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정확하게 맞춰진 예수님의 순명과 겸손의 생애!
천부당만부당한 일,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 오늘 복음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갓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작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그리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도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일이 틀림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과 구원,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호시탐탐 그를 감시하고, 여차하면 고발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유다인들, 참으로 대책이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다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딱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① 신성 모독죄: 유다인들 입장에서 자신들과 다름없는 한갓 인간인 듯한데,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처럼 말씀하시고, 그분의 외아들임을 강조하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예수님을 늘 봐왔던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분의 메시아성을 백번 깨어나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② 안식일 규정의 폐기: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뭔가 어색하거나 경직된 모습들을 본성상 수용하기 힘드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눈에 안식일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던 유다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웃겼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인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 때부터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깨트리셨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만 골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 이삭을 훑어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다른 날도 많은데, 하필 안식일에 수십 년 된 고질병 환자들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유다인들 눈에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좋아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분기탱천했습니다. 어떻게든 율법 위반 혐의를 예수님께 씌워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지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지혜로움의 끝판왕이셨습니다.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결정적 수난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할 때였습니다. 치고 빠지는 데 명수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정확하게 맞춰진 순명과 겸손의 생애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