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며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화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은 눈물이 아니라 칼이다
〈슬픔이 기쁨에게〉는 내 첫 시집의 표제시다. 1979년에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가 출간된 지 45년이 되었으나 두 번의 개정판을 거쳐 지금도 증쇄가 계속되고 있다. 그 가닭은 이 시가 고등학고 검인정 국어교과서에 다수 게재 돼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수능 준비를 하기 위해 공부하는 한국현대시 중에서 결코 빠지지 않은 시가 바로 이 시다.
시인으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40여 년 전, 청년기에 쓴 시가 노년기에 이른 지금까지 그 문학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감사한다. 한 시인의 대표작은 그 시를 쓴 시인이 결정하거나, 어느 누가 나서서 '아무개 시인의 대표작은 무엇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시간에 걸쳐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에의해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대표시로 여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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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시를1973년 3월 7일, 당시 내가 재직 중이던 서울 숭실고등학교 교무실에서 완성하고 그해에 동인지 《반시 反時》 제 3집에 '슬픔을 위하여'와 함께 발표했다. 그 시절 어느 겨울이었을 것이다. 추위에 떨며 길을 가다가 어두운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깊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슬픔'이라는 낱말이 무거운 바윗덩어리처럼 내 야윈 가슴을 짓눌렀다.
아니,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비수 끝에 매달린 눈물이 핏물이 되어 아침 햇살에 영롱 했다. '슬픔'은 '비극' 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한국인으 삶의 어떤 원형 같은 낱말로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고 '슬픔'을 주제어 삼아 연작시 《슬픔은 누구인가》를 〈 반시〉 제 2집에 발표했다.
〈슬픔이 기쁨에게〉에서 화자인 '나'와 객체인 '너'는 서로 대비되는 관계에 있다. 이 시는 박해자와 피박해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늘과 햇빛,눈물과 웃음, 행복과 불행, 등의 비극적 대비를 나타낸 시다. 기쁨 없는 슬픔은 없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합일된 상관 관계를 나타내고자 한 시는 아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표현되는 기득권적 행복한 삶이 슬픔으로 표현되는 불행한 삶을 위로하고 껴안고 나눔으로써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동체적 사랑을 나타낸 시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고통을 희망과 기다림의 의지로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독재로 얼룩진 시대의 어둠과 상처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치유하고 싶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유신체제의 폭압적 상황을 '기쁨'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견딜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의 상황을 '슬픔'으로 은유하고자 했다. 슬픔으로 대변되는 '내가' 기쁨으로 대변되는 '너에게' 언젠가는 너도 슬픔의 옷을 입고 통곡하게 될 것임을 엄숙히 경고하고 자숙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도 행간에 숨어 있다.
그래서 〈슬픔을 위하여〉에서는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노래 하기도 했다. 이 시에서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 무렵 길거리에서 귤을 파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귤을몇개 더 달라고 했던 나를 두고두고 책망했다. 또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도 바로 나 자신이다. 중학생 때 내가 살던 대구 신천동 냇가[지름은 범어천] 둑길에 얼어 죽은 이를 본 적이 있다. 누가 썩은 가마니 한 장을 덮어놓았는데, 그 동사자한테서 느껴졌던 죽음의 추위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이 연작시 때문인지 나는 뜻밖에도 '슬픔의 시인'이라고 불리곤 했다. 처음에는 감상적 별칭으로 느껴져 달갑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단순한 감상적 슬픔의 늪에 빠지지 않는 한, 슬픔은 모든 시의 원형이며, 슬픔이 본질로 내포되지 않는 시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1970년대는 암담한 시대의 특성상 순수 서정시보다 참여시와 민중시가 많이 쓰였다. 그 시들은 서정성이 다소 결핍되었다 하더라도 작품성 강한 시대적 호소력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참여성과 민중성을 지향하되 가능한 한 서정의 끈을 놓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슬픔이 기쁜에게〉는 표면상 한 편의 서정시로 읽힌다. 그것은 시는 서정의 밥그릇에 밥을 퍼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내가 잊지 않았기 땨문이다.
문하평론가 김현은 어느 평문에서 "정호승 시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비애나 한과 같은 감정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독특한 것은 비애나 한이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능동적 감정의 뿌리라는 것이다. 그의 비애나 한은 눈물이 아니라 칼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또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정호승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인종과 사랑과 기다림의 삶의 철학이 깊은 슬픔의 늪에서부터 우러나와 친근한 대화의 언어로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첫 시집은 첫 사랑과 같다, 나에게 '슬픔이 기쁨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늘 기쁨과 감사의 시집이다. 그렇지만 이제 '슬픔이 기쁨에게'에 관련된, 꺼내기 조차 힘든 부끄러운 이야기도 하는 게 좋겠다. 이 시집이 출간 되었을 때 나는 숭실고등학교 국어교서로, 1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마침 우리 반 아이들이 내가 시집을 낸 것을 알고 그 시집을 갖고 싶어 했다.
하루는 반장이 나를 찾아와 그 시집을 스무여 권 구입하고자 한다면서 나보고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담임선생이 낸 시집에 관심을 갖는 우리 반 아이들이 고마워 출판사를 통해 시집을 일괄 구입한 뒤 일일이 사인을 해서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반장이 아이들한테 책값을 걷어 내제 주었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때 내가 책값을 받았다는 사실이 상기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책값을 받지 말아야 옳았다. 내 돈으로 시집을 사서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야 했다. 그런데 왜 그때 책값을 받았는지 생각할수록 어리석고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몇 가지 크게 후회되는 일이 있는데 이 일은 그 후회되는 일 중에서 늘 빠뜨려지지 않는다. 그 때 우리반 아이들은 지금 육십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만나면 내가 참 잘못했다고 진정으로 사과하고 신작 시집을 사인해 건네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마음뿐이지 이제 그들을 만날 수가 없다. 참으로 잊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정 승 호의
시가 있는 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