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의 건설, 구스타프 에펠-1】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에 메인 조형물로 기획된 에펠탑은 1889년 5월 6일 완성되었다.
20년 뒤 철거한다는 조건으로, 에펠탑만큼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직후까지 비난과 험담의 대상이 된 건축물도 찾기 힘들 것이다.
“거대하고 기이한 탑”, “참으로 비극적인 가로등”,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우며 일그러진, 체육관 장비 같은 철기둥“, ”높고 깡마른 철사다리로 된 피라미드“, ”세우다 만 공장 파이프“, ”암석이나 벽돌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뼈대, 깔때기 모양의 그릴“ 등등, 에펠탑은 온갖 몰매를 맞아가며 탄생했다.
구스타프 에펠은 1832년에 프랑스 보르고뉴에서 태어났다.
1850년 에펠은 아버지와 함께 난생 처음 파리에 왔다.
에펠은 프랑스 최고의 공과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점수가 모자랐다.
대신 직업학교인 중앙공예학교에 입학했다.
에펠이 학교를 졸업한 1855년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1855년, 파리는 제2회 세계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만국박람회는 시대와 미래의 窓이었다.
세계 각국들은 전시관을 지어 자국이 보유한 과학기술의 총아를 전시하며 국가 위상을 과시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시관 중에서 에펠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한 곳은 ’산업의 궁전‘이었다.
산업의 궁전은 철로 만든 건축물
여기에 오랜 앙숙관계였던 영국과의 경쟁심리가 작동했다.
당시 프랑스 통치자인 나폴레옹 3세는 영국 런던에 세워져 세계를 놀라게 했던 ’수정궁전‘을 꺾을 수 있는 구조물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정궁전은 영국이 1851년 제1회 세계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세운 구조물이었다.
철골로 구조를 만들고 유리로 전면을 덮어 ’Crystal palace’, 즉 수정궁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영국은 이 궁전을 세계만국박람회장 메인 전시관으로 사용하면서 제국의 권위와 영화를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
수정궁전의 등장은 영국과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강대국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수많은 관람객들이 ‘산업의 궁전’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에펠도 그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철의 성질과 쓰임새에 관심이 많았다.
에펠은 철이 미래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산업의 궁전을 접한 에펠은 주저하지 않고 주철공장을 운영하는 처남 조세프를 찾아가 그의 도제로 들어갔다.
주철공장에서 철의 성질과 구조를 배우던 중인 1856년 에펠은 귀인을 만나게 된다.
철도 설계회사를 운영하던 샤를 넵뷰를 만난 것이다.
에펠은 그의 비서로 고용되었다.
에펠은 철 구조물 설계에 자신의 미래가 있음을 알고, 이 분야에서 성공하겠다고 결심한다.
얼마 후 넵뷰의 회사가 파산하며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에펠의 재능을 인정한 넵뷰는 회사를 정리하면서도 에펠에게 서부 철도회사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이 전화위복이었다.
에펠은 서부 철도회사에서 기회를 잡게 된다.
그는 처음으로 생제르망 철교의 22m짜리 철교를 설계한다.
여기에 또 다른 우연이 발생한다.
벨지 철도회사가 넵뷰의 회사를 인수하면셔 넵뷰가 벨지 철도회사의 파리 공장장이 된 것이다.
넵뷰는 에펠을 조사팀장으로 데려왔다.
넵뷰는 파리-보르도 철도노선 중에서 가론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건설 계약을 따냈다.
가론 강에 세워질 다리는 길이 500m의 철교였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철교가 에펠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참고 서적
조성관 지음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
(옮긴글)
산업의 궁전
수정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