 보말은 간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평리포구에서 잡는 신선한 보말이 넉넉하게 음식의 안을 채운다. 마치 녹차로 국물을 만든 것처럼 녹색의 물결이 출렁인다.
바닷고동의 일종으로 톡 터진 내장이 비결
김순실 용왕난드르마을 사무장에게 요리 비법을 들었다.
- 강된장비빔밥 맛의 비결은 ‘강된장’ 같은데 강된장은 어떻게 만드시나요? = 마늘과 표고버섯을 잘게 썰고 으깬 두부와 8가지 채소를 집된장과 함께 끓입니다. 8가지 채소는 부추, 양파 등입니다. 채소를 끓이기 전에 먼저 볶아 익혀요. 식재료가 모두 익은 것이기 때문에 30분 정도만 끓여요.
- 식탁에 오르는 강된장비빔밥은 어떤 모양이지요? = 우리 동네에서 재배한 나물, 버섯 등을 밥에 얹혀 살짝 데운 강된장에 보말을 뿌려서 냅니다.
강된장은 이곳에서 판매도 한다. 300그램 1통이 7천원, 600그램 조금 안되는 1통은 1만원에 판다.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은 손에 한 통씩 강된장을 들고 문을 나선다. 만드는 법은 마을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지만 배미경씨 한 사람만이 만든다. 배씨가 손맛이 가장 좋아서 다른 이들이 만든 것보다 맛있단다.
- 보말수제비도 신기한데? = 보말은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내용물을 꺼냅니다. 물에 잘 씻어야 합니다. 바다에서 잡은 것이라 불순물이 있어요. 참기름를 넣고 볶은 후에 조물조물 만지다보면 내장이 톡 터져요. 그것을 이용해서 국물을 만듭니다. 반죽한 밀가루는 냉장보관해서 써요.
인공 조미료는 전혀 넣지 않는다고 김사무장은 자랑한다. 먹는 동안 자연이 입안 한가득 들어오는 느낌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간을 맞출 수가 있다.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먹는 것이다.
걷는 동안 내 얼굴에, 내 어깨에 톡톡 말을 건 바람이 ‘강된장비빔밥의 맛은 어떠니’하고 물어온다. ‘알싸하고 청량한 바람 너처럼 기분 좋은 맛이야’라고 답한다.
‘나’를 만나는 걷기 여행길에서 강된장비빔밥은 진심어린 우정으로 격려해주는 친구이자 둘도 없는 소올메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